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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늘 딱딱한 무표정이었던 도균의 표정이 모노드라마 배우의 것처럼 흥미진진하게 바뀌어 가자 세인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얼굴을 디밀었다. 그녀의 손이 다시 한 번 그의 이마에 닿았다.
“괜찮으세요? 병원에 가 봐야 하나?”
가까이에서 세인의 긴 속눈썹이 느릿하게 팔락였다. 도균은 홀린 것처럼 그 속눈썹 아래의 까만 눈동자를, 그 눈동자 안에 담긴 자신을…… 젠장.
멍청한 표정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 그가 황급히 마른세수를 하며 세인의 손을 이마에서 떼어 냈다.
“도련…….”
“이렇게 여러 번 말하게 될 줄 상상도 못 해서 나는 지금 네가 꽤 괘씸해. 그러니까 이번에는 정신 제대로 차리고 똑바로 듣는 게 신상에 좋을 거야.”
“네?”
도균은 자신의 이마에 닿았던, 그리고 지금은 그의 손아귀 안에 잡혀 있는 세인의 가느다란 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영문을 모르고 ‘넹? 도련님?’ 같은 소리만 반복하고 있는 그녀의 손을 꽉 부여잡은 채 그가 나머지 손을 재킷 안주머니에 넣어 자그마한 상자를 꺼내 들었다.
마술사의 눈속임처럼 그 안에서 반지 케이스가 튀어나왔다. 그리고 세인의 눈도 튀어나올 듯 휘둥그레졌다. 그녀는 감히 그것이 자신의 손가락에 끼워질 것이란 걸 모르고 생뚱맞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와, 한 손으로도 저렇게 멋있게 케이스를 열 수가 있구나. 어우, 눈부셔. 다이아인가? 다이아겠지. 아니, 근데 지금이 자기 반지 쇼핑했다고 자랑할 타이밍인가? 예쁘긴 하네, 뭐. 근데 좀 작아 보이는데? 어, 저걸 왜 내 손가락에……?
“으악! 뭐예요?”
“으악이라니. 맘에 안 들어? 설마 막, 정신 사나운 장식 달린 게 취향인가? 잘 모르나 본데 이렇게 단순한 디자인이 제일 비싼 거라고. 이게 바로 벨기에의 가장 저명한 세공 장인이 심혈을 기울여 탄생시킨…….”
“이걸 왜 여기 끼워요!”
“……뭐?”
“이런 거 안 줘도 정말 소문 안 내요! 저 남의 약점 잡아서 금품 갈취하는 악취미 없어요!”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애초에 너 줄려고 산 건데.”
“네?”
“뇌라는 걸 좀 정상적으로 굴려 볼 의향은 없어? 결혼하잔 말 후에 끼워 주는 반지를 어떻게 그런 식으로 생각할 수 있지?”
반지를 빼려는 걸 멈추고 눈만 끔뻑거리는 세인을 두고 도균이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이 여자에게 자신의 말을 믿게 할 궁극의 대책이 절실했다. 그의 시선이 한 곳에 꽂혔다.
쿵. 쿵. 쿵.
도균은 귓가를 어지럽히는 자신의 심장소리를 용납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긴장이나 초조라는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며 그 궁극의 대책이라는 것을 결국…….
“웁!”
저질렀다.
박치기였다, 그건. 다만 머리가 아니라 입술끼리라는 게 조금 다른 점이겠지만. 키스로는 발전하지 못한, 꼬마커플의 장난 같은 그런 거. 아빠가 출근할 때, 엄마가 안아 줄 때, 만나면 반갑다고 하는 바로 그거.
도균은 말랑한 세인의 입술이 주는 감촉을 자신의 입술로 느끼고는 서둘러 그녀에게서 떨어져 나왔다. 그리곤 그녀의 체향이 옅게 남아 있는 입술을 벌려 오늘만 도대체 몇 번을 말하는지 이젠 셀 수조차 없게 되어 버린 그 말을 세인에게 각인시키듯 말했다.
“결혼하자, 민세인.”
놀라서 모든 감각기관이 팽창된 그녀가 더듬더듬 목소리를 끄집어냈다.
