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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타이틀드(Untitled) 1화

1. Spring Semester (1)


그놈과 나 사이의 악연에 대해 말하자면 3박 4일로 밤을 새워도 시간이 모자랄 것이다. 열한 살 여름,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강렬했던 또라이에 대한 인상은 내 머릿속에 깊이 각인되어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놈의 얼굴을 보면 자동으로 떠오르는 장기 기억이 되어 버렸다.

‘새로 이사 온 옆집 가족네 애가 남자라더니.’

뻣뻣하게 서 있는 나를 내려다보며 씩 웃는 그 얼굴.

‘……여동생도 있었나?’

머리끝까지 열 받아서 어림잡아 나보다 20cm는 더 클 중학교 교복 차림의 그놈의 가슴팍에 이마를 들이박았던 것은 생각이 난다. 그러고 나서, 벌게진 이마를 붙들고 주저앉아 울었던 것 같다. 나를 달래던 당황한 손짓과 목소리는 아직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다. 놈으로서는 정말 드물게 선의를 베풀던 모습이라 잊고 싶어도 잊을 수가 없다. 특히나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아, 일어나! 너는 왜 술만 처먹으면 내 자취방에 기어 들어오는데!”

술 냄새를 풀풀 풍기며 집주인의 침대를 빼앗아 뻔뻔하게도 숙면을 취하는 후안무치의 작태를 더 이상 참지 않을 것이다. 이를 빠득 갈며 이불을 걷어 내고 맨 허리를 발로 밟았다. 끄응, 신음 소리를 내며 돌아눕기에 이번에는 손바닥으로 등을 찰싹찰싹 내리쳤다.

“일, 어, 나!”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꿍얼대는 소리가 들려 무슨 말인가 하고 귀를 가까이 댔다. 순간 몸이 휘청였다.

“악…!”

“아침부터 시끄럽네, 진짜.”

허리에 감겨 오는 팔 때문에 티셔츠조차 안 입은 맨몸 위로 쓰러졌다. 균형 감각이 더럽게 없는 몸이었다. 누굴 탓하랴, 운동 안 하는 내 잘못이지. 놈의 가슴팍에 닿은 왼손의 감각이 기분 나빴다. 뜨끈한 기운이 느껴지는 근육에 몸서리치며 손을 물렸다. 킬킬 웃는 소리가 울렸다.

“형아 수면 부족이라 못 놀아 준다. 입 좀 다물어 봐. 어제 3시까지 마셨더니 머리 울려.”

“그러게 누가 그 시간까지 술을 퍼먹으래. 난 형 때문에 침대까지 뺏기고 바닥에서 잤거든?!”

“그냥 옆에서 자면 되지, 내외하냐?”

말이 안 통한다. 남자하고, 그것도 189cm의 초장신 몸뚱이하고 싱글 침대에서 같이 잘 수 있을 리가 있나. 실수로 다리에 얻어맞기라도 하면 그날로 골병이 들 것이 분명했다. 대화를 통한 협상을 포기하고 와일드카드를 꺼내 들었다.

“나 현관 비번 바꿀 거야.”

스르르 감겨들던 눈꺼풀이 도로 올라갔다. 빙고. 놈이 부스럭대며 일어났다. 재수 없게도 잘생긴 얼굴이었다. 막 자다 깬 사람의 몰골을 하고 있어도 잘생긴 건 안 숨겨져서 더 열 받는다. 유정현이 저 얼굴을 공대의 자랑이라고 했던가, 인생 치사하게 사는 인간이라고 했던가. 어느 쪽이든 반박을 할 수 없었다. 그 뒤에 너는 공대 예쁜이니까 괜찮아, 하며 어깨동무를 하던 유정현의 턱을 정수리로 가격했었다.

“알았어, 이제 술 먹고 늦게 안 들어올게.”

의외로 고분고분하게 나오기는 했지만 문제는 하나 더 있었다.

