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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아내라는 단어가 원래 이렇게 간지러운 느낌이던가? 도균은 쓸데없이 얼굴까지 뜨거워지는 스스로가 낯설어도 너무 낯설다.
“그러니까 이왕이면 더 많은 사람 축하받으면서 하자고. 결혼.”
“식은 짧고 일상은 길어요. 설령 도련님 말씀처럼 제가 걱정한 것과 반대의 상황이 된다고 해도, 그건 그것 나름대로 문제라고요.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는 건 절 어려워할 거란 소리잖아요? 앞으로 평범한 직장에 들어가서 평범하게 사람들이랑 어울리면서 살고 싶은 저한테 그건 너무 가혹해요. 여자도 서른 넘어 결혼하는 게 태반인 시대에 스물네 살 유부녀라는 것도 충분히 신기한 일인데, 것도 모자라 그 남편이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회 지배층이라니. 윽, 저라도 껄끄러울 거예요.”
“사회 지배층? 뭐야 그 고리타분한 단어는. 요즘 시대에 그런 게 어디 있어. 그리고 네 생각보다 나 별로 안 유명…….”
“도련님이 입고 계신 이 옷, 남들 일 년 치 월급이고요, 남들은 몇 십 년 걸려 이 차 한 대 값 모아서 내 집 마련이 꿈이라고요. 오빠가 쓰는 한도 없는 블랙카드, 일반 직장인들은 평생 꿈도 못 꿔요. 그리고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별로 안 유명하신 분이 저번 달에 잡지 인터뷰는 왜 하셨어요? 전 무슨 연예인 화보인 줄 알았어요. 그 인터뷰로 음지에서 활동하는 도련님 팬이 적어도 세 배는 늘었을걸요? 덕분에 제가 얼마나 피곤해졌는지 아세요?”
“연예인이라니, 그건 잡지사에서 입혀 준 대로……. 그리고 나한테 팬 따위가 어디 있어? 난 그런 거 질색하는 사람이야.”
“네. 그렇게 질색하는 거 이미 도련님 팬들도 다 알아요. 그래서 제가 좀 전에 그랬잖아요. 음지에서 활동한다고. 저 얼마 전에도 거액의 제의 받았는데? 도련님 팬티 한 장만 훔쳐 달라고.”
“뭐? 그래서!”
도균이 거의 숨넘어갈 듯이 물었다. 이미 차는 일찌감치 학교 앞에 도착해 있었지만 두 사람의 이야기는 도무지 끊길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는 무슨 그래서예요. 도련님 빨래바구니는 정말 보물단지예요. 검은색은 이미 있는 거라면서 값을 짜게 부르기에 아빠 꺼 구멍 난 거나 줘 버릴까 하다가…….”
“민세인!”
“농담이에요, 농담. 제가 도련님 성격 제일 잘 아는데 설마 그런 짓을. 근데 그런 은밀한 유혹이 있었던 것만큼은 사실이에요.”
세인이 능글맞게 웃으며 반달의 눈을 활처럼 휘었다. 그녀의 이런 애교스러운 모습에 그는 늘 논점을 잃곤 했다. 하객으로 시작해 팬티로 끝나는 스토리라니. 이게 세인이 의도해서라면 그녀는 도균의 짐작보다 훨씬 고단수임에 틀림없다.
“정말 안 알릴 거야?”
“네. 제가 학교와 곧 취업할 사내에서 왕따가 되고, 오빠 팬들로부터 테러당할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알려야 하는 이유가 있나요? 타당한 거라면 고집 꺾을게요. 절 짝사랑하는 남자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그런 일어날 가능성 제로의 터무니없는 가정 말고요.”
도균은 심각하게 고민에 빠졌다. 이대로 세인에게 배려 넘치는 멋진 남자로 남는 대신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싶은 불안을 남겨 둘 것인가, 아니면 질투에 눈이 먼 치졸하고 미성숙한 남자가 되는 걸 감수하고 마음의 평화를 찾을 것인가.
