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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혁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당연히 회사를 그만두고 기회를 잡아야죠.”

“그럼 잘됐네요. 내가 소고기와 소주에 대한 수입 및 유통 라이선스를 줄게요.”

“…정말입니까?”

“단, 소고기는 1년에 네 번, 소주는 1년에 여섯 번만 가지고 들어오세요.”

“물량 제한이나 금액 제한은 없나요?”

“물량 제한은 없는데, 금액 제한은 1회에 백만 달러로 책정할게요.”

“첸나이로 가지고 들어와야 하는데, 그건 상관이 없습니까?”

“인도 중앙정부에서 라이선스를 주는 것이기 때문에 상관없어요. 그리고 라메시 세관장하고 스레얀 첸나이 경찰청장이 알아서 처리해 줄 거예요.”

예스민 장관의 제안은 다시없을 좋은 기회임이 분명했다.

민혁은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에 벅찬 가슴을 누를 수가 없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은혜는요. 오히려 우리가 더 감사하죠.”

그런데 민혁은 바로 현실적인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소고기 및 소주의 수입 유통 라이선스를 자신에게 준다고 했는데, 그러려면 인도에 정착해서 이것저것을 챙겨야 한다.

하지만 자신이 당장 인도로 몸을 옮기기에는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너무 많았다.

만약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그림의 떡이 될 가능성이 농후했다.

“장관님, 이 라이선스는 꼭 저만 받을 수 있는 건가요?”

“개인이 아니라 법인에 줄 생각이에요. 그러니 민혁 씨가 지정하는 회사에 줄 수도 있어요.”

“그렇다면 제게 생각할 시간을 주실 수 있습니까?”

그때, 사제한이 한 가지 묘책을 들고 나왔다.

“생각할 시간이 뭐가 필요합니까? 무조건 예스를 하시고, 장 사장이 수입 판매를 맡으세요.”

“맞아요. 그렇게 하면 되겠네요. 민혁 씨도 그러면 안심을 할 것 같은데요.”

예스민 장관도 사제한 총수의 의견에 적극 동의했다.

“너무 번갯불에 콩 구워 먹는 것 같아서요. 그리고 장 사장님 의견도 들어봐야 할 것 같은데요.”

성격 급한 사제한 총수가 윽박지르듯 원섭의 의견을 물었다.

“장 사장, 어떻게 할 거요? 결코 나쁜 얘기는 아닐 거요.”

사제한의 말마따나 원섭은 지금이 평생에 세 번 온다는 기회 중 한 번임을 직감했다.

다만, 자신은 민혁을 며칠 전에 처음 만났고, 고향 후배라는 것밖에는 그 어떤 특별한 인연이 없었다.

그런데도 눈앞에 있는 이들은 자신과 민혁이 특별한 관계인 양 오해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오해를 푸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민혁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가 진짜 중요한 핵심인 것이다.

막말로 얘기해서 민혁이 거부하면, 지금 진행되는 일들과 자신은 아무런 상관없는 일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

원섭이 바로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리자, 그 이유를 알아차린 듯 민혁이 원섭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을 했다.

“저는 선배만 오케이한다면, 인도랑 무역을 해볼 생각입니다.”

자신에게 기회를 주는 민혁의 마음 씀씀이에 원섭은 가슴이 북받쳐 올랐다.

겨우 며칠간의 인연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이다.

원섭은 벅차오르는 가슴을 애써 누르며 확고한 의지를 담아 말했다.

“저한테 기회를 주신다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장 사장님은 최대한 빨리 법인을 설립하시고, 소고기와 소주 수입 및 유통 라이선스 서류를 저한테 가져다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민혁과 원섭에게 전혀 예상치 못한 행운이 넝쿨째 들어오는 순간이었다.

머리 복잡한 문제가 모두 끝나자 아신이 쾌활한 목소리로 정리에 나섰다.

“엄마, 다 끝났으면 밥이나 먹으러 가요. 민혁 씨한테 맛있는 점심을 대접해야죠.”

“이 녀석아, 공무원이 뭔 돈이 있다고 그래? 돈 많은 아빠에게나 사 달라고 해.”

“허허, 아신아. 이 아빠만 믿으렴. 제가 이 호텔에서 제일 맛있고 비싼 걸로 사마.”

“네, 고맙습니다, 아빠.”

역시나 아신은 분위기를 부드럽게 이끌 줄 알았다.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외모뿐만 아니라 부드러운 사교술까지, 볼 때마다 새로운 매력이 느껴지는 아신이었다.



***



점심을 거하게 얻어먹고 게스트 하우스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원섭이 내내 궁금해하던 점을 물었다.

“민혁아, 정말 고마운 일이긴 한데, 나를 파트너로 선택한 이유가 뭐냐?”

“특별할 이유랄 게 있나요. 어차피 선배님 아니면 부탁할 사람도 없었는데요, 뭐.”

“신경섭 사장도 있잖아.”

“개인적으로 그분이 싫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저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면서까지 돈을 벌기는 싫어요.”

원섭도 신 사장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았다.