“아니, 너네 집으로 가시라고요. 더 비싸고 좋은 아파트 놔두고 좁아터진 원룸에서 내 침대 뺏어 쓰고 싶어?”

“응.”

아, 역시 또라이 새끼는 사고방식이 남달랐다.



아침부터 주정뱅이를 상대하느라 온몸에 진이 다 빠졌다. 학교에서는 저 성격을 숨기고 사는 건지 나 말고는 그놈의 실체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었다. 반 장난으로 네 실체를 고발하겠다며 들어간 동아리 환영회에서는 ‘제가 아는 동생이라서 뽑았습니다’ 선언에 역으로 물 먹은 데다가 회장이 어찌나 끈질긴 인간인지 발도 못 빼고 1년 넘게 강제로 참여 중이었다. 그나마 활동이 안 바쁜 동아리라는 점이 다행이었다.

“아, 걔는 진짜 나랑 전생에 무슨 원수를 져서…….”

“걔? 누구, 승언이 형?”

눈치 빠르게 주어 없는 문장을 알아듣고 유정현이 무슨 일 있냐며 눈을 반짝 빛냈다. 저놈한테야 주승언이 공대 왕자님, 친해지고 싶은-지금도 충분히 친하지만- 형, 닮고 싶은 사람 등등일지 몰라도 나에게 있어서 주승언은 재난이었다. 인생의 재난.

과거 주승언은 여자 친구와 헤어지기 위해 나를 써먹은 전과도 여러 번 있었다. 전화를 걸어 놓고 끊지 말고 가만있으라기에 며칠 내내 시키는 대로 했더니 모르는 번호로 ‘저 승언 오빠 여자 친구인데요’로 시작하는 장문의 문자가 왔었다.

네가 보고 싶다고 했던 영화 예매했어, 뭐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 가게 미리 알아볼게. 의미를 알 수 없는 메시지를 잔뜩 보내 놓고는 마지막엔 ‘자기야♥’로 끝내기에 이게 드디어 미쳤나 싶어서 전화를 걸었다가 지금은 응답할 수 없다는 기계적인 여자 목소리만 듣고 끊은 일도 있었다.

3일쯤 지나서 그때 그거 뭐였냐고 물으니 헤어지자고 한 애인이 붙잡는 것이 귀찮아 다른 사람 있다고 개뻥을 쳤다는 답이 돌아왔다. 너 그렇게 살다가 언젠간 돌려받는다고 한마디 하려다가 다리만 한 대 가볍게 걷어차고 끝냈었다.

“어. 어제도 술 처먹고 우리 집 왔다고! 자기 집이 먼 것도 아니고 학교에서 지하철 두 정거장인데, 꼭 술만 먹으면 내 집 와서 잔다니까? 내가 화가 나겠냐, 안 나겠냐.”

“승언이 형이 술 먹고 우리 집 와 준다면야 나는 영광인데.”

저 새끼도 정상은 아니라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다. 유정현의 영양가 없는 주승언 찬양질이 시작되기 전에 책 위에 얼굴을 처박았다. 세 시간짜리 연강 하나만 더 버티면 끝이었다. 차라리 술을 마실 거면 오늘 마시든가. 금요일은 오후 수업이라며 너 먼저 가라고 손을 휘휘 내젓던 놈의 얼굴이 다시 생각나 짜증스러워졌다. 내가 왜 주승언이랑 같은 학교를 왔지.

기본적인 의사소통에는 큰 문제가 없었지만 표준 발음법을 싸그리 무시하고 마음대로 말하는 것이 거의 버릇이 된 나를 걱정한 엄마가 옆집의 가짜 모범생 형에게 과외를 맡겼을 때부터 내 인생은 이미 꼬이기 시작한 상태였다. 한국어를 접할 데라고는 부모님과 책뿐이었던 환경에서 멋대로 굳어진 발음과 어색한 말투를 고친다며 주승언은 나에게 국어책 읽기 따위를 시키고는 내가 틀릴 때마다 이마에 딱밤을 놨었다. 덕분에 이제는 어디 가서 외국 살다 왔냐는 질문은 안 받긴 하지만.

