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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양아치 놈들은 이번에도 역시 거칠게 문을 걷어차고 나갔다.

순간, 민혁은 꼭지가 확 돌아버렸다.

계획이고 뭐고 간에 당장 쫓아 나가서 작살을 내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내, 저놈의 새끼들을!”

“내버려 둬라. 어디,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그래도 월요일 아침부터 재수 없잖아요.”

“대신 저 새끼들은 월요일부터 기분이 좋을 거다. 나한테 와서 스트레스 마음껏 해소하고 갔잖아.”

“선배님도 참, 사람이 너무 좋으세요.”

“어떻게 할래? 신 사장이랑 세관에 같이 갈래?”

“왜요? 바쁜 일 있어요?”

“아니, 인도에서 바쁠 일이 뭐 있겠냐. 어차피 손님들도 몇 분 안 계신데.”

“그럼 저랑 같이 가요. 앞으로 세관장하고 친하게 지내야 하잖아요.”

“그럴까?”

원섭의 얼굴이 확 피어나는 것이, 같이 안 가자고 했으면 섭섭해할 것이 분명했다.

“나는 이상하게 신 사장이 별로예요.”

“너도 그렇게 생각하냐? 사람이 나쁜 건 아닌데, 좀 꺼려지는 부분이 있긴 하지. 그렇게 친하게 지낼 만한 이는 아니야.”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자, 그럼 얼른 아침부터 먹고 슬슬 움직여 보자고.”



아침 식사는 스트레스도 풀 겸 원섭이 실력을 발휘해 얼큰한 김치찌개를 끓여주었다.

돼지고기와 두부가 듬뿍 들어간 김치찌개는 보기만 해도 침이 흘러나올 정도였다.

민혁이 국물을 한술 떠 입에 넣자, 매콤하고 얼큰한 맛이 혀를 타고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캬~ 역시 한국인은 이 맛이죠. 선배는 딴 거 안 하고 음식점을 차려도 떼돈을 벌 거예요.”

“하하, 내가 한 요리 실력 하긴 하지.”

두 사람이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며 식사를 하고 있을 때, 그제야 일어나셨는지 원섭 선배의 어머니가 식당으로 들어왔다.

민혁으로서는 지난 화요일 이후로 오늘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동안 어디 다녀오셨어요? 통 안 보이시던데요.”

“으응~ 큰손자가 있는 푸네(Pune)에 다녀왔어.”

인도의 지리를 잘 모르는 민혁을 위해 원섭이 바로 설명을 덧붙였다.

외국인들을 위한 교육 기관이 많은 도시라고 했다.

첸나이에서 차로 최소 열 시간 가까이 걸리지만, 오가는 비행기가 있어서 그리 멀게는 느껴지지 않는다고 했다.

“큰애가 몇 살인데요?”

“이제 열세 살이야.”

“겨우 그 나이밖에 안 됐는데, 거기서 혼자 있어요?”

“기숙사에 있어서 괜찮아.”

“어머님, 시장하실 텐데, 여기 앉아서 같이 식사하세요.”

“그럴까? 음, 오늘은 김치찌개네?”

“네, 어머니. 제가 민혁이를 위해서 실력 발휘 좀 했어요.”

“그래. 내 아들이 요리 하나는 정말 기막히게 잘하지.”

얼른 주방에 들어가 밥 한 공기를 퍼 온 원섭이 어머니의 자리에 수저와 함께 놓아드렸다.

식탁 분위기는 마치 한 가족인 것처럼 편안해서 민혁도 스스럼없이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런데 민혁이는 언제 한국에 들어가?”

“아무래도 다음 주 월요일부터는 회사로 출근해 봐야 할 것 같아요.”

“좋겠다. 나는 죽기 전에 가볼 수나 있을지 모르겠네.”

민혁은 원섭의 어머니가 한국을 몹시 그리워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무리 자식과 손자가 있다지만,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이 타국 땅에서 산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여 자신이 나서면 안 될 순간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무의식적으로 말이 튀어나왔다.

