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언타이틀드(Untitled) 3화

1. Spring Semester (3)


***



카페에서 미적대며 시간을 죽이다가 밥을 먹자는 말에 짐을 챙겼다. 먹고 싶은 거 있냐는 질문에 무턱대고 비싼 걸 사 달라고 했는데도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다.

“차 끌고 올 테니까 짐 놓고 내려와.”

자취방에 들어서서 가방을 내려놓고 카디건을 찾았다. 추위를 많이 타는 편이라 남들은 슬슬 반팔 찾을 시기에 나만 겉옷까지 챙겨 입어야 한다는 건 꽤 억울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무 때나 감기에 걸리는 나에게 주승언은 옷 얇게 입지 말라는 소리를 습관처럼 하곤 했다. 휴대폰 진동음이 울렸다. ‘내려와.’ 배너에 뜬 메시지를 확인하고 신발을 신고 터덜터덜 입구로 걸어 내려갔다.

“어디 갈 거야?”

“호텔.”

주말인데 예약 안 해도 되나,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주승언이 어련히 알아서 했겠지. 카디건 소매를 꼼지락대며 잡아당기는 무의미한 행동을 반복했다. 심심해진 내가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나 먹힐 잡담의 화두를 먼저 던졌다.

“요즘은 연애 안 해?”

뜬금없는 주제에 놈의 오른쪽 눈썹이 들려 올라갔다.

“갑자기 그건 왜.”

“아니, 애들이 궁금해하더라고. 민하 형이 너 군대 가기 전에 날렸단 얘기를 술안주로 써먹던데.”

“날리긴 개뿔이. 걔야말로 4년째 같은 사람 사귀니까 어지간한 놈은 다 지 기준에선 날린 걸로 보이는 거고.”

“4년? 오래 만났네. 안 질리나.”

“너랑 나도 10년째 아는데 4년이 별거냐. 걔도 그런가 보지.”

어딘가 이상한 논리였지만 그냥 넘겼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호텔이라 금방 도착했다. 발레파킹 요원에게 키를 넘긴 놈이 내 쪽으로 걸어왔다.

“일식 괜찮지?”

응, 입 모양으로 대답하는 걸 확인하고는 가자며 어깨에 팔을 올린다. 그래도 170은 넘겼는데 주승언이 워낙 커서 어깨동무도 아니고 그냥 팔을 걸쳐 놓은 모양새였다. 비싼 거 사 주니까 오늘은 그냥 참았다.



저녁은 꽤 맛있게 먹었다. 원래 맛에 크게 감동하는 타입은 아닌데 코스 요리로 나온 게 우연히도 전부 좋아하는 것이었다. 주승언은 희희낙락하는 내 얼굴을 살피더니 웨이터를 불러 사케를 주문했다.

“운전은 어떡하게? 너 대리 부르는 거 싫어하잖아.”

“죽도록 마시고 호텔 1박 하면 되지.”

돈 많은 인간의 여유를 얕봤다, 내가. 마지막 플레이트로 나온 초밥까지 다 먹고 고개를 들었을 때는 묘하게 벽지가 흔들리고 있었다. 뭐야, 이거. 놈이 나와 몇 번인가 시선을 맞추려 하다가 포기하고 일어섰다.

“사케에도 약한 건 처음 알았네.”

주승언이 중얼거리며 내 허리를 팔로 휘어 감았다.

“자고 가라.”

얌전히 놈의 팔에 몸을 맡겼다. 엘리베이터가 움직이는 소리가 묵직하게 울렸다. 이 호텔 객실 몇 층까지 있지, 하는 의문을 떠올리다가 생각을 포기하고 옷 너머로도 뜨거운 체온이 느껴지는 가슴팍에 머리를 기댔다. 뜨끈뜨끈해.

“그래서 좋다는 거야, 싫다는 거야.”

