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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도균은 쫑알대는 세인의 입술을, 한 줌에 잡힐 것 같은 가녀린 목을, 한 팔에 감으면 어떤 느낌일까 상상하게 만드는 굴곡진 허리를 볼 때마다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지르며 팽창하는 고통에 어쩔 줄을 몰랐다.
그래, 혈기왕성한 나이에 내가 너무 금욕적인 삶을 산 탓이다.
그래서 생전 처음으로 마음에도 없는 여자를 안아 보려고도 했었다. 그러나…… 젠장! 아예 서질 않았다. 귀찮지만 같이 있으면 꽤 재미있고, 눈에 안 보이면 어쩐지 답답하고 불안하게 만드는 여동생쯤이었던 세인이 어느새 그에게 여자로 인식된 이후부터 그는…… 성불구가, 빌어먹을 고자가 되고 만 것이다! 아, 물론 세인의 앞에서만은 예외였다. 그는 이미 상상 속에서 세인을 벗기고 물고 빨고 하며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해 보며 만리장성을 쌓아도 이미 여러 번 쌓았던 것이다.
그래서 고민 끝에 결심한 미국행이었다. 모든 건 그녀가 눈에 가까이 있기 때문이리라,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지리라 희망 속에 출국한 도균이었다. 그런데 이건 무슨 시추에이션? 미국 뉴욕의 한 펜트하우스 침대 위에 누운 도균의 귓가에 한 자락 노랫말이 흘러 들어온 건 바로 그때였다.
‘아침이 오는 소리에 문득 잠에서 깨어, 내 품에 잠든 너에게 워어우 워어…….’
“워억!”
말도 안 돼! 나 지금 무슨 생각 한 거야? 내가. 나 이도균이 지금. 그 꼬맹이, 민세인과. 아침에. 한 침대에서 눈을 뜨고 싶다는 그런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상상을 한 건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가?
그날 그는 출근하지 못했다. 하루 종일 퀭한 얼굴로 침대 위에서 울부짖으며 자신의 감정을 확인해야 했다. 몸부림의 결과는 단순했다.
그는 세인이 보고 싶었다. 미국에 온 것을 뼈저리게 후회했다. 정확한 계기와 원인은 알 수 없지만 그는 세인을 여자로 느끼고 있었고 그래서 안고 싶었다. 하지만 단순히 잠자리만 같이 하고 싶은 거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아아, 결혼. 그 단어가 침대 위를 구르던 그의 뒤통수를 가격한 것도 바로 그때였다.
그 나이 대의 남자들에게 그보다 더 자주 들려오는 단어는 없었다. 결혼을 하면 다 해결되겠구나. 내가 그 애를 보고 싶어 하는 것도 당연한 게 되고, 밤엔 같이 잠들고 아침을 맞이하는 것도 일상이 될 것이다. 굳이 거창한 이유를 갖다 붙이지 않고 하는 선물도 부담스럽지 않게 될 것이고, 시시때때로 전화를 걸고 싶은 충동도 애써 참을 필요 없게 될 것이다.
그래! 결혼을 해야겠다!
그는 후다닥 스케줄을 정리하고 숨 돌릴 틈도 없이 바로 인천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때 느꼈던 초조함과 불안함을 생각하면 세인을 품에 안고 있는 지금은 얼마나 행복한가.
아, 물론 동시에 고통스럽기도 하다. 너 이 자식, 그쯤 했으면 이제 포기하지? 아직은 네놈이 끼어들 때가 아니라고. 우리에겐 아직 수많은 고행의 시간이 남아 있단 말이다.
도균은 울상을 지으며 빳빳하게 일어서 있는 자신의 분신을 향해 마음속으로 빌었다. 세인은 애타는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까부터 별 해괴한 잠꼬대 중이다.
“음냐……. 어머니……. 한 잔 더…….”
그래. 굳이 묻지 않아도 무슨 꿈을 꾸는지 알겠다. 도균이 피식 웃으며 세인을 바라보았다.
“그 꿈에 나도 좀 끼워 주면 어디가 덧나나.”