“진심……이세요?”
“백 퍼센트 그래. 난 너랑 결혼해야겠다.”
서로 제각각의 색을 내던 두 개의 시선이 얽히고설키며 하나로 합쳐지는 것 같았다. 시간은 멈추었고 부드러운 고요가 흘렀다. 그 어떤 소리도 끼어들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아아, 멋진 청혼이었어, 아들. 흐흑. 정말 다 컸구나.”
“한 편의 영화 같네요. 이젠 이 서방이라고 부르겠습니다, 대표님.”
“어머, 도련님 너무 로맨틱하시다.”
“세인아, 좋겠다!”
“축하드려요!”
짝짝짝! 월드컵에서 골이 터졌을 때나 들을 수 있을 법한 우렁찬 박수 소리가 들리고 선두를 끊은 서 여사와 민 집사의 목소리를 필두로 저택의 모든 고용인들이 앞다투어 축하 인사를 건네며 그들의 결혼을 기정사실화했다.
멈췄던 시곗바늘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2.


“아니, 이게 무슨! 어? 내가 대체 뭔 죄를 그렇게 지었다고, 응? 나 그래도 이 정도면 착하게 산 편 아니야? 어?”
“그렇지. 우리 초등학교 5학년 때 담임이 새 차 뽑은 거에 락카칠 해 놓은 거 빼곤 크게 벌받을 만한 짓은 안 하고 살았지.”
“그것 때문이라면 이건 너무 가혹해. 결혼을 이렇게 등 떠밀려 하는 경우가 어디 있어! 나는 그냥 화려한 독신으로 늙어 죽을 생각이었다고! 박성연, 넌 알지? 응? 내 미래계획!”
“알지. 네 그 화려한 독거노인에 대한 로망이라면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고말고.”
“독거노인이 아니라 독신!”
“아, 그래, 그래. 뭐, 어쨌든.”
치맥을 앞에 두고 하소연을 시작한 지 어언 2시간째. 베프라는 것이 이젠 귀찮은 듯 대충 대꾸하는 것을 보며 욱한 세인이 벨을 눌러 소주를 주문했다. 성연이 혀를 끌끌 찼다.
“너 소주 한 잔만 마셔도 유체이탈이잖아. 오늘 네가 진정 요단강을 건너고 싶냐?”
“보쌈당하듯이 이런 억지 결혼을 할 바에야 차라리 요단강에서 헤엄을 치는 편이 낫겠어.”
“내가 진짜 네 친구 입장에선 이런 말 하면 안 되지만…….”
“그럼 하지 마.”
“객관적으론 너 땡잡은 거야, 계집애야.”
“아, 하지 말랬잖아. 그 얘기 벌써 열두 번도 넘게 들었어!”
“그래도 또 들어. 너 어차피 좋아하는 사람도 없고, 네 그 덜 자란 유아틱한 성격에 앞으로 사랑이라는 걸 하기도 힘들 것 같고, 어차피 독신주의고. 야, 지금은 네가 이십 대니까 그런 한가한 소리 하지 서른 넘고 마흔 넘어 봐. 사실이야 어찌 됐건 남들은 다 독신이 아니라 노처녀라고 흉본다니까?”
성연의 신랄한 목소리가 높아질수록 소주잔을 집어 드는 세인의 손놀림은 더욱 빨라지고 있었다.
“나도 몇 번 뵀지만 이 대표님 정도면 모르긴 몰라도 말 한 마디 섞어 보려는 대단하신 집안 딸내미들이 줄을 섰을 거다. 대한민국 결혼 적령기 여성들의 로망, 일등 신랑감이라는 건 딱 그런 남자를 두고 하는 말이라고. 봄이라도 타시는지 지금 잠깐 정신이 혼미하신 모양인데, 넌 이 일생일대의 기회를 하이에나처럼 물고 늘어져야 해.”
“그래도 말이 돼? 결혼은 서로 죽고 못 살게 사랑해야…….”
