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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 같은 잠을 자던 민혁은 어둠이 내려앉을 즈음에 눈을 떴다.

식당으로 내려가 보니 마침 저녁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저녁 메뉴는 뜨거운 김이 피어오르는 커리였다.

오리지널 인도식 커리는 한국에서 먹던 것과는 완전 달랐다.

무엇보다 커리에 찍어 먹는 난이 참 기가 막혔다.

만족스레 식사를 마친 민혁은 자리를 옮겨 원섭과 시원한 맥주를 마셨다.

“선배님, 이곳 첸나이에서는 원래 술을 마시면 안 된다면서요?”

“엥? 누가 그래? 그러면 한국 사람들이 여기서 못 살지. 술을 아예 못 마시게 하는 중동에서도 마시는 사람들인데.”

“그래요? 케네디한테 금주법이 시행되고 있다고 들었는데요?”

“아, 그거야 음식점 같은 데서 팔지 못한다는 말이지, 집에서까지 마시지 말란 뜻은 아니야.”

“…여기는 집이 아니잖아요?”

“뭐, 걸리면 뒷돈 조금 찔러주면 돼.”

원섭은 전혀 걱정할 일이 아니라는 듯 시크하게 대답했다.

그 모습에 민혁은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럼 선배님은 술을 어디서 공급받는데요?”

“소주는 신 사장한테 공급받고, 맥주는 아는 밀매 업자들한테 공급받고 있어.”

순간, 민혁은 오전에 만난 빌루가 떠올랐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물었다.

“밀매업자들이 많나 봐요?”

“그렇지. 오늘 널 데려다준 사람도 분명 밀매업자일걸?”

“어? 어떻게 아셨어요?”

“트럭들을 보면 대충 아니까.”

“트럭에 비밀 공간이 있는 건가요?”

“당연하지.”

“단속하는 경찰들은 모르고요?”

“그걸 왜 몰라? 당연히 다 알고 있지.”

“그럼 알고도 안 잡는다는 거예요?”

“당연하지. 경찰들 주 수입원이 뭘 것 같아?”

“혹시 뒷돈?”

원섭이 빙긋 웃음을 지어 보였다.

“우리 게스트 하우스도 뒤를 봐주는 경찰들이 한둘이 아니야.”

“그래서 이렇게 마음 놓고 술을 마시는 거예요?”

원섭은 대답 대신 탁자 위에 놓인 캔 맥주를 들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 모습에 민혁도 덩달아 맥주를 마셨는데, 한국에서 파는 것보다는 조금 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찰 일인당 한 달에 5천 루피만 쥐어 주면 괜찮아.”

“정말 그 정도만 줘도 돼요?”

“그 경찰들이 우리 게스트 하우스만 뒤를 봐주는 건 아닐 테니, 결코 적은 돈은 아니지.”

“…하긴 그렇겠네요.”

민혁은 원섭과 함께 맥주를 마시며 많은 대화를 나눴다.

이상하게도 원섭과 이야기를 할수록 친형같이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동향 선배라서 그런지, 남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선배님은 여기에 사신 지 몇 년 됐어요?”

“음~ 올해로 11년째가 돼가고 있어. H 자동차 공장이 가동되자마자 들어왔으니까.”

“그때부터 게스트 하우스를 하신 거예요?”

“그건 아니고…….”

잠시 망설이던 원섭은 곧 덤덤하게 자기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내가 대학을 졸업할 때, 한창 IMF 외환 위기가 닥쳤더랬지. 그래서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졸업생들은 취업이 매우 어려웠어.”

“아, 저도 그때는 고등학생 때라 잘 몰랐는데, 매우 심각했다고 얘기 들었어요.”

“그때, 평소 알고 지내고 있던 지인의 소개로 이곳 첸나이까지 오게 되었어. 그 후에는 H 자동차 협력 업체에 취업해서 부품 구매 업무를 담당했지.”

그는 목이 마른 듯 맥주 캔을 따서 한 모금 마시고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한국의 본사가 부도나는 바람에 하루아침에 일자리가 사라지고 말았지. 그때, 인도 땅을 떠날까도 생각을 했는데… 때마침 이 게스트 하우스가 매물로 나오는 바람에 부랴부랴 인수하여 지금까지 운영해 오고 있는 중이야.”

“벌이는 괜찮아요?”

“글쎄다. 이곳 H 자동차 주변에는 요즘 한 달에 두세 개씩 게스트 하우스가 생기는 것 같아.”

“그럼 레드오션에 빠져 들어가고 있다는 말인가요?”

“이야~ 우리 후배가 유식한 소리를 하네? 역시 대기업은 달라.”

“하하, 그런 건 아니고요. 그런데 선배님… 혹시 인도에서 밥 벌어 먹을 만한 사업 아이템이 없을까요?”

“왜? LK상사에서 버티기 어려울 것 같아?”

“누군가가 책임을 져야 하는데, 아무래도 저는 벗어나지 못할 것 같아요.”

