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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영진 씨는 몇 대를…….”

“두 대 정도…….”

가늘게 떠진 그녀의 눈이 영진을 빠르게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한쪽 입꼬리만 올라간 저 웃음은 분명 비웃음이었다.

“전 다섯 대 사겠습니다.”

한심하다는 듯 영진을 쳐다보던 그녀의 눈이 사르르 접히며 옆에 있던 남자를 바라보았다.

“어머, 역시 통이 크시네요. 지금 투자해 두시면 절대 후회할 일은 없을 거예요. 남자라면 기회가 있을 때 과감하게 투자해야죠. 남자 중에 남자시네.”

그녀의 칭찬이 옆에 있던 남자에게 쏟아졌다. 그녀의 따뜻한 시선과 칭찬을 받으며 남자는 입을 헤 벌린 채 웃고 있었다.

‘이런 놈에게 그녀를 빼앗길 수 없지.’

영진이 주먹을 힘껏 쥐었다.

“저도 그럼 투자해 보죠. 여섯 대 주세요.”

그 말에 두 사람이 동시에 영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싱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여는 순간, 눈에서 레이저를 쏘며 영진을 째려보던 남자가 선수 쳤다.

“남자라면 어정쩡한 숫자보다는 딱 떨어지는 것이 좋죠. 열 개 사겠습니다.”

‘이런 미친놈이!’

영진과 그녀의 시선이 다시 움직였다. 남자는 몸을 거만하게 뒤로 젖혔다. 그녀가 두 손으로 남자의 손을 턱 잡았다.

“어머! 역시. 전 이렇게 과감한 분이 좋더라. 계약서 이거 대충 쓰고 나가서 밥이라도 먹으면서 좀 더 이야기를 나눠 봐요. 술까지 먹으면 더 좋고.”

“뭐, 좋죠. 계약서 이리 주시죠.”

남자가 계약서를 보기 전 슬쩍 고개를 돌려 영진을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남자가 씨익 웃는다. 경쟁에서 이긴 승리자의 표정.

‘저런 망할 놈이! 에라 모르겠다!’

간신히 붙잡고 있던 이성의 끈이 뚝 끊어졌다. 뒷일이고 뭐고, 일단 저 놈을 이기고 싶었다. 그녀를 다시 빼앗아 와야 했다.

“……이십 대. 이십 대 살게요.”

계약서에 서명을 하고 자리에 일어나려던 그녀와 남자가 영진의 조용한 목소리에 그 자리에 멈췄다. 그녀가 동그랗게 커진 눈으로 영진을 쳐다보았다.

“며, 몇 대요?”

“이십 대요. 빨리 계약서 쓰고 나가죠. 밥부터 술까지 제가 모실게요.”

“어쩜. 저 영진 씨에게 반한 것 같아요.”

그녀가 감격한 표정으로 말하며 자리에 황급히 앉았다. 그리곤 영진이 계약서를 작성하는 동안 의자까지 옆으로 가져와 그를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필체도 어쩜 이렇게 멋지세요. 나중에 부자 되셔도 저랑 연락 끊고 이러시면 안 돼요. 영진 씨한테 딱 붙어 있어야지. 호호.”

그녀에게 가볍게 미소를 지어 준 영진이 슬쩍 남자를 쳐다보았다.

남자는 분을 참지 못하고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영진을 노려보고 있었다.

영진은 한쪽 입꼬리를 올려 씨익 웃어 보였다.



동쪽 끝에서부터 밀려들어온 새벽빛이 까만 밤하늘을 조금씩 물들였다. 결국 밤을 지새운 영진은 새빨갛게 충혈 된 눈을 비비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녀와 식사를 하고, 술을 마실 때만 해도 치열한 경쟁에서 이긴 승리자의 쾌감에 행복했다. 영진의 말에 호응해 주고, 웃어 주는 그녀가 금방이라도 자신의 여자 친구가 될 것 같아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와 헤어지고 집에 들어오는 길. 우편함에 꽂힌 도시가스 고지서를 보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마주한 현실은 시리도록 차가웠다.