“어쨌든 너랑 결혼하고 싶단 그 팩트가 중요하지. 너 없인 죽어 버리겠다, 아침에 한 침대에서 눈 뜨고 싶다, 이런 거창한 멘트가 필요해? 사랑, 그거 어차피 오래 못 가. 오히려 말만 번지르르한 그런 놈들을 조심해야 하는 거야, 이 연애 초짜야.”
에이, 술맛 버렸네. 소주를 한 입에 털어 넣은 세인이 인상을 찌푸리며 혀를 내밀었다. 진짜 억울하고 짜증 나 미칠 지경이다.
아니, 청혼은 그 인간이 했는데 어째서 내가 꼬리 아홉 달린 구미호가 되는 거야? 내가 대체 누구 발목을 잡아? 발목은커녕 발톱도 구경 못 해 봤다고!
세인은 이런 식의 오해라면 이제 정말 지긋지긋했다. 그녀는 그가 황제로 군림하는 저택의 집사의 딸이자 초등학교, 중학교 심지어 고등학교 후배이기까지 했다. 도균의 외삼촌이 총장으로 있는 대학의 부속 초·중·고등학교를 연달아 입학해 가능한 일이었다.
다행히 6살 차이가 났기에 망정이지 한두 살 차이. 아니, 동갑이기라도 했으면 아마 무사히 졸업장을 따기란 불가능했을 것이다.
세인은 단 한 번도 아버지의 직업을 불만스러워하거나 남에게 감춰야 할 부끄러운 부분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차세대 재벌 교육소라든가 재벌 2, 3세들의 비공식적인 사교장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것 같은 학교를 다닐 때에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항상 부모님의 직업을 묻는 란에 당당히 사실 그대로를 적어 냈고, 그건 우월의식에 뼛속까지 사로잡힌 철모르는 몇몇 아이들의 구미를 돋우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도균은 집에서뿐만 아니라 학교에서도 황태자여서 그런 도균의 집에 얹혀(?) 사는 세인은 종종 적당한 사냥감을 찾는 못된 아이들의 표적이 되고는 했다.
다른 사람들의 말을 빌리자면 ‘뭐 하나 빠지는 것 없는’ 이도균은 졸업 후에도 늘 화제와 관심의 중심에 있었고, 세인은 그런 도균의 그늘에 가려 꽃다운 학창시절과는 거리가 먼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래도 나름대로 견딜 만했다, 이거지!”
그 사건, 그녀가 중학교 3학년 때 말년 휴가를 나온 도균이 서 여사의 성화에 못 이겨 학교로 심부름을 왔던, 그 일만 아니었더라면 말이다.
“내가 그때, 흑, 진짜 지금 생각해도…….”
“그 전설적인 사건, 그 얘기라면 관둬라. 나도 술맛 떨어진다.”
세인이 훌쩍훌쩍 코를 들이켜며 점점 차오르는 성연의 소주잔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리곤 성연이 마시려는 찰나, 그것을 냉큼 가로채 들이켰다. 식도가 타는 듯했지만 그날을 떠올리자 이쯤은 고통 축에도 못 들었다.
“크. 달다!”
소리치는 것과는 다르게 상념에 사로잡히는 눈은 어둡게 젖어 들기 시작했다.
세인은 또래보다 초경이 더뎠었다. 빠른 아이들은 초등학교 4학년, 5학년에 시작한 생리가 중학교 졸업할 무렵이 다 되어도 아직이었다. 챙겨 줄 엄마라도 있었으면 다행이었겠지만, 애석하게도 경호의 보살핌은 거기까지는 미치지 못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점심 시간 전 4교시 수업 중에 느닷없이 아랫도리가 축축해졌다. 급히 화장실에 가서 확인해 보니 팬티가 이미 새빨갛게 젖어 있었다. 허벅지를 타고 흐르는 선혈을 바라보며 세인은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빌릴 사람이 없을까, 하는 생각을 제일 먼저 떠올렸지만 이 학교 어디에도 그녀에게 생리대를 빌려 줄 친절한 학생은 없었다. 소문이나 내지 않으면 다행이지.
그녀는 울먹거리며 경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이나 음성 사서함으로 넘어가는 핸드폰으로 걸기를 포기하고 결국 저택의 번호를 눌렀고, 전화기 바로 옆에 있던 서 여사가 그 전화를 받았다. 서 여사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해 도움을 구하는 것 말고는 다른 해결책이 없어 보였다.
