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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후식은 내가 결정할래. 아니, 앞으로 같이 밥을 먹을 때 모든 메뉴는 다 내가 정해.”
도균이 단호하게 말했다. 조금 전과 같은 충격은 하루 한 번이면 족했다. 마냥 해맑게 자신을 쳐다보는 세인을 이끌고 도균은 바다를 훤히 볼 수 있는 탁 트인 전망으로 유명한 카페로 들어섰다. 서울의 일류 호텔 레스토랑과는 다른 고즈넉한 분위기가 인상적인 곳이었다.
“여기 좋네요. 바다도 보이고, 차도 맛있어요.”
세인을 따라 앞에 놓인 허브차를 한 모금 넘긴 도균은 창밖의 아름다운 풍경과 귓가에 잔잔하게 내려앉는 클래식 선율에 빠져 정신없었던 몇 시간 동안의 기억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었다.
“아, 서울 올라가기 싫다.”
그건 그도 공감했다. 연달아 그의 예상과 계획을 벗어난 사건들이 일어나 조금 피곤하고 지친 건 사실이지만 세인과 함께 있는 시간이 결코 싫지 않았…….
“올라가면 아빠한테 죽은 목숨인데.”
이런, 젠장.
“후. 내가 잘 말씀드릴 테니 걱정 마.”
“와, 정말요? 약속한 거예요! 무르기 없기!”
세인이 두 손바닥을 마주쳐 가며 좋아하자 도균은 금방 섭섭했던 감정을 잊고 가슴 한구석이 부풀어 오르는 자신을 깨닫곤 조소를 흘렸다. 세인에겐 정말 어쩔 수가 없는 모양이다.
“도련님이…….”
“또.”
“아, 오빠가 이렇게 착하게 나오니까 정말 다른 사람들 말이 맞는 것도 같아요.”
테이블에 팔꿈치를 놓고 턱을 괸 세인이 드물게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으며 말을 걸어왔다. 도균 역시 전처럼 부러 표정을 굳히는 대신 희미한 웃음기를 띤 채로 세인의 말간 눈동자를 마주 바라보았다.
“무슨 말.”
“땡잡았대요, 나더러.”
하고 많은 좋은 단어 중에 하필 골라도 땡이라니.
“사실 지금도 이 반지가 아니면 내가 꿈꾼 건가 싶을 거예요. 워낙 느닷없었잖아요. 오빠도 인정하죠?”
“그래.”
사실을 말하자면 그는 이미 오래전에 그 반지를 사 두었었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준비 없이 청혼을 하게 될 줄은 그 역시 몰랐었다. 그러니 세인이 쉽게 믿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도균이다.
“그냥이라고 그랬었죠? 그냥 나랑 결혼이 하고 싶다고.”
“내가 말한 그냥은, 이 결혼과 네가 나한테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뜻으로 한 말이 아니야.”
“그럼요?”
“아직 적당한 단어를 못 찾았을 뿐이지.”
조금 시무룩해 보이던 세인의 눈이 도균의 말에 별이라도 박아놓은 듯 반짝거렸다.
“어떤 이유를 붙여야 하는지 모르겠다. 너랑 결혼을 하고 싶은 건 확실해. 결혼을 한다면 너 말고 다른 여자랑은 상상할 수가 없는 것도 확실하고. 미국에서 급하게 일 마무리하고 돌아온 가장 큰 이유가 너라는 것도, 부인하기엔 이미 늦었지.”
“네?”
“미친 소리 같겠지만…… 보고 싶었다. 당장 못 보면 객사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들 만큼.”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생애 처음이었다. 남자에게서 보고 싶었단 고백을 듣는 건.
“같이 있고 싶어. 그 방식이 꼭 결혼이 아니어도 괜찮겠지만, 사실 지금 그것보다 더 간절히 원하는 게 없는 건 맞아.”
“…….”