무슨 정신으로 그런 말을 했을까.

머리를 쥐어뜯으며 자책했지만, 이제 와서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밤새 생각을 해 보았지만 자신의 능력으로 그 많은 돈을 구할 수 있는 곳은 없었다.

‘아니, 한 군데가 있네.’

영신이 살고 있는 집의 보증금. 투자하면 한 달 안에 원금은 찾을 수 있다고 했다. 당장은 누나가 화를 내겠지만, 원금을 찾은 뒤 얻게 되는 수익을 보면 영신도 인정할 것이다.

‘한 달만. 한 달만 누나의 보증금을 빌려 쓴다고 생각하자.’

한 달만 있으면 원금을 찾을 수 있다던. 부자가 될 수 있다던. 귓가에서 아직 맴도는 남자의 외침이 그 생각에 힘을 실어 주었다.

영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직 어둠이 다 걷히지 않은 어두운 방에서 비틀거리며 외출 준비를 하는 그의 모습은 조금 섬뜩해 보이기까지 했다.



* * *



영신이 회사를 그만둔 지 세 달이 지났다. 그리고 집 안에만 처박힌 건 오늘로 한 달째였다.

처음에는 열심히 회사를 알아보고 다녔다. 대한민국에 회사가 얼마나 많은데 자기 하나 받아 줄 곳이 없을까 생각했었다.

열심히 지원서를 썼고 셀 수도 없이 많은 회사에 제출했다. 보란 듯이 좋은 곳에 취직해서 당당해지고 싶었다.

전에 다니던 회사 사람들에게. 그리고 지영신, 자기 자신에게.

몇 군데에서 서류 전형이 통과되었다고 연락을 받았다. 하지만 약속이나 한 듯 면접에서 모두 떨어졌다.

심지어 지원서에 적힌 영신의 키와 몸무게만 보고 지원서를 덮어 버린 회사도 많았다.

회사를 그만 둬도 어떻게든 먹고는 살겠지 라고 생각했던 것이 얼마나 건방진 생각이었는지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대한민국의 수많은 회사 가운데 자신을 받아 주는 곳은 하나 없다는 사실이 잔인했지만, 현실이었다.

“아, 배고파. 뭐 먹을 거 없나?”

다이어트는커녕 스트레스 때문에 더 많이 먹어서 몸집이 더 커진 것 같았다.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거나, 거울을 보면 우울해져서 또 먹고. 이런 상황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딩동.

축 늘어진 엿처럼 소파에 누워 과자를 먹고 있던 영신의 귀에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그동안 소파 위에서만 생활을 한 탓에 소파 주변은 텅 빈 생수병과 찌그러진 맥주 캔들, 그리고 온갖 과자 봉지들로 엉망이었다.

얼마 만에 들어본 초인종 소리인지 모르겠다. 영신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비대해진 몸을 이끌고 현관으로 향했다.

“아가씨, 월세는 도대체 언제 줄 거야? 이번 달에는 꼭 주기로 했잖아!”

현관문이 다 열리기도 전에 문 앞에 있던 주인집 아주머니가 따발총처럼 말을 내뱉었다.

그동안 모아 두었던 돈은 사직서를 던지기 전, 하나 있는 동생 놈에게 빌려주었다. 영신이 살면서 했던 일 중에 가장 멍청한 일이었다. 영신의 통장 잔고는 0을 향해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죄송해요, 아주머니. 이번 달 월세도 보증금에서 까 주세요.”

“이봐, 아가씨. 저번에 받아 간 보증금을 제하고 나면 이제 얼마 남지도 않았어! 알고는 있지?”

보증금을 받아 가다니. 주인집 아주머니의 말에 영신의 눈이 커졌다. 벌렁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간신히 말을 내뱉었다.