어릴 때부터 세인을 딸처럼 아껴 주던 서 여사가 당장 속옷과 생리대를 가지고 가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그때는 어째서 조퇴라든가 양호실 같은 대안을 생각해 내지 못했었는지, 아마도 학교가 세인에게 그다지 믿음직하지 않은 곳이어서 그랬을 것이다.
아무튼 세인은 둘둘 말은 휴지를 팬티에 집어넣고 화장실 칸에서 안절부절못하며 서 여사로부터 도착했다는 전화가 걸려 오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생각보다 전화가 너무나 일찍 걸려 왔다.
‘세인아, 누가 갑자기 돌아가셨다고 해서 아줌마가 장례식장에 가느라 직접은 못 갈 것 같아. 급한 대로 도균이 보냈으니 곧 도착할 거야. 쇼핑백 절대 열어 보지 말라고 했으니까 너무 걱정 마.’
네, 하고 괜찮다며, 조심히 다녀오시라며 전화를 끊었지만 피가 마르기 시작했다. 열여섯 소녀에게 생리란 죽어도 남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비밀스러운 것이었으므로. 도균이 제발 쇼핑백을 열어 보지 않기를 바라며 세인은 평소엔 그 존재조차 믿지 않는 하느님을 찾아가며 열렬히 기도까지 했었다.
도균에게서 학교 앞이니 나오라는 연락을 받고 세인은 휴지를 더 말아 응급처치 후 화장실을 나섰다. 도균에게 여자화장실로 와 달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도균이 있을 교문 쪽으로 향하면서 그녀는 유난히 많은 학생들로 운동장이 평소와는 달리 시장 한복판처럼 정신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쉬는 시간 아껴 가며 하는 공부가 세상 전부인 것처럼 사는 아이들의 발길을 이끈 원인이 난데없이 군복을 입고 등장한 이도균 때문이었음을, 그때는 미처 짐작하지 못했다.
세인은 웅성웅성대는 인파를 헤치고 도균 앞에 섰다. 그녀의 뇌리에는 온통 얼른 저 쇼핑백을 받아 화장실로 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세인을 발견한 도균이 쇼핑백을 내밀었다. 기색을 보아하니 정말 열어 본 것 같지는 않아서 안도한 세인이 손을 뻗었다.
그러나 중간에 새하얗고 마른 손 하나가 튀어나와 쇼핑백을 가로채 갔다. 고개를 돌린 세인의 시야에 도균을 오랜 시간 어마무지하게 사모해 온 걸로 유명한 고등부 3학년 선배의 일그러진 얼굴이 포착되었다.
‘이게 뭐예요, 오빠?’
‘몰라.’
‘하. 오빠가 가져와 놓고 그게 무슨 소리예요. 장난해요?’
‘안 열어 봤어. 심부름 온 거니까 내놔.’
‘아, 그래요? 이야, 근데 오빠가 이런 애 때문에 심부름까지 오시기도 하는구나? 뭘까요? 되게 열어 보고 싶어지는데요? 안 열어 봐서 뭔지 모른다고 그랬죠? 그럼 오빠도 되게 궁금하겠다. 그렇죠?’
도균이 인상을 구기건 말건, 이미 수차례 그에게 무시당해 독이 오를 대로 오른 그 여선배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그녀는 도균이 심부름 왔다는 말을 믿지 않는 듯 입술 가득 비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날은 하필이면…… 11월 11일. 호감 있는 남녀 사이에 막대과자가 오고 간다는 수많은 ‘Day’ 중 하나였다.
상황이 잘못 돌아가고 있었다. 어지간하면 학교에서 죽은 듯 지내는 세인이지만 잠자코 지켜보고 있을 수만은 없어서 겨우 용기를 냈다.
‘저, 선배님. 그거…….’
‘닥쳐. 어디서 건방지게 끼어들어! 아아, 넌 알고 있는 모양이지, 여기 뭐가 들었는지? 같이 좀 보자? 아니, 같이 좀 먹자고 해야 하나?’