“왜? 너도 당한 거라며?”

민혁은 자신이 정리한 내용을 원섭에게 설명해 주었다.

그러면서 앞으로의 계획도 함께 털어놓았다.

이야기를 들은 원섭은 민혁의 생각에 100% 찬동해 주었다.

“암, 그래야지. 너한테 죄를 뒤집어씌운 놈한테 복수는 해야지. 그만둘 때 그만두더라도 말이야.”

“그래서 말인데요, 핸드폰 좀 빌려주시면 안돼요?”

“왜? 신 사장하고의 대화를 녹음하려고?”

“예.”

“음, 신 사장이 얼마나 여우인데 그걸 모를까?”

“그럼 어떻게 하죠?”

“잠깐 있어봐.”

잠시 후, 다시 돌아온 원섭이 볼펜처럼 생긴 것을 스윽, 내밀었다.

“이게 뭐예요?”

“볼펜 녹음기. 이걸 사용하면 아무리 신 사장이라도 의심하지 않을 거야.”

“…고마워요, 원섭 선배.”

“짜식. 됐고, 사용법은 알아?”

“예.”

“자, 그럼 이제 오늘 저녁은 다 잊고 편안히 술이나 마시는 거다?”

“네. 신경 써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선배님.”

민혁은 취할 정도로 맥주를 마시다 자정이 지나서야 자신의 방에 돌아왔다.

침대 위로 지친 몸을 누인 민혁은 천장을 쳐다보며 각오를 다졌다.

‘성민호, 이 개새끼. 너는 내가 어떻게든 복수하고 만다! 난 이제 옛날의 강민혁이 아니야. 두고 보라고!’



***



첸나이 종합병원.

VIP 병실 옆에 마련된 보호자 대기실에서는 지금 살벌한 공기가 감돌고 있었다.

“그러니까, 강민혁의 머리카락 하나도 못 찾았다는 겁니까?”

“네, 누나.”

“누나? 지금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데,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죄, 죄송합니다, 장관님.”

사제한은 급히 고개를 숙이며 용서를 구했다.

저렇게 화를 내는 예스민 앞에서는 그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예스민은 한심스럽다는 듯이 사제한을 한 번 바라보고는 수리야 국장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수리야 국장.”

“네, 장관님!”

“테러범들은 윤곽이 잡혔나?”

“자이칸트를 의심하고 있지만, 명확한 증거는 아직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동영상들은 분석해 봤나?”

“네, 장관님.”

“얘기해 봐.”

“예상대로 자동차 번호판은 위조된 것이었습니다.”

“동영상에 등장하는 놈들은?”

“아신 아가씨를 습격한 놈들은 전과가 없는 놈들이었습니다.”

“그럼 한낱 동네 양아치 놈들이 우리 아신을 습격했단 말이야?”

“현재로서는 그렇습니다.”

“그럼, 강민혁을 테러한 놈들은?”

“동영상 내용이 워낙 짧아서 제대로 분석이 어려웠습니다만, 그놈들 역시 전과가 없는 놈들입니다.”

“그놈들도 놈들에 대해 아는 게 없단 말이야?”

“…죄송합니다. 그렇습니다.”

“그 양아치 놈들의 거주지는 덮쳐 봤나?”

“일정한 거주지가 없는 놈들이었습니다.”

예스민은 탁자 위에 놓인 종이컵을 손으로 꽉 움켜쥐었다.

분노를 주체할 수 없는 그 모습에 방 안에 있는 이들이 바짝 긴장했다.

“그럼 우리 아신을 테러한 놈들은 잡을 수 없단 말인가?”

“아닙니다! 첸나이 시내를 샅샅이 뒤져서라도 반드시 잡아내겠습니다!”

수리야는 급히 변명하듯 말을 꺼냈지만, 그 말을 믿는 이는 없었다.

그야말로 첸나이라는 넓은 백사장에서 1루피짜리 동전을 찾겠다고 하는 것과 진배없는 말이기 때문이었다.

예스민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애써 화를 삭였다.

자신이 여기서 성질을 부려봤자 해결책이 나오는 것도 아니니, 좀 더 냉정해질 필요가 있었다.

“아무 전과도 없는 양아치 놈들이 우리 아신이 탄 차를 덮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나?”

“그래서 자이칸트를 의심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세히 말해봐.”

“저희는 자이칸트가 아신 아가씨를 습격하기 위해서 전과 기록이 없는 동네 양아치들을 동원했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꼬리 자르기를 했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단순한 우발적 사고가 아니라면 예상보다 훨씬 심각한 상황이었다.

배후가 누구냐에 따라서 사건이 어마어마하게 커질 수 있었다.

예스민은 화를 애써 삭이며 으르렁대듯 입을 열었다.

“수리야 국장.”

수리야 국장은 그녀가 지금 극도로 화가 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만약 지금 이 자리에서 제대로 처신을 못하면, 자신의 운명은 끝장이었다.

“네, 장관님.”