“어째서냐고 물으면 설명할 길이 없다. 누군가가 밤새 생각나서 잠 못 자는 날도, 결혼이란 걸 하고 싶단 생각이 든 적도 전부 처음이니까. 정의하기엔 너무 복잡한 감정이라 그래. 그래서 그냥이라는 표현을 쓴 거고.”
도균의 솔직한 고백에 세인의 커다란 눈동자 아래에 맑은 물웅덩이가 생겼다.
“갑작스럽고 엉망진창인 청혼이었다는 거 알아. 하지만 이 결혼으로 너한테 무조건적인 희생을 강요할 생각은 없어. 말했듯이 내가 원하는 건 진짜 결혼이다, 세인아. 나는 진짜 남편이 되고 싶어.”
“…….”
“널 괴롭히거나 장난질이나 하려고 결혼씩이나 하자는 미친놈은 아니니까, 혹시 그런 의심을 했다면 안심해도 좋아. 노력할 거야. 기대도 되고.”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무뚝뚝한 음성이었지만 빼곡히 전해져 오는 그의 진심에 세인의 코끝이 찡하게 아려 왔다.
“두 분이 어쩌다 아시게 되는 바람에 일이 좀 꼬였지만 네가 싫다고 하면 어쩔 수 없겠지. 기다릴 생각도 있어. 물론, 어머니께선 크게 실망하실 거다. 어쩌면 몸져누우실 수도 있고 며칠, 길면 몇 달간 가출하시거나 삭발시위나 단식투쟁도 불사할 유별난 분이라는 건 너도 이미 잘 알고 있을 거야. 아버님도 크게 낙심하실 것 같다. 이제 연세도 있으신데 혹시 쓰러지진 않으실지…….”
도균은 점점 파랗게 질려 가는 세인의 얼굴을 보면서 안타까운 표정을 꾸며 내느라 혼이 났다. 아, 내가 공갈과 협박에 이렇게나 소질이 있는 사람이었던가. 도균은 새로 알게 된 자신의 진면모에 경악할 따름이었다.
“뭐, 그래도 네가 싫다면 어떻게 결혼을 억지로…….”
“할 거예요.”
그렁그렁한 눈물을 달고 다부지게 주먹을 쥐어 보인 세인이 씩씩하게 말했다. 도균은 자꾸만 의지와는 다르게 위로 휘어지려는 입꼬리에 간신히 힘을 주며 방금 큰 결단을 내린 세인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해요, 결혼. 전…… 솔직히 평생 결혼 같은 거 할 생각 없었는데요. 그냥 아빠 잘 모시면서 그렇게 사는 게 효도라고 생각했는데, 어제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았어요. 아빠가 그렇게 기뻐하시는 거, 처음 봤거든요.”
정말 단지 그 이유뿐인 건가, 도균이 조금 슬퍼지려고 하는 찰나에 세인이 두 뺨을 사랑스럽게 물들이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저도…… 도련님이라면 왠지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결혼.”
귀 기울여 듣지 않으면 쉽게 놓쳐 버리고 말 것 같은 작은 목소리였다.
“사실, 제 첫사랑이었거든요.”
“언제?”
갑자기 카페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이 핑크색인 것만 같은 느낌은 착각이겠지? 놀란 티를 내지 않으려는 게 꼭 관심 없는 것처럼 멋없게 묻는 꼴이 되어 버렸다.
“중학교 1학년 여름에 다 같이 별장으로 피서 갔을 때요.”
“뭐 그렇게 콕 짚어서야?”
“딱 그 며칠 동안이었거든요. 그러니까 첫사랑이죠. 뭘 잘 몰랐으니까.”
“후…… 그래.”
“그때 감기 걸린 채로 갔었는데 도련, 아니 오빠가 저 약도 챙겨 주고 간호도 해 줬었던 거 기억나세요?”
도균이 고개를 끄덕이자 세인은 그때가 새삼 떠오르는지 수줍은 소녀의 얼굴을 하고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때 오빠 좀 좋아했었어요.”
“그런…….”
“물론 제 감기가 낫자마자 오빠가 기다렸다는 듯이 계곡 물에 빠뜨려서 익사할 뻔했던 일이 있기 전까지만요.”
