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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랑, 나의 신부, 나의 아내


1화

프롤로그


“결혼하자.”
“네?”
“결혼해, 나랑.”
MT 가서 들이부은 술이 아직 덜 깬 건가.
세인은 검은색의 으리으리한 철문을 막아선 채 자신을 가만히 내려다보는 무표정한 도균의 얼굴을 갸웃거리며 응시했다. 입고 있는 각 잡힌 회색 슈트만큼이나 딱딱해 보이는 도균의 입매를 거의 노려보다시피 하던 세인이 남아 있는 술기운을 몰아내려는 듯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초봄의 햇살 아래에서 그녀의 머리카락이 갈색으로 물결쳤다.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결혼하자고 했어.”
“결혼하세요? 어머! 축하…….”
“결혼하자고 했지 누가 결혼한대?”
“결혼하자고요? 누가 누구랑…… 저랑 도련님이요?”
도균의 눈썹이 홱 하니 위로 들리는 것을 보며 세인은 속으로 뜨끔했다.
그놈의 도련님 소리. 이 집에서 매일 들으면서 유독 세인의 입을 통해 나오는 소린 듣기 싫어했다. 도균이 몇 번이나 경고를 주었지만 다들 그를 보며 도련님, 도련님거리니 세인이 아무리 주의해도 고치기가 쉽지 않았다.
아니, 지금 이런 호칭 문제를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니다. 술이 덜 깨서 환청을 듣는 거라든가, 꿈을 꾸는 게 아니라면…….
“혹시 어디 아프세요? 아니면 뭘 잘못 드셨다든지.”
“아니, 아주 멀쩡해. 누구처럼 밤새 술을 퍼마시지도 않았고.”
역시나.
비꼬는 도균의 목소리에 세인의 아랫입술이 못마땅한 듯 삐죽 튀어나왔다.
“지금이 무슨 조선시대도 아니고, 제가 어린애도 아닌데 학교생활하다 보면 술도 한잔할 수도 있고, 외박도 좀 할 수도 있는 거……죠.”
눈으로 화살이라도 쏠 듯한 기세인 도균의 앞에서 어쩔 수 없이 목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정말 잘못한 거 없다고 생각하는데 어째서 도균이 이런 식으로 눈을 부라리면 겁먹은 강아지처럼 꼬리를 말게 되는지 모를 일이다.
“지금이 조선시대도 아니고, 민세인 네가 어린애도 아니니까 더 위험하다는 생각은 전혀 안 드나 보지?”
“뭐, 그런 생각 안 해 본 건 아니지만, 도저히 어쩔 수 없는 경우라는 것도 있잖아요. 마지막 MT였다고요. 이제 저도 취업 준비를 해야 하니까 동아리 활동은 앞으로…….”
“취업 준비는 됐고, 결혼 준비에 전념해.”
“네, 결혼 준비도 물론 해…… 네?”
세인이 튀어 오를 듯 격하게 놀라자 도균은 그 모습이 또 마음에 들지 않는지 벌써 세 번째로 눈썹을 치켜 올렸다.
“뭘 그렇게까지 놀라?”
“아니, 그렇잖아요. 안 놀랄 수가 있나. 장난인 줄 알았는데 여러 번 말하니까 이제 진짜인가 헷갈린다고요. 도련…… 아니, 오빠랑 저랑, 뭐요? 뭘 하자고요?”
“결혼.”
“하?”
“그 말도 안 된다는 표정, 내 쪽에서 받아들이기에 정말 말도 안 되는 거라는 건 알고 있지.”
하? 하! 하는 요상한 소리만 연신 내뱉는 세인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도균을 위아래로 훑기 시작했다. 이 인간이 정말 어디 아픈 게 아니라면, 혹시 신종 괴롭히기 수법인가 싶어서다.
“결혼이요?”
“그래, 결혼.”
“결혼이라고요?”
“그래, 결혼이라고. 대체 몇 번이나 말하게 할 작정이야?”
그사이 차고에서 차를 빼 온 도균의 기사가 안절부절못하며 끼어들 타이밍만 노리고 있자 도균이 한 손을 들어 기다리란 신호를 보냈다. 도균은 여유롭게 팔짱을 끼는데 세인은 멀찌감치 운전석에 앉아 창문을 내리고 대화를 엿듣고 있는 기사 덕분에 개에 쫓기는 닭마냥 조급해졌다.
“아침부터 대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예요. 아니다, 그러고 보니까 지금 2시가 넘었는데? 왜 이제 출근하세요?”
보통은 해가 뜨기도 전에 출근해 밤 9시, 10시가 되어서야 퇴근해 집에 들어오는 일중독 말기 환자가 이 시간에 집을 나선다는 건…… 역시나 어디가 아픈 게 틀림없어.
멋대로 답을 내린 세인이 두 걸음 정도 떨어져 있던 도균과의 간격을 좁히며 그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그러고 보니 혈색도 나쁘고 어딘가 창백한 것이, 잠도 잘 못 잤나? 눈은 또 왜 이렇게 충혈되어 있어?
“뭐하는 거야.”
“밤새우셨죠?”
“뭐?”
“토끼눈이에요. 어휴, 꿈에 나올까 봐 무섭네. 그러게 사모님께서도 매일 일 좀 줄이라고 그러시잖아요. 일은 회사에서만 하면 됐지 왜 집까지 끌고 들어오셔서는 집안 식구들 다 고생시키는지 몰라. 쯧. 이제 도련님도 슬슬 나이 생각을 하실 때라고요. 밤새고 그러는 건 저처럼 파릇파릇한 이십 대 때에나…….”