주승언이 군대에 간 사이에 수험생이 된 나는 주승언의 학교에 원서를 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과거의 내가 그랬는지 알 수 없었다. 아마 잠깐 미쳤던 것이 분명하다. 휴가를 나왔다가 내가 자기 학교에 지원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피식 웃으면서 ‘형아가 그렇게 좋아? 대학교까지 따라오게’ 하던 게 바로 작년의 이야기다. 박장대소할 줄 알고 눈 꾹 감고 말했는데 의외로 유들유들한 반응이긴 했다. 그래도 놀리는 건 짜증 나서 또 이마로 들이받으려고 했다가 제지당했었다.

어느 순간 성장이 멈춘 나와 다르게 주승언은 무지막지하게 키가 커졌다. 고등학교 무렵부터는 아예 체격으로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늘 몸으로 개겼다. 어차피 그놈은 진심으로 나를 이기려고 든 적이 없었으니까. 쓸데없는 기억을 떠올리다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자꾸 이런 생각 하면 주승언한테 물러지기밖에 더 하나. 술 처먹고 내 자취방 들어오는 건 진짜 어떻게 해서든 고쳐야 했다. 바닥에서 잔 것 때문에 욱신거리는 허리가 통증을 빌미로 내게 호소했다. 자꾸 봐주면 버릇이 되니, 그냥 넘어가면 절대 안 된다고 말이다.



***



수업이 끝났다. 백 명은 거뜬히 들어갈 강의실 안에 남은 건 복습에 목숨 건 일개미 몇 명과 나 그리고 주승언 극성팬이 전부였다. 휴대폰만 들여다보던 주승언 극성팬이 말을 꺼냈다.

“야, 이재. 애들이 술 마시러 가자는데.”

“애들 누구.”

“지원, 병서, 최은성. 오채영이랑 걔 친구들도 같이 있다고.”

오채영과 그 친구들이라 함은 나와는 이름하고 얼굴이나 겨우 아는 사이인 경영대 학생들이었다. 그중에 복수 전공을 하는 몇 명이 우리 과 나불이 최은성과 전공 수업이 겹친 것을 계기로 꽤나 친해진 듯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내 주변인들은 여학생들하고 어울리는 데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공대 너드라는 것도 옛말인가, 무의미한 생각을 하며 고개를 까딱였다.

“어차피 할 일도 없으니까 갈래. 너도 가지?”

“술 안 마신 지 3주 됐어. 나 이거 최고 기록인 것 같아. 원래 기록은 깨라고 있는 거 아니냐? 당연히 갑니다.”

또 헛소리 시작이었다. 얼굴을 모로 돌려 외면하는 시늉을 해 보였다. 유정현이 씩 웃으며 내 어깨에 팔을 걸쳤다.

“정현아.”

“왜, 재윤아.”

“팔 내려라.”

오늘은 곱게 팔이 내려간다. 오랜만에 마시는 술에 어지간히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약속 장소인 학교 앞 술집은 안주로 계란찜, 감자튀김, 치즈김치볶음밥, 일본식 닭튀김, 어묵탕, 부추전을 파는 웃긴 곳이었다. 나는 사장에게 ‘여긴 왜 이렇게 주제도 없이 중구난방이냐’고 물어본 적도 있었다. 그때 사장은 이렇게 말했다. ‘돈만 되면 못할 게 없어.’ 백번 동의할 수밖에 없는 소리였다. 같이 있던 주승언은 요상한 표정을 지었지만.

“오, 이재랑 정현이 왔다.”