“보증금을 받아 가다니요.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전 그런 적이 없는데.”

“지영진. 동생 맞지? 저번에 와서 누나가 병원에서 수술 받아야 한다며 보증금 대부분을 빼 갔는데.”

“네?”

영신의 다리가 후들거렸다. 영신이 회사를 그만 둔지 모르는 동생 놈이 기어코 사고를 치고 만 것이다. 왜 자신에게만 이런 가혹한 일이 생기는지 분하고 억울했다.

“아니, 그걸 확인도 안 하고 빼 주시면 어떡해요!”

“동생이 가족 관계 증명서까지 뽑아 들고 와서 그러는데 어떡해. 지금 당장 수술 안 하면 누나 죽게 생겼다고 아주 생난리를 피웠다고.”

‘하아. 이 미친 새끼.’

“아가씨, 멍 때리고 있지 말고 어떡할 거야? 돈을 주든가, 아니면 나가든가!”

“……나갈게요. 나가면 되잖아요!”

영신은 억울함을 토해 내듯 외쳤다. 이 망할 놈의 세상. 이까짓 세상 안 살고 만다!



* * *



달빛마저 구름이 가려 버린 듯 어둡다. 길가에는 지나다니는 사람도 없고 바람만 휑하니 분다. 영신의 기분처럼 어둡고 쓸쓸한 밤이다.

영신은 멀리 보이는 한강을 향해 캐리어를 끌며 걷고 또 걸었다. 나오는 눈물을 참지 않고 마음껏 흘리다 보니 어느새 다리 근처에 다다랐다. 이제 눈물조차 말라 버린 듯 눈물도 나오지 않는다. 심란했던 기분은 왠지 차분해져 있었다.

그때 할머니 한 분이 영신의 맞은편에서 걸어왔다. 영신은 비켜 주려고 몸을 한쪽으로 비틀었다.

“아이쿠!”

“죄송해요, 할머니. 괜찮으세요?”

비대해진 몸은 이제 말도 제대로 듣지 않는 모양이다. 마주 오던 할머니가 영신의 몸에 부딪혀 튕겨 나갔다. 영신은 서둘러 할머니를 부축했다.

“고마워요, 아가씨.”

“아니에요. 제가 죄송해요. 전 이만 가 볼게요. 조심히 가세요, 할머니.”

영신은 할머니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 몸을 돌렸다.

“잠깐만. 아가씨.”

할머니는 영신을 불러 세우더니 들고 있던 종이 가방을 쥐어 주었다. 가방 안에는 분홍색 구두가 한 켤레 들어 있었다.

“이게 뭐예요, 할머니?”

어리둥절한 영신에게 할머니는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동안 고생한 아가씨에게 이 할미가 주는 선물이에요. 나쁜 생각 하지 말고 곧장 집으로 가서 이 구두를 꼭 신어 보세요. 좋은 일이 생길 거예요.”

할머니는 오랫동안 걸어서 차가워진 영신의 손을 감싸 쥐었다. 따뜻한 체온이 영신의 손을 타고 온몸에 전해졌다. 추운 겨울에 쏙 들어간 이불 속처럼 따뜻하고 포근했다. 이렇게 따뜻한 사람의 체온을 느껴 본 적이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죽는 것보다는 쉬울 거야. 할 수 있지?”

할머니는 어느새 영신의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며 다정하게 말했다. 그 온화한 목소리에 얼음처럼 굳어 버렸던 영신의 마음이 조금씩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고맙습니……. 응? 할머니? 어디 가셨지?!”

눈물을 닦은 영신이 고개를 들었는데 분명 앞에 있던 할머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꿈을 꾼 것이 아닐까 싶었지만 손에는 여전히 따뜻한 온기와 함께 건네받은 구두 한 쌍이 남아 있었다.

영신은 한동안 멍청한 표정으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