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락시미 회장 일행은 꽃송이 게스트 하우스를 나와 첸나이 호텔로 향했다.

이미 시간이 늦은데다 술도 한잔했기에 하루 자고 가려고 숙소를 잡은 것이었다.

“어휴~”

예스민이 어두컴컴한 차창 밖을 내다보며 커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이를 의아하게 여긴 락시미 회장이 물었다.

“여보, 뭔 일 있소? 일도 잘 풀렸는데, 갑자기 웬 한숨이오?”

예스민은 술에 취해 곤히 잠들어 있는 아신의 머릿결을 쓰다듬으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우리 아신이 마음 고생할 것이 눈에 보여서 그래요.”

“응? 그건 또 무슨 소리요?”

“이 녀석이 강민혁, 그 청년에게 푹 빠져 있잖아요.”

“뭐라고? 그게 정말이오?”

“사실 장난이 좀 섞였긴 하지만, 저도 그가 활짝 웃는 모습을 보니까 가슴이 설레더라고요. 호호호호, 나도 참 주책이지.”

“누나는 그랬어요? 나는 그 사람이 성질내니까 무섭던데. 역시 특수부대 출신이라 그런가?”

“음, 처남도 그랬나? 나도 정말 충격적이었네.”

“그런 부분은 저도 느꼈어요. 하지만 그것도 남자의 매력 중 하나 아니겠어요?”

“아까 그 청년이 고함을 쳤을 때, 정말 놀랐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런 경험은 처음이었어.”

“매형, 저도요.”

세 사람은 저마다 민혁에 대해 떠올리며 격하게 동의했다.

“내가 사람을 약간 볼 줄 아는데, 강민혁이란 그 청년은 제왕의 상을 가지고 있더라고. 인도인이 아닌 게 참 아쉬웠어.”

“어머, 당신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역시 내 남편답다니까.”

락시미 회장을 향해 싱긋, 웃어 보인 예스민이 다시 사제한을 보며 타박을 늘어놓았다.

“그런데 그런 사람을 사기꾼 취급을 하다니. 쯧쯧, 너는 도대체가…….”

잊을 만하면 뒤끝이 작렬하는 예스민의 추궁에 사제한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사제한이 바닥을 뚫고 들어갈 즈음, 락시미 회장이 뜬금없이 한마디를 흘려냈다.

“그래도 강민혁 정도라면, 시집보내도 괜찮을 것 같은데…….”

“그 정도면 괜찮긴 하죠. 그래도 걱정이에요. 우리 아신이 수많은 여인들 중에 하나가 될 것 같아서.”

두 사람이 좀처럼 미련을 떨쳐 버리지 못하는 듯하자, 사제한이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매형, 누나, 정 그러면 강민혁을 우리 쪽으로 확실하게 끌어당깁시다.”

“응? 그게 무슨 소리야?”

“누나, 강민혁을 인도와 뗄 수 없는 관계를 만들면 되잖아요. 그러면서 그 사람의 그릇을 관찰할 수도 있을 테고요.”

락시미 회장과 예스민 장관은 사제한의 말에 깜짝 놀랐다.

“너… 정말 사제한이 맞니? 내 동생이 그런 생각을 해낼 수가 없을 텐데…….”

“에이 씨, 누나! 대체 사람을 뭘로 보고. 그냥 말하지 말까요?”

“아니다, 이 누나가 잘못했다. 자, 어서 말해봐.”

“강민혁에게 소고기와 소주 유통 라이선스를 주면 되잖아요?”

“음, 그거 정말 좋은 생각이긴 한데… 그가 싫다고 하면 어쩌지?”

“아니요.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무슨 근거로 그렇게 자신하는 건데?”

“아까 매형하고 대화를 나눌 때 지켜봤는데, 무역 관련 얘기를 할 때 눈이 반짝반짝 빛났어요. 특히 소주를 몇 번이나 언급하는 걸 보니, 소주에 미련이 많은 듯하더라고요.”

“아, 처남도 그렇게 봤나?”

“네. 사실 주류 수입하고 소고기 유통을 금지하고 있는 거지, 불법은 아니잖아요? 이 타밀나두 주 말고 다른 주는 수입 허가를 내주고 있는지도 모르잖아요.”

