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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저, 저는 춤 잘 못 추는데.”

“하하하. 춤까지 출 필요 없어요. 그냥 음악에 맞춰서 몸만 가볍게 흔들면 돼요. 이렇게.”

남자가 몸을 움직이는 것을 보고 있는 사이에 같이 온 남자가 뒤에서 영신의 허리를 양손으로 잡았다. 영신이 움찔거리며 허리에 놓인 남자의 손을 탁 쳐냈다.

“왜 이래요.”

“에이. 이런 데선 다 이러고 놀아요. 우리 자연스럽게 놀아 봐요.”

“우리 말만 따르면 나이트 마스터가 될 수 있다니까.”

영신의 반응이 재밌는 듯 키득거린 남자들이 다시 다가왔다. 갑자기 느껴지는 불길한 기분에 영신은 지체 없이 사람들을 비집고 출입구로 향했다.

“에이, 정말 왜 이래. 재밌게 놀자니까.”

“우리가 재미있게 해 줄게.”

뒤를 따라온 남자들이 나가려는 영신의 어깨를 잡았다. 그 손을 쳐낸 영신은 눈에 힘을 주고 남자들을 노려보았다.

“됐어요. 저 이제 갈래요.”

“아이고. 무서워라. 이러다가 사람 치겠네?”

“언니. 자꾸 이러면 재미없어진다.”

영신의 싸늘하게 굳은 표정은 웬만한 사람이라면 접근하기 힘들 정도였지만, 두 남자는 이런 경험이 많은지 전혀 굴하지 않았다.

영신은 남자들의 손길을 피해 천천히 뒷걸음을 쳤다.

턱.

구두 뒷부분이 벽에 닿았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은 없었다. 남자 한 명이 재빨리 입구 쪽 방향을 몸으로 막아섰다.

“어딜 도망가시려……. 크헉!”

몸으로 막아섰던 남자가 예상치 못한 영신의 몸통 박치기에 괴상한 소리를 내며 뒤로 넘어졌다.

보기와는 다르게 가녀린 영신의 몸이 주는 충격은 엄청났다. 마법의 구두로 외모는 바뀌었지만, 몸무게는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저런 미친!”

남자의 고함소리를 뒤로하고 입구를 향해 그대로 뛰어갔다. 남자와 부딪혔던 어깨에 가볍지 않은 통증이 느껴졌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영신의 눈앞에 계단이 나타났다. 이제 이 계단만 뛰어오르면 클럽을 벗어나게 된다!

계단을 향해 뛰어오르려던 영신의 몸이 뒤에서 끌어당기는 힘에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다.

“꺅!”

외마디 비명과 함께 바닥에 엉덩방아를 찍었다. 어느새 영신을 따라온 남자들이 영신의 손목을 잡고 있었다.

비명 소리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쳐다보았지만, 험악해 보이는 남자들 때문에 다가오는 사람은 없었다.

“하! 몸통 박치기를 하고 튀어? 보통이 아니네. 이거.”

“자꾸 이러면 재미없어진다고 했잖아. 응?”

웃음기가 없어진 얼굴이 무슨 일이라도 저지를 것처럼 험악하게 구겨져 있었다. 주저앉은 영신을 향해 다가오는 남자들의 굵은 다리가 보인다.

“너네 뭐하냐?”

그런데 갑자기 굵은 남자 목소리가 영신과 남자들 사이에 끼어들어 왔다. 세 명의 시선이 동시에 목소리의 근원지로 향했다.

위로 솟은 탈색한 회색 머리, 그 아래로 진한 눈썹과 쌍꺼풀은 없지만 큰 눈이 잘 자리 잡고 있는 잘생긴 남자였다. 영신은 지금 처한 상황도 잊어버리고 한동안 시선을 떼지 못했다.

“넌 뭔데 끼어들어?”

