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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타이틀드(Untitled) 2화

1. Spring Semester (2)


멀지 않은 위치의 한식당은 놈의 말대로 괜찮은 가게였다. 갈치구이를 뒤적이다가 수저를 내려놓는 주승언의 모습에 의아해져서 한마디 했다.

“벌써 다 먹었어?”

“아니, 갑자기 땡겨서. 한 대만 피우고 올게.”

“밥 먹다 말고…….”

더 구박할까 하다가 관뒀다. 테이블 위에 빼놨던 담뱃갑과 라이터를 챙겨 들고 나서던 놈이 고개만 기울여 나를 내려다보았다.

“먹고 있어. 금방 올게.”

가볍게 끄덕이고 다시 갈치구이에 젓가락을 댔다. 문득 놈이 놓고 간 휴대폰이 거슬렸다. 잠금을 풀고 전화번호부에 들어갔다. ‘ㄱ’부터 시작하는 리스트는 굉장히 사무적이었다. 강민하(RESEARCH 회장), 곽윤준(전자), 권정태(과대), 김서하(전자), 김하늘(전자), 아버지, 어머니, 오경민 교수님, 이영인(컴공), 임수호(전자), 장하영(RESEARCH 부회장), 정규환(기계), 집주인, 지효석(전자), 태영, 평창동, 한원진(전자), 황선민(전자).

……집주인? 어쩐지 익숙하게 불쾌한 느낌에 확인했더니 역시나 내 번호였다. 이 새끼가 진짜. 멀쩡한 집 놔두고 세 들어 사는 가난한 학생 놀이에 심취한 게 틀림없었다. 바꿀까 하다가 내버려 두기로 했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으니 더 볼 일은 없다. 휴대폰을 다시 원래 자리에 돌려놓고 조용히 식사에 열중했다.

“손님 후식 나왔습니다-”

간드러지는 소리와 함께 짧은 흡연으로 만족한 얼굴의 놈이 나타났다. 양손에 도기 잔을 들고 있었다. 안 봐도 뻔했다. 그거 저희 테이블 거예요? 하고 서빙하는 사람한테서 뺏어 왔겠지.

“후식은 무슨 후식이야. 밥부터 먹어.”

“네네.”

담배 좀 빨았다고 죽다 살아난 사람 같아지는 게 웃겼다. 젓가락으로 밥을 뜨는 주승언에게 물었다.

“그게 그렇게 좋아?”

“뭐. 담배?”

“어.”

“그럼.”

“나도 해 볼…….”

“넌 안 돼.”

단칼에 말허리를 잘렸다. 억울한 기분에 입을 비죽거렸더니 주승언이 피식 웃었다.

“하지 마. 한번 손대면 끊기 힘들어.”

맞는 말이긴 했다. 나와 엄마 앞에서 금연 선언을 한 이후 오만 추태를 다 보이던 아빠를 생각하면. 담배 생각이 너무 간절하다며 탭 댄스 비슷한 정체 모를 스텝을 밟다가 아래층에서 사람이 올라온 적도 있었다.

주승언은 심각한 골초는 아니었지만 술이며 담배며 안 좋은 것은 다 하고 사는데도 나보다 건강체인 게 신기했다. 놈이 타고난 건지 내 쪽이 몸뚱이 뽑기에 실패한 건지. 빠른 속도로 음식을 먹어 치우는 놈을 멍하니 바라보다 후식이라던 잔의 내용물을 확인했다. 매실인가?

“맛있네.”

홀짝이다가 중얼거린 한마디에 주승언이 대꾸했다.

“괜찮은 집이라고 했잖아.”