‘아, 안 돼요! 이리 주세…….’
‘이도균이 주는 건 뭐가 달라도 다르겠지. 어? 이거 우리 아빠 백화점 쇼핑백이네? 우리 백화점에서 사셨나 봐요? 내 맘 뻔히 알면서 오빠 되게 잔인하네요.’
‘내놓으라니…….’
보다 못한 도균이 억지로라도 뺏을 요량으로 손을 뻗자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난 여학생이 입구가 고이 접혀 있던 쇼핑백을 그대로 뒤집어엎었다. 안에 있던 내용물이 운동장 흙바닥 위로 쏟아져 나뒹굴었다.
세인은 태어나 처음으로, 아주 잠시이긴 했지만 죽어 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구경하던 학생들의 웅성거림이 OFF 버튼을 누른 것처럼 뚝 끊기고, 입술을 깨문 세인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눈물이 왈칵 쏟아져 눈앞이 흐릿해지는 바람에 생리대를 주워 드는 손이 자꾸 맨 흙바닥을 짚었다.
‘어머나, 이게 뭐야? 먹을 게 아니네? 와, 근데 안에 든 게 상상 이상인데요? 고양이? 핑크색? 민세인 취향하고는. 큭큭큭.’
오물을 대하듯 손가락 끄트머리에 세인의 속옷을 건 여선배가 주변을 둘러싼 모두가 볼 수 있도록 손을 높이 치켜 올렸다. 여기저기서 숙덕대는 소리가 세인의 여린 심장에 비수를 꽂았다.
‘둘이 정말 무슨 사이인가 봐요? 다른 것도 아니고 이런 것까지 친히 학교로 배달해 주고. 그저 집사 딸한테 이런 거 가져다줄 만큼 오빠 상냥한 사람 아니잖아요. 민세인, 부럽다? 나도 집사 딸 하면 너처럼 이런 도련님한테 언감생심 꼬리도 쳐 보고 그럴 수 있는 거니? 너 솔직히 말해. 몸으로…….’
‘입 다물어.’
바들바들 떨던 세인의 아랫입술에서 피가 터지던 순간이었다. 도균이 그 여선배의 손에 들린 속옷을 잡아채며 그녀의 목을 쥐었다. 눈 깜빡할 사이라는 말로도 모자랄 찰나에 벌어진 일이었다. 다들 숨도 쉬지 못하고 도균의 한 손에 목을 잡힌 여선배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가는 광경을 쳐다보고 있었다.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도균이 늘 주목받는 사람이긴 했지만 그건 그의 타고난 외모와 재력과 실력 때문이었지, 절대로 그가 튀는 행동을 해서는 아니었다.
그는 건조하리만치 감정이 메마른 사람이었다. 웃는 일도 화내는 일도 극히 드물었다. 집이 아닌 바깥에서는 더더욱. 그런 그가 눈동자 가득 증오를 담고 한 여자의 목을 잡고 흔드는 광경은 세인을 비롯한 그 자리의 모든 사람들에게 소름을 안겨 주기 충분했다.
‘너 말이야, 내가 왜 너 따위를 거들떠보지도 않는 줄 알아?’
‘큽. 크윽.’
‘멍청해서야. 이렇게 전교생 앞에서 자진해 밑바닥 인증하는 네 그 멍청함 때문이라고.’
무서웠다. 세인은 지금껏 도균을 조금 괴팍하다고만 생각했지 이토록 두려운 사람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꿈에도 해 본 적 없었다. 짧게 깎아 위화감을 주는 머리와 그을린 피부색. 거기에 당장 여선배를 죽이기라도 할 것 같은, 군모 아래 어둡게 빛나던 충혈된 두 눈.
서 여사를 닮아 새하얀 얼굴과 아름다운 이목구비는 살기 어린 모습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래도 최근 들어 부쩍 세인의 장난과 농담에 드물게 웃어 주기도 하던, 그래서 소녀의 어린 심장을 수줍게 두드리던 그 얼굴이었는데.
‘그, 그만하세요!’