“알았다. 내일 만나면 자세히 얘기를 해보자.”

“누나, 내가 좋은 아이디어 줬으니까, 오늘 실수한 건 이제 퉁치면 안 돼?”

“이 녀석아, 하나밖에 없는 동생인데, 아무렴 내가 너를 미워하겠니?”

“흐흐, 역시 내 누나라니까.”



***



다음 날.

민혁은 모처럼 상쾌한 아침을 맞이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민혁은 게스트 하우스 뒤뜰로 나가 간단하게 몸을 풀어보았다.

어제보다도 더 몸이 유연해진 것 같았다.

이번에도 민혁이 하는 양을 지켜보던 원섭이 불쑥 한마디를 꺼냈다.

“역시 너, 이종격투기 선수로 한 번 나가봐라.”

“그래요? 진짜 한 번 나가볼까요?”

“응. 네 체급에서는 적수가 없어 보인다.”

“그럼 당장 수속을 밟아주세요, 선배. 선배는 매니저 시켜줄게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밥이나 먹어라. 일찍 시내에 나가봐야 한다며?”

“아차, 그렇지.”



민혁이 시내로 나갈 준비를 하고 사무실에서 콜택시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쾅!

사무실 문을 거칠게 열고 들어오는 양아치 몇이 민혁의 눈에 띄었다.

이들은 민혁은 아랑곳하지도 않고, 원섭과 다가가 무언가를 통보하듯 말을 늘어놓았다.

쾅!

그러고는 다시 거칠게 발로 문을 차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불과 2~3분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차마 끼어들 틈도 없이 멍하니 지켜보던 민혁의 머릿속에 문득 양아치 놈들의 인상착의가 떠올랐다.

처음 볼 때부터 왠지 낯이 익다고 생각했는데, 생각해 보니 자신에게 린치를 가한 놈들 중 하나였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했던가.

민혁은 갑자기 가슴이 흥분되고 온몸에 아드레날린이 솟구쳐 올랐다.

‘저놈들을 이대로 보낼 수는 없지. 이 자식들, 내가 인도를 떠나기 전에 어떻게든 모조리 손을 보고 만다.’

으득으득, 이를 갈며 복수를 다짐하는 민혁이었다.

우선 지금은 저놈들 뒤를 밟아 아지트를 알아내는 게 먼저였다.

“선배님, 운전 좀 해주세요.”

원섭은 민혁이 허둥대며 부탁을 하자, 순간 뭔가가 있다고 생각했다.

“왜? 무슨 일인데?”

“자세한 건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일단 방금 나간 놈들 좀 쫓아가 줘요.”

“무슨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하자.”

원섭은 사무실을 나가면서 인도 직원에게 콜택시를 취소시켰다.

그런 후, 민혁을 태우고 양아치 놈들의 차를 조심스럽게 뒤따라갔다.

“선배님, 혹시 저놈들 본거지가 어디인지 아세요?”

“나도 저놈들을 본 지 몇 년이 넘었는데도 본거지에는 가본 적이 없어.”

“저놈들이 어디로 가는 것 같아요?”

“음, 아마도 퀸즈 파크(Queen’s Park) 쪽으로 가는 것 같은데?”

한참의 미행 끝에 원섭의 말대로 차에서 내린 양아치 놈들은 퀸즈 파크의 초입에 위치한 3층 건물로 올라갔다.

“선배님, 저 건물에도 놈들이 삥 뜯을 만한 가게가 있나요?”

“아니. 아무래도 저기가 저놈들 소굴인 것 같다.”

“그럼 조금만 더 기다려 보죠.”

“나야 상관없지만, 이러다 약속 시간에 늦으면 어쩌려고? 상대는 이 나라의 장관인데.”

“에이, 인도 특유의 핑계 수단이 있잖아요.”

“헐, 인도에 온 지 일주일도 안 됐는데, 벌써 그런 걸 알아냈단 말이야?”

“특별할 게 뭐 있나요. 한국에서도 잘 써먹는 수법인데요, 뭐.”