세인의 얼굴이 금세 뾰로통해졌다.
“그래서 며칠 동안이란 거예요.”
세인이 어깨를 으쓱하며 허브티를 쭉 들이켰다. 도균 역시 대체 왜 그때 자신이 그렇게 못되게 굴었을까 후회하며 세인을 따라 향긋한 허브티를 소주 마시듯이 한 입에 털어 부었다.
“어쨌든, 그러니까 결혼해요.”
그래, 그게 왜 결혼의 사유가 되는지 이해는 안 가지만. 어쨌든 그때 네 병간호로 시간을 보냈던 며칠 동안의 이도균에게 이 영광을 돌리는 걸로…….
“제 칙칙했던 첫사랑을 블링블링하게 재구성하는 의미로다가.”
세인이 싱긋 웃었다.
“선 결혼, 후 연애. 신선하잖아요. 재미있을 것 같고.”
기대와 흥분으로 떨리는 목소리와 함께 세인이 도균에게 불쑥 손을 내밀었다.
“잘 부탁드려요, 도련…… 아니.”
“…….”
“잘 부탁드려요, 남편!”
샛말갛게 미소 짓는 세인의 손이 도균의 손을 잡고 힘차게 위아래로 흔들었다.
그때 도균은…… 그래, 인정하기 싫지만 온몸이 간지러워서 붕 뜨는 것 같은 생경한 느낌에 어쩔 줄을 몰랐었다. 그리고 그게 세인의 입술 사이에서 나온 남편이라는 호칭 때문인 것도 결코 부인할 수 없었다.

3.


그날 여행 아닌 여행에서 돌아온 둘은 경호와 지연을 모아 두고 중대 발표를 했다.
“날짜 잡으세요.”
팡파르라도 터질 줄 알았는데 도균의 그 말에 묵직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러나 곧 팡파르 대신 다른 게 터져 나왔다. 지연이 왈칵 눈물을 터뜨리며 세인의 두 손을 꼭 부여잡았다.
“기특한 것. 그래, 고맙다. 잘 생각했어. 우리 세인이 아니었으면 저 녀석 꼬장꼬장한 노총각으로 혼자 늙어 죽었을 텐데. 아줌마가 세인이한테 이렇게 큰 짐을 떠맡겨서 어쩌니? 저 멋대가리 없는 녀석 잘 좀 부탁한다, 세인아.”
저기, 어머니. 저도 어디서 모자라단 소리는 안 들어 봤거든요?
도균은 이 훈훈한 분위기를 차마 망가뜨리지는 못하고 뻐근해져 오는 뒷목만 연신 손바닥으로 주물렀다. 하지만 사실은 손을 꼭 맞잡은 두 사람을 보고 있자니 대화 내용이 아무리 그를 깎아내리는 것이라 할지라도 기분이 썩 나쁘진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세인을 아꼈던 지연이고 그런 지연을 엄마처럼 따랐던 세인이니 아마 죽이 잘 맞는 고부지간이 될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하다 도균은 따뜻한 눈길로 세인을 바라보는 경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처음 그를 보았을 땐 그렇지 않았는데, 어느새 그는 머리의 반이 희끗희끗한 노신사가 되어 있었다.
“아버님.”
훌쩍거리던 지연과, 따라서 눈물을 글썽거리던 세인,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을 봄볕 같은 시선으로 관망하던 경호까지 나지막한 도균의 한마디에 일제히 고개를 한 곳으로 고정시켰다. 순식간에 여섯 개의 눈동자가 자신에게로 꽂히자 부담스러워진 도균이 크흠,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세인이 제가 잘 돌보겠습니다. 염려 마세요.”
도균의 말에 다시 싸한 침묵이 그들을 덮쳤다. 그리고 정확히 5초 후, 경호가 도균을 와락 안으며 지연, 세인의 뒤를 따라 세 번째로 울음을 터뜨렸다.
“허윽! 내 딸 잘 부탁하네, 이 서방!”
