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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아무리 생각해도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없었다. 결국 영신은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구두를 들고 길을 나섰다.

살던 집에서 쫓겨나 갈 곳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다시 한번 생각해 보니 영신에게도 갈 곳이 있었다.

영신이 마련해 준 집이.

당장이라도 뒤통수를 갈겨 버리고 싶은 그 녀석의 집.

띠리링.

발랄한 전자음을 내며 현관문이 열렸다. 어릴 적부터 뭐든지 ‘1111’로 비밀번호를 설정해 온 동생의 단순함이 고맙게 느껴졌다. 동생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영신은 할머니에게서 받은 종이 가방을 열고 구두를 꺼냈다. 적당한 높이에 아무런 장식이 되어 있지 않은 단순한 디자인의 분홍색 구두였다. 좋은 일이 있을 거라는 할머니의 말이 영신의 귓가에 맴도는 듯 했다. 현관에 선 영신은 무엇에 홀린 듯 구두를 신어 보았다. 구두는 맞춘 듯 영신의 발에 딱 맞았다.

“너무 단순해 보였는데 신어 보니 예쁘네. 그리고 내 다리도 예쁘…… 응? 내 다리가 왜 이렇게 얇아졌지?”

씨름 선수처럼 두툼했던 영신의 다리가 모델처럼 날씬하게 쭉 뻗어 있었다. 영신은 깜짝 놀라 전신 거울을 보았다.

“어머! 이게 나야?!”

흑옥처럼 윤기 나는 흑발과 이와 대비되는 하얗고 매끄러운 피부, 약간 올라간 눈매에 자리 잡은 동그란 눈과 오똑한 코, 그리고 적당히 솟아 있는 가슴과 잘록한 허리.

구두를 신은 영신은 TV에서 나온 듯한 아름다운 여인이 되어 있었다.

완전히 바뀌어 버린 자신의 모습을 보며 영신은 벌어진 입을 한동안 닫지 못했다.



* * *



“어우, 피곤해. 어제 너무 무리했나?”

뺀질거리게 생긴 남자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영신의 동생 영진이다. 신발을 대충 벗어 두고 집에 들어온 영진은 옷도 아무렇게나 던져두었다. 그리고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몸을 던지려 던 그의 눈에 거대한 물체가 들어왔다.

“으아악! 뭐야 이거!”

영진의 놀란 외침에 거대한 물체가 꿈틀거렸다. 이불 속에서 우람한 팔뚝이 튀어나오더니 영진의 머리채를 세게 쥐었다.

“아아아악! 아파! 누나 잠깐만 나 옷 좀 입고!”

반팔 티에 반바지를 걸친 영진은 불만스러운 얼굴로 바닥에 털썩 앉았다. 그의 맞은편에는 영신이 손톱을 매만지며 소파에 앉아 있다. 엉망이 된 영진의 머리는 그가 얼마나 험한 꼴을 당했는지 말해 주고 있었다.

거실 바닥에는 영진의 것으로 추정되는 머리카락 뭉치가 여기저기 굴러다니고 있다. 핏자국도 몇 군데 보이는 것 같지만 기분 탓이라고 생각하고 넘어가자. 영진은 영신을 쏘아보며 말했다.

“그래서. 지금 내 집에 들어와서 살겠다고?”

“응.”

당연하게 대답하는 영신을 보며 영진은 기가 찬다는 듯 말했다.

“하, 참. 이보세요. 아무리 친누나라고 하지만 나 건장한 남자야. 다 큰 남자와 여자가 단 둘이 산다니 이게 말이 돼?”

“남자 같은 소리하네. 넌 남자이기 전에 동생이야. 누나가 지금 갈 곳이 없어서 길바닥에서 생활하게 생겼는데 나가라는 거니?”

“……그래도! 여긴 내 집이라고!”

영진의 말에 영신의 눈이 번뜩인다.