잠시 후, 한 무리의 양아치들이 그 건물로 올라가는 모습이 민혁의 눈에 띄었다.

그중 몇 놈은 민혁의 기억에도 남아 있었다.

역시 이곳이 양아치 놈들의 본거지가 맞는 것 같았다.

“선배님, 이제 가시죠.”

“어딜?”

“첸나이 호텔이요.”

“응? 내가 거길 왜 가야 하는데?”

“그럼 언제 또 택시를 타고 가요? 제가 렌트 비용 넉넉히 드릴게요.”

“그게 아니라, 이 옷을 입고 가도 되겠냐는 말이지.”

“뭐, 어때요. 발가벗은 것도 아니잖아요.”

얼떨결에 원섭이 미팅에 끼게 되는 순간이었다.



***



한편, 첸나이 호텔에서는 한창 대책 회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전날 게스트 하우스를 찾은 아신과 락시미 회장, 예스민 장관, 사제한 경찰 총수에 더해 라메시(Ramesh) 첸나이 세관장까지 함께하고 있었다.

“라메시 세관장, 자세한 현황은 파악되었습니까?”

“네, 장관님.”

“그럼 어떻게 된 일인지 자세히 설명해 보세요.”

“지난 5월 말에 한국의 부산항에서 출발한 40피트짜리 냉동 컨테이너가 6월 15일에 첸나이 항구에 도착했습니다. 3일 후인 6월 18일, 정상적으로 통관이 진행되던 중에 찜찜함을 느낀 신입 세관원이 통관을 중지시켰다고 합니다. 그런 후에 컨테이너를 개봉해서 확인한 결과, 앞쪽만 닭고기였고, 나머지는 전부 소고기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압류했나요?”

“네, 그렇습니다.”

“향후 처리 계획은 어떻게 되나요?”

“원래는 공매 처리를 하는데, 소고기는 금수 품목이라서 바로 폐기 처분에 들어갑니다.”

“그러면 언제쯤 폐기할 예정인데요?”

“행정절차대로라면, 올해 안에는 폐기 처분이 가능할 겁니다.”

예스민 장관은 차를 마시며 잠깐 생각에 빠졌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하나를 받으면, 하나를 줘야 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만약에 자신이 부탁을 하면, 세관장은 옳다구나 하며 받아들일 게 불을 보듯 빤했다.

인도의 실권자라 할 수 있는 자신에게 빚을 만드는 셈이니, 라메시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이윽고 생각을 정리한 예스민 장관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라메시 세관장.”

“네, 장관님.”

“세관장이 앞으로 공직 생활을 하다가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딱 한 번 나한테 도움을 요청할 기회를 드리겠어요. 살인과 같은 범죄만 아니라면 어떻게든 도움을 줄게요.”

“정말입니까? 감사합니다!”

라메시 세관장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구십 도로 허리를 숙여 보였다.

예스민 장관의 발언은 그에게 있어 또 하나의 생명이나 다름없는 약속인 것이다.

그 모습에 예스민 장관은 일이 어렵지 않게 풀리겠다는 생각을 하며 말을 이었다.

“일단 앉으시고, 대신 오늘은 내 부탁을 들어주세요.”

예스민 장관이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라메시 세관장이 바로 가려운 곳을 긁어주었다.

“닭고기로 통관을 시키겠습니다!”

“허허, 세관장이 참 똑똑한 친구구먼.”

“감사합니다, 총수님!”

사제한 경찰총수가 라메시 첸나이 세관장을 은근히 치켜세웠다.

윗사람이 어려운 말을 꺼내기 전에 속내를 파악하는 것은 그야말로 대단한 재능이라 할 수 있었다.

“이대로라면 관세청장까지는 충분히 올라갈 수 있겠어.”

예스민은 동생인 사제한에게 눈을 흘겼다.

꼭 이럴 때 쓸데없이 끼어드는 동생의 말문을 막을 필요가 있었다.

“사제한, 이 누나가 얘기하고 있는 거 안 보이니?”

“…미안해요, 누나.”

“라메시 관세청장… 아니, 세관장. 마저 얘기를 끝냅시다.”