“어머님, 한국에 돌아가서 사실 날이 곧 올 거예요.”

“어머, 정말?!”

아주머니의 얼굴에 급 화색이 돌았다.

민혁은 너무나도 좋아하시는 아주머니의 모습에 약간 당황했지만, 이미 내친걸음이라는 생각에 말을 이어 나갔다.

“네. 지금 당장은 어렵겠지만, 늦어도 1년 안에 한국에서 사실 수 있도록 해드릴게요.”

“그럼… 올해 안에 돌아갈 수 있을까?”

“음, 올해 꼭 가셔야 할 이유가 있나요?”

“영감 첫 제사는 한국에서 지내주고 싶어서 그래.”

민혁은 아주머니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되고도 남았다.

이번에 소고기와 소주를 수출해서 돈을 벌면, 원섭 선배의 고향에 집을 한 채 마련해 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어머님, 그럼 하남에 집을 마련해야겠네요?”

“내가 예전부터 살던 곳이 좋긴 하지.”

“그럼 일단은 원섭 선배하고 상의 좀 해볼게요.”

원섭은 두 사람이 이야기를 주고받는 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고 묵묵히 밥만 먹을 뿐이었다.

그러다 문득 파르르 떨리는 손이 민혁의 눈에 보였다.

아마 무언가 말 못할 사연이 있는 것 같았다.

나중에 원섭과 이야기를 나눠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민혁은 다시 아주머니와 대화를 이어 나갔다.

“어머님, 전에 사시던 곳이 인제 하남 어딘데요?”

“구만동이라고 들어봤니?”

“네. 고등학교 다닐 때 친구가 거기 살았어요.”

“누군데?”

“박호식이라는 친구예요.”

“아, 박씨네 아들이구먼. 지금 포항에서 살고 있다고 하던데.”

“맞아요. 잘 아시네요?”

순간, 아주머니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아무래도 고향의 기억을 떠올리시는 것 같았다.



***



첸나이 세관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원섭이 뜬금없이 감사를 표했다.

“고맙다, 민혁아.”

“뭐가요?”

“우리 어머니가 첸나이에 오시고 난 이후로 오늘이 제일 기분이 좋으신 날 같았어.”

“아니에요. 사실 제가 괜히 주제넘게 끼어든 것은 아닌가 죄송스런 마음이었는데요.”

“어쨌든 네 덕분에 당분간은 어머니 걱정을 덜었어.”

“어머님 상세가 별로 안 좋으신가 봐요?”

“응.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갑자기 우울증이 발병했어.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곳으로 모셔온 것이고.”

“그런 사연이 있으셨군요.”

“그런데 여기 오셔서는 향수병까지 더해지는 바람에 더 힘들어하셨거든. 그렇다고 내가 다시 하남으로 모시고 갈 수도 없는 형편이고 말이야. 사실 그 양아치 놈들이 난리를 부리면 충격을 받으실 것 같아 걱정도 되었고.”

민혁은 원섭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민혁도 우울증에 대해 마음의 감기 정도로만 알고 있을 뿐, 심할 경우에는 극단적인 선택도 할 수 있다고는 생각지 못했다.

가끔 신문 기사에 나오는 사례는 정말 극히 드문 경우라고만 여겨 흘려 넘기곤 했다.

하지만 아주머니가 자신을 과하게 반가워하는 모습에 조금은 걱정이 들었다.

그만큼 평소 사람을 그리워했다는 반증이었다.

원섭도 그런 부분을 걱정해서 식사 자리에서 따로 말을 못한 것 같았다.

“고향에 돌아가면 금방 회복되실 거예요.”

“그나저나, 우리 어머니께 집 지어줄 돈은 있어?”

“아니요.”

“그럼 어떻게 하려고?”

“뭐, 소주를 한 열 컨테이너 정도 수출하면 되지 않을까요?”

“진짜야?! 농담하는 거지?”

원섭은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은 민혁의 말에 엄청 놀랐다.

스케일이 자신이 생각하던 것과는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였기 때문이다.