밥을 다 먹고는 카페에 들러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테이크아웃이요, 인토네이션이 불분명한 낮은 목소리가 귀에 꽂힌다. 오후에는 악덕 교수가 내준 과제와 지옥의 줄다리기를 해야 해서 마음이 급했다. 주승언은 집에 가겠다고 했다. 우리는 인사 없이 헤어졌다. 과제 때문에 침대에는 누워 보지도 못하고 노트북 앞에서 낑낑대다가 아침이 되어서야 겨우 쪽잠에 들었다. 어쩌면 수면 부족의 원인은 과제가 아니라 아메리카노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



월요일은 오랜만에 동아리 모임이 있었다. 대외 활동 동아리라고는 해도 말이 대외 활동이지, 사실상 놀고먹는 게 이 동아리의 주요 과제였다. 오히려 동아리 스케줄은 방학 때가 더 바쁜 편이었다. 저번 겨울에는 공모전 준비를 한답시고 3주 내내 매일같이 모여서 얼굴 맞대고 지내다가 앞으로 세 달은 안 보고 살자, 너네 얼굴만 봐도 구역질 날 것 같다, 그런 우스갯소리가 오갔다. 민하 형이 짊어지고 온 치킨 박스를 테이블 위에 늘어놨다.

“맥주 손.”

대여섯 명이 손을 들었다. 형이 머릿수를 세더니 의아하다는 듯이 말했다.

“어, 근데 주승언은?”

“승언이 형 오늘 교수님이랑 일 있대요. 늦게 온다던데.”

“아, 그래?”

나도 모르는 놈의 행방을 전부 꿰고 있는 유정현을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봤다.

“왜 그런 눈으로 봐. 형 간 떨어진다.”

“형 같은 소리 하네 새끼야. 너 사실 주승언이랑 사귀지? 뭐 이렇게 잘 알아?”

“우리 재윤이는 얼굴은 참 이쁜데 입담은 안 예뻐.”

일회용 나무젓가락의 결을 정리하던 하영 누나가 웃으며 거들었다.

“그러게, 재윤아. 너 좋다는 여자애들 많은데 생긴 거랑 언어 생활이랑 매치 좀 시켜 봐.”

“누가 절 좋아해요?”

그거야말로 금시초문이었다. 우리 학교 컴공에는 여자애들이 꽤 있었지만 나는 여자 동기들하고 안 친했다. 동아리도 공대 동아리라서 여자는 하영 누나, 서하 누나, 그리고 이번 년도 신입 해정이, 딱 셋이었다. 이 중에 컴공은 하영 누나뿐이었다.

“네가 워낙 주변에 관심이 없어서 그렇지, 너 소개시켜 달라는 애들 널렸다? 요즘은 마초보단 예쁜 남자가 먹힌다니까.”

“그래서 누나한테 청탁한 비리 인사 대체 누군데요? 우리 과?”

당사자인 나보다 유정현이 더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나는 청탁이라는 말 같지도 않은 소리에 코웃음 쳤다.

“컴공에만 있는 줄 아냐. 저 윗동네 생과대까지 재윤이 미모에 대한 소문이 퍼졌단다.”

인상을 슬쩍 찌푸렸다. 생과대에는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 ‘아는 사람’의 기준을 ‘지구상에 존재하고 있음을 내가 인지한 상태’ 정도로 넓힌다면야 고등학교 동창이 하나 있기는 했지만 걔하고는 고등학교 시절에 알고 지내던 사이도 아니었고, 연락처조차 없었다. 졸업 직전에 담임이 같은 학교에 진학하게 된 녀석의 이름을 넌지시 알려 준 게 전부였다. 전혀 짚이는 구석이 없었다.

“저 생과대랑은 연이 없는데요.”

“너야 그렇겠지. 작년에 선배들 졸업 사진 촬영할 때 장소가 그 근처였잖아. 학교 사이트에 네 얘기 올라왔었는데 모르는구나?”

알 턱이 있나. 컴공 이름값 못하게 나는 학교 커뮤니티고 SNS고 온라인 사이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최은성은 그걸 알고 나더러 원시인이냐며 놀렸었다.