신 사장의 장점은 정말 열심히 산다는 것이고, 단점은 돈을 버는 데 있어 과정 따위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기본적인 신뢰 없이 일을 같이하게 되면, 제대로 된 파트너 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

신 사장은 사람 간의 신뢰를 배제한 채 눈앞의 이익만을 좇는 유형이라는 것을 두 사람은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맺은 모든 인간관계를 오직 거래를 위한 수단으로만 보는 것이다.

그렇기에 중요한 사업을 같이하기엔 민혁과 맞지 않는 점이 너무도 많다고 볼 수 있었다.

또한 민혁이 원섭을 파트너로 선택한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이곳 인도에 아는 사람이 없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원섭의 인물 됨됨이를 알기 때문이다.

물론 민혁이 원섭을 만난 것은 고작 5일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나 여러 차례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거나 이용하려 한 적이 전혀 없었다.

타지에서는 같은 한국인끼리 오히려 더 사기를 치는 경우가 비일비재한데, 원섭은 정말 진솔하고 신뢰가 갔다.

평소의 언행에서 자연스럽게 인성이 보였다.

주변의 평판을 들어봐도 아주 좋은 편이었다.

게스트 하우스를 운영하는 모습을 지켜보니 사업적 감각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민혁은 최근 획득한 자신의 감을 철석같이 믿었다.

자신의 감이 파트너로서 원섭이 아주 좋을 것이라고 계속 신호를 보내오고 있었으니까.

“고맙다, 민혁아. 나를 생각해 줘서.”

“글쎄요. 오늘의 선택이 복이 될지, 화가 될지는 아무도 모르죠.”

“아니. 내 나이 이제 겨우 마흔이지만, 다른 건 몰라도 하나는 확실히 안다.”

“뭐를요?”

“우리가 지금 굉장한 기회를 잡았다는 사실을.”

“하지만 선배님이 고생이 많으실 것 같아요.”

“응? 무슨 고생?”

“모든 것을 새롭게 다 구축하셔야 하잖아요.”

“하하, 남들에게 없는 전설의 명검을 두 개나 가지고 있는데, 뭐가 걱정이냐. 사실 나는 가만있어도 여기저기서 물품을 공급해 달라며 달려들 거다. 걱정할 거 하나 없어.”

“그럼 저도 한국 들어가서 최대한 빨리 법인을 하나 만들어놓을게요.”

“회사는 바로 그만두는 거야?”

“그만두기는 할 건데, 저한테 물 먹인 놈들은 한 방 먹여준 후에 그만두려고요.”

“알았다.”

민혁도 오늘 자신이 엄청난 기회를 잡았다는 것을 잘 알았다.

이 기회를 살리기 위해서는 한동안 바쁘게 움직여야 할 것이다.

인도에서의 일은 원섭에게 맡겨두더라도 한국에서 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먼저 법인을 설립하는 것은 크게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다만, 인도로 술을 수출하려면 주류 면허를 획득해야 하는데, 그게 조금 까다로울 것 같았다.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은 법인 설립과 물품 구매에 들어갈 자금인데, 정상혁, 조민수와 함께하면 그리 문제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됐다.

언제든지 기회가 되면 같이 사업을 하자고 말해왔으니까.

하지만 이러한 모든 것들은 나중 일이다.

당장은 눈앞에 닥친 소고기 컨테이너 건부터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선배님, 신 사장은 언제 만나야 할까요?”

“내가 게스트 하우스로 오라고 하면 득달같이 달려올 거다.”



원섭의 말처럼 민혁이 게스트 하우스에 도착해서 잠시 숨을 돌리는 사이에 신경섭 사장이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의 옆에는 항상 수족처럼 붙어 다니는 케네디가 있었다.

“어서 오세요, 신 사장님.”

“하하, 장 사장이 나를 다 불러주고… 어쩐 일이십니까?”

“사장님하고 차나 한 잔 마시려고 모셨습니다.”

“허허허, 내가 장 사장을 알고 지낸 지 10년 가까이 되는데, 이렇게 농담하시는 것은 오늘 처음 봤습니다.”

“하하하, 그런가요?”

“분명 이유가 있으시겠지요. 궁금해 미치겠습니다.”

“한 번 알아맞혀 보세요.”

신 사장은 원섭의 표정을 요리저리 살펴보았다.

그러면서 민혁도 슬쩍 쳐다보았는데, 그저께 된통 당한 일이 떠올라서인지 바로 고개를 돌렸다.

신 사장은 한동안 고민을 하는 듯하더니, 곧 평소의 느물느물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장 사장의 표정에 웃음이 넘쳐 나는 것을 보니 무지 좋은 일인 것 같은데, 민혁 씨랑 같이 있는 이유는 모르겠네요.”

“다른 게 아니라, 사장님께서 수입한 냉동 닭고기 때문에 잠깐 뵙자고 했어요.”

이야기를 질질 끄는 게 답답하게 느껴진 민혁이 먼저 치고 나갔다.

“왜요? 혹시 좋은 소식이 있습니까?”

역시 냄새를 맡는 데는 귀신이었다.

“잘하면 컨테이너 문제가 해결될 것도 같아요.”

“정말입니까?!”