젠장.
“그래, 그럼. 네가 싫다는데 강요할 수는…… 없지.”
차라리 몰래 감시하는 쪽이 낫다. 질투하는 남자라니, 스스로가 생각해도 정나미가 다 떨어진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해요, 도련님.”
그녀가 또 습관처럼 씩 웃었다. 소리도 없이 입가와 눈가에 걸리는 미소가 어째서 그렇게 예뻐 보이는지 모르겠다. 출근 시간 늦춰 가며 바래다준 보람이 있다고, 도균은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무의식적이라는 게 어찌 보면 굉장히 무서운 거라서 도균으로 하여금 ‘왜 내 눈엔 세인의 이런 미소가 이다지도 예뻐 보이는 것인가.’에 대한 깊은 생각을 가로막기도 한다.
그에게 그녀의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가 예쁘고 사랑스럽게 보이는 건 가랑비에 옷이 젖듯이 당연한 것이 된 지 오래였다. 다만 도균이 이런 속내를 고스란히 내비칠 수 없는 건 상대가 세인 그녀이기 때문이었다. 도균은 세인에게 최대한 괜찮은 남자로 비치고 싶었다. 그리고 그녀의 미소 한 번 눈길 한 번에 좋다고 헤죽거리거나 볼을 붉히거나 하는 건 절대 괜찮은 남자일 수 없다는 게 도균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도균은 종종 세인의 앞에서 가식적이 되었다. 그녀의 감사 인사에 퉁명스럽게 대꾸하는 지금처럼.
“고마우면 내가 호칭 문젤 그만 지적하게 해.”
“아. 하하. 이게 습관이라 참 고치기 힘드네요.”
“결혼하고 나서도 도련님, 도련님 그럴 거야? 난 가사도우미가 아니라 아내를 원해.”
아내라니. 그가 무심코 내뱉은 말에 이번엔 세인의 머릿속이 별천지가 되었다.
“알겠어요, 오빠.”
“오빠도 제외. 동생 얻자고 하는 결혼도 아니니까.”
“그럼요?”
그는 속으로 뜨끔했다. 너무 티 났나?
“그, 그렇다고 절대 자기라든지 여보라든지 그런 걸 바라는 건 아니고.”
“그럼 뭐가 또 남지? 생각 좀 해 볼게요.”
아쉬운 듯한 세인의 반응에 도균은 자신의 혀를 세게 깨물어 버렸다. 그냥 뒀으면 자기, 여보 소리 나왔을지도 모르는……. 너 미쳤구나. 전엔 누가 그리 부르면 온몸에 두드러기 나던 인간이.
“이러다 지각하겠어요. 가 볼게요. 태워다 주셔서 감사합니다.”
혀가 얼얼해 대꾸하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이자 세인이 차에서 사뿐 내려섰다. 유리마다 썬팅되어 있는 차에서 벗어나 햇빛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세인의 뒷모습을 조금 더 오래, 자세히 보고 싶은 마음에 도균은 핸들을 끌어안듯 팔을 괴고 그 위에 얼굴을 기댔다. 그런 그의 시선을 느낀 것처럼 몇 걸음 걸어가던 세인이 뒤돌아섰다. 어서 가라는 의미로 그녀가 손을 흔들며 웃었다. 마주 손 흔들고 후진 멋지게 하면서 떠났어야 맞는데, 얼어 버린 것처럼 꼼짝하질 못했다.
세인이 픽 웃고는 다시 등을 돌려 그로부터 멀어져 갔다. 저녁에 집에서 또 볼 그녀인데도 아까워서 차마 시선을 떼지 못하는 도균의 시야에 별안간 이물질 하나가 끼어들었다.
누군가 그녀의 팔뚝을 팔꿈치로 쿡 찌르며 말을 걸었다. 친밀함이 느껴지는 제스처가 한눈에 보기에도 수상하기 짝이 없다.