하여튼 요놈의 입이 방정이다. 참, 이상한 일이다. 밖에선 오히려 조용한 편이란 소리를 듣는 세인인데 도균의 앞에만 서면 말 못 해 죽은 귀신이라도 붙은 사람처럼 주절주절 제어가 잘 안 됐다. 그가 유독 말이 없어서일 것이다. 어쩌다 말을 길게 한다고 하더라도 다정한 맛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고.
뭐, 그런 게 입방정의 핑계 거리가 되냐고 한다면, 희한하게 세인에게 도균과 있을 때의 침묵은 견디기가 힘든 것이었다. 저쪽이 조용하니 나도 입 다물고 있자, 다짐해도 곧 물거품이 되고 마는 건 고요하면 할수록 도균의 시선이 더 진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사람을 빤히, 그대로 꿰뚫을 듯 쳐다보는 도균의 그 불편한 버릇 때문이다.
“일하느라 밤새운 거 아니야. 그리고 방금 그 말, 내가 중늙은이라도 된다는 거야 뭐야.”
봐봐, 저 눈. 아주 오금이 저린다니까.
세인이 눈동자를 굴리며 허허, 멋쩍게 웃었다.
“뭐 그렇게까지 확대해석하실 필요가 있나요. 제 말은, 전 앞자리에 아직 2가 붙어 있지만, 도련님은…… 아니, 오빠는 올해로 3을 다셨으니까 조금 더 건강을 챙기셔야 한다는 뭐 그런 뜻이죠. 다 걱정돼서 드리는 말이라고요.”
“네가 내 걱정도 해?”
“어유, 그럼요. 저를 비롯한 이 저택의 모든 피고용인들은 자나 깨나 사모님과 도련님의 건강과 편의를 위해…….”
“됐어. 너는 굳이 덧붙여서 좋을 것 없는 말을 늘어놓는 그 버릇 좀 고치도록 해. 그게 내 정신 건강에 훨씬 도움이 될 것 같으니까. 그리고 민세인 너, 내가 누누이 말한 걸로 아는데.”
“네?”
“너는, 내, 피고용인, 아니라고.”
딱딱 끊어 말하는 그가 무서워서 따스한 봄 햇살을 베풀던 해마저 두꺼운 구름 사이로 순간 숨어 버린 것 같다. 세인은 한기가 느껴지는 팔을 두 손으로 교차해 감싸고는 망할 놈의 입을 머릿속으로 수차례 꼬집고 있었다. 물론 처량한 눈빛으로 기사를 흘끔거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제발, 윤 기사님. 이 저승사자를 이제 그만 거두어 가 주세요.
“눈, 원위치.”
윤 기사가 미안하다는 얼굴을 해 보이고 세인은 거의 울상으로 다시 도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저기, 도련…… 오빠, 출근 안 하세요?”
“네가 대답을 해야 갈 거 아니야. 안 그래도 아주, 심각하게 늦었어. 그러니까 빨리.”
번쩍거려서 눈이 멀어 버릴 것 같은 손목시계를 한 번 들여다본 도균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팍 찌푸리곤 그녀를 재촉했다. 그러나 세인은…….
“넹? 빨리라니 뭘용?”
어제 하루 감지 못해 불쾌감이 드는 머리를 한 손으로 긁으며 눈만 뎅그렇게 뜰 뿐이다. 도균이 한숨을 땅이 다 꺼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길게 내쉬었다. 움찔한 세인이 주춤하며 뒤로 물러섰다. 세인이 물러난 그만큼, 아니 그보다 한 발짝 더 도균이 다가섰다. 그녀의 코앞까지 그의 얼굴이 다가왔다.
“결혼 말이야. 결. 혼.”
“어…… 그게…….”
“대체 지금까지 내 말을 뭐로 들은 거야?”
제대로 듣긴 들었죠. 근데 어딘가 아파서 헛소리하는 줄 알았죠.
“그러니까 오빠가 아픈 것도 아니고, 실성한 것도 아니고, 지극히 제정신인데 지금 나한테 결혼하자고 한 거 맞아요?”
“정확히 맞아.”
아니…….
“대체 왜요?”
뭐 이런…….
“대체 오빠랑 저랑 결혼을 왜 해요? 아니, 오빠가 나랑 결혼을 왜 해요? 같은 말인가? 아, 혹시 이거 몰래카메라?”
“후. 정신 차려, 민세인. 나 지금 진지하니까.”
“진지. 네, 진지. 저도 그럼 진지하게 물을게요. 왜요? 대체 왜?”
더 가까워질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손바닥만큼의 틈을 남겨 두었던 도균의 얼굴이 불쑥 쳐들어왔다. 코끝이 닿았다. 화들짝 놀라 몸을 뒤로 빼려는 세인의 팔을 그의 손이 힘 있게 그러쥐었다.
갑자기 쿵쾅쿵쾅하는 소리가 들려 어디 지진이라도 났나, 천둥이라도 치나 싶었는데 알고 보니 그녀 자신의 심장 소리였다. 얼굴이 당장이라도 터져 버릴 것처럼 달아올라서는 어지러운 머릿속을 정리하지도 못하고 속수무책 도균에게 잡혀 있는데, 그의 입술이 감질날 만큼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하고 싶으니까.”
“무, 무슨…….”
“내가 민세인 너랑 결혼을 하고 싶으니까.”
그가 씨익 웃었다. 정말 오랜만인 거 같다. 이렇게까지 환하게 웃는 이도균은. 해가 너무 강해서 헛것을 보나. 세인이 손을 눈썹 뼈에 갖다 대고 햇빛을 막았다. 그러나 찡그렸던 눈을 제대로 뜨고 보니 그의 웃는 얼굴이 더욱 선명하게 보일 뿐이다. 세인은 그때 멍하니 매끄러운 입술을 올려다보며 그런 생각을 품었던 거 같다.
평화는, 끝났다.