아아, 그제야 주승언한테는 한 번도 체온이 높은 게 좋다는 말을 해 준 적이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좋아. 내가, 체온이 낮으니까, 너는 뜨거운 게 좋아. 뜨문뜨문 말을 이어 가다가 쏟아지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팔을 붙잡고 고꾸라졌다. 아니, 고꾸라지려 했다. 카드키를 쥔 반대편 손이 가슴팍에 닿았다. 한숨을 내쉰 놈이 나를 들어 올렸다. 초등학교 이후로는 이렇게 놈에게 ‘운반당한’ 기억이 없었다.

브이넥 티셔츠 위로 뻗은 목 뒤에 팔을 걸자 호흡이 어긋나는 소리가 들렸다. 키들키들 웃으면서 목에서 어깨로 이어지는 곳에 코를 비볐다. 주승언의 걸음이 빨라졌다. 문을 열고 들어간 놈이 나를 침대에 내려놓았다.

“잘 자.”

내 인사에 어이가 없다는 듯이 코로 웃는 놈을 뒤로하고 잠에 서서히 취해 갔다. ‘자냐?’, ‘진짜 자냐?’ 연거푸 이어지는 방해꾼의 말은 한 귀로 흘려들었다. ‘쓸…없이 …뻐서는. 갖고 놀지, 아주.’ 마지막 말의 의미를 해독하기 전에 기억은 거기서 끝났다.



“으응…….”

잠투정 같은 소리를 흘리며 눈을 떴다. 어지러울 만큼 취했던 것 같은데 의외로 숙취는 없었다. 옆자리는 사람이 누웠던 흔적이 젖혀진 이불과 함께 남아 있었다. 희미하게 물줄기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주승언이 씻고 있는 듯했다. 베개에 얼굴을 푹 파묻은 채로 5분쯤 있었을까, 욕실 문이 덜컥 열리고 놈이 나왔다.

“일어났냐.”

눈이 마주치자 묻는다. 벌떡 일어나서 놈을 지나쳐 욕실 안으로 들어섰다. 습한 열기가 가득했지만 개의치 않고 세면대 앞에 서서 물을 틀었다. 일회용 칫솔을 까서 양치를 하고 찬물을 얼굴에 끼얹었다. 아, 좀 살겠네.

“양치가 그렇게 급했어?”

황당하다는 듯이 말하는 주승언에게 대꾸했다.

“내가 한 깔끔 하잖아.”

“그러시겠죠.”

갈아입을 옷도 없는데 샤워를 하기는 싫어서 밥이나 먹자고 채근했다. 머리카락에 맺힌 물기를 대충 털어 낸 놈이 의자 등받이에 걸쳐 놨던 티셔츠에 머리와 팔을 차례로 끼워 넣었다. 침대에 걸터앉아 등허리에 뻣뻣하게 선 기립근과 그 주변이 물결치듯이 움직이는 것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팔을 잡아당기는 힘에 일으켜 세워졌다.

“호텔 조식 상관없지?”

“응.”

샐러드를 깨작거리다가 놈이 가져온 커피로 관심을 돌렸다. 우유 거품이 부드러워서 긴장이 많이 풀어졌다. 의자에 널브러지듯 기대 있는 내 꼴을 보고도 주승언은 별말이 없었다.

“다 먹었어?”

고개를 한 번 느릿하게 끄덕여 긍정의 표시를 하자 일어선다. 놈을 따라 로비를 걸어 나가는데 프런트 직원들의 시선이 뒤따르는 것이 느껴졌다. 주승언은 본인 얼굴에 남들이 관심을 갖든 어쩌든 전혀 개의치 않는 타입이라 같이 다니는 나만 날로 예민해져 갔다. 중학교 때는 저놈이 하교 시간에 중앙 현관까지 몇 번 찾아왔다는 이유로 반 애들한테 질릴 만큼 시달린 적도 있었다.

“집에 갈 거지?”

핸들을 돌리면서 묻는 말에 대답 대신 질문을 했다.

“형도 집?”

“난 잠깐 평창동 들르게.”

평창동이라 함은 놈의 친가를 부르는 이름이었다. 주승언 돈지랄의 밑천은 다 거기서 나오는 거였다.