시선 가득 하트가 묻어나는 걸 잠든 세인은 물론이고 도균 본인도 모르고 있었다. 그냥 그는 어쩐지 안아도, 안아도 부족한 마음에 세인을 가둔 팔에 조금 더 힘을 줄 뿐이다. 조금 더 꽉 껴안아 보면 이 갈증이 해소될 것도 같은…….
“으음. 숨 막혀어……!”
세인이 몸부림을 치며 눈을 떴다. 도균은 헉 소리와 함께 다시 눈을 감았다. 왜? 내가 왜 자는 척을 하지? 어이가 없었지만 이제 와 뺀질거리며 눈을 뜨기엔 타이밍이 영 아니다.
“으아. 나 왜 또 여기 있는 거야! 미쳤어, 미쳤어. 아니, 근데 이 싸람이 지금 손을 어디에……!”
뒤척뒤척하던 그녀가 그의 손을 홱 떼어 거의 던지다시피 했다. 도균은 하마터면 눈을 번쩍 뜨고 일어나 내 손이 뭐, 가슴을 만졌냐, 아니면 엉덩이를 더듬길 했냐, 따질 뻔했다. 괘씸한 것. 남의 속도 모르고…….
“근데, 어휴. 얼굴이 왜 이렇게 해쓱해? 일이 힘드신가.”
세인의 말랑거리는 양손이 도균의 양 뺨을 감쌌다. 바로 코앞에서 느껴지는 숨결로 보아 얼굴 사이의 거리도 한 뼘이 채 안 될 것 같다. 도균은 혼란과 욕망의 소용돌이에 빠져 허우적대기 시작했다. 잠꼬대인 척 고개를 움직이면 입술이 닿을 것도 같…… 아, 안 돼. 망상은 집어치워. 얜 그냥 내가 걱정되는 순수한 마음에…….
“식은땀까지 흘리잖아? 대체 무슨 악몽을 꾸길래.”
그래, 차라리 악몽을 꾸는 거라면 좋겠다.
“또 열이 나네. 아무래도 안 되겠어.”
아니, 열이 나는 건 아무래도 좋아. 지금 네가 하려는 짓, 이게 안 되는 짓이야. 이건 옳지 않아.
“도련님 실례 좀 할게요. 이게 다 도련님 열 내리라고 그러는 거거든요? 나 눈도 감았고, 절대 불손한 의도가 있어서가 아니니까. 단추만 몇 개 풀게요. 아, 혼자 뭐라고 중얼거리는 거야. 어우, 입은 또 왜 이렇게 바짝 말라? 근데 눈 감고 단추를 어떻게 풀지? 살짝만 볼까? 본다고 닳는 것도 아닐 텐데. 아냐. 어머.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젠장. 뭐라는 거야. 손 못 치워? 안 돼. 위기야. 난 지금 거의 발정 난 짐승이나 다름이 없다고.
“좀만 볼까? 실눈만. 그래, 딱 실눈…… 엄마야!”
참을 인 자를 딱 백육십 개까지 마음에 새기던 도균이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 그의 단추 주위에서 배회하는 세인의 손목을 낚아챘다. 이글거리는 그의 눈과 부끄러움에 데굴데굴 구르는 세인의 눈이 마주했다.
“……너 이러다. 진짜 위험해지는 수가 있다, 민세인.”
“도, 도련님, 저기…….”
“내 말 어디로 듣는 거야? 나 너무 믿지 말랬잖아.”
“근데요, 저기…….”
“네가 자꾸 이러는 건 내 도덕성과 인내력의 한계를 시험하는…….”
“도련님, 근데…….”
“뭐! 아, 뭐! 근데, 뭐!”
“피 나요.”
뭐? 그게 무슨 개풀 뜯어먹는…….
“여기. 코에서요. 도련님 코피 터졌어요.”
세인의 손가락이 도균의 인중에 닿았다. 그녀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피가 묻은 자신의 손가락을 그의 눈앞에 들이댔다. 피였다. 그것도 아주 시뻘건. 도균은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황급히 화장실로 도피해야 했다.

“한 달 후로 하기로 했어, 얘들아.”