도균은 통곡하듯 우는 세 사람 사이에서 혼이 나가 멍한 얼굴로 저보다 한참 작은 경호의 품에서 이리저리 흔들려야 했다.
아아, 나도 울어야 하는 건가.
잠깐 생각했지만 아무리 눈가에 힘을 주어도 동공만 시릴 뿐 눈물은 어림도 없었다. 남자는 태어나 세 번 운다는 말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샴페인이라도 한 병 까야겠어요. 안성댁! 거기 내가 몰래 숨겨 둔 그거 있죠? 가져와요!”
대체 누구로부터 샴페인을 숨겨 놓았다는 것인가. 그게 설마 자신은 아닐 거라고 생각하며 도균이 눈썹을 찡그렸다.
곧 거나한 술상이 차려지고 지연은 자신의 허벅지 두께만 한 크기의 샴페인을 찬탄의 눈길로 바라보며 그 병을 손끝으로 쓸어내리고 있었다.
“내가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아껴 뒀었지. 그거 아니, 세인아? 이 녀석이 고등학교 때 몰래몰래 내 컬렉션에 손을 대지 뭐니? 이 녀석 한창 사춘기였을 때라 모르는 척하고 있었지만 내가 어떻게 내 애기들 줄어 가는 걸 모를 수 있었겠어. 녀석은 나름 완전범죄를 꿈꾼 모양인지 보리차를 타 놓곤 했는데, 제 엄마를 너무 물로 봤지.”
“어머니. 그런 얘길, 하필 지금 하실 필요가…….”
“듣자 하니 우리 세인이도 술 좀 한다면서? 아유, 그런 쫄깃한 정보를 왜 이제야 알려 주니? 며느리랑 술친구를 동시에 얻었네! 아차, 이거 마셔 봤니? 이런 게 다음 날 숙취도 없고 깔끔한 게 참 좋아.”
“전 소주랑 맥주, 막걸리 전문이라서. 와아, 전 이렇게 큰 샴페인은 처음 봐요!”
너무 죽이 잘 맞을 것 같아 그게 걱정이라면 걱정이랄까. 동시에 한숨을 내뱉던 도균과 경호의 눈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숨죽여 웃으며 잔을 맞부딪혔다.
“어머! 건배는 다 같이 해야죠! 다시, 다시!”
수선을 떠는 지연의 목소리와 함께 본격적으로 술판이 시작되었다.

햇빛이 감긴 눈 사이를 파고들었다. 창틀에 이름 모를 새가 앉아 짹짹거리며 게으름을 피우는 그의 정신을 흔들어 깨웠다.
도균은 ‘5분만 더’ 하는 심정으로 옆구리를 파고드는 따뜻하고 말랑거리는 뭔가를 두 팔로 가두며 세게 끌어안았다. 베개인가? 의심이 똬리를 트는 찰나, 묘한 향기가 그의 코끝을 어지럽혔다. 자신이 쓰는 샤워 젤과 샴푸 냄새, 그 사이에 섞인 낯설고도 익숙한 달콤한 체향. 도균은 본능적으로 두방망이질 치는 가슴을 달래며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으음…….”
세인의 헝클어진 머리가 바로 그의 턱 아래 있었다. 햇빛 때문에 눈이 부신지 자꾸 너른 품으로 파고들며 어두운 곳을 찾는 그녀에게서는 그의 몸에서와 마찬가지로 옅은 알코올 냄새가 배어 나왔다.
순간, 그는 세인을 안은 그대로 숨을 멈췄다. 그런 그의 머릿속만이 희뿌연 안개에 가려진 듯한 어젯밤의 일을 떠올리려 기민하게 움직였다. 하지만 끊겨 버린 필름은 어떻게 해도 다시 이어붙일 수 없는 법!
결국 포기한 도균은 신음하며 곤히 자고 있는 세인을 내려다보았다.
