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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평상시라면 조심스럽게 노크를 하고 굽신거리며 들어갔겠지만 오늘은 다르다.

노크 따위는 필요 없다. 사직서를 손에 쥔 영신은 부장실 문을 힘차게 열었다.

통화를 하고 있던 부장은 갑작스럽게 열린 문에 놀라 잠시 영신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귀찮다는 듯 나가라고 손짓했다.

부장 앞에만 서면 움츠러들곤 했지만 손에 쥔 사직서의 힘인지 아무것도 무섭지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입꼬리만 살짝 올려 웃으며 성큼성큼 부장에게 다가갔다.

“네, 잠깐만요. 이봐요. 지영신 씨! 나가라고! 나가! 몇 번을 말하게 하는 거야!”

“나가라는 말 방금 처음 하셨고요! 할 말이 정말 많지만 짧게 할게요. 사람 차별하지 마세요! 부장님은 뭐 얼마나 잘났길래 그래요? 그리고 치매예요? 일 시킨 지 얼마나 됐다고 계속 불러서 이거 해라 저거 해라 하는 거예요! 복사 같은 건 직접 좀 하시라고요, 회사에 손이 없는 사람이 왜 이렇게 많아!?”

호통에 지지 않고 더 크게 소리 지르는 영신을 보고, 부장은 통화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잊은 채 입을 떡 벌리고 영신을 쳐다봤다.

“……지영신 씨. 지금 뭐 하는 짓이야! 회사 안 다닐 거야?”

“그래, 더럽고 치사해서 안 다닐 거다! 그동안 함께 한 시간 정말 거지같았고, 앞으로 그렇게 살지 마!”

영신은 사직서를 힘껏 내던졌다. 날아간 사직서가 부장의 얼굴을 때리고 바닥에 떨어졌다. 그대로 나가려던 그녀는 다시 몸을 돌려 말했다.

“그리고 점심시간에 전화 좀 하지 마! 이 개매너야!”



* * *



“이 더러운 회사, 다들 잘 먹고 잘 살아라!”

영신은 짐을 싸 들고 회사 로비를 걸어갔다.

꿈에서만 그리던 순간이었다. 그동안 숨도 못 쉴 정도로 답답하게 막혀 있던 속이 뻥 뚫린 기분이었다.

코에 들어오는 공기는 공기청정기 100개는 틀어 놓은 듯 상쾌했고 손에 든 짐을 하나도 무겁지 않았다.

기분 좋게 회사를 나가는 영신을 향해 한 남자가 급하게 뛰어왔다.

“영신 씨. 헉, 헉…….”

“아, 신세일 대리님. 무슨 일이세요?”

세일은 영신의 앞에 서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얼마나 열심히 뛰어왔는지 늘 단정했던 머리는 엉망이었고, 귀엽게 생긴 동그란 눈은 제대로 떠지지도 않았다.

그는 회사에서 영신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었던 몇 안 되는 사람 중에 한 명이었다.

“이야기 들었어요. 그만 두신다고.”

“네, 그렇게 됐어요. 그동안 고마웠어요.”

“아니에요. 그동안 마음고생 심했을 텐데……. 도움이 못 되어 주어서 미안해요.”

세일의 다정한 말을 들으니 울컥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영신은 촉촉해진 눈가를 숨기기 위해서 더 활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할 말 다하고 그만 뒀더니 속이 정말 시원하고 기분 좋아요. 그동안 충분히 많은 도움 주셨으니까 그런 말마시고 어서 들어가세요. 요즘 대리님 부서 바쁘다고 소문났던데요?”

“하하하……. 할 말은 정말 많지만 지금 하는 건 좀 아닌 것 같네요. 언젠가 또 만나요. 근사한 모습으로.”

영신은 말없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손을 크게 흔들며, 몸을 돌려 회사를 빠져나갔다. 영신의 작아져 가는 뒷모습을 세일은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 * *



영신의 하나뿐인 남동생, 영진은 카페에 앉아 열심히 눈동자를 굴리고 있었다.

영신과는 정반대로 삐쩍 마른 영진은 예쁘장한 여자를 볼 때마다 쉴 새 없이 몸을 들썩였다.

마치 바람에 휘날리는 종이처럼 한없이 가벼운 몸놀림이었다.

“오, 대박! 완전 내 스타일인데?”

카페의 문이 열리자 영진의 눈이 자연스럽게 출입문을 향해 움직였다.

동그란 눈을 깜빡이며, 길게 쭉 뻗은 다리를 가진 새로운 여자가 들어왔다. 예쁘장한 얼굴에 몸매도 빠지지 않는다.

당연히 움직일 줄 알았던 영진의 몸이 웬일로 차분하게 자리를 지켰다.

‘……저렇게 예쁜 여자는 말 걸어도 소용없어.’

빠르게 포기한 영진이 스스로를 위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영진의 시선이 들고 있던 책으로 향하는데 또각또각 거리는 소리가 조금씩 크게 들려왔다.

‘에이, 김칫국 마시지 말자. 영진아.’

괜한 기대감 뒤에 밀려오는 창피함과 허무함은 견딜 수 없이 크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영진은 자기 자신을 달랬다. 하지만 이미 흥분한 심장은 마라톤을 달리고 난 후처럼 정신없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또각이던 발소리가 그의 옆에서 멈췄다. 영진의 심장이 더 미쳐 날뛰었다. 책으로 향한 시선은 흐릿해진 지 오래다.

“저기. 죄송한데요.”

“네, 네?”