서 여사가 두 손을 마주치며 그렇게 말했을 때, 북엇국에 코를 박고 있던 세인과 도균은 기함을 하며 고개를 쳐들고 말았다.
“어머니, 너무 이른 것 아닙니까? 결혼이라는 게, 준비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닐 텐데요.”
“얘는,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말 몰라? 미적지근하게 시간 끌다간 우리 세인이 맘 언제 바뀔지 몰라. 네 엄마의 추진력을 한 번 믿어 보도록 해, 아들.”
“사모님, 저 마음 안 바꾼다고 약속드릴 테니까 천천히 하셔도…….”
“어머, 세인아. 섭섭하게 사모님이 뭐야. 이제 어머니라고 하렴. 세인인 어떻게 불러 줄까? 이대로 쭉 세인이라고 할까? 아니면 새아가? 것도 아니면 딸?”
“딸도 좋고, 새아가도 좋고. 아이 참, 못 고르겠어요. 어, 어머님.”
“골고루 섞어 부르지 뭐. 딱 하나 고르려니 나머질 포기하기가 아깝네? 호호호!”
세인은 금세 지연에게 휘둘려 뺨을 발그스름하게 물들이고 있고, 코에 휴지를 꽂아 넣은 도균만 이 상황에 어울리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근데 아들, 어쩌다 코피가 다 났어, 응?”
지연이 엉큼하게 웃으며 다 안다는 눈빛으로 도균을 건너보았다. 그게 아니라고요, 어머니. 그냥 저 혼자 쑈 한 거예요.
“오빠가 좀 과로했나 봐요. 저 때문에 어제 바다까지 가느라…….”
세인이 미안한 듯 눈썹을 늘어뜨리고 도균을 흘끔거렸다. 지연이 의기소침해진 세인의 밥그릇 위에 반찬을 올려 주며 상냥하게, 그러나 더없이 은근한 어투로 속삭였다.
“아냐, 세인아. 저 코피는 그 코피가 아니란다. 저건 속에서 열이 나서 그런 거야. 세인이가 우리 도균이 마음에 불을 질러…….”
“어머니!”
“아유, 깜짝이야! 알았어! 세인아, 아무것도 아니다. 마저 먹어, 마저.”
“네? 아, 네.”
도균은 사실 밥 생각이라곤 전혀 없었다. 그런데도 꿋꿋이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이유는 바로 이래서였다. 서 여사의 입에서 또 무슨 엄한 소리가 나올지 몰라서.
“오늘 수업 있지? 가자, 데려다줄게.”
그는 최대한 세인이 서 여사와 둘만 있는 상황을 줄여야겠다고 다짐했다. 역시나 서 여사가 안타까운 듯 입맛을 다시는 걸 보고 그는 속으로 승리의 쾌재를 부르짖었다.
세인이 교재를 챙기러 별채로 들어간 사이에 그림자처럼 도균의 옆에 소리도 없이 따라붙은 지연이 아들의 귓가에 바람을 훅 불어넣었다.
“아, 어머니!”
“왜. 새아가가 아니라서 실망하셨는가, 아들?”
예전부터 종종 들었던 생각이지만 이 집엔 아무래도 정상적인 사람이 없는 듯하다.
“아들, 내가 세인이한테 하는 말은 다 너 좋으라고 그러는 거야. 이 상태면 우리 아들 밤마다 염불만 외울까 봐. 엄마가 우리 세인이 성교육 자알 시켜서…….”
“어머니, 그건 제발 당사자인 저한테 맡겨 주세요. 결혼하고 차근차근해도 늦지 않아요. 서두르다 탈납니다.”
“차근차근 해서 언제 손자 손녀 안아 보니?”
“걱정 마세요. 농구팀 꾸릴 정도의 계획은 하고 있으니까요.”
“어머! 얘는. 야망은 크게 가져야지. 우리 집 살림도 넉넉하고, 얼마 차이도 안 나는데 핸드볼은 안 되겠니?”
“쉿. 세인이 나와요.”