“할아버지 잘 계셔?”

“노인네가 잘 안 계시면 큰일 나지.”

막말인데 웃기는 소리라 피식 웃음이 나왔다. 놈은 어머니 쪽하고는 별로 교류가 없는 것 같아 보이는데 친가에는 꼬박꼬박 얼굴을 비추곤 했다. 의외로 살뜰하게 인간관계를 챙기는 부분이 있었다.

“나 여기서 내려 줘. 좀 걸을래.”

차가 갓길에 멈췄다. 문을 막 열고 다리를 지면으로 뻗은 나에게 주승언이 말했다.

“싸돌아다니지 말고 빨리 들어가라.”

“뭐래.”

사실 유정현이 아침부터 계속 징징거려서 만날 생각이 약간 있었는데, 약속을 잡기도 전에 들킨 기분이라 좀 무안했다.

“너나 사고 안 나게 안전 운전해라.”

“네, 선생님.”

망설임 없이 등을 돌렸다. 차가 출발하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휴대폰을 들어 올려 전화를 걸었다.

“어디야.”

-나 공대 도서관.

“카페에서 볼래?”

-지금 갈게. 아, 그리고 지원이도 있어.

“같이 와, 그럼.”

술 마시는 것도 아니고 건전한 공부 모임이니 괜찮겠지. 놈의 잔소리는 흘려들었다.



공부는 역시 혼자 하는 거라는 걸 깨달은 오후였다. 하나 걸러 하나씩 막힌다고 질문 공세를 퍼붓는 유정현을 허지원과 번갈아 가며 상대를 해 주다 진이 쪽 빠졌다. 미안하다며 저녁을 산다기에 고기 아니면 취급 안 한다고 했더니 너는 승언이 형이랑 맨날 맛있는 거 먹으러 다니면서 그지 친구한테까지 삥을 뜯냐고 우는소리를 한다.

그래도 고기가 좋다는 주문은 참작해서 곱창집에 데려가 줬다. 맛이야 있겠지만 보기만 해도 고지혈증에 걸릴 듯한 생김새다. 작게 잘린 것을 집어 먹는데 유정현이 눈치를 보다가 말을 꺼냈다.

“소주 한 병만 시키자.”

허지원이 손을 들어 알바를 불렀다. 초록색 병이 곧 그 손에 들렸다.

“나 어제도 술 마셨어. 난 딱 한 잔만 마실래.”

미리 못 박는 말을 하자 유정현이 불만을 터뜨렸다.

“누구랑 마셨는데. 설마 여자?!”

또 드라마 각본 쓰고 앉았네. 한심함을 가득 담은 시선을 쏴 주었다. 주승언이랑 마셨다고 하자 김샌 표정을 짓는다.

“너야말로 승언이 형이랑 사귀는 거 아니냐? 아니지, 10년이면 부부지 그냥.”

“징그러운 소리 하지 마라.”

줄곧 인스턴트 같은 만남을 선호했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 만난 여자애들도 제일 오래 사귄 게 반년을 못 채웠다. 친한 애라면 고백을 받아도 거절했다. 잘 모르는 사람과, 적당히 거리를 유지해 가면서 싸구려 같은 위로를 주고받는 것이 편했다.

아마도 성격적 결함 때문일 것이다. 상처를 줄까 봐 내 성격 숨기고 다정한 척하는 건 성미에 영 안 맞았다. 뭣보다 남자는 싫었다. 생긴 게 이 모양이라 공학을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몇몇 남자들이 나를 어떤 시선으로 보는지는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한때는 나도 그쪽인가, 하는 고민을 심각하게 했을 정도였다. 같은 반 남자 새끼가 장난을 치다 나를 껴안았을 때 온몸에 소름이 끼치는 감각을 경험하고는 곧바로 그 생각은 폐기해 버렸지만.