지나치게 긴장한 영진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렸다.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떨리는 음성에 여자가 싱긋 웃었다. 가볍게 올라가는 그녀의 입꼬리가 영진의 심장을 더욱 떨리게 만든다.

“그쪽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그러는데. 연락처 좀 주시면 안 될까요?”

‘안 될 리가 있나요! 감사합니다!’

목젖까지 차오르는 감격에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영진은 대답 대신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의 휴대폰에 번호를 찍는 손가락이 목소리처럼 떨린다.

‘하나님. 부처님. 조상님. 감사합니다!’

영진은 몇 번째인지도 모를 감사를 마음속으로 쉴 새 없이 외쳤다.

다음 날, 대학교 입학식 이후로 처음 꺼낸 정장까지 차려입은 영진이 현관문을 열고 나왔다. 그대로 엘리베이터로 향하려던 그는 닫고 나온 현관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우수에 찬 눈빛으로 현관문에 가만히 손을 댔다.



“백수나 다름없는 대학생 주제에 무슨 집을 얻겠다고 이 지랄이야! 이제 내가 살고 있는 이 집 보증금 말고는 나한테 한 푼도 없어. 지금 빌려주는 이 돈 갚지 않는다면 곱게 죽지는 못할 거다. 진짜 각오해!”



사자처럼 울부짖던 영신의 호통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들리는 것 같다. 살고 있던 집에서 나와 이 집을 얻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고통과 아픔의 시간을 견뎌야 했던가.

그러나 온갖 구박과 비난을 이겨 내고 결국 누나에게서 돈을 빌려 이 집을 얻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오늘.

혼자 사는 남자의 즐거움과 보람을 느끼기 위한 위대한 첫걸음을 시작하는 날이었다.

‘마이 하우스. 조금만 기다려. 오늘 데이트 성공적으로 마쳐서 곧 여자 친구로 만들어서 데리고 올게.’

그렇게 영진은 전쟁터에 나가는 병사처럼 비장한 표정으로 집을 나섰다.



하얀 천장과 하얀 벽지. 온통 하얀색으로 덮인 넓은 방에 이십 여명 정도 되어 보이는 사람들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데이트 장소와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이는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대부분 비슷한 표정과 자세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영진도 그중에 하나였다.

한 시간이 넘는 긴 기다림 끝에 만나게 된 그녀는 삼십분도 되지 않은 짧은 카페 데이트를 한 뒤 다짜고짜 이곳으로 영진을 데려왔다.

‘여긴 내가 있을 곳이 아닌 것 같아.’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는데 옆에 있던 그녀가 영진의 손을 턱 잡았다.

“분명 도움이 되실 거예요.”

차마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속삭이는 그녀의 손을 뿌리칠 수는 없었다. 영진은 어색하게 웃으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아직도 상황이 파악되지 않아 고개를 열심히 움직이는데, 앞에 위치한 스크린이 켜지면서 정장을 말쑥하게 차려입은 남자가 등장했다.

남자 자리에 앉은 사람들을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왠지 영진의 옆에 있는 그녀의 미소와 겹쳐 보인다.

“행운의 기회를 잡게 되신 여러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이 말을 시작으로 남자의 혀가 화려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투자한 돈의 본전을 찾는데 걸리는 시간, 한 달! 이것이 팩트입니다. 그 다음 달부터 통장에 입금되기 시작하는 액수! 여러분이 갖게 될 순이익입니다. 믿기 힘들겠지만 이것이 여러분에게 곧 찾아올 현실입니다. 한 푼 두 푼 모아서는 절대 부자가 될 수 없습니다. 돈은 이렇게 버는 겁니다. 부자는 바로 이렇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



남자의 마지막 외침이 아직도 머릿속에 울리는 것 같았다. 영진이 머리를 손으로 짚었다.

“갑자기 이런 곳에 모셔 와서 당황스러우시죠?”

귓가에 들리는 상큼한 목소리. 그녀의 목소리다. 잠시 나가 있던 정신이 다시 들어오는 것 같았다. 영진이 힘없이 웃으며 맞은편에 앉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사방이 하얀 이상한 방에서 빠져나와 카페 테이블에 앉은 영진의 옆에는 그와 비슷한 또래의 남자가 영진과 비슷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리고 저와 둘이 만나는 줄 아셨는데, 옆에 처음 보시는 남자분이 앉아 있어서 더 당황스러우시고요.”

영진과 남자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죄송해요. 갑자기 급한 일이 생기셨다고 하셔서 이렇게 동시에 약속을 잡을 수밖에 없었어요.”

그녀가 콧소리를 내며 입을 삐죽거린다. 영진과 남자가 도끼눈을 뜨며 서로를 노려보았다.

‘약속도 없어 보이는 놈이 급한 일은 무슨. 저 새끼 때문에 단둘이 못 만나게 된 거야?’

서로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두 사람이었다.

그녀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뻗어 영진과 남자의 손을 하나씩 잡았다.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남자들의 표정은 금세 풀어졌다. 모자라 보일 정도로 해맑게 웃고 있는 두 남자를 번갈아 바라보던 그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까 설명은 다 들으셨죠? 몇 대나 사실지 결정은 하셨나요?”

그녀가 두 남자에게 계약서 같이 생긴 종이를 한 장씩 내밀었다.

한 대에 200만원이라니. 어떤 기능을 갖추고 있는지는 몰라도 어마어마한 가격이었다. 통장에 찍혀 있는 잔고를 생각해 보면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두 대를 사기에도 빠듯했다.

당장의 생활을 포기한다고 해도 그 이상은 무리다.

그녀의 시선이 영진에게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