“그 얘기를 당사자가 못 봤다니. 글 쓴 애가 울겠다, 야.”

유정현이 옆에서 원본 글이 아직 남아 있냐며 보여 달라고 하영 누나의 팔을 흔들어 댔다. 잠깐만, 하고 누나가 휴대폰을 들었다.

“어, 아직 있다. 이거 봐 봐.”



작성자 익명. 작성일 201X.9.19. 14:25.

아까 12시 좀 넘어서 생과대 앞에서 졸사 찍던 분들 일행 중에 얼굴 진짜 하얗고 개잘생긴 사람 봤는데 번호라도 물어볼 걸 그랬음 ㅠ 내 이상형이셨는데 아 계속 생각난다

(댓글)

아니 얼마나 잘생겼길래 ㅋㅋ 근데 그 정도로 존잘이면 이미 페북이나 인스타 유명인 아님? 잘 찾아보면 나올지도

└ 잘생쁜 느낌? 내가 원래 예쁜남자 좋아해서 ㅠ 나도 그럴 것 같아서 찾아봤는데 안 나옴 ㅋㅋㅋ 사실 과도 모르고…

일정표 보니까 오늘 찍은 거면 공대일텐데. ㄱㄷ 공대친구한테 물어보고 옴

└ 오늘 컴공이었음 ㅇㅇ

└ 헐 대박 고마워 ㅋㅋㅋㅋ 근데 촬영하는 당사자가 아니라 같이 있던 사람이라 같은 과일지는 모르겠다

컴공이면 누구 말하는지 알것 같다ㅋㅋㅋ 걔 1학년이야

└ 유명한 애임?

└ 애는 얌전해. 근데 얼굴이 유명인의 얼굴임

└ 얼굴이 유명인이래 ㅅㅂ ㅋㅋ

└ 여친 잇냐? 잇으면 안됨 왜냐면 내가 비참해지니까

└ └ 이건 또 뭐야ㅋㅋㅋㅋㅋㅋㅋ

└ 내가 알기론 여친 없음ㅋㅋ 여자애들이랑도 안 친해

└ 아 왠지 나도 누군지 알거 같은데 키 별로 안큰 애 맞음? 흔한 성씨?

└ ㅇㅇ 니가 생각하는 걔 맞을걸

└ 흔한 성씨면 김이박최 중 하나란 뜻인가

└ 정씨나 윤씨도 많잖음

└ ㄴㄴ니가 말한거 안에 정답 있음



밑으로 시답잖은 이야기가 비슷한 패턴으로 이어졌다. 구체적인 신상 이야기는 없어서 이걸 다행이라 해야 할지 나를 아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유추 가능한 정보가 나 모르는 곳에서 오간 것에 불쾌감을 느껴야 할지 알 수 없는 참 애매한 내용이었다.

고작 성씨와 학년, 그리고 외모에 대한 추상적인 묘사가 전부였지만 전자공학과나 기계공학과처럼 한 학번에 백 명이 넘는 대형과도 아니니 더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남 얘기에 더 신난 유정현이 하영 누나의 어깨를 마구 두드렸다.

“누나, 누나. 재윤이 소개팅 함 나가야 되는 거 아니에요?”

“그러게. 근데 우리 재윤이가 여자 앞에서 저 성질머리를 죽일 수 있을까?”

“아마 안 되겠죠…? 안 되겠다, 이재. 네 파탄 난 성격 연막을 위해 지금부터라도 내숭 떠는 법을 익히자.”

내 성격이 파탄 난 게 진짜라면 제1 원인은 주승언일 것이요, 두 번째는 유정현일 것이다. 헛소리를 시작한 그 주둥이를 다물라는 의미로 볼을 콱 꼬집었다 놓고 이미 바닥을 보여 가는 내 앞의 치킨 박스를 내려다봤다. 순살이라. 먹기는 편해도 맛은 뼈치킨보다 못하다고 생각했다. 주승언은 아마 뼈치킨이고 순살이고 다 싫다며 맥주만 깠겠지만. 하나를 집어 입 안에 넣고 우물우물 씹었다. 앞에 앉아 있던 민하 형이 짧은 진동이 울리는 휴대폰에 메시지를 확인했다.