남학생의 비율이 비교도 안 되게 높은 공대에서는 그 시선이 좀 더 노골적으로 변했다. 그걸 처음 겪었던 장소는 새터의 술자리였다. 주승언은 내게 학교 행사라고 다 가야 되는 건 아니라며 새터는 그냥 건너뛰는 게 어떻겠냐고 마뜩잖은 목소리로 물었었다. 그 말을 무시하고 끝끝내 새터에 참석했던 건 어떻게 보면 나의 과실이었다.

“야, 승언이 형이 그 말 들으면 울겠다.”

“걔도 여자 좋아하는데 뭘.”

연애 안 한 지는 꽤 된 것 같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내 기억 속의 놈은 항상 옆에 여자가 있었다. 그리고 그 여자들의 상당수는, 놈의 ‘친한 동생’인 나에게도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아마 좋아하는 사람하고 공유할 수 있는 무언가를 좇는 본능적인 행동이었을 거다. 연애 감정 따위가 아니어도 주승언이 나를 자기 방식대로 아낀다는 건 너무나도 명백한 사실이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승언이 형 요즘 묘한 기류가 있던데.”

허지원이 갑자기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왜, 서한나 있잖아. 걔가 번호 알아냈나 봐. 오채영이랑 얘기하는 거 들었는데.”

불시에 했던 전화번호부 검사는 의미가 없었던 모양이다. 하긴, 주승언은 자기가 먼저 연락할 필요가 있는 사람 외에는 번호조차 저장하지 않았다. 내가 자기 딴에는 애정을 담아 지었을 가당찮은 별명으로 저장되어 있는 것에 황송해할 타이밍인가.

“에이, 서한나가 승언이 형 타입은 아니지. 형은 좀 더…. 뭐라고 해야 되지, 정직하게 예쁜 걸 좋아하잖아.”

“고등학교 선배라며.”

듣고만 있던 내가 말을 보탰다. 허지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근데 서한나가 엄청 들이대는 것 같더라고. 지 말로는 고등학교 동아리 OB 모임 때 처음 만나서 번호도 받고 잠깐 연락했었다던데. 그 정도면 뭔가 있긴 했던 거 아냐?”

“주승언 걔는 원래 만인의 썸남이야.”

여지를 너무 흘리고 다녀서 문제지……. 한숨을 속으로 삼켰다. 내 말을 들은 유정현은 테이블을 두드리며 웃어 젖혔다.

“반박을 못하겠네. 하긴 승언이 형 정도면 그럴 만하다.”

“중고등학교 때 얘기라도 풀어 줘?”

내가 평정을 가장한 얼굴로 가볍게 대꾸했다.

“난 승언이 형의 과거가 어떻든 형을 변함없이 사랑하거든?!”

내 뒷머리를 마구 쓰다듬어서 헝클어뜨리는 유정현의 팔을 치워 내고 고기를 하나 더 집어 먹었다. 그걸 물끄러미 보고 있던 녀석의 입에서 기어코 내 신경을 거스르는 한 마디가 나왔다.

“많이 먹고 커라, 우리 이쁜이.”

“누가 이쁜이야. 죽을래?”

그 말을 듣자마자 내 옆에 앉은 놈의 옆구리를 세게 가격했다. 밥 먹으랴 친구 조지랴, 양손이 아주 바빴다.



***



주말 저녁을 내리 술로 보낸 결과, 월요일은 아침부터 속이 안 좋았다. 커피 한 잔으로 겨우 정신을 차린 뒤 학교로 향했다. 정문까지 걷는 사이에 좀 진정이 되는 것 같아 크게 숨을 들이켰다. 공학관으로 들어서려는데 마침 가방을 들고 나오던 오채영과 마주쳤다.

“어, 재윤이네.”

“안녕…….”

가라앉은 목소리를 듣고 어디 아프냐며 눈을 동그랗게 떠 보인다. 오채영은 술자리만 아니라면 썩 괜찮은 붙임성을 가진 애였다. 과음이라고 했더니 알 만하다며 웃는다.

“너 주량 얼마야….”

