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2화


“아니, 그런데 대체 왜!”
집에 들어오자마자 쓰러지듯 침대에 누워 감기지 않는 눈을 억지로 감고 잠을 청하던 세인이 결국 5분도 지나지 않아 허공에 발차기를 날리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말이 안 되잖아, 말이! 결혼은 무슨 얼어 죽을. 그 인간 결혼이란 단어의 뜻을 알기는 아는 거야?”
가슴 앞에 단단히 팔짱을 끼고 가부좌를 틀고 앉은 세인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 갔다.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좀 전의 대화에서 이성적인 구석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아니, 그게 대화가 맞긴 해? 조금 전 도균의 어투는 청혼이나 구애가 아닌 거의 통보이자 명령이었다.
‘할 거지?’
‘아니요. 제가 왜요?’
‘내가 하고 싶다니까. 결혼.’
‘결혼이 그렇게 하고 싶으시면 다른 여자 찾으세요. 도련님 좋다는 여자 많잖아요. 왜 저한테 이러세요. 이러지 마세요.’
몸을 뒤로 쭉 빼고 그렇게 정색을 하자 도균 역시 따라서 정색을 했다.
‘이러지 마세요? 나 참, 누가 들으면 내가 너 싫다는 거 억지로 조르는 줄 알겠다.’
‘어머. 조르고 계시잖아요, 지금.’
‘내가? 뭐? 졸라?’
‘…….’
‘너 설마 싫다는 거야?’
‘당연하죠!’
어중간한 망치가 아니라 집채만 한 해머로 머리를 맞은 듯한 공포와 충격으로 얼룩진 도균의 모습에 세인은 내심 뜨끔했었다.
“그래, 거절이 너무 격했어. 좀 더 스무스하게 타이를 것을.”
이제 앞으로 이 저택에서의 생활이 더욱 가시밭길이겠구나. 후회해도 늦었다.
아무래도 그 인간이 뭔가 잘못 먹은 게 틀림없어. 이따가 아빠한테 오늘 식단 뭐였는지 물어봐야지. 분명 요리 어딘가 땅콩이나 게 같은 것, 이도균을 알레르기로 정신 못 차리게 할 만한 뭔가가 섞였을 거…….
“딸!”
“악! 깜짝이야!”
문을 벌컥 열고 들어서는 경호가 가자미눈을 하고 그녀를 째려보았다. 가슴을 쓸어내릴 틈조차 주지 않고 경호의 잔소리가 시작되었다.
“어딜 시집도 안 간 처녀가 외박을 해! 응? 너 그러다 혼삿길 막혀!”
“시집간 처녀는 외박해도 돼, 그럼?”
“뭐야?”
“그럼 결혼 그거 한번 해 볼까 싶어서.”
“아이고. 아이고, 세인 엄마…….”
뒷목을 잡으며 쓰러지는 시늉을 하는 경호의 눈치를 보며 세인이 슬그머니 운을 띄웠다.
“근데 아빠……. 좋아하지도 않고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결혼하자는 건 대체 무슨 의미야?”
“그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야?”
“아, 아니. 내 친구 성연이 알지? 걔가 같이 동네에서 자란 아는 오빠가 있는데 얼마 전에 성연이한테 글쎄 청혼을 했다더라고? 그 인간이 엄청 무뚝뚝하고 싸가지도 없고 예민하고 까칠하고, 아주 세상에 저가 제일 잘난 줄 아는 거만함의 끝판왕…… 아니, 뭐 실제로 잘나기도 하긴 했지만 어쨌든 아주 재수 없는…….”
“이 대표가 그렇게까지 못되지는 않았는데?”
“아니야! 아빠가 몰라서 그래! 이도균 그 인간 가끔은 정말 밥맛……!”
정적이 흘렀다. 열을 내며 연설을 하던 세인은 허공에 손가락질을 하던 그 자세 그대로 얼어 버렸다. 아, 진짜 얼어붙어서 아주 그냥 깨져 버렸으면 좋겠다.
“……성연이랑 이 대표랑 아는 오빠 동생 사이인 줄 이 아빠는 정말, 정말, 정말! 꿈에도 몰랐지 뭐야?”