“어, 승언이 지금 온대.”

“교수님하고 뭐 한다더니 생각보다 빨리 끝났나 보네?”

5분쯤 지나 문이 열렸다. 어쩐지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 얼굴이라 교수한테 깨졌나 싶었다. 주승언이 내 옆자리에 풀썩 앉자 소파가 놈의 무게 때문에 푹 꺼지는 느낌이 났다. 민하 형이 젓가락을 내밀었다.

“먹을래?”

“아냐. 나 밥 먹고 왔어.”

“일이라더니 식사 자리였어?”

“아, 어. 말도 안 해 주고 가자길래 따라갔더니 동문회관 식당이더라고.”

그 말을 끝으로 주승언은 옆에 놓여 있던 맥주 캔을 하나 가져와 땄다. 기포가 올라오는 소리가 경쾌했다. 앞머리를 연신 쓸어 넘기는 놈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교수한테 깨졌어?”

“넌 내가 그런 허접으로 보이냐.”

헛웃음을 지으며 이마를 딱, 때린다. 얼얼해진 살갗을 문지르며 슬쩍 눈치를 봤다. 처음 들어올 때보다는 한결 나아진 표정이었다. 다시 치킨을 하나 집어 먹었다.

“이재. 농담 말고, 진짜로 너 소개팅할래?”

다 끝난 얘긴 줄 알았더니 또 시작이다.

“안 해.”

“왜?!”

절규하듯 소리친다. 이 새끼는 공학도가 아니라 뮤지컬 배우가 적성인 것 같은데. 얼얼한 귀를 문지르며 답했다.

“귀찮아. 나 밖으로 쏘다니는 거 싫어하는 거 알잖아.”

“야, 우리 누나가 잘생긴 사람이 솔로로 사는 건 대역죄랬어. 얼굴 아끼지 말고 살자, 친구야.”

“그럼 네 누나 남자 친구 자리 나 주든가.”

웃음이 뚝 멎는다.

“내가 누나랑 친하긴 하지만 우리 누나를 친구한테 넘겼다간 양심이 찔려서 잠을 설칠 것 같다.”

그냥 해 본 말이었는데 정색하는 게 웃기다. 유정현은 나를 연애 한번 못해 본 숙맥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은데 경험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마지막이 고등학교 2학년 때라 그렇지.

고등학교 2학년 가을, 주승언이 막 입대하고 난 뒤 첫 휴가를 나왔을 때였다. 그때 이미 주승언은 예전에 살던 집을 나와 학교 근처 아파트에서 지내고 있었고, 주승언의 아버지는 출장이 잦은 편이라 자리를 자주 비웠다.

빈집에서 혼자 휴가를 보낼 것이라 생각하니 신경이 쓰여서 어쩔 수 없었다. 학교가 끝나자마자 놈의 아파트로 향했다. 익숙하게 도어락을 누르고 문을 열자 머그잔을 쥔 채로 걸어가던 놈과 눈이 딱 마주쳤다.

“……네가 웬일이냐?”

“형 첫 휴가 기념으로 사 왔는데.”

케이크. 가지고 온 상자를 들어 보이자 한쪽 눈썹을 찡그린 채로 웃다가 들어오라고 한참 만에 말했다. 거실의 유리 테이블에 상자를 올려놓고 소파에 앉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사귄 지 네 달 된 애였다.

“왜?”

가끔 주승언한테도 틱틱대는 것 같다고 지적당하는 나만의 전화받는 법이었다. 안 고쳐지는 건 별수 없다. 이렇게 살아야지.

-어디야?

“친구 집.”

나이만 많은 친구지, 암.

“내가 누구 친구라고?”