“영진아. 네가 지금 잊어버렸나 본데, 이 집 전세금 누구 돈으로 했는지 알고 있니?”

영진의 몸이 심하게 움찔거렸다. 그는 잠시 자세를 고쳐 앉더니 다소 공손해진 말투로 말했다.

“저기, 누나. 그래도 저에게 사생활이라는 것도 있는데…….”

“빚쟁이 주제에 무슨 사생활이야. 사생활 신경 쓰고 싶으면 빌려 간 돈 당장 내놓던가.”

그 말에 영진은 아무 말도 못하고 입을 벌린 채 콧구멍만 벌렁거렸다. 궁지에 몰렸을 때 습관처럼 나오는 버릇이다. 이제야 자신이 처한 처지를 파악한 영진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휴우. 알겠어, 누나. 그런데 보다시피 내 집, 아니 우리 집에 방이 한 개 뿐이라 누나가 거실에서 자야 할 것 같은데…… 괜찮지?”

영진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억지로 미소를 짓는 것이 힘든지 입술 끝이 바르르 떨리고 있다. 영신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으며 다리를 꼬았다. 그리고 몸을 뒤로 젖혀 영진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래, 우리 영진이는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그런데 누나가 어제 이상한 말을 들었는데. 누나가 살던 집 보증금을 누가 미리 빼 갔다고 하던데 혹시 알고 있니?”

영신이 씨익 웃었다. 분명 웃고 있는데, 영진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양반 다리로 앉아 있던 그는 아무 말 없이 무릎을 꿇었다. 양손은 최대한 공손하게 무릎 위로 살포시 얹었다.

“하하하. 당연히 누나가 방을 써야지. 난 거실도 괜찮아. 아니, 거실이 좋아. 누나 집이라고 생각하고 편하게 써. 하하하.”

“응, 그러려고. 이제야 우리 동생이 상황을 파악했구나.”

영신은 만족했다는 웃음을 지으며 소파에서 일어나 방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눈치를 살살 살피던 영진은 슬쩍 꿇고 있던 무릎을 들어 올리며 일어나려고 했다. 그러다 방으로 들어가던 영신의 시선이 영진에게로 향하자 재빨리 다시 무릎을 꿇었다.

“동생아, 이제 할 말 다했으면 좀 나가 줄래? 누나가 할 일이 좀 있어서 말이야.”

“응? 나 방금 막 들어왔는데…… 그리고 어제 밤도 샜는데…….”

“응, 그러니까 나가라고. 아니면 영원히 나갈래?”

영신이 눈을 치켜떴다. 영진은 영신의 입에서 더 험한 말이 나오기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문으로 내달렸다.

“하하하. 약속이 있었던 걸 깜빡했네. 네 시 정도에 들어오면…….”

“뭐라고?!”

“아니, 저녁 먹고 들어오겠다고. 천천히 누나 할 일해. 하하하.”

띠리링.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여유 있게 앉아 있던 영신은 영진이 나가는 소리가 들리자,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밑에서 분홍 구두를 꺼냈다. 믿기지 않아서 밤새 몇 번이나 구두를 신었다 벗었다 해 봤는지 모르겠다.

이제 실험은 끝났다. 오늘은 이 구두를 신고 밖에 나가 보기로 마음먹었다. 아기를 안은 것처럼 소중하게 구두를 가슴에 꼭 껴안고 현관으로 향했다. 혹시 흠집이라도 생길까 소리도 나지 않게 조심히 바닥에 놓았다.

구두에 살며시 발을 집어넣었다. 굵은 침을 한 번 삼키고 천천히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거울 속에는 뚱뚱한 영신 대신 밤에 보았던 아름다운 여인이 서 있었다.



* * *



“와, 저 여자 봐. 쩐다.”

“연예인인가? 몸매도 작살나네.”