“에이, 설마 제가 이런 걸로 농담할 사람으로 보여요?”

“그 양이 얼마나 되는지 알고는 있지?”

“그럼요. 40피트 컨테이너에 소주 2,000박스씩 실으면 2만 박스네요. 병으로는 40만 병이고요.”

“그걸 두 달 만에 다 팔란 말이야?”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죽어라고 파셔야죠.”

“히야~ 이거, 첸나이 앞바다에 소주병이 둥둥 떠다니겠군.”

“하여간 제가 한국으로 들어가자마자 바로 작업해서 보낼 테니까, 미리 라이선스를 받아놓으세요.”

“이야, 이거 벌써부터 죽어나겠는걸. 아무래도 내가 보스를 잘못 만난 것 같다.”

“설마 소주만 판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그럼 소고기도?”

원섭은 이제 입을 다물 수 없을 지경이었다.

민혁의 말이 농담이 아님을 확실하게 인식했기 때문이다.

판이 생각과 달리 완전 커질 것 같았다.

“당연하지 않겠어요? 당길 때 확 당겨야지요.”

“수출할 돈은 있고? 난 수입할 돈 없다.”

“외상으로 보내 드릴게요.”

“이야~ 너무 파격적인 조건 아니야? 내가 먹고 튀면 어떻게 하려고?”

“하하, 선배님이 도망가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내가 못 도망갈 이유가 뭔데?”

씨익.

민혁이 원섭을 보며 음흉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사제한 총수가 가만히 있을까요?”

“흠, 하긴 그러네. 네 말 한마디면 나는 바로 그날로 잡혀갈 테니까.”

“이제 아셨어요? 게다가 어머님도 한국에 오시면…….”

“알았다, 알았어. 절대 딴마음 품지 않을게. 그나저나 소주 양이 너무 많은 거 아니야?”

“그게 뭐가 많아요. 당장 보내는 것도 아니고, 적어도 3~4개월은 걸릴 텐데요.”

“그렇지. 그 정도 시간이 걸릴 거야.”

“그 기간 동안에 영업 뛰세요.”

“넵, 보스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만약에 다 못 팔겠으면, 대신 팔아달라고 탄탄 그룹에 던져 버리세요.”

“흐흐흐흐, 그러면 되겠네. 소고기는 어려워도 소주는 얼마든지 가능하겠네.”

“제 생각인데요, 아마 소주 열 컨테이너로도 부족할 수 있어요.”

“에이~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자그마치 40만 병이다. 그게 부족하단 말이야?”

“두고 보세요. 제 말이 맞을 거예요.”

둘은 이동하는 내내 사업 얘기로 웃음꽃을 피웠다.

인도에서 이렇게 신나는 일이 생길 줄은 둘 다 전혀 예상도 못한 일이었다.



***



민혁과 원섭이 첸나이 세관 입구에 도착해 보니, 신 사장이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도 급한 마음에 일찌감치 나와 있던 것 같았다.

민혁은 반갑게 인사를 주고받고는 바로 건물 5층의 세관장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라메시 세관장은 민혁을 정중하게 맞이했다.

전날 이미 예스민 장관과의 돈독한 사이를 확인했기에 민혁을 대하는 데 있어 한 점의 소홀함도 없는 태도였다.

민혁도 정중하게 인사를 건넨 다음, 신경섭 사장을 소개시켜 주었다.

“밀수를 시도한 사람이 당신이었군요.”

표정을 확 구긴 채 쏘아붙이는 말에 신 사장은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그에 할 수 없이 민혁이 나서서 중재를 했다.

“세관장님, 이제 그 이야기는 더 이상 하지 않기로 하셨잖습니까. 양해 부탁드릴게요.”

“어이쿠, 미안합니다. 별 뜻은 없었다는 것을 이해해 주십시오.”

“신 사장님도 어찌 됐든 인도 법을 어긴 것은 사실이니까, 그 부분에 대해서는 세관장님께 정중히 사과를 드리세요.”