옆에서 듣고 있던 주승언이 헤드락을 걸었다.

“아, 좀.”

밀어 내면서 휴대폰을 더 귀에 가까이 붙였다.

-바쁜 거 아니면 지금 좀 올래? 내 친구들이 너 보고 싶대. 중학교 친구들이야.

순간 짜증이 치솟았다.

“나 그런 거 싫어하는 거 알잖아. 학교에서야 자주 보는 얼굴들이니 그렇다 쳐도.”

같은 고등학교라 한 다리 건너면 다 아는 사이였다. 부득이하게 애인으로 소개받는 작위적인 자리에서도 어차피 내 친구가 쟤하고도 친구고 쟤 친구가 나랑 아는 사이고 하는 식이었기 때문에 참았었다.

“안 가. 끊어.”

내가 생각해도 좀 재수 없는 반응이긴 했다. 그래도 어쩌나, 싫은 건 싫은 건데. 다시 전화가 올까 봐 비행기 모드를 활성화하고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뭐 해, 안 먹어?”

포크를 내밀자 약간 얼이 빠진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너는 진짜…. 말을 하다 말고 멈춘 놈이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아니다. 잘 먹을게.”

말을 하다 말고 케이크에 포크를 쿡 찔러 넣는다. 그 이후로는 케이크 어디서 샀냐는 말이라든가, 최근에 개봉한 영화 이야기 같은 것을 했다. 주승언은 원래도 수면 패턴이 불규칙적인 인간이라 기상 시간이 일정한 생활을 하는 데 꽤 애를 먹는 모양이었다. 그 외에는 딱히 어려운 건 없다고 했다. 복귀일에는 공부 열심히 하라는 진부한 문자를 하나 남겨 놓고 갔다. 그리고 그날 여자 친구에게 헤어지자는 말을 들었다. 예상한 일이었다.

주승언 말대로 공부나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엄마한테 과외를 하고 싶다고 했더니 화색이 돌아 외려 미안해질 정도였다. 별로 대단한 열의가 있어서 꺼낸 말은 아니었는데, 의외로 할 만해서 속도가 붙었더니 친구들이 실연의 아픔을 면학으로 승화시키냐며 실컷 비웃었다. 전부 개소리였다. 사귄 사람은 여럿이었지만 헤어질 때 슬펐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 정도로 가볍고 의미 없는 만남이었다는 이야기다.

순간 과거의 기억에 잠겨 있다 유정현의 볼륨 조절 안 되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너 또 내 말 안 듣고 있었지.”

“네가 귀를 기울일 만한 소리를 한다면야 난 충분히 들어 줄 의향이 있어.”

쳇, 구시렁대는 말이 몇 마디 이어지다가 다시 치킨으로 관심이 쏠린다. 나는 앞에 놓인 콜라 캔을 들다가 옆에서 느껴지는 쪼는 듯한 시선에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렸다.

“형은 또 왜.”

“진짜 소개팅 안 할 거야?”

“안 한다니까.”

그제야 주승언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맥주 캔을 꺾어 남은 것을 털어 넣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불가사의한 존재가 바로 주승언이었다.



***



중간고사가 끝난 5월은 대학생들에게 있어 놀러 다니기 가장 좋은 계절이지만 나와는 영 상관없는 일이었다. 날이 따뜻해질수록 벌레의 출몰 횟수도 많아지는 데다가-자취방에 살면서 가장 신경 쓰는 게 바로 있어서는 안 될 것과의 반강제 동거를 피하기 위한 위생이었다- 커플은 그보다도 더 늘기 때문이었다. 딱히 커플을 질투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지금처럼 내가 볼 수 있는 곳에서 애정 행각을 해 대는 게 보기가 싫다는 거다.