지난번 도균은 잠든 그녀의 곁이 아닌 창가 아래 소파에서 기다란 몸을 불편하게 구기고 잠이 들었었다. 어떻게 무방비 상태의 그녀 옆에서 잠들 수 있겠는가.
세인은 그를 철석같이 신뢰하는 모양이지만 도균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늑대스러움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니 정확히 셈하자면 오늘이 그녀와의 첫 번째 동침인 셈이다.
“아, 정말…….”
아무리 결혼 약속을 했다지만 아직 식도 올리기 전인 남녀를 두 분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한 방에 집어넣어 놓으신 거지.
도균이 두 어른의 대책 없는 행동에 한탄을 금치 못하고 있을 때, 갑자기 세인이 뒤척이며 자신의 얼굴을 벅벅 긁기 시작했다.
“뭐, 뭐야?”
짜증스러운 그녀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아무래도 얼굴에 아무렇게나 엉겨 붙은 머리카락 때문인 듯했다. 도균의 손이 서둘러 그녀의 머리를 빗어 넘겼다. 한결 편안해진 세인의 표정에 도균의 가슴에서 뭉게구름이 피어났다.
그는 비스듬히 누워 한 팔을 괴고 머리를 받친 뒤 본격적으로 잠든 세인의 얼굴을 감상하기에 이르렀다.
감은 눈은 옅은 쌍꺼풀과 함께 가로로 길어 개구쟁이 같은 느낌을 주었다. 적당히 앙증맞은 코와 화장 없이도 깨끗한 피부가 단정해 보였다. 무엇보다, 도균은 세인의 도톰한 입술이 좋았다. 그녀는 자신의 입술이 번데기나 누에고치를 연상시킨다며 세련되고 지적인 느낌의 얇은 입술을 선망하는 듯했지만 뭐니 뭐니 해도 세인의 얼굴에서 그의 시선을 가장 잡아끄는 것은 바로 그 붉고 통통한 입술이었다.
도균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세인의 뺨을 손가락으로 슬쩍 쓸었다. 그 간단한 스킨십만으로도 그의 얼굴이 조금은 달아오른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멈추지 못하고 가속도가 붙은 손을 조금 더 아래쪽으로 미끄러뜨렸다. 하지만 그 아래라는 곳이 언감생심 그녀의 허락도 받지 않은 가슴이라든가 혹은 더 은밀한 곳을 지칭하는 건 절대로 아니다. 도균의 손끝이 머문 건 그저 잠들어 살짝 벌어져 있는 세인의 입술이었다.
“정신 차리자.”
열렬히 키스를 나눈 것도 아니었다. 그저 살짝 눌러 본 것뿐인데, 그런데 그만 그의 아래가 불끈거리며 반란을 시작한 것이다. 아, 여기서 아래는 세인에게 써먹었던 그 아래가 아니라 ‘진짜 아래’다.
정신 차려. 너는 십 대가 아니야. 자, 이도균 넌 몇 살이지? 넌 서른이라고. 서른. 서른은 이래선 안 되는 거야. 이렇게 물불 안 가리고 아무 때나 일어서면 곤란한 거라고.
그는 눈을 질끈 감으며 자가 최면에 들어갔다. 지금이야말로 저번에 마음먹었던 인내와 자제력 기르기를 목표로 한 선행학습 시간이다. 그러나 곧 그는 견디지 못하고 눈을 번쩍 떴다. 막 잠에서 일어나 새하얗던 그의 흰자는 마치 밤을 꼴딱 샌 사람처럼 어느새 실핏줄이 드러나 있었다. 그는 본능과의 싸움에 지고 만 처참한 패배감과 함께 세인의 입술을 매만졌다.
그는 문득, 자신이 이런 아침을 무척이나 소망했던 과거의 어느 한 시기를 떠올렸다. 그건 그리 오래지 않은 몇 달 전이었다.