나와 유정현을 발견한 최은성이 손짓했다. 빈자리를 찾아 앉는데 빤히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내가 예상한 사람이었다. 서한나. 눈이 마주친 상황에서야 먼저 인사를 할 수밖에 없다.

“……안녕.”

“응, 안녕.”

나한테 그런 의미로 관심이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유독 친한 척이 눈에 띄는 애였다. 그다지 공감이 가는 성향은 아니지만 그럴 수도 있다고는 생각했다. 어차피 공학관은 경영대 건물하고 더럽게 멀기 때문에 전공 수업 들으러 오는 날 빼고는 우연히 마주치기도 어려우니 별 상관은 없었다. 서한나 쪽도 애초에 인사 이상의 것을 바라는 눈치도 아니었다. 그런 점은 편했다. 그에 비하면 오채영은…….

“야, 일단 마셔.”

20분 지각이니까 벌주 한 잔이야, 호쾌한 목소리가 울렸다. 맥주잔에 소주병을 기울인다.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저걸 마시라고? 소주는 별로였다. 사실 알싸한 냄새가 확 올라오는 주류 자체가 취향은 아니다. 1학년 때에는 이 냄새가 공업용 알코올 같다고 한마디 했다가 술맛 떨어진다고 유정현에게 욕을 들었었다.

주승언은 고량주나 보드카도 막 털어 넣는 주당이지만 나는 그런 부류는 아니었고, 평범하게 술자리만 좋아하는 쪽이었다. 그래도 분위기를 깨기는 애매한 순간이라 억지로 잔을 들고 입에 가져다 댔다.

“어? 승언이 형!”

혀를 타고 흘러 들어가는 알코올의 쓴맛에 눈썹을 구기는데 잔 너머로 문을 열고 들어오는 길쭉한 실루엣이 보였다. 나보다도 빠르게 주승언 극성팬이 먼저 반응했다. 극성팬도 아니고 저 정도면 집 지키는 개 아닌가 싶었지만 주승언 애완견이라고 하기엔 내게도 매너라는 게 있었으므로 봐줬다. 일행과 함께 서 있던 웬수 놈이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너 이렇게 한 번에 마시면 취하잖아.”

사시사철 서늘하게 식어 있는 내 손을 붙들고 잔을 내리는 목소리는 평이했다. 하여간 나하고 둘이서만 있을 때와 밖에서 다른 사람들이랑 있을 때하고 하는 짓이 딴판이었다. 주승언은 그게 사회생활이라고 했지만, 글쎄. 내가 보기엔 그냥 내숭일 뿐이었다. 애초에 학생이 사회생활을 핑계로 대외용 인격을 구분하는 게 웃긴 거다. 생긴 대로 살아야지.

“승언이 형, 형 오늘 재윤이 침대 뺏어 쓰셨어요? 얘 하루 종일 허리 아프다고 징징대던데요.”

“나야말로 얘를 업어 키우다가 허리가 휘어서 침대가 아니면 잠을 못 자.”

웬수 놈의 말을 들은 유정현과 허지원, 최은성, 박병서가 와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저것들이 내 친구인지 주승언 친구인지 알 길이 없었다. 뻔뻔함밖에 안 남은 얼굴을 째려보자 형 얼굴 뚫릴 것 같아, 하고 눈 위로 손을 덮어 버린다. 아, 진짜!

“너 친구한테 안 가냐?”

평소와 같은 온도의 손바닥에 묘하게 안심하면서 동시에 열이 뻗쳐 손목을 잡아 내동댕이치고 꺼지라고 손짓하자 아예 내 옆에 의자를 빼 앉으며 제 일행을 부른다.

“임수호! 그냥 여기 와서 앉아. 나 아는 애들이야.”

몇 번 인사한 적 있는 주승언의 과 동기였다.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하자 오랜만이라는 답이 돌아온다. 말수는 안 많아도 대하기는 꽤 편한 사람이었다. 술 못 돌려서 안달이 난 오채영을 대신해 최은성이 여자애들을 주승언과 수호 형에게 소개했다.