저놈이군.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육감이라는 사이렌이 정신없이 울렸다. 나는 질투 따위 하지 않는다. 질투는 나보다 우월한 사람을 시기하는 유치한 감정이다. 고로 난 저놈을 절대 질투하지 않…… 이런, 빌어먹을!
운전석 문을 벌컥 열고 나온 도균의 기다란 두 다리가 평소의 느긋함을 잃고 조급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한 뼘 정도의 틈을 남겨 두고 걷던 두 사람 사이에 불쑥 끼어들었다. ‘어마야!’ 하고 놀라는 세인의 어깨에 팔을 둘러 끌어당기는 대담함도 서슴지 않았다.
“내가 할 말이 있는 걸 깜빡했네. 수업 끝나고 집에 일찍 들어오라고. 우리, 집에.”
말은 세인에게 하면서 시선은 시종일관 어리둥절한 표정의 남자에게 꽂혀 있었다. 이 자식, 가까이서 보니까 더……
못생겼는데? 이런 녀석이 감히 내 걸 넘봐?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노릇이었다.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으랬다고, 저보다 하나도 나은 것 없어 보이는 놈이 세인의 발목을 잡으려고 했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외모가 사람의 전부가 아니란 말 따위는 이미 그의 뇌리에서 삭제되고 없었다.
“왜요? 무슨 일 있어요, 오늘?”
“꼭 무슨 일이 있어야 하나. 우리 사이에. 하하하. 그런데 이쪽은 누구?”
젠장. 이건 무슨 영역 표시나 다름없잖아. 게다가 방금 그건 웃은 거냐, 운 거냐. 도균은 연기처럼 사라져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남자를 도전적인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남자가 흠칫하며 어깨를 떨었다.
“아, 우리 과 선배예요.”
“가, 강납굽니다.”
“아, 예……. 뭐 전 성북구 삽니다만.”
그가 탐탁지 않게 대꾸했다. 보기와는 달리 집이 좀 사는 건가? 통성명도 하기 전에 주소부터 까라는 거야 뭐야?
“도련…… 아니, 오빠! 그게 아니라 선배 이름이에요. 남구 선배라고요!”
“뭐?”
교정을 노랗게 물들이던 봄 햇살은 어디로 숨고 썰렁한 기운만이 세 사람을 감돌았다.
“아, 알지. 농담이었어.”
“괜찮습니다. 이름 때문에 오해받는 거 하루 이틀 일이 아니거든요. 성은 강, 이름은 남굽니다.”
그 짧은 순간 속으로 백팔 번쯤은 거뜬히 욕했던 것 같다. 작명에 무심했을 것 같은 남자의 부모를 원망하기도 했다가, 안 하던 짓을 해서 굳이 망신을 자처한 스스로를 탓하기도 했다. 젠장. 그러게 끼어들길 왜 끼어들어서…….
“……네. 전 이도…….”
“도, 도련님!”
소개가 끝나기도 전에 세인이 찢어질 듯한 목소리로 도균을 불렀다. 도균과 남구, 두 사람 모두 깜짝 놀라 저들보다 더 놀란 듯한 세인을 바라보았다.
“도……련님?”
남구가 의아한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세인의 낯빛이 파리해졌다. 짧은 순간 그녀의 머릿속엔 수만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났다.
“도, 도령님이라고 그랬는데. 하하. 여, 여기는 이도령 님, 아니. 이도령 씨예요. 저, 전 반드시 오빠라고 부르지만요.”
횡설수설하는 세인의 영혼은 그녀의 몸을 반쯤 빠져나가 어디선가 너울거리고 있는 것 같았다. 도균이 눈을 부라리며 세인을 노려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 불꽃 튀는 시선이 오고 간다.
‘왜 멀쩡한 이름을 네 맘대로 바꿔!’
‘도련님은 인터넷에 이름 검색하면 나오는 사람이잖아요!’
‘그럼 좀 그럴싸한 걸로 하던지! 이도령이 뭐야, 장난해?’