두 사람 사이의 은밀한 계약을 상상도 못 하는 세인은 높게 올려 묶은 머리를 대롱대롱 흔들면서 돌계단을 총총 내려오고 있었다. 세인이 차 앞에 서자마자 도균은 저번처럼 자신이 조수석에 구겨 넣어지는 불상사가 생길까 봐 저도 모르게 냉큼 세인의 손을 잡고 조수석으로 이끌었다. 세인은 볼을 붉히며 자신의 작은 손을 꽁꽁 숨긴 도균의 커다란 손을 바라보았다. 자꾸만 온몸이 배배 꼬이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두 사람이 아직 처녀, 총각일 수 있는 마지막 한 달의 첫날이 흐르고 있었다. 어쩐지 쏜살같이 지나갈 것만 같은 한 달이었다.

“청첩장 보낼 명단은, 생각하고 있지?”
도균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등교를 하는 일상에 제법 익숙해진 세인의 눈꺼풀이 반쯤 감겨 있었다. 그녀가 아이보리색 가죽시트에 몸을 파묻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명단이랄 것도 없는데요, 뭘. 성연이만 부를 거예요. 나머지 자리는 다 아빠 친구분들이 채워 주실…….”
“뭐?”
끼익. 도균의 놀란 음성에 이어 유연하게 잘 달리던 차가 도로 한복판에 우뚝 멈추었다.
“왜 서요! 초록불인데!”
신호를 확인한 세인이 소리치자 도균은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듯 다시 액셀을 밟았다. 다행히 차량 통행량이 많지 않은 도로였길 망정이지 사고라도 났으면 어쩔 뻔했는가. 세인이 잔소리를 하려고 입을 여는데 도균이 한발 빨랐다.
“왜. 어째서 아무도 안 불러?”
“아무도라니. 성연인 사람 아니에요?”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세인의 대꾸에 할 말을 잃어버린 도균이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차도 바깥쪽으로 핸들을 기울였다.
“안 그래도 성연이가 언제 밥 한 번 얻어먹어야겠다고 난리예요. 물론 도련…… 오빠는 바쁘시니까 제가 잘 구슬려서 대충 사 먹일게요. 부자 남편 얻게 생겼으니 등골까지 빼먹겠다고 벼르고 있긴 한데…… 그래도 설마 제 과외비를 초과하진 않겠죠? 혹시 생각보다 많이 나오면 영수증 청구해도 돼요?”
“어? 어, 그래…….”
……가 아닌데?
“잠깐.”
도균의 가라앉은 목소리에 세인의 불안한 눈동자가 그에게로 꽂혔다. 도균이 느낀 그녀의 시선은 정확히 그것이었다. ‘설마, 돈 아깝다고 말 바꾸는 건 아니겠지?’라는.
설마. 나 이도균이야. 내가 그럴 리가.
“밥, 제대로 대접하지. 내가 직접.”
“아뇨. 그렇게까지 무리하실 필요는…….”
“무리라니. 내가 먼저 챙겼어야 하는 건데. 날짜 잡아. 근사한 곳 예약해 놓을 테니까. 초대할 수 있는 사람은 ‘다’ 초대하라고.”
그가 유독 한 글자를 강조해 말하는 걸 까마득히 모르는 세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성연이밖에 없어요. 무슨 거창하게 예약씩이나…….”
“어째서? 잘 생각해 봐. 많을걸. 이를테면…… 유독 잘 챙겨 주는 학교 선배 놈, 아니 님이라든지.”
혹시 방금 들었을까? 이 갈리는 소리.
“없는데, 그런 선배.”
“없을 리가 없어. 분명히 있어.”
난 아직도 그놈 목소리가 생생하다고. 지금도 그 정체 모를 놈을 생각하면 뒷골이 당기는데, 없으면 안 되지. 도균의 눈동자 안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꽃의 속성은 분명 질투가 틀림없으렷다.
“뭐, 있다고 하더라도 됐어요. 결혼하는 거 알릴 생각 없는데요, 뭘.”
“뭐어!”
“아, 깜짝이야! 아까부터 왜 자꾸 버럭버럭!”
“왜! 왜 안 알리겠다는 거야, 왜? 그럼 앞으로도 쭉 처녀인 척하겠다는 거야?”
“네.”
“뭐라고?”