경호가 음흉하게 웃으며 세인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대한민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간지럼에 약한 세인은 다 안다는 듯 옆구리에서 활개 치는 경호의 손가락에도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사람이 궁지에 몰리면 온몸의 감각이 마비될 수도 있는 모양이다.
어떻게 수습하지? 이 눈치 백단 아줌마를 무슨 수로 속이냔 말이야!
그녀의 머릿속이 디스코 팡팡처럼 빠르게 회전하며 널을 뛰었다. 마땅한 답은 나오지 않고 급기야는 어지러웠다. 아, 돈다 돌아, 술기운이.
“아, 아빠. 저, 저기 그게…….”
“사모니임!”
그녀가 입을 떼자마자 경호가 미사일처럼 세인의 방을 뛰쳐나가며 소리쳤다. 안 돼! 아빠아아! 애타는 세인의 목소리가 뒤를 이었지만 곧 쾅 하고 닫히는 문에 가로막혀 흔적도 없이 부서졌다.
망했다, 망했어.
알코올에 취해 상황 파악이 더딘 머릿속을 간신히 추스르고 황급히 경호를 찾아 나섰지만 이미 한발 늦은 뒤였다.
저택 한구석의 유리온실에서 속닥거리고 있는 두 사람을 발견한 순간, 세인은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런 그녀를 온실 유리를 통해 지켜보고 있는 서 여사와 경호의 입술이 비밀스럽게 말려 올라갔다.
오케이. 시작됐어!

“다시.”
“다시.”
“다시 해 오십시오.”
“여기, 여기, 여기. 전부 다 엉망입니다.”
“뭐가 부족한지, 굳이 내 입으로 말 안 해도 알죠?”
그에게 정확히 다섯 번째로 까임을 당하는 강 실장의 관자놀이에 핏대가 섰다. 이놈의 회사 다 엎어 버리고 당당히 무직의 길로 들어서겠다, 다짐하고 들어섰던 강 실장은 도균의 표정 하나 없는 냉정한 얼굴에 결국 이번에도 한 마디도 하지 못한 채 대표실을 나섰다.
“저건 카리스마가 아니라 살기다, 살기.”
회사 내의 다른 곳과 달리 한겨울의 냉기가 흐르는 것 같은 대표실 앞을 서둘러 빠져나가는 강 실장의 좁은 어깨를 바라보는, 그 대표실 앞을 하루 종일 지키고 있어야 하는 공 비서의 눈가가 우울해졌다.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처음 도균의 얼굴을 봤을 때, 이곳을 천상의 직장이라고 여겼던 공 비서는 과거의 자신을 향해 조소를 보냈다. 다비드상이 숨을 쉰다면 이런 모습 아닐까, 아폴론이 현신한다면 우리 대표님이 아닐까 하던 그녀의 몽상은 실전 업무 하루 만에 와장창 깨지고 말았다. 대체 뭐 이런 피곤한 사람이…….
“공 비서.”
“네, 대표님!”
열성적으로 도균의 흉을 보고 있던 그녀가 사색이 된 채로 벌떡 일어섰다. 예리한 눈빛 앞에 그녀의 심장은 발에 밟힌 음료 캔처럼 무자비하게 찌그러 들었다. 왠지 그녀의 속을 다 읽고 있을 것만 같다.
“뭐 필요하신 거라도…….”
“저기.”
“네.”
“내가 그렇게 별롭니까?”
쿠쿵! 아니, 이 인간 신기까지 있었어?
“대, 대, 대표님. 저기, 그게…… 어, 없는 자리에선 나라님 욕도 한다는데…… 아니, 이게 아니고…… 제, 제가 정말 죽을죄를…….”
“그렇게 질색할 정도로 내가 별로인 남자인가요? 결혼 상대자로는 일고의 가치도 없을 만큼?”
석고대죄라도 할 기세였던 그녀가 이어지는 도균의 말에 당황해 말을 멈추었다. 결혼 상대자? 그녀의 얼굴색이 짧은 시간 내에 파랗게 하얗게 빨갛게 요란하게도 변하는데 정작 원인 제공자인 도균은 혼자 심각하게 고민에 빠진 듯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도 못하고 있었다.