그 부분에 대해선 세인도 할 말이 없었다. 순간 튀어나온 도련님이란 말을 수습할 길이 그땐 생각나지 않았던 탓이다. 꼬리를 내린 세인을 보며 도균이 하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며 멋쩍은 얼굴로 남구를 바라보았다.
“이……도령입니다.”
“아. 하하. 저만큼이나 특이한 이름이시네요.”
“트, 특이하긴요, 선배. 도롱뇽쯤 되어야 특이한 이름이죠. 안 그래요? 이도령은 멋있잖아요. 이도령, 이도롱뇽. 이 도령, 이 도롱뇽. 도롱뇽이 아니라 다행이다. 하하하. 그, 그죠, 오빠?”
“……그만해 줄래.”
미안한 마음에 안절부절못하며 되는대로 지껄이는 세인을 보며 도균이 이마를 짚었다. 피곤하다. 갑자기 몹시 피곤해졌다. 침묵이 흐르고 도균은 대체 자신은 누구인지, 왜 여기 있는지 심각한 딜레마에 허우적대고 있었다. 그때, 남구의 목소리가 참기 힘든 정적을 깼다.
“근데 세인이랑은 어떤……?”
자책하고 있는 도균의 귓가에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꽂혔다. 때가 왔다. 그래. 내가 누구고 왜 여기 있는지 네놈에게 똑똑히 알려 주마.
도균은 비장한 각오와 함께 비스듬히 미소 지었다. 세인이 악마의 미소라고 평가하는 바로 그것이었다.
“그렇고 그런 사입니다.”
“네……?”
“연애를 약속한 사이죠. 정확히 보름 후부터.”
정확히는 연애를 빙자한 결혼을 앞둔 사이지만.
솔직하게 불었다간 세인이 난리를 쳐도 보통 난리를 칠 것 같지 않아서 도균은 그녀의 의사를 최대한 존중해 주자는 의미로다가 수위를 한참 낮추어 말했다.
“아차, 조만간 저희의 연애를 미리 축하하는 자리를 마련할까 하는데 시간이 되시면…….”
“오빠아아악!”
물론 그마저도 세인의 질타를 받아야 했지만 도균은 해냈다는 만족감으로 충만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다. 그날 회사로 향하는 그의 차 안에선 콧노래가 연신 끊이지 않았다.

4.


“어, 어머니. 너무 꽉 조인 건 아닐까요? 버진로드 걷다가 질식사한 신부로 기사 날 것 같은데…….”
“얘는 농담도. 빼빼 말라서는 흘러내리지나 않으면 다행이겠네.”
“아유, 고부간에 어찌나 보기가 좋으신지. 사모님 저 정말 이 드레스 공수해 오기 힘들었답니다. 이 아이가 케이트 미들턴의 드레스를 디자인했던…….”
들으면 들을수록 혼이 빨려 나가는 것 같은 이야기라 세인은 숨을 들이마시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까딱 잘못해 지퍼라도 터졌다간 저 여자가 케이트 미들턴을 외치며 기절이라도 하지 싶었다.
“근데 무슨 결혼을 이렇게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하세요? 혹시…… 손주 보시는 거예요? 배만 봐서는 모르겠…….”
“아, 아니에요!”
거울 속의 낯선 자신이 부끄러워 시선을 줄곧 아래로 내리깔고 있던 세인이 손사래를 치며 부정했다. 그러자 지연이 한숨을 푹 내쉬며 뒤돌아섰다.
웨딩숍의 사장과 지연이 세인에게서 조금 떨어져 은밀히 숙덕였다. 속삭이는 목소리였지만 워낙 조용한 실내에 조금만 귀를 기울이면 세인도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면 좋겠지만, 우리 아들놈이 그런 쪽으론 영 영악하질 못해요. 조금 덜 올곧아도 좋을 텐데.”
“어휴. 이 대표님 신사적인 거야 이 바닥에 소문 자자하죠. 그런 분이 혼전 임신 생각이나 해 보셨을까…….”
호, 호, 호, 혼전임신. 아아…… 현기증…….