누구도 섣불리 나서지 못하는 난장판에 끼어들 사람은 결국 세인뿐이었다. 군복이 찢어질 정도로 세인이 필사적으로 매달리자 도균의 팔에서 서서히 힘이 빠졌다. 그가 손을 놓자마자 여선배는 입에 거품을 물며 쓰러졌다.
그 뒤로 어마어마한 후폭풍이 몰아닥쳤다. 얄밉긴 하지만 딱히 눈에 띄는 행동은 하지 않아 그냥 조금 거슬리는 존재 정도였던 세인은 사건 이후 눈을 마주쳐서도, 말을 섞어서도 안 되는 투명인간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휴가 중 폭행사건에 휘말린 도균의 문제가 더욱 심각했었다. 하마터면 자신 때문에 영창에 갈 뻔했던 도균을 떠올리면 세인은 끝도 없는 죄책감에 빠져들며 움츠러들었다.
그때의 우울감이 마치 어제 일인 양 생생해서 술이 말 그대로 술술 넘어간다. 세인은 그 여선배를 안주 삼아 열성적으로 씹으며 몇 잔인지도 모를 소주를 연거푸 입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성연아아, 나 진짜, 진짜아!”
“아니라니까. 젠장. 네 친구는 남자친구 만나겠다고 내가 도착하기도 전에 내뺐다고.”
“성연아아. 헝헝.”
“후. 대체 얼마나 마시면 이 지경이 되는 건데?”
만취해 흔히들 하는 말로 ‘꽐라’가 되어 버린 세인을 들쳐 업은 도균이 나지막이 욕을 내뱉었다. 여자고 뭐고 세인이 애타게 찾는 그 성연이란 친구가 부러워질 정도다.
오늘 나랑 그렇게 많은 역사를 쌓아 놓고 어떻게 내 이름은 한 번도 나오질 않나. 나라에선 요즘 같은 무분별한 음주시대에 금주령 같은 거 국회 안건으로 채택도 해 보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닌가?
그래, 뭐, 오늘 정도는 봐주자. 결혼하고 나면 얄짤 없으니 그전에 많이 마셔 두는 것도…… 아니지. 가끔 같이 마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주사 부리는 모습이 꽤 귀여운…….
“진짜! 진짜아아!”
“아까부터 뭐가 그렇게 진짜야.”
“진짜로! 이도균이랑 결혼하기, 끅! 싫어어어.”
경사진 길을 힘든 줄도 모르고 열심히 걸어 올라가던 도균의 두 발이 그대로 섰다. 그 자리에 뿌리라도 내린 듯 멈춰 버린 도균이 비몽사몽으로 어깨에 뺨을 부비는 세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왜, 뭐가 그렇게 싫은데?”
“아, 왜! 그런 거 있잖아아. 그…… 부조화!”
“부조화라.”
세인이 눈도 뜨지 못하고 소리친 단어를 도균이 곱씹듯 힘주어 내뱉었다.
“그래, 그으래. 부조화. 세상엔 같이 있으면 마이너스밖에 안 되는 조합이란 게 있잖아. 그게 바로…… 이도균이랑 나, 민세인이라고.”
마이너스라. 어떻게 보면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세인과 함께 있으면 그는 자제력을 잃고 나사가 하나 빠진 사람처럼 어딘가 모자란, 마이너스의 사람이 되어 버리니까. 문제는 그게 싫지 않다는 거다.
“읏차.”
도균이 쓴웃음을 베어 물며 세인을 고쳐 업었다. 축 늘어져 까딱하면 떨어질 것 같은 세인을 단단히 붙들고 도균은 자신이 세인에게 어디까지 너그러워질 수 있을지 그 한계가 새삼 궁금해졌다. 다른 사람이었더라면 얼어 죽든, 차에 치여 죽든 그건 그 정도로 취할 만큼 술을 마신 본인 탓이라고 생각하며 참견하지 않았을 것이다.
“히잉……. 나두 찌인한 연애라는 거…… 함 해 보고 싶었는데에…….”
흠냐흠냐. 입맛을 다시며 아예 곯아떨어져 버린 세인을 업은 채 쌀쌀한 밤길을 천천히 걸어가는 도균의 머릿속은 깜빡거리는 가로등만큼이나 어지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