당당함을 넘어 당돌하기까지 한 눈동자에 숨이 턱 막혔다. 처녀인 척이라니. 유부녀가 처녀인 척하겠다는 데에는 어떤 그럴싸한 이유를 갖다 붙여도 미심쩍기만 하다
도균은 끓어오르는 심화를 간신히 삭이고 차분히 계산에 들어갔다. 몰아세우거나 다그쳤다간 일이 더 꼬일 수도 있으므로. 그가 더없이 다정하고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그녀를 어르기 시작했다.
“왜? 왜 처녀 행세를 하겠다는 거지? 나 돌아 버리는 꼴 보고 싶…….”
물론 달랜다는 게 생각처럼 순조롭진 않다.
“이유를 말해 봐. 내가 납득할 만한.”
“……그냥요.”
“납득할 만한 이유를 대 보라니까. ‘그냥.’ 그런 이유로 신부 측 하객이 텅텅 비어서야 되겠어? 결혼은 일생에 딱 한 번이라고. 생각해 봐. 지인들이 나중에 알면 서운해하지 않을까? 넌 단순히 말하지 않는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상대 입장에선 속이는 게 될 수도 있어. 예를 들면, 그래. 남 몰래 너를 짝사랑하고 있는 남자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런 사람 없는데요?”
“있어!”
“네?”
“아, 아니. 가정이라고. 내가 방금 가정해 보자고 했잖아?”
진땀이 다 났다. 뭘 이렇게 쩔쩔매야 하나 자괴감이 들었지만 도균은 어쩐지 세인에게 죄를 짓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상상도 못 하는 비밀을 우연한 기회에 엿들어 버린 죄다.
“그러니까, 내 말은…… 그 짝사랑남은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가 유부녀라는 건 꿈에도 생각 못 할 텐데, 그 얼마나 잔인한 짓이야. 안 그래?”
물론, 나한테도 잔인한 짓이고.
“그런 가정이 현실로 일어날 가능성은 제로예요. 절 짝사랑하는 남자라니, 있었으면 제가 가만뒀겠어요?”
암. 그럼, 그럼. 그런 걸 가만둬선 안…….
“꽉 끌어안고 안 놔줬을 거예요.”
“뭐?”
“모태 솔로나 다름없는데 물불 가릴 처지가 아니라고요.”
세인이 그 대목에서 도균을 노려보았다. 갑자기 울컥하는 기분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래, 여태껏 연애 한 번 못 한 게 순전히 누구 탓이던가.
도균과 얽혀 있다는 이유로 학창시절 내내 그녀에게 다가오는 남자는 없었다. 대학을 가면 달라질 줄 알았건만, 남자에 면역이 없는 그녀는 남학생이 조금만 많은 자리에 끼면 거나하게 술 취한 사람처럼 얼굴부터 시뻘게졌다. 누군가 말이라도 걸어오면 긴장해서 말을 더듬기 일쑤였으니, 캠퍼스 커플은 꿈도 못 꿨다.
물론, 가끔. 아주 가끔 자신이 모태 솔로라는 비극의 원인이 도균이 아닐 수도 있단 생각을 해 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특별하게 얼굴이 예쁘기를 하나, 몸매가 늘씬늘씬 쭉쭉빵빵이기를 하나, 옷도 늘 편한 걸 추구하고 또래들처럼 화장에 열 올리는 타입도 아니었다. 그러니 성연으로부터 늘 그런 인격모독적인 발언을 듣는 거다.
‘넌 대체 무슨 자신감이냐?’
‘네가 독신주의라는 건 선택이 아니라 강요에 의한 거라고 보는 게 맞지.’
등등등.
그러한 성연의 잔소리는 최근 단 하나로 귀결되었다.
‘넌 이년아, 진짜 땡잡은 거야. 이유 불문하고 앵겨!’
“그럼 날 끌어안아야겠네.”
“네, 네?”
“물불 가릴 처지 아니라며. 난 언제든 안길 준비가 되어 있다, 민세인.”
하필 그 타이밍에 터져 나온 도균의 묵직한 저음에 세인은 생각을 들킨 것 같아서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음식을 잘못 삼킨 것처럼 헛기침이 터져 나오고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다.