영신을 보고 속닥거리는 사람들의 소리가 들린다. 그동안 영신이 겪었던 속닥거림과 전혀 달랐다. 저를 향해 쏟아지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질투와 동경 그리고 욕망이 뒤섞인 시선들. 영신은 사람들의 시선이 닿을 때마다 흥분되는 것 같았다. 지금 걷고 있는 거리가 몽땅 자신의 것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영신은 사람들의 시선에 용기를 얻어 그동안 두려워서 가 보지 못했던 카페에 가 보기로 했다. 이 주변에서 가장 큰 카페를 골라 문을 열고 들어갔다.

“저기…… 죄송하지만 번호 좀 알 수 있을까요?”

“아, 죄송해요.”

남자는 아쉬움이 가득한 표정으로 뒤돌아 갔다.

영신에게 말을 건 11번째 남자였다. 27년 동안 누구도 궁금해 하지 않았던 영신의 번호를 채 3시간도 되지 않아서 많은 남자들이 먼저 다가와 물어보고 있다.

처음에는 누군가가 번호를 물어보았을 때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며 번호를 알려 주었지만 이제는 제법 익숙하게 거절도 할 수 있게 되었다.

밖을 보니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영신은 쑥스러워 하며 다가오는 남자들과 쌓여 가는 휴대폰 메시지에 시간가는 줄 모르고 카페에 앉아 있었다.

커피 하나 달랑 시켜 놓고 몇 시간 째 앉아 있었지만 아르바이트생들 중 누구도 나가라는 눈치를 보내는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화보를 보듯 영신의 행동 하나하나를 감상하고 있었다.

심지어 영신에게 먼저 마실 물을 떠다 주기까지 했다. 처음 받아 보는 사람들의 호의는 그녀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 영신은 이제 큰 결심을 했다.

하늘에는 구름이 드리워져 별빛도 보이지 않았지만 영신의 주위는 온갖 화려한 불빛으로 눈부셨다. 세련된 의상으로 한껏 멋을 낸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영신의 옆을 지나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TV에서만 보던 곳. 나이트클럽이었다. 그것도 요즘 가장 핫하다는 ‘판테온’. 평생 상상만 하고 가 보지는 못할 것 같았던 그곳에 영신이 있었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인기에 용기를 얻어 나이트클럽 입구에 오긴 했는데, 막상 들어가려고 하니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지하를 향해 뚫려 있는 어두운 입구가 지옥의 문이라도 되는 것처럼 겁이 났다. 지하에서 올라온 조명 빛이 번쩍거릴 때에는 자기도 모르게 움찔거리기도 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돌아가려고 하는데 낯선 남자 두 명이 영신에게 다가왔다.

“혼자 왔어요?”

“예쁘다. 같이 놀아요, 우리.”

“아니, 그게 아니라.”

“에이. 그러지 말고 같이 들어가요.”

어쩔 줄 모르는 사이에 양쪽에서 영신을 둘러 싼 남자들은 영신의 어깨를 잡고 클럽으로 들어갔다. 내심 들어가고 싶었기에 마침 잘됐다 싶어 못 이기는 척 안으로 들어갔다.

왁자지껄한 사람들의 소리와 쿵쾅거리는 커다란 음악이 쉴 틈 없이 귓가를 때린다. 공기 중에 가득한 알코올 냄새와 약간의 땀 냄새가 영신의 코를 찔렀다.

“혹시 처음 왔어요?”

두리번거리는 영신의 반응을 살펴보던 남자가 말했다. 잠시 고민하던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가 싱긋 웃는다.

“오늘 저희만 따라다녀요. 여기 완전히 마스터 시켜 드릴게요.”

“자, 따라와요.”

남자들이 슬쩍 영신의 손을 잡고 사람들이 모여 있는 중심부로 데리고 갔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클럽에 울리는 강렬한 비트에 맞춰 몸을 흔들고 있었다.

쉴 새 없이 번쩍거리는 조명과 사람들의 환호 소리에 영신은 정신이 조금씩 몽롱해지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