“죄송합니다, 세관장님. 제가 너무 욕심을 부리느라 이번에 실수를 하고 말았습니다. 다음부터는 절대 그런 일이 없도록 주의하겠습니다.”

역시나 닳고 닳은 신 사장답게 입에 발린 사과가 술술 흘러나왔다.

그 능력에는 민혁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라메시 세관장 역시 못 당하겠다는 듯 곧 부하 직원을 불러 신 사장이 지참한 서류를 넘겨주었다.

“그럼 수입자는 관세와 각종 부대비용을 오늘까지 세관에 납부하세요. 그러면 내일 중으로 컨테이너를 출고 받을 수 있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세관장님!”

신 사장이 과장되게 허리를 구십 도로 숙이며 인사를 했다.

하지만 이미 단단히 찍힌 듯, 라메시 세관장의 입에서는 좋은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나한테 감사할 것 없습니다. 인사를 하시려면 강민혁 씨에게 하시고, 당신은 우리 직원을 따라 나가서 일 보세요.”

라메시 세관장은 단호하게 축객령을 내렸다.

그 냉랭한 태도에 신 사장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방을 떠나갔다.

세관장실에 민혁과 원섭만이 남자 라메시 세관장은 백팔십도 태도를 바꿔 부드러운 목소리로 감사를 전했다.

난데없는 감사에 의아함을 느낀 민혁이 그 이유를 물었다.

“인도에서 최고 부자는 탄탄 그룹의 락시미 회장님이십니다. 그리고 최고 명문가는 예스민 장관님의 가문이지요. 그러니 저는 민혁 씨 덕분에 아주 튼튼한 동아줄을 잡은 거나 다름없습니다.”

“음, 인도도 학연이나 지연, 혈연이 존재하겠죠?”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겠지만, 우리 인도에서는 혈연과 지연을 결코 무시 못 합니다. 심지어는 아직도 카스트 제도의 잔재가 여러 부분에 남아 있을 정도이지요. 특히 크사트리야 계급은 그들만의 서클을 형성해 놓고 있기 때문에, 다른 이가 함께 어울리는 것이 매우 어렵습니다.”

“그럼… 아신 아가씨네 가문은 크샤트리아 계급인가요?”

“거기에 브라만 계급이 살짝 들어가 있습니다. 어찌 됐든 저는 민혁 씨 덕에 출세의 발판을 마련한 셈입니다.”

민혁도 고등학교 세계사 시간에 인도의 카스트 제도에 대해 배운 적이 있었다.

카스트 제도는 1947년에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고 알고 있었는데, 아직까지 그 잔재가 남아 있다는 소리를 듣고는 관습이란 참 무서운 것이라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자신 역시도 아신의 생명을 구해줌으로써 인도 최고 명문 가문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어찌 보면 천운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축하를 드려야겠네요. 세관장님, 대신 앞으로 저희 장 사장님을 잘 부탁드립니다.”

“이를 말씀입니까. 제가 이곳에 있는 동안, 아니, 다른 곳으로 가더라도 제 후임자에게 철저히 교육시켜 놓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신 사장은 오후 다섯 시가 넘어서야 꽃송이 게스트 하우스로 찾아왔다.

“어서 오십시오. 어떻게 됐습니까?”

“덕분에 완벽하게 끝났습니다. 관세까지 납부 완료했습니다.”

“이제 남은 절차가 뭐죠?”

“일단 내일 물건을 찾게 되면, 모레쯤 물품 대금하고 부대비용을 전부 정산하려고 합니다.”

“그럼 데머리지 비용하고 스토리지 비용도 모두 해결되는 겁니까?”

“스토리지 비용은 오늘 정산을 했어요. 데머리지 비용은 컨테이너를 반환할 때 선사에 정산할 예정입니다.”

“좋습니다. 저는 금요일쯤에 한국으로 들어갈 예정이니, 그때까지 정산 서류를 한 부씩 복사해서 제게 전달해 주세요.”

“물론입니다.”

“그리고 한국에는 절대 비밀인 거 알고 계시죠?”

“그럼요. 저는 지금 베트남 출장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