누군가 세인을 대체 언제부터 여자로 보기 시작했냐고 물으면 그는 정확히 언제라고 대답해 줄 수 없었다. 그건 그냥 봄이 되면 꽃이 피고, 꽃이 지면 열매가 맺히듯이 자연스럽게 일어난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제 처음 그녀와 결혼이라는 걸 하고 싶단 생각을 했느냐 물으면 그는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었다. 해외 지사에서 근무했던 6개월 전, 평소와 다를 것 없이 어딘가 허전했던 어느 날의 아침이었다고.
스물아홉 이도균은 먼 타국 땅에서 벌써 몇 개월째 일에 찌든 무료한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뭐,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다만 무대가 한국에서 미국으로 옮겨졌을 뿐, 눈 떴을 때 혼자라는 건 뼈에 사무치도록 익숙한 일이었으니까. 그날도 스케줄은 두통을 유발할 만큼 빈틈없이 꽉 채워진 채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침대에 멍하니 누워 새하얀 천장을 바라보며 오늘 해야 할 일들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는데 별안간 지루해졌다. 난 왜 이렇게 무미건조하고 재미라고는 하나도 없는 일상을 살고 있나, 회의가 들었다. 그리고 그때, 세인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린 건, 도균에겐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일이었다.
아니, 사실 따지고 보면 그렇게 갑작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도균의 미국행에 가장 큰 일조를 한 게 바로 세인이었으니까.
‘솔직히 말해 줘요. 이도균 씨, 여자 있죠.’
‘도균 씨, 무슨 딴생각을 그렇게 해요?’
‘저기, 내가 하는 말 듣고는 있어요?’
‘맘에 안 들면 차라리 맘에 안 든다고 하는 게 예의란 거 몰라요?’
위의 것들은 절대 한 여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 아니었다. 각기 다른 여자들, 그러니까 도균이 좋다며 먼저 다가온 여자들이 그의 미지근한 반응에 지쳐 뺨이라도 올려붙일 기세로 쏘아붙인 말들이었다.
무엇이 그녀들을 그렇게 만들었는가 하면, 바로 시도 때도 없이 딴생각, 정확히는 세인의 생각에 잠기는 도균 때문이었다.
도균이 눈앞의 여자와 세인을 자신도 모르게 비교하는 건 거의 병적일 정도로 심각한 수준이었다. 같은 표정이라도 ‘세인이었더라면 더 귀여웠을 텐데’, 같은 말이더라도 ‘세인이었더라면 더 재밌었을 텐데’로 시작해서…….
저 옷은 세인이한테 입히면 더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이 여자는 향수냄새가 왜 이렇게 독해. 세인인 무슨 향수를 쓰지? 향이 꽤 좋던데.
아, 이 여잔 왜 이렇게 내숭을 떠는 거야. 민세인 그 선머슴이 들으면 콧소리에 경악을 하겠군.
너무 요란한 목소리야. 근데 세인인 집에 들어왔나? 감히 외박을 해? 지금 전화해 볼까?
이런 지경에 이르렀으니 여자들이 나가떨어지는 건 당연지사. 도균같이 잘난 조건의 남자에게 욕을 퍼부었다는 건 그만큼 그녀들의 마음고생이 심했단 반증이었다.
그리고 이윽고 도균이 세인의 생각으로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자신을 자각했을 때, 그는 당연한 수순대로 부정의 단계에 들어섰다.
아니야. 아닐 거야. 아니어야만 한다.
그러나 부정하면 할수록 도균의 모든 감각은 세인을 중심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밤늦게 대문이 열리는 소리, 돌계단을 사뿐사뿐 오르는 소리, 별채의 현관문을 열고 닫는 소리, 신발을 벗고 방문을 여는 소리, 사락사락 그녀가 옷을 벗는 소…….
도균은 마치 스스로가 헐리웃 영화 속에 나오는 초능력자나 뱀파이어가 된 것만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나 멀리 떨어진 곳의 소리가 바로 옆방에서 나는 것처럼 가깝게 느껴질 수가 없었을 테니까. 비단 청각뿐만이 아니었다. 도균은 세인의 뺨을 덮은 자잘한 솜털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조차 보이는 것 같았다. 그냥 한 마디로 미친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