“저…… 대표님 그게 무슨……?”
“만약 내가 결혼하자고 그러면 공 비서는 어떨 것 같습니까? 그게 그렇게 끔찍하게 싫을 정도입니까?”
“저, 저는…….”
그 순간 도균의 전화가 울렸다. 액정을 확인한 그가 한숨과 함께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이후로 내내 상대의 목소리를 듣고만 있던 그가 쌩하니 바람을 일으키며 복도를 가로지르며 뛰어나갔다. 그 뒤엔 순식간에 투명인간이 되어 버린 공 비서만 얼굴을 핑크빛으로 수줍게 물들인 채 덩그러니 남았다.
“대표님이 저를 그렇게 생각하고 계시는 줄은……. 저야…… 당연히 땡큐죠, 대표니임.”
대상을 잃은 목소리만 허공에 메아리처럼 쓸쓸히 맴돌 뿐이었다.

누구도 먼저 입을 떼지 않으려는 숨 막히는 분위기에 세인은 속이 울렁거리는 것을 느꼈다.
“저 왔습니다.”
아주 때려 죽여도 시원찮은 인간인데 이 순간 세인은 도균이 마치 구세주처럼 느껴졌다. 그라면 어떻게든 이 난감한 상황을 정리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오셨습니까, 대표님.”
“왔니? 어서 앉아라, 아들.”
이 저택의 집사이자 세인의 아버지인 경호의 목소리가 먼저 그를 반겼고, 그다음은 저택의 주인이자 도균의 어머니인 지연의 목소리가 그를 자리에 앉혔다. 세인은 구부정한 자세로 힘없이 도균을 올려다보았다. 미간에 잔뜩 주름을 잡은 도균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자 세인은 등골을 따라 흐르는 식은땀과 함께 얼른 고개를 돌려 버렸다.
“자, 다 모였으니 얘기를 좀 해 보자꾸나.”
“어머니, 저…….”
“그래. 둘이 결혼하기로 했다면서? 요 앙큼한 것들. 음, 우선 날짜부터 잡는 게 순서겠지? 이미 서로 아는 사이에 상견례 같은 절차는 생략해도 좋을 것 같은데 어떠세요?”
“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그렇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사모님.”
“아유, 사모님이라니요. 이제 그런 삭막한 호칭은 앞으로 않기로 해요, 사돈어른.”
“하하하. 그러죠, 사부인!”
아니…… 이게 무슨…….
“아, 아빠?”
“어머니?”
호호호하하하, 하는 웃음소리에 세인과 도균의 목소리는 흔적도 없이 묻혀 버렸다. 세인은 황당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지 못했고 도균은 끄응 하는 신음 소리와 함께 관자놀이를 짚으며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예비 사돈지간인 두 중년의 대화는 순풍에 돛 단 듯해서 마음만 먹으면 당장 내일이라도 식을 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세인은 좀 전까지 울렁거리던 속도 잊고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인 도균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가만히 있지만 말고 뭐라도 해서 수습을 해야 할 것 아니야!
울화통 터지는 그녀의 시선을 느꼈는지 머리를 짚으며 발끝만 내려다보던 도균이 비스듬히 얼굴을 들어 올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격렬하게 허공에서 부딪혔다. 아니, 뭘 잘했다고 날 노려봐? 세인이 입을 삐죽거리는데 도균의 무어라 말을 한다. 소리 없이.
세인은 정신을 집중해 그가 하려는 말을 읽기 위해 눈을 부릅떠 입술의 움직임을 좇았다.
‘허락한 거야?’
뭘? 세인이 어깨를 으쓱였다. 도균은 뭘 당연한 걸 되묻느냐는 듯 답답하단 얼굴로 또다시 소리 없는 대화를 시도했다.
‘결혼.’
펄쩍 뛸 뻔한 세인은 가까스로 진정하고 대꾸했다.
‘미쳤어요?’
이에 도균이 한숨을 쉬며 경호와 지연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잠시 저희 둘이 얘기 좀 하고 올게요.”