남사스러운 소리가 내 귓구멍을 억지로 들쑤셨다. 도대체 카페에서 끈적하게 엉켜 있는 이유가 뭔지 나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보여 주고 싶은 건지, 너무 좋아서 주변을 의식할 여유도 없는 건지, 밖에서 저러는 게 취향인지. 대학가 카페에 공부하겠다고 나온 내 불찰이지, 하고 스스로를 탓했다.

휴대폰을 들고 메시지 어플을 실행시켰다. 한 시간 전쯤에 유정현에게서 연락이 와 있었다. ‘술 마실래?’ 중간고사 성적을 보고서는 절규하던 놈이 주말인데 술 마신다고 학교를 다 오고, 교수님이 알면 감동하시겠다. ‘공부해라, 정현아. 다음 주 퀴즈 있다.’, ‘아 맞다 ㅅㅂ’ 짧은 욕설을 끝으로 새 메시지는 없었다. 또다시 쪽쪽대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 심히 거슬려 뭐라고 한마디 할까 고민하던 차에 어딘가 익숙한 기다란 하반신이 보였다. 응?

“우리 자기 발-견.”

저 미친놈이…. 하필 ‘자기’를 너무 크게 말해서 옆자리의 몇 명이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그보다도 사실은 저 얼굴에 시선이 쏠린 것이겠지만.

“누가 네 자기야.”

“나?”

오늘따라 기분이 심히 좋아 보인다. 맞은편 의자를 빼고 앉는 놈에게 말했다.

“나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

“집에 갔는데 없길래.”

저 새끼를 언젠간 주거 침입죄로 고소하고 말겠다고 재차 다짐했다. 커피를 시켰는지 진동벨을 한 손에 쥐고 있었다. 아까의 ‘자기’ 여파인지 더 이상 듣기 괴로운 소리는 나지 않았다.

“가끔은 쓸모 있다고 생각했지.”

움찔 어깨를 떨었다. 주승언은 종종 내 생각을 읽는 것처럼 굴었다.

“형이 나한테 신세 진 게 얼마인데 그 정도는 깽값으로도 안 먹혀.”

뭐라고 장난을 더 걸려던 놈이 진동벨에 불이 들어오는 것을 확인하고 일어섰다. 놈의 동선을 좇는 시선들이 나에게까지 느껴졌다. 얼굴 잘난 것도 정도가 있어야지, 그것도 과하면 살기 피곤하다. 내가 주승언 인생을 살아 본 적은 없지만 그 정도는 알았다. 키가 190 가까이까지 커 버린 다음에야 말 붙이기도 어려워하는 사람이 많아졌지만 지금만큼 크지 않았을 때는 길에서 자주 붙잡혔었다. 생각 있으면 연락 달라며 명함 찔러 주고 가는 캐스팅 매니저들부터 수줍게 팔을 붙들고는 번호를 묻는 여자까지, 모르는 사람과 나누는 대화가 훨씬 많은 삶이었다. 군대 가기 전에는 그래도 먼저 좋다고 달려드는 사람을 굳이 밀어 내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그마저도 질렸는지 요즘은 그런 기색조차 안 보였다.

“앗, 이거 너무 단데. 네 거 아메리카노지? 한 입만.”

자연스럽게 뺏어서 빨대로 쭉쭉 빤다. 아, 얼마나 마시는 거야! 내 표정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뭐야. 얼마 안 남았잖아?”

얼음까지 털어먹은 주제에 말은 잘한다. 고개를 내젓고 노트북을 덮었다. 놈을 앞에 두고는 공부고 뭐고 안 될 것 같았다. 세 시간 넘게 가만히 앉아서 화면만 들여다봤더니 눈도 좀 뻑뻑했다. 관자놀이 근처부터 콧대까지 꾹꾹 마사지하는 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던 주승언이 손을 내 얼굴 쪽으로 뻗었다. 내 손을 치우고 눈 주변을 누르는 큰 손에서 언제나처럼 열기가 느껴졌다. 체온이 높다는 건 내가 생각하는 놈의 장점 중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