맥주잔에 소주를 따라 내게 주더니 자기도 똑같이 따라서 연거푸 세 잔씩 마시던 그 모습이 아직도 강렬하게 뇌리에 남아 있었다.

“나? 아마 세 병 정도?”

최은성에게 다음에는 인간 친구를 사귀라고 해야겠다. 고래랑 친구 하지 말고.

수업 시작까지 시간이 꽤 남아서 선 채로 오채영과 잠깐 잡담을 했다. 컴공 1학년이 필수로 듣는 입문 강의 때문에 애를 먹고 있다는 푸념을 듣고 모른 척할 수가 없어 작년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생각나는 대로 말해 주었다. 오채영은 잠깐만, 이라고 하더니 휴대폰 메모 어플을 켜고 내가 해 주는 말을 그대로 받아 적었다.

“더 모르는 거 있으면 허지원한테 물어봐. 걔가 우리 중에서는 제일 모범생이라 나보다 나을걸.”

“알았어. 아무튼 고마워.”

공강이라 도서관에 갈 거라는 녀석에게 대충 손을 흔들어 주고 강의실로 들어섰다. 몇 명이 나를 흘긋 쳐다봤다.

“어, 왔어?”

뒤쪽에 최은성과 박병서가 앉아 있었다. 그 옆에 가방을 놓고 앉으면서 말했다.

“오채영 컴입 어느 교수 거 들어?”

“최컴입일걸?”

…나랑 다른 교수 분반인데. 지금이라도 연락해서 정정해 줄까 하다가 관뒀다. 일단 연락처가 없었다.

“은성아, 다음에 걔 보면 내가 알려 준 거 그냥 참고만 하라고 해라. 다른 교수 수업이라고.”

“입문이 다 거기서 거기지.”

“그래도.”

알았다는 말에 의자에 몸을 구겨 넣었다. 일체형 책걸상 처음 만든 놈은 죽어야 한다. 이미 죽었다면 부관참시라도 해야 한다. 매주 월요일마다 하는 생각이었다. 주승언한테 이 말을 했다가 네가 아무리 불편해 봐야 긴 다리 접고 앉아야 하는 나만 하겠냐는 재수 없는 소리를 들은 적도 있었다. 하여간 말을 해도 꼭…. 박병서가 과제 이야기를 꺼내기에 자세를 고쳐 앉고 본격적으로 교수 험담에 동참했다.



***



공대 전공 수업의 시험은 학기당 최소 세 번이다. ‘시험 2회’라고 쓰여 있는 강의 계획서는 앞에 ‘퀴즈 빼고’를 끼워 넣어서 읽어야 했다. 따사로운 햇볕을 쬐며 잔디밭에 드러누워 낮잠을 즐기는 캠퍼스 라이프? 그런 거 없다. 일상이 과제와의 전쟁이었다. 그리고 요즘은 바지에 풀물 든다고 아무 데나 드러눕는 인간도 없었다.

아빠는 요즘 애들은 낭만이 없다며 투덜댔지만 자기 옷 자기가 빨아 입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게 당연한 거다. 귀찮은 일을 사서 만들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내 인생의 가장 귀찮은 일은 내가 아니라 웬수 놈이 만들고 다녔다.

수요일 저녁, 퀴즈가 끝나고 돌아와 침대에 몸을 눕히고 쪽잠을 시도하는데 예고도 없이 문이 열렸다. 웬일로 며칠 안 보인다 했더니 저놈도 시험에 실컷 시달린 몰골이었다. 공대는 이래서 좋다. 돈 많은 놈이건 소시민이건 똑같이 시험과 과제에 처맞는 공평한 인생이다.

“나 이틀 밤샜어. 좀 봐줘.”