“여기서부터 오채영, 윤주희, 서한나고요, 경영인데 다 저희랑 동갑이에요.”

주승언과 수호 형은 고개만 끄덕였고, 오채영은 겨우 최은성에게 뺏긴 소주병을 되찾았다. 아까 오채영에게 받은 잔에는 아직도 소주가 가득 차 있었다. 물끄러미 잔을 내려다보는데 내 시선을 오해한 건지 주승언의 손이 내 잔 위를 덮었다.

“맥주나 마셔.”

막무가내 합석 때문에 이미 1차로 짜증 난 상태였는데 하지 말라고 하니 괜히 반발심이 들어 잔을 빼냈다.

“이거 마실 건데.”

눈썹이 팔자로 구겨졌다가 도로 올라온다.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내젓는 걸 보다 잔으로 다시 시선을 내렸다. 마신다고는 했지만 여전히 별로 맛이 있어 보이진 않았다. 식도를 타고 들어가는 맛에 인상을 쓰는데 등 뒤로 말소리가 들렸다.

“승언 오빠 오랜만.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네?”

서한나의 목소리였다. 그 뒤에 이어진 가벼운 주승언의 대꾸에 나는 슬슬 접점이 없어 보이는 그 둘의 관계에 흥미가 생겼다.

“한나랑 아는 사이였어?”

“고등학교 후배.”

단조로운 대답이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세상 좁다지만 내 생각보다 더 좁은 것 같았다. 중학교는 주승언과 같은 곳을 나왔지만 고등학교는, 약간 집에서 떨어진 곳으로 갔었다. 그때도 이유 같은 것은 따지지 않고 그냥 내키는 대로 정한 결과였다. 아마 대학교 원서 쓸 때하고 비슷한 이상 심리였지 싶다.

어쩐지 마음이 불편해졌다. 공대 안에서 주승언은 꽤 유명 인사였고 놈과 여기저기서 엮일 일이 많았던 나를 생각하면, 처음부터 서한나가 관심이 있었던 것은 이쪽이었을지도 몰랐다. 아직까지는 그저 추측일 뿐이지만.



서한나의 의도가 신경 쓰여서 술을 물처럼 마셔 버린 결과로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나를 주승언이 업어 들었다. 오채영이 나 이상으로 취해 버린 게 약간 걱정스러웠지만 윤주희와 서한나가 기숙사까지 데려다 놓기로 해서 최은성이 함께 갔다. 애초에 그 여자애들하고 제일 친한 건 최은성이었으니 당연한 일이긴 했다.

나를 업은 채로 가방까지 챙긴 주승언의 등에 기대서 다시 생각해 보니 서한나가 나와 주승언의 관계를 알고 친해지자며 속 보이는 제스처를 취했을 것 같진 않았다. 예민해질 때마다 늘 이상한 쪽으로 생각이 튀는 건 내 나쁜 버릇 중에 하나였다.

뜨끈한 체온이 느껴지자 어쩐지 잠이 쏟아지는 것 같았다. ……나 자도 돼? 등에 코를 박고 웅얼대는 소리를 용케 알아들었는지 주승언이 픽 웃었다. 나이에 안 맞는 짓만 일삼는 인간이라고 항상 생각하면서도 저런 웃음소리를 흘릴 때면 형이 맞긴 하구나 싶어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맞벌이 부부 밑의 외동인 나를 자기 동생보다 더 챙긴 게 주승언이었다. 주승언의 남동생 주태영은 나보다 한 살이 많았는데, 주승언의 부모님이 이혼하면서 어머니 쪽을 따라 집을 나갔다. 중학교 이후로는 보지 못했다. 그래도 주승언이 나를 챙길 수 없을 때면 태영이 형이 나와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아직도 얼굴이 희미하게 기억에 남아 있었다.