“응? 응, 그래. 그러렴. 부부 사이엔 모름지기 많은 대화가 필요한 법이지. 우린 날짜며 너희 신혼집이며 상의할 게 많으니까 어디 교외로 오붓하게 데이트라도 갔다 오든지. 호호호.”
세상에. 고상함의 극치였던 서 여사님은 어디로 가신 거지? 오붓이라니? 오붓이라니! 세인은 그 순간 처음 알았다. 솜털을 따라 오소소 돋아나는 소름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기분이란 어떤 것인지.
“뭐해? 일어나.”
세인이 멍청한 표정으로 올려다보고만 있자 그가 다시 미간을 접더니 그녀의 팔뚝을 잡아 소파에서 일으켰다. ‘어머, 어머! 우리 아들 세인이 앞에선 박력도 있네!’ 방정맞을 정도의 호들갑이 서 여사님의 세련된 입술 사이로 흘러나와 다시 한 번 세인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그럼 저희 잠깐 위층에서 얘기 좀 나누고 오겠습니다.”
막무가내로 끌어당기는 손에 세인은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느새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몇 걸음 가지 않아 도균이 홱 뒤를 돌아 새로 탄생한 젊은 커플의 뒷모습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두 사람을 향해 나직이 말했다.
“두 분, 거기서 더 이상 결혼 얘기 진행시키지 마세요. 절대로.”
“그래. 당사자 없이 무슨. 어서 올라가, 어서.”
손을 휘휘 대충 흔들며 쫓아내듯 말하는 두 사람이 영 못 미더웠지만 도균은 하는 수 없이 세인을 이끌고 2층으로 향했다.
두 사람이 사라지자 지연이 앞에 놓인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켜며 경호에게 조용히 물었다.
“두 사람 정말 잘 어울리네요, 그렇죠?”
“네. 오래도 걸렸네요. 저 둘, 평생 제 감정 깨닫지도 못할까 걱정했더니.”
“정말 감사해요. 우리 도균이, 이렇게 멀쩡히 잘 자란 거 다 민 집사님…… 아니, 사돈어른이랑 세인이 덕분이에요.”
“별말씀을요. 대표님 같은 훌륭한 사위를 얻게 돼서 저야말로 참 든든합니다.”
따뜻한 온기가 저택 안을 가득 채웠다.
물론, 2층만은 예외였다. 창과 방패만 없다 뿐이지 세인과 도균 사이에 흐르는 기운은 분명 전의였다.
“어떻게 된 거야?”
“뭐가요?”
아니, 왜 화를 나한테 내? 내가 결혼하자고 그랬나? 울컥한 세인이 도균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이어지는 그의 냉담한 목소리에 그녀는 곧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두 분이 어떻게 알고 계신 건지 설명이 필요한 것 같은데.”
“그게…….”
“미쳤냐고? 내 청혼을 받아 주는 게 미쳐야만 가능한 일이었나?”
“지금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잖아요!”
“그래. 그럼 어째서 이런 상황이 벌어졌는지 설명해 봐. 5분 주지.”
창가로 걸어간 그가 창틀에 비스듬히 걸터앉아 자신을 빤히 바라보자 세인은 어쩐지 몸속 장기 중 어떤 것에 화르륵 불이 붙은 것 같았다. 햇빛을 등지고 앉은 도균의 모습은 마치 왕좌에 앉은 왕……. 민세인, 정신 나갔니?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난 맹세코 말씀드린 기억이 없고, 오는 길에 물어보니 윤 기사님도 아니야. 그럼 남은 용의자는 딱 하나인데.”
“혼자 다 말할 거면서 5분 준단 소린 왜 해요?”
도균이 허공에 흔들던 긴 다리를 우아하게 뻗어 창틀에서 내려와 세인의 주위를 빙빙 돌며 탐정이라도 된 듯 그녀를 궁지로 몰아넣기 시작했다. 세인은 순식간에 왕자의 청혼을 받은 공주에서 강등돼 사자 앞의 쥐 신세가 되었다.
“무슨 꿍꿍이야? 나랑 결혼할 생각 없으시면서?”
“그게 무슨 꿍꿍이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요…….”