뭐라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주승언이 선수를 쳤다. 실험 보고서에 퀴즈에 중간고사까지 휘몰아쳤다며 실성한 사람처럼 중얼대더니 내 옆에 엎드려 누워 버린다. 침대가 약간 기울어지는 느낌이 났다. 한쪽 팔이 내 등까지 둘렸다. 평소보다도 좀 더 뜨거웠다. 열 있나? 하지만 주승언의 건강 이상까지 걱정하기엔 내가 너무 졸린 상태였다. 내 쪽으로 고개를 틀고 반쯤 수면 상태가 된 놈을 쳐다보다가 나도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눈을 떴을 때는 아침 8시였다. 거의 열한 시간은 잔 것 같은데……. 휴대폰 대기 화면의 시계를 확인하고 어림잡아 수면 시간을 계산했다. 학기 초에 애매하게 목요일을 공강으로 비운 것을 보고 유정현이 월요일이나 금요일을 빼는 게 낫지 않냐고 했지만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내 저질 체력으로는 주중에 하루를 비워 놓는 게 나았다.

어차피 학교 앞에 자취하는데 공강은 사치지, 최은성이 말했다. 틀린 말은 아닌데 문제는 내 체력이 평균치에 한참 미달인 특수한 케이스라는 거였다. 오랜만에 찾아온 나른함에 더 잘지 말지 잠깐 고민하는데 옆에서 거슬리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너 어디 아파?”

색색대는 호흡이 거칠었다. 연중 안 차가운 날보다 차가운 날이 훨씬 많은 내 손을 들어 놈의 이마에 가져다 댔다. 땀이 맺힌 관자놀이가 어색하다. 대답이 없는 주승언을 잠깐 보다가 화장실에서 수건을 찬물에 적셨다. 주욱, 짜내는데 침대 쪽에서 부스럭대는 소리가 났다.

“깼어?”

“……음.”

기도가 부었는지 말을 하려다 말고 목을 매만진다. 수건을 들고 놈의 얼굴을 닦았다. 귀찮은지 인상을 쓰면서도 밀어 내지는 않는다.

“병원 갈래?”

“됐어. 자면 나아. 침대 좀 빌린다.”

아무래도 오늘 수업은 결석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환자 옆에서 잘 수는 없는 노릇이라 대충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종합 감기약이라도 사 올 생각이었다. 대학가 근처의 약국들은 9시 이전에도 이미 약사가 출근해 있는 곳이 많았다.



약을 사고 죽을 포장해서 집에 돌아왔을 때 놈은 깊이 잠든 상태였다. 주승언이 아픈 일은 정말 희귀해서 나조차도 놈이 감기 걸린 모습을 본 게 이번이 딱 두 번째였다. 약을 먹고 자라고 깨우기엔 이틀 내리 밤을 새웠다는 말이 신경 쓰여서 내버려 뒀다. 노트북을 열고 키스킨을 깐 키보드 위로 손을 조심스럽게 내렸다. 나 참, 내 집인데 이게 무슨 일이야. 주객전도라는 게 바로 이런 상황을 두고 하는 말 아닌가 싶었다.

12시쯤 되자 놈이 눈을 떴다. 죽을 다시 데워서 내밀자 군말 없이 먹고 약까지 삼킨다. 평소처럼 말을 할 수가 없으니 목이 부어서인지 퍽 답답한 눈치였다.

“우리 주인님 없으면 나 어떻게 사냐.”

쉬어서 가라앉은 목소리로도 번드르르한 말은 잘한다. 한숨을 내쉬며 대꾸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잠이나 자.”

“매정한 우리 자기.”

잠 좀 잤다고 살맛 났는지 불필요하게 주둥이를 놀리려는 놈을 제지하고 침대에 밀어 눕혔다. 다시 노트북 앞으로 가려는데 손목이 잡혔다.

“옆에 누워 봐.”

“왜, 또.”

“얼른.”

손목을 죄어 오는 힘에 진심이 담겨 있어서 금방 저항을 포기했다. 주승언이 고집을 부리기 시작하면 아무도 못 말렸다. 놈이 덮은 이불을 들추고 다리부터 집어넣었다. 머리를 삐딱하게 받치고 옆으로 누워 내가 들어갈 공간을 만들어 주는 놈을 흘겨보면서 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