주승언은 종종 동생과 연락을 하긴 하는 것 같았으나 그걸 내가 물어볼 이유는 없지 싶어서 먼저 이야기를 꺼내지는 않았다. 그래서 태영이 형이 어떻게 지내는지는 잘 모른다. 그냥 막연하게,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생각하면서 가끔 떠올리는 게 전부였다.

도어락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진심으로 잘 생각은 없었는데 그 짧은 시간 사이에 숙면을 취하기라도 했는지 시야가 맑아졌다.

“깼어?”

가방을 현관 앞에 내려놓던 주승언이 내가 깬 기색을 알아차렸는지 말을 걸어왔다. 응, 잠긴 목소리로 답하며 안락한 등에서 내려왔다. 오늘 하루 어린 시절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해서 그런지, 여차하면 주승언에게 내 기준치를 넘어 과하게 관대해질 것 같았다. 내가 비척비척 방 안으로 들어서는 것을 확인한 놈이 나가려는 듯이 몸을 돌렸다.

센서 등이 꺼지면 바로 그림자가 질 얼굴을 상상하고 싶지 않아서 충동적으로 던진 말이었다.

“안 자고 가?”

주승언과 보낸 10년간 처음 해 본 말인 건 확실했다. 네가 웬일이냐는 것 이상의 표정을 지은 놈에게 싫음 말고, 하자 신발을 벗고 올라선다.

“오늘 아침만 해도 비밀번호 바꾸신다더니 갑자기 황송한 제안을 다 하네. 어디 아파?”

마음씨 좀 곱게 써 보려니까 꼭 매를 번다. 옆구리를 콱 찌르고 품이 큰 티셔츠를 꺼내 휙 던졌다. 바지는 안 맞겠지만 상의라도 갈아입고 자라는 나름의 배려였는데 느물거리는 말투로 나 안 입고 자는 거 알잖아, 하고 되지도 않는 소리를 하기에 인상이 한층 더 구겨졌다.

내가 그걸 왜 알아야 되는데. 그보다 그걸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이 더 짜증 났다. 당장 오늘 아침에도 불필요하게 근육질인 상체와 마주했었다. 윽, 떠오르지 마라.

“씻을 거니까 자든지 기다리든지 알아서 해.”

“네, 주인님.”

킬킬대는 소리는 못 들은 척했다.

샤워를 끝내고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나오다가 침대 한 켠에 구겨지듯이 누워서 자는 놈을 발견했다. 침대 뺏겼다고 투덜대니까 저런 쓸데없는 배려를 해 줬나 보다. 그럴 거면 그냥 침대를 큰 걸로 하나 사 주든가. 돈도 많으면서. 구시렁대다가 얼추 머리가 마른 것이 느껴져 놈이 비워 준 옆자리에 누웠다. 역시나 좁았다.



***



평범한 주말이었다. 느지막하게 일어나서 세수를 하고, 커피를 한 잔 내려 마시고, 주승언을 깨우고, 놈이 씻는 사이에 모아 놓은 배달 밥집 전단지를 뒤적였다.

“뭐 먹을래?”

“뭘 시켜 먹어. 나가서 사 먹어. 나 얼마 전에 아버지랑 갔던 곳 있는데 괜찮더라. 가까워.”

주승언은 배달 음식을 싫어한다. 게으른 것치고는 밥은 꽤나 본격적으로 챙겨 먹는 쪽이라고 해야 하나, 아침도 빵 쪼가리로 해결하는 나하고는 다르게 밥이 기본이었다. 욕실에서 나오는 놈의 몸에 어제 던져 준 티셔츠가 걸쳐져 있었다. 내가 입었을 때는 어깨 근처까지 휑하니 드러나던 게 저놈이 입으니 어깨선이 꽉 끼듯이 맞아서 약간 빈정이 상했다. 저 티셔츠 이후로는 인터넷 쇼핑몰에서 옷을 안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