“아니면 네가 안겨도 좋고. 발목 잡을래, 잡힐래?”
“네?”
“왜, 나 말고 네 발목 잡겠단 남자가 또 있어?”
“무, 무슨 소리 하시는 거예요.”
“말 더듬네. 이건 순도 백 퍼센트 당황인데.”
헛. 황당무계한 소리에 세인의 입에서 헛웃음이 튀어나온 건 당연지사. 그러나 차마 도균에게 안기는, 성연의 표현을 빌리자면 ‘앵기는’ 상상 끝에 더듬거린 거라곤 털어놓을 수 없어서 세인은 그저 입을 일자로 꾹 다물 뿐이었다.
“누구야. 말 안 해?”
“그런 거 아니거든요?”
“내가 맞춰 봐? 같은 과 선배지? 유학 갔다가 얼마 전에 귀국했고. 맞지?”
“누구 얘기예요? 우리 학교 선배 중에 도련님이 아는 사람 있어요?”
“내가 아는 사람이 아니라, 지금 우리 얘기의 요점은……!”
강아지처럼 동글동글 깨끗한 까만 눈동자가 호기심을 담고 그를 빤히 응시했다.
“됐다. 가자, 가.”
그가 한숨을 훅 내쉬고 놓았던 핸들을 다시 잡았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게 분명하다. 알면서 시치미 떼는 거라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감이겠지만 그가 아는 민세인으로는 어림도 없다.
나처럼 불쌍한 놈이 또 있군. 탄식하며 그렇게 생각하던 도균이 혼자 뜨끔했다. 그딴 놈이랑 동질감을 느끼다니. 난 어설프게 연애놀음이나 하려는 풋내 나는 애송이랑은 다르지. 난 결혼을 할 거라고. 내가 이겼다! 내가 이겼…….
아, 근데 왜 자꾸 눈물이 나지.
“어쨌든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도련님 말씀이 맞는 거 같아요. 괜히 말 안 했다가 나중에 엉뚱한 오해 사는 거 별로 유쾌하진 않겠네요.”
“그렇지? 그러니까…….”
“조금 더 철저하게 숨길 필요가 있겠어요. 이럴 줄 알았으면 성연이한테도 비밀로 할걸.”
세인의 다짐에 날 선 도균의 눈빛이 그녀의 옆얼굴을 콕콕 찔러 댔다. 그 시선의 의미를 제멋대로 해석한 세인이 하는 수 없이 설명을 시작했다.
“너무 잘난 사람이랑 엮이면 인생이 얼마나 고달파지는지 도련님은 죽었다 깨어나도 모르실 거예요.”
“나보다 잘난 사람을 만나 봤어야 알지.”
“네네. 어련하시겠어요.”
세인이 조그만 입술을 뾰로통하게 내밀며 비꼬자 도균이 픽,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농담이었어? 어이없어하는 세인의 표정에 도균이 서둘러 얼굴을 굳혔다. 요즘 세인의 앞에서 너무 흐물거린다 싶다. 체통 없이.
“그럼 어떻게 할까? 일 그만두고 백수 되면 민세인 인생이 덜 고달파지나?”
“뭐라고요?”
“살림하는 남편은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원한다면 검토해 보도록 하지.”
“제발 농담은 농담답게 웃는 얼굴로 부탁드릴게요.”
한탄조의 목소리에 자꾸 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아야만 했다. 지금 이런 농담 따먹기를 할 때가 아니라는 깨달음이 불현듯 뒤통수를 강타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결론은, 결혼 사실을 비밀로 하겠다 이거지.”
“네. 도련님 때문에 시달리는 건 제 학창시절만으로도 충분하니까요. 제가 도련님이랑 사귀었던 것도 아니고 단지 아빠가 저택의 집사로 일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지경이었는데, 도련님의 신부 자리요? 여기저기서 피라냐처럼 절 물어뜯으려고 달려들 거예요.”
“혹은 그 반대일 수도 있지.”
“반대라니요?”
“네가 내…… 아내라서 사람들이 함부로 대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은 안 해 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