한 명 정도는 가볍게 제압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지, 영신을 둘러싸고 있던 남자들이 회색 머리에게 위협적으로 걸어갔다. 키는 비슷했지만 두툼한 살집이 있는 남자들이 누가 봐도 유리해 보였다. 그들의 위협적인 접근에도 회색 머리 남자는 여전히 띠꺼운 표정으로 시선을 피하지도 않고 서 있었다.

“나? 저 여자, 남자 친구.”

회색 머리 남자는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난데없는 남자 친구의 등장에 남자들은 물론 영신의 눈도 동그랗게 커졌다. 잠시 서로를 쳐다보던 남자들이 코웃음을 쳤다.

“지랄하네. 저 여자는 우리가 데리고 들어왔는데 남자 친구는 무슨.”

“남자 친구가 있는 여자를 말도 없이 데리고 들어온 거야? 개념도, 인성도 정말 쓰레기구나? 아니, 가까이에서 보니까 면상도 진짜 쓰레기네.”

“야. 괜히 멋 부리려다가 얻어터지고 울지 말고. 조용히 꺼져라.”

회색 머리 남자의 말에 자극받은 남자가 손으로 어깨를 밀었다. 제법 세게 밀었는데도 휘청거리기는커녕 입가에 미소를 짓는다.

“너네나 걱정해야 할 걸? 야, 매니저!”

회색 머리 남자가 매니저를 부르며 손을 들었다.

그의 부름에 정장을 입은 매니저가 쏜살같이 달려와 코가 무릎에 닿을 정도로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그 반응에 당황한 남자들이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회색 머리는 남자들을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말했다.

“이봐. 클럽 이딴 식으로 관리할 거야? 쓰레기들이 이렇게 둥둥 떠다니는데, 물 관리 개판이네. VIP들 오늘부터 빠져 볼까?”

“죄, 죄송합니다. 즉시 조치하겠습니다.”

매니저가 쩔쩔매며 회색 머리 남자에게 다시 한번 인사를 크게 했다. 몸을 돌린 매니저의 표정이 험악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의 눈짓에 우람한 근육질의 가드 몇 명이 남자들을 에워쌌다. 가운데에 갇힌 남자들의 자신 있던 어깨는 어느새 쭈글쭈글해져 있었다.

“여기서 더러운 짓거리들 하면 안 되죠. 일단 나가서 천천히 이야기 하죠. 따라오세요.”

애써 존댓말을 하고 있었지만, 매니저의 말투에는 분노가 꾹꾹 담아져 있었다. 남자들은 찍소리도 내지 못하고 그대로 끌려 나갔다.

멍하니 상황이 정리되는 것을 지켜보고 있던 영신에게 회색 머리 남자가 다가왔다. 가까이에서 보는 남자의 얼굴은 흠집 하나 없는 완벽한 조각 같았다.

갸름한 턱선과 도톰한 입술을 보고 있으면 야릇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에게서 풍기는 세련되고 섹시한 향수 냄새가 영신의 코끝을 간질였다.

“못 했던 데이트 이제부터 해 보자.”

“네?”

“여긴 너무 시끄럽고. 따라와.”

회색 머리 남자가 따라오라고 손짓을 하며 앞서 걸어갔다. 영신은 자꾸 올라가는 입꼬리를 애써 끌어내리며 그의 뒤를 따라갔다.

남자와 술을 마셨다. 얼마나 마셨는지,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니, 사실 어디서 술을 마셨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곳을 빠져나오는 길이 무척 아쉬웠다는 것은 분명히 기억한다.

머리가 조금 어지러웠지만, 술에 취한 알딸딸한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밤늦게 남자와, 그것도 잘생긴 남자와 단둘이 시간을 갖는 것이 처음이라 얼어 버린 혀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지만 술기운 탓에 조금씩 긴장이 풀리는 것 같다.

딱딱하게 굳었던 턱도, 수축된 근육들도 이제 제법 마음대로 움직여졌다.