“네, 장관님.”

“통관 서류는 언제쯤 접수하라고 할까요?”

“월요일까지 접수하면, 화요일에 바로 통관 처리하겠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말고, 세관장이 챙겨봐 주세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하나하나 다 챙겨보겠습니다!”

“좋은 자세예요. 그렇게만 한다면 제 동생의 말이 결코 허언은 되지 않을 겁니다.”



***



민혁과 원섭은 거의 열 시에 임박해서 첸나이 호텔에 도착했다.

서둘러 차를 주차하고 스위트룸까지 부랴부랴 달려갔지만, 역시 조금은 늦어버리고 말았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민혁은 큰 소리로 사과부터 했다.

“인도의 교통 상황이 최악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답니다. 이 정도라면 아주 양호한 편이에요.”

다행히도 예스민 장관은 그리 기분이 상한 것 같지 않았다.

민혁이 안도의 숨을 내쉬자, 예스민 장관이 다시 라메시 세관장을 소개시켜 주었다.

서로 인사를 주고받은 후, 소파에 앉아 간단한 차를 즐겼다.

예스민 장관은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볼 겸 어제 이야기로 말문을 열었다.

“장 사장님, 어제 먹은 그… 삼겹살이란 게 무척이나 맛있더군요. 이곳에 그런 맛있는 요리가 있는 줄은 정말 몰랐어요. 다음에 또 찾아가도 되겠죠?”

“그럼요. 장관님이라면 언제든지 환영하겠습니다.”

“소주도 주시는 거죠?”

“네, 당연합니다. 장관님 것은 항상 준비해 놓고 있겠습니다.”

“호호, 말만이라도 고마워요.”

어느 정도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지자, 민혁이 준비해 둔 말을 꺼냈다.

“자, 이제 어느 정도 분위기도 잡힌 것 같으니, 본론으로 들어가시죠.”

예스민 장관도 언제 말을 꺼내야 하나 시기를 보던 차에 민혁이 먼저 말을 꺼내주자 기꺼운 듯 화제를 돌렸다.

아울러 이렇게 자신의 마음을 헤아리는 민혁의 모습에 속으로 1점을 더 추가하는 예스민 장관이었다.

“좋습니다. 안 그래도 여기 있는 라메시 세관장하고 얘기를 나눴어요. 다음 주 월요일 중으로 통관 서류를 라메시 세관장한테 직접 가져다주시면, 다음 날 바로 물건을 받을 수 있을 거예요.”

“정말 감사합니다, 장관님. 그러면… 통관 서류를 수정해야 하나요?”

“아니에요. 그냥 닭고기로 통관해 주기로 했어요.”

“정말 잘됐네요. 통관 서류를 바꾸라고 했으면 시간이 조금 걸릴 뻔했거든요.”

“닭고기 통관 얘기는 이것으로 종결을 짓도록 하죠.”

“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드디어 닭고기 건이 해결되었다.

민혁은 정말 만세라도 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마치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마음이 아주 홀가분해졌다.

이보다 더 좋게 마무리될 수는 없었으므로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이 들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민혁은 이미 할 말을 다 끝낸 셈이라 약간은 뻘쭘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더 이상 용무가 남아 있지 않아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 모습에 아신이 물었다.

“민혁 씨, 어디 가시게요?”

“네. 이제 숙소로 돌아가려고요. 무슨 용건이 남아 있나요?”

“푸훗, 이제부터 시작인데 어디를 가신다는 거예요?”

“네?”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어정쩡하게 서 있는 민혁에게 앉으라는 손짓을 하며 예스민 장관이 말을 꺼냈다.

“아신이 말이 맞아요. 이제부터 시작이에요.”

“알겠습니다. 말씀해 보십시오, 장관님.”

예스민 장관은 찻잔을 들어 가볍게 목을 축이고는 다시 이어 나갔다.

“민혁 씨는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를 언제까지 다닐 생각이에요?”

“음, 그 부분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 없습니다. 이제 겨우 입사한 지 3년 차이거든요.”

“그럼 만약에 민혁 씨에게 기가 막힌 기회가 찾아온다면 어떻게 하실 건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