“꿍꿍이가 없을 리가 없지. 어차피 거절할 청혼, 굳이 두 분께 알렸을 때는 뭔가 이유가 있는 거 아닌가.”
“이유요?”
“이를테면, 아침의 일을 후회한다든지.”
사모님, 사모님 아들이 망상증을 앓고 있나 봐요.
“아주 질색을 하면서 치를 떨더니. 마음이 좀 바뀌셨어? 많이 아쉬울 거야, 그치? 미쳤다, 라는 말은 그럴 때 쓰는 거야. 나 같은 남자의 청혼을 단칼에 잘라 내는 여자를 설명할 때. 뭐, 그럴 만도 해. 너무 설레고 떨리면 이 정신이라는 게 굉장히 섬세하고 불안정한 거라서 정상 궤도에서 벗어나기도 하니까. 게다가 넌 그때 술에 절어 있기도 했고.”
가만 보면 진짜 웃기는 인간이란 말이야, 이거. 세인이 차마 속마음을 입 밖으로 꺼내진 못하고 눈을 부라렸다. 그러나 갑자기 도균이 얼굴을 가까이 들이미는 바람에 쌍심지가 이글거리던 눈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그러니까 없던 일로 해 주겠단 소리야.”
“네엥? 뭘요?”
“이번엔 제대로 대답하라고. 정신 똑바로 차리고.”
도균의 두 손이 어깨를 감싸듯 쥐자 세인이 불에 덴 듯 화들짝 놀랐다.
“왜 이렇게 손이 뜨거워요? 혹시 열 있으세요?”
“지금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
세인의 작은 손이 허락도 없이 멋대로 도균의 이마를 덮었다. 그녀가 심각한 표정으로 도균을 올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열이 있네, 있어. 그래서 대낮부터 헛소리를 늘어놓으셨구만? 아니, 근데 남자가 무슨 얼굴이 이렇게 작아? 이마가 내 손에 다 가려지잖아. 하여튼 여러모로 인간미 없다니까. 그건 그렇고 왜 이렇게 빤히 쳐다봐? 사람 민망하게. 와, 가까이서 보니까 콧대 장난 아니다. 몰랐는데 입술도 되게…….
“엄마야.”
최면에 걸린 듯 몽롱하게 도균의 얼굴에 심취해 있던 그녀가 기겁을 하며 그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두 손으로 자신의 뺨을 탁탁 소리가 나도록 때리며 귀신이라도 본 듯 혼자 중얼중얼하는 그녀를 도균이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와 함께 바라보았다. 물론 잠깐 그답지 않았던 표정은 세인이 고개를 쳐든 순간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말았지만.
“열 있어요.”
“…….”
“도련님 이마가 펄펄 끓고 있다고요.”
“그래서?”
“사람이요, 열에 취하면 정신도 없고, 헛소리도 하고 그러잖아요? 당장 내려가서 말하자고요. 낮에 그건 아파서 잠깐 실성한…….”
“나 전혀 안 아파. 멀쩡하다고 몇 번을 말해?”
“분명히 열이 난다니까요?”
발끈하며 따지는 세인은 오히려 제가 열이 오르기 시작하는지 두 뺨이 복숭앗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도균은 무심결에 그 볼을 손가락으로 쿡 찔러 볼 뻔했다. 그는 두 손을 뒷짐 지듯 등 뒤로 감춰 세게 맞잡았다. 큼큼, 하는 헛기침 소리가 연방 도균에게서 터져 나오자 세인은 옳다구나 싶어 그에게 바짝 다가서며 추궁했다.
“감기죠? 그렇죠? 거봐, 목도 아픈 것 같은데 어디서 발뺌이에요. 얼른 내려가서 말하자고요. 두 분 반응이 예상과 전혀 달라서 좀 멘붕이긴 하지만, 오빠가 아파서 한 헛소리였다고 하면 이해해 주실 거라고요. 자, 빨리빨리. 이 사태를 수습하고 도련님도 약 드시고 푹 쉬시고, 저도 좀 잡시다. 잠을 못 자서 그런지 지금 심장도 좀 빨리 뛰는 것 같고 눈앞에 별도 좀 보이는 것 같고…….”
“열나는 거 네 탓이야.”