“그래도 사모님, 식 일주일도 안 남았으니 조금만 기다리시면 되겠어요. 허니문베이비라는 것도 있고, 두 사람 다 젊으니까 늦어도 올해 가기 전에 들어서지 않겠어요?”
허, 허, 허, 허니문베이비…….
연타로 가해지는 충격에 수다의 주인공인 세인의 무릎이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게다가 12센티나 되는 높은 힐에 몸은 고꾸라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넘어지겠다. 어어? 넘어진다!
그런 생각을 하며 그 와중에도 드레스만은 살려 보고자 몸을 잔뜩 말던 그녀의 몸을 누군가 받아 냈다.
한쪽 눈을 찔끔 뜨자 도균의 얼굴이 코앞이다. 남은 눈까지 마저 뜬 세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오빠가 여기 어떻게…….”
“신랑 될 사람이 보러 오는 게 당연하지. 오늘 드레스 맞추는 날이라고 왜 말 안 해?”
“아, 오빠 요즘 많이 바쁘신 것 같아서. 어, 저 어때요? 매일 청바지만 입다가 드레스라니, 좀 안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도균의 품에서 일어난 그녀가 간신히 균형을 잡으며 그를 향해 열없이 웃었다.
“뭐…… 꽤, 그럴싸해.”
“네?”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은 도균이 홱 고개를 돌리며 무뚝뚝하게 내뱉는 말에 당황한 건 오히려 그녀 쪽이었다. 이 남자, 귀가 왜 이렇게 빨개? 깨달은 순간 세인의 귓불도 따라서 달아올랐다.
“하하, 그, 그래요? 전 영 남의 옷 훔쳐 입은 것 같고 어색해서 잘 모르겠어요.”
“자.”
치맛단을 매만지며 눈을 굴리는 세인에게 도균이 테이블에 놓여 있던 부케를 집어 건넸다.
“이거 들면 되겠네. 손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모르고 있잖아.”
도균은 속으로 자신에게 조소를 보냈다. 문제는 손 둘 곳을 찾지 못한 세인이 아니라 눈 둘 곳을 찾지 못한 자신이었다. 그런 그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세인이 부케로 얼굴 반을 가린 채 눈만 빼꼼 내놓고 환히 웃었다. 귀여운 박수까지 곁들여서.
“그렇구나. 아, 이걸 잡으면 되는구나. 와아.”
미쳤어. 이 상황에 박수를 왜 쳐? 세인은 울고 싶어졌다. 갑자기 긴장이 몰려와 숨도 못 쉴 지경이었다. 일주일 후면 결혼이라는 게 뒤늦게 실감 나자 심장 안에서 누군가 마구 널을 뛰는 것 같았다. 혼전임신, 허니문베이비 따위의 말을 들어서 그런지 이윽고 도균과 눈이 마주쳤을 때에는 온몸의 피가 다 말라 버리는 것 같은 갈증을 느꼈다.
“바보야. 꽃잎 다 떨어진다.”
갑자기 다가선 도균의 손이 그녀의 쇄골 근처를 스쳤다. 온몸이 순식간에 얼었다가 녹는 듯 간지러운 기분으로 어깨를 움츠리는 세인의 코끝에, 연보라색의 손톱만 한 꽃잎을 쇄골에서 집어 얹어 놓은 그가 짓궂은 얼굴로 웃었다.
“예뻐. 결혼식 땐 더 예쁠 거고. 내 말 믿어.”
“…….”
“누가 청혼한 여잔데. 나 미적 기준 굉장히 까다로운 남자인 거 알지?”
가까워진 그에게선 이전엔 느낄 수 없던 달콤한 향기가 났다. 그의 짙은 머스크 향과 이름 모를 꽃을 얼기설기 엮어 놓은 부케에서 번지는 향이 어우러져 정신이 혼미해진다.
“그러니까, 좀 더 자신감을 가지라고. 민세인.”