“네. 그러니 일단 통관 서류를 준비해 놓으세요. 월요일에 첸나이 세관에 함께 들어가 보자구요.”

“통, 통관될 가능성이 있나요?”

신 사장은 무척 놀랐는지 말까지 더듬었다.

사실 소고기인 게 적발된 이상, 폐기 말고는 방법이 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깊게 파고들면 수입의 주체였던 신 사장 자신에게도 큰 타격이 올 수밖에 없었는데, 만약 통관이 허가되면 그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셈이었다.

“첸나이 세관장하고 미팅 약속을 했으니까, 그때 한 번 통관을 시도해 보려고요.”

“알았습니다. 빈틈없이 준비해 놓고 기다리겠습니다.”

신 사장은 이게 웬 떡인가 싶어 꽁지에 불붙은 새처럼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갔다.

신 사장이 케네디와 함께 게스트 하우스를 떠나자 사무실에는 민혁과 원섭만이 남았다.

토요일 오후라서 인도 직원들이 모두 퇴근하고 나자, 약간의 썰렁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나저나 내일은 뭐 할 거냐?”

“음, 운전이나 가르쳐 주세요.”

“운전? 별거 없어. 그냥 한국과 반대라고 생각하면 돼.”



다음 날.

“잘하네.”

“이 정도면 괜찮은 거예요?”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잘한다니까.”

“그럼 외곽으로 한 번 나가볼까요?”

“그러자고.”

민혁은 외곽 도로를 타고 신나게 차를 몰았다.

도로 사정은 그리 좋지 않았으나, 차가 거의 없어서 그나마 속도를 낼 수 있었다.

꽉 막힌 도로에서 벗어난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분 전환이 되었다.

쭉 뻗어 있는 도로가 마치 두 사람의 앞날을 말해주는 듯했다.

한동안 질주를 만끽한 민혁이 슬슬 돌아갈 생각에 말을 꺼냈다.

“선배, 이제 돌아갈까요?”

“음, 이왕 여기까지 왔는데, 바로 돌아가기가 좀 애매하네.”

“왜요? 이 앞으로 계속가면 어디가 나오는데요?”

“퐁디셰리라는 이름은 들어본 적이 있지?”

“아, 전에 빌루라는 사람에게 들어봤어요.”

“그럼 이참에 거기 들러 맥주나 사 오자.”

“단속에 안 걸려요?”

“트렁크에 싣고 오는 것은 괜찮아. 그리고 외국인들은 관광객으로 여겨서 잘 안 잡아.”

“어떻게 그렇게 잘 아세요?”

“나도 한 달에 한두 번은 퐁디셰리에 맥주를 사러 들르거든.”

“신경섭 사장한테 구입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신 사장한테는 주로 소주를 구입하고, 맥주는 필요할 때만 조금씩 구입하는 편이야.”

목적지가 정해지자 원섭과 민혁은 자리를 바꿨다.

이곳 지리를 잘 아는 원섭이 운전대를 잡은 것이다.

빌루에게 들은 것처럼 퐁디셰리까지 가는 동안 여러 군데의 검문소가 있었다.

일요일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무더운 날씨 탓인지 검문은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검문이 별로 없네요? 원래 이런 건가요?”

“음, 나도 오늘 같은 날은 처음이네. 혹시 사제한 경찰 총수가 길 터준 거 아니야?”

“설마요?”

“하하하, 그렇겠지?”

결국 민혁과 원섭은 트렁크와 뒷좌석에까지 맥주를 가득 싣고 첸나이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느긋하게 주말을 보낸 민혁은 해가 뜨기도 전에 눈을 번쩍 떴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게스트 하우스의 공터로 나간 민혁은 간단하게 몸을 풀어주었다.

얼마 전, 신비한 과일을 먹은 이후로 하루가 다르게 몸이 변하는 느낌이었다.

내지르는 주먹과 발차기에 절로 힘이 실렸다.

마음 같아서는 돌벽이라도 와르르 무너트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한참 동안 기분 좋게 땀을 뺀 민혁이 운동을 접고 방으로 돌아가려던 순간이었다.

게스트 하우스 입구로 자동차 한 대가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차에서 내린 이들은 얼마 전 원섭을 협박한 양아치 놈들이었다.

민혁은 마음을 가라앉히며 놈들을 뒤따라 사무실로 들어갔다.

역시나 양아치 놈들은 이번에도 원섭에게 폭언에 쏟아부으며 협박을 하고 있었다.

민혁이 들어오는 것을 봤음에도 전혀 개의치 않는 태도였다.

무엇보다 며칠 전에 자신들이 린치를 가한 후, 그대로 죽어가도록 들판에 내다 버린 사람이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하는 듯했다.

“이봐, 장 사장. 이번이 마지막 경고야! 내일 다시 왔을 때 돈을 주지 않으면 어떻게 될지 잘 생각해 보라고!”

“크크크, 뭐, 별일 있겠어? 그냥 칼침 몇 방 맞으면 되지.”

민혁은 당장에라도 양아치들을 요절내고 싶었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생각에 겨우 화를 눌러 참았다.

양아치들을 그런 민혁을 한 번 흘낏 바라보고는 그대로 지나쳐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