“네, 아무렴요. 제 탓이…… 네? 아니 그게 왜 제 탓이에요! 도련님께서 매일 철야도 불사하시고 일만…….”
“너 때문에 열받아서야. 네가 열받게 하니까.”
세인이 어깨를 으쓱이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제가 도련님 열받게 하는 거 뭐 하루 이틀 일인가요.”
“지금도 봐. 하지 말라는데 따박따박 도련님 소리.”
“예예, 오빠. 모든 게 다 제 학습력 딸리는 주둥이 때문…….”
“그리고 예전에도 몇 번 말했지만 그 오빠 소리도 별로야. 동네 오빠, 옆집 오빠, 친구 오빠. 난 뭐 그럼, 같이 사는 오빠인가?”
“그럼 뭐라고 해요? 이도균 이 자식아?”
“…….”
“……는 제 생각에도 좀 아니네요.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노려보지 마세요. 잘못했어요.”
꿍얼대는 세인을 보며 도균은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은 입가를 손으로 가리며 간신히 표정을 갈무리했다. 그나저나 이게 아닌데. 어째서 세인과의 대화는 늘 원래의 목적을 잃고 이런 식으로 엉뚱하게 흘러가는 걸까.
도균이 매번 세인에게 쉽게 휘둘리는 자신이 한심해 한숨을 훅 쉬자 세인이 그 뜻을 잘못 해석하고 어깨를 움츠리며 그의 눈치를 슬금슬금 보았다. 그게 또 마음에 들지 않는다. 뭐가 그렇게 무섭고 어려워서 매번 주눅이 드는 건데?
“내가 혹시 언제 때린 적 있었나?”
“네? 아, 아뇨. 도련님이 손버릇이 사납진 않죠. 입버릇이 사나워서 그렇지…….”
“뭐?”
“아니에요. 못 들으셨음 말고요.”
구시렁거리는 그녀는 이 순간이 못내 어색한지 애꿎은 두 손톱만 탁탁 소리 나게 부딪히고 있었다. 그런 세인을 도균은 한참이나 말없이 그저 바라만 보았다. 그 시선이 불편한 세인이 문을 흘끔거리며 채근했다.
“저기, 언제까지 여기 있어요? 얘기 정리됐으니까 이만 내려가요. 우리 둘이 이렇게 오래 빠져나와 있으면 더 상상력을 발휘하실 분들이라고요.”
도균에게는 세인 하나였다. 그를 포함시킨 ‘우리’라는 단어를 써도 도균이 껄끄러운 기분을 느끼지 않을 수 있는 사람.
도균은 무의식적으로 느슨하게 풀어지는 표정을 깨닫지 못한 채 세인의 팔을 이끌어 의자에 앉혔다. 작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그 역시 의자에 앉아 세인을 마주 보았다.
“네가 말하는 정리라는 게, 두 분께 내가 열에 취해서 헛소리한 걸로 말씀드릴 계획인 거라면 난 동의 못 해. 그러니까 두 분의 상상력은 두 분께 맡기고 우린 우리 얘기 좀 제대로 하지.”
“뭘 더 얘기할 게 남았어요?”
세인이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순진무구한 눈빛으로 묻자 그는 순간 말문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아, 이것도 추가다. 그에게 이런 막막한 기분을 안길 수 있는 것도 민세인 하나다.
“잊어버린 거야, 잊은 척하는 거야?”
“뭘요?”
“내가 결혼하자고 한 거.”
“아, 그거요? 걱정 마세요. 아파서 한 소리인데 까짓 거 못 들은 걸로 해 드릴 수 있어요. 저 남의 실수 가지고 우려먹고 놀려 먹는 그런 사람 아니에요.”
“잊진 않은 건 다행인데, 누구 마음대로 못 들은 걸로 쳐?”
“그럼 좀 놀려 드려요? 소문나면 곤란하실 텐데?”
“그런 말이 아니잖아.”
한숨이 절로 나온다. 하는 짓이 영락없는 초등학생이다. 얼굴은 예쁘게 생겨 가…….
뭐야, 나 지금 무슨 생각 한 거야. 정말 열 있는 거 아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