코끝을, 아니 그 위의 꽃잎을 두드리던 도균의 손가락이 장난스럽게 세인의 뺨을 쓸고 지나갔다. 뺨에 남은 그의 향이 그녀의 체향과 섞여 또 다른 향을 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세인은, 그 향이 무척이나 좋아져 버릴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아침부터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아니, 지난 일주일간 세인은 거의 유체이탈 상태였다고 보는 게 맞다. 지연의 손에 이끌려 매일매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풀코스로 짜인 관리를 받는 것이 그녀의 주된 스케줄이었으므로. 이제 그녀의 몸은 구석구석 전문가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심지어 지연이 예약해 놓은 코스에는 여자의 가장 은밀한 부분까지 제모하는 프로그램이 포함되어 있어 세인은 거품을 물어 가며 벌인 반대 시위 끝에 겨우 그곳(?)을 사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그녀는 지난 일주일 동안 잘나가는 연예인의 삶을 대신 살아 본 것 같았다. 그 끝에 얻은 것은, 연예인과는 거리가 먼 외모를 타고나게 해 준 부모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겠다는 깨달음이었다.
길게만 느껴졌던 하루하루가 지나고 드디어 디데이가 왔을 때 식의 당사자들보다도 더욱 긴장한 건 지연과 경호였다. 두 사람은 나란히 근처의 절로 새벽기도를 나가는 것도 모자라 아침식사 후 사이좋게 청심환까지 나눠 먹는 모습을 보여 세인과 도균의 웃음보를 터뜨렸다.
무튼, 지연은 각고의 노력 끝에 달라진 세인의 모습이 꽤나 흡족한 모양이었다. 지연은 기나긴 산통 끝에 탄생시킨 자신의 걸작을 바라보는 예술가의 눈빛으로 새하얀 면사포에 가려진 세인을 바라보았다.
“세인아, 정말…… 우리 아들한테 덥석 던져 주기 미안해서 어쩌니.”
“죄송합니다. 어머니 아들이 좀 더 잘나질 못해서.”
“어머. 엿듣는 건 신사가 할 짓이 아니지!”
방귀 뀐 놈이 성낸다는 건 딱 지금의 지연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그나저나 세인은 좀 전까지 지연과 마주 보고 있던 상태에서 순식간에 그녀의 등만 바라보는 신세가 되었다. 지연의 철통 방어는 곧 세인과 혼인 서약서를 나누어 갖게 될 도균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여긴 발길 말라니까 왜 뭐 마려운 똥개마냥 기웃거려?”
“뭐 마려운……. 하. 어머니, 저도 좀 아까워해 주시죠? 다른 사람들은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하는데, 어머니 보시기엔 저 오늘 별롭니까?”
“어차피 아들은 평상복이 슈트였으니까. 슈트나 턱시도나 거기서 거기지. 캐주얼이라든지 아예 과감히 트레이닝복을 입었더라면 차라리 신선한 맛은 있었겠다만.”
세인이 지연의 뒤에서 몰래 킥킥거렸다. 이 집안에 서열이나 계급이 존재한다면 아마 도균이 가장 아래층을 담당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밖에선 이독종, 이독존이란 별명을 가진 도균이지만 집에선 유난스럽고 소란스러운 어머니에게 매번 져 주는 그저 평범한 아들에 불과했다.
“어쨌든 어서 나가. 맛있는 건 아껴 뒀다 제일 마지막에 먹어야 제맛인 거야.”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단 말이 있습니다, 어머니. 자꾸 이러시면 저 기대치만 높아져요.”
“기대해도 좋아. 아들의 기대치가 백두산 꼭대기만큼의 높이라면 오늘 우리 새아가 비주얼은 히말라야 정상쯤은 거뜬하니까.”
하, 어머님…… 그건 좀, 아니 많이 무리수예요.
결국 도균은 세인의 머리카락 한 올도 구경하지 못하고 씁쓸한 걸음으로 돌아서야 했다. 세인은 지연의 뒤에 숨어 제발 도균의 기대치가 백두산 정상에 오르지 않길 빌고 또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