눈을 돌려 옆에서 걷고 있는 남자를 슬쩍 쳐다봤다. 취한 상태에서 봐도 여전히 잘생겼다. 시선이 느껴졌는지 남자도 영신을 바라보았다.

그대로 눈이 마주쳤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사람은 천천히 걷고 있던 걸음을 멈췄다. 옆에 있던 남자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의 크고 따뜻한 손이 영신의 두 볼을 따뜻하게 감쌌다.

‘지금 이거…… 꿈은 아니겠지?’

부드럽고 따뜻한 감촉이 입술 위에서 느껴졌다. 긴장한 나머지, 영신은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조금만 더 이 부드러움을 느껴 보고 싶은데 남자의 입술이 아쉽게 떨어져 나갔다. 짧지만 강렬한 첫 번째 입맞춤. 그리고 조금 더 거칠어진 두 번째 입맞춤.

부드럽기만 했던 그의 입술이 조금씩 움직였다. 숨소리도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그의 입술이 떨어지자 영신은 자기도 모르게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떴다.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아몬드 색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눈동자가 조금씩 떨리는 것 같다.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단둘이.”



* * *



보기만 해도 피로가 풀리는 것 같은 푹신한 침대.

고급스럽고 깔끔한 상아색 대리석으로 둘러진 호텔 방.

처음 남자와 방 안에 단둘이 있게 된 영신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눈을 부릅뜨고 입가에는 옅은 미소를 지은 채 점점 다가오는 남자를 보자 더 당황한 영신이 아무 말이나 내뱉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가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남자가 영신을 침대 위로 거칠게 넘어뜨렸다.

그대로 영신의 위로 올라탄 그는 영신의 양손을 잡아 머리 위로 올렸다. 당황한 영신이 상황 파악을 하기도 전에 남자의 입술이 영신의 입을 막았다.

놀란 아기를 달래는 듯 따뜻하고 부드러운 키스에 잔뜩 긴장하고 있던 영신의 몸이 녹아내리는 듯 했다.

입술에서부터 시작한 입맞춤이 조금씩 아래로 내려갔다. 처음 느껴 보는 자극에 영신의 몸이 계속 움찔거렸다.

고개를 박고 있던 남자가 얼굴을 들어 영신을 내려다보았다. 남자는 붉게 달아오른 영신의 두 볼을 귀엽다는 듯 부드럽게 손바닥으로 쓰다듬었다.

그는 단추를 풀 시간도 아까운 듯 입고 있던 셔츠를 거칠게 벗어던졌다. 은은하게 켜진 조명에 남자의 탄탄한 상체가 드러난다. 보기 좋은 잔근육이 붙은 남자의 몸을 보자 영신은 자기도 모르게 침이 꿀꺽 넘어갔다.

무언가에 홀린 듯 영신이 몸을 일으켜 두 손을 남자의 어깨 위에 얹었다. 그리고 양손으로 천천히 쓸어내리며 남자의 몸을 조심스럽게 만졌다. 영신의 손이 접시를 뒤집어 놓은 듯 넓고 탄탄한 가슴을 지나자 조약돌같이 단단한 근육들이 촘촘하게 박혀 있는 복근에 도착했다.

예술품을 감상하듯 복근을 천천히 어루만지던 영신의 손이 허리띠를 지나 점점 밑으로 내려갔다. 순간 남자가 두 손을 낚아채더니 영신을 다시 침대에 거칠게 눕혔다.

흥분한 남자가 영신의 스커트를 벗기려다가 거슬린다는 듯 발치를 내려다보았다. 영신의 발에는 분홍색 구두가 신겨져 있었다. 남자는 구두를 향해 손을 뻗었다.

구두에 남자의 손이 닿는 느낌이 나자 영신은 번개라도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변신이 풀린다면 어떻게 전개가 되든지 좋은 결말은 되지 않을 게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