“그럼 자이칸트가 범인이 아닐 수도 있겠네?”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럴 가능성도 있다고 봅니다.”

“그러면 뭔가?”

“…….”

“강민혁은 머리카락 한 올 못 찾고, 아신을 테러한 놈들은 윤곽도 못 잡고 있고.”

“…….”

“대체 자네는 뭐 하고 있는 건가? 그러고도 수사국장이라고 할 수 있나?”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는 말은 됐고, 내가 어떻게 해주면 되겠는가?”

“이번 주까지만 시간을 주십시오. 두 가지 모두 다 해결해 놓겠습니다.”

“사제한 총수.”

“네, 장관님!”

“이번 주말까지 해결 못하면, 저 두 인간에게 사표 받아.”

“네, 알겠습니다!”

“나하고 아신은 내일 델리로 돌아갈 테니까, 너는 사건이 해결될 때까지 여기 남아.”

“장관님, 저도 델리에서 일정이 있는데…….”

사제한이 눈치 없게 엉뚱한 소리를 꺼내자 예스민은 도끼눈을 치켜떴다.

“너도 사표 낼래?”

“아, 아닙니다.”

“꼴도 보기 싫으니까, 다들 나가봐.”



예스민이 병실로 돌아오자 아신은 기다렸다는 듯 질문을 쏟아냈다.

“엄마, 찾았대요?”

“아직. 열심히 찾고 있다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

“엄마, 혹시 병원에 입원하지는 않았을까요?”

“나도 그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니야.”

“병원에는 그런 사람이 없는가 보죠?”

“그런 것 같다.”

“그럼 혹시… 죽었을까요?”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어.”

“그럼 어떻게 해요? 나 때문인데.”

“일단 시체라도 찾으라고 했으니, 조만간 뭔가 연락이 올 거다.”

“…알았어요.”

아신은 체념한 듯 고개를 창밖으로 돌렸다.

그동안 너무 많이 울어서 이젠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가벼운 마음으로 첸나이에 방문했다가 이렇게 무서운 일을 당하리라고 누가 예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게다가 자기 때문에 민혁이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한없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 모습을 보다 못한 예스민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아신아, 내일 델리로 올라가자.”

“여기에 있으면 안 돼요?”

“그럴 수 없다는 것은 너도 잘 알고 있잖니.”

“그래도…….”

“그 사람을 찾으면, 그때 다시 내려오든지 하자.”

“…알았어요.”



***



다음 날 아침.

민혁은 자신을 찾아온 케네디와 함께 신경섭 사장의 사무실로 향했다.

차 안에서 케네디에게 말을 걸면서 몰래 볼펜 녹음기를 작동시켰다.

“사장님은 어젯밤에 돌아오셨나요?”

“늦게 돌아오셨어요.”

“일이 많으신가 봐요?”

“네. 인도 전역을 바쁘게 돌아다니고 계십니다.”

“그나저나, 컨테이너는 찾았나요?”

“현재 열심히 알아보고 있는 중입니다.”

민혁은 그 순간 케네디의 눈을 바라보았다.

[거짓말!]

그러자 머릿속에서 예의 누군가의 음성이 들려왔다.

민혁은 이제 더 이상 그 목소리를 의심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강하게 나가기로 마음먹고 입을 열었다.

“케네디, 거짓말하지 마세요. 이미 한국에서 다 알아보고 왔어요.”

민혁의 단정적인 말에 케네디는 순간 당황했다.

왠지 모르게 공항에서 처음 본 것과는 민혁에게서 풍기는 느낌이 많이 달랐다.

성민호 과장이 해준 말과도 전혀 맞지 않았다.

성 과장의 말에 따르면, 민혁이 이번 일은 전혀 모를 테니 대충 둘러대면 될 거라 했다.

그런데 지금 거침없이 치고 들어오는 민혁의 모습은 마치 먹잇감을 눈앞에 둔 맹수와도 같았다.

덜컥, 겁을 집어 먹은 케네디는 무조건 잡아떼기로 했다.

“사장님께서 백방으로 수소문 중에 있습니다. 사실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델리에 다녀오신 겁니다.”

[거짓말!]

“거참, 거짓말하지 마시라니까요? 다 알고 왔다는 말 못 들었어요? 소고기를 싣고 와서 압류당한 거잖아요.”

“헉! 그걸 어떻게…….”

순간적으로 말실수를 했다는 생각에 황급히 입을 다물었지만, 민혁은 한술 더 떠서 케네디를 몰아붙였다.

“성 과장하고 신 사장님이 공모한 것도 다 알고 있어요.”

“…….”

“성 과장하고 통화한 것도 다 알고 있어요. 그러니 거짓말하지 마세요.”

케네디는 너무 당황하며 민혁을 돌아보았다.

순간, 민혁과 눈을 마주치게 되자, 갑자기 숨이 막혀왔다.

“컥!”

그와 동시에 머릿속으로 공포라는 단어가 스멀스멀 떠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