1.


도균과 처음 만났던 때가 언제더라. 정확한 나이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녀는 무척 어렸고 계절은 한파가 대단했던 겨울이었다. 아빠의 손을 꼭 잡고 그때는 지금보다 훨씬 으리으리해 보였던 검은 철문 앞에 서서 호기심에 찬 까만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아빠, 이제 여기서 일해?”
“응. 여긴 세인이랑 아빠가 이제부터 살 집이기도 하지만, 아빠 직장이기도 하니까 우리 세인이 여기서…….”
“어른들 말씀 잘 듣고, 버릇없이 굴지 말고, 인사도 잘하고. 또 뭐 있었지, 아빠?”
자신이 할 말을 가로채 손가락을 꼽아 가며 외는 세인이 대견하면서도 안쓰러운 듯 그녀의 아버지인 경호는 딸의 작은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세인아, 여기엔 세인이보다 여섯 살 많은 오빠야도 있어.”
“우와! 정말?”
“응, 그런데 그 오빠야는 좀 아프대. 그래서 세인이랑 잘 안 놀아 줄지도 몰라. 그러니까 우리 세인이 그 오빠야가 세인이한테 혹시 화내고 저리 가라고 그래도 너무 속상해하지 마, 알았지?”
“응응. 근데 오빠야는 어디가 아프대?”
“마음이 아프대.”
세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비장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조그맣게 말린 주먹이 꽤 다부지기까지 했다. 마음이 아픈 오빠야라니, 세인이가 호 해 줘야지.
이윽고 철문이 그들 부녀에게 틈을 내어 주었고 세인은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그 저택에 첫 발을 내딛었다.
저택엔 일하는 사람들이 참 많았다. 그리고 거실이라기보다는 홀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넓은 공간의 한가운데에는 화려하게 장식된 트리가 버티고 있었다.
세인은 아버지의 손을 놓고 이야, 와아, 하는 감탄사와 함께 트리 주위를 돌다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곧 머루 같은 눈동자가 놀란 듯 동그래졌다. 털이 송송 돋아난 흰 니트 원피스를 입은 아름다운 여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안녕하세요!”
세인이 유치원에서 배운 대로 허리를 숙여 우렁차게 인사하자 여자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여자가 허리를 굽히더니 세인을 향해 팔을 뻗었다.
“네가 세인이구나? 이리 와 보렴. 아줌마가 한번 안아 보자.”
세인이 눈치를 보며 머뭇거리자 경호가 조심스럽게 등을 떠밀었다. 그에 용기를 얻은 그녀가 작은 발을 움직여 여자에게 포옥 안겼다. 좋은 향기가 났고 더할 나위 없이 포근했다. 엄마 품을 제대로 느껴 보지 못했던 어린 세인은 어쩐지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여자의 어깨에 턱을 걸치고 앙증맞은 입술을 꾹 깨물며 눈물을 참아 내던 세인의 시선이 2층으로 통하는 계단 난간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누군가의 시선과 마주친 건 바로 그때였다.
“어!”
세인이 작게 탄성을 내지르자 지금까지 쭉 관찰하듯 아래를 내려다보던 소년이 뒤돌아 사라졌다. 다다다. 달리는 발걸음 소리가 도망치는 것처럼 들렸다. 경호를 돌아본 세인이 천진난만한 얼굴로 물었다.
“그 오빠야야?”
경호가 고개를 끄덕이자 세인의 뽀얀 얼굴이 분홍색으로 물들었다. 언뜻 본 얼굴이 마치 백설공주나 신데렐라 같은 동화책에 나오는 왕자님처럼 근사했다.
“가서 인사해도 돼, 아빠?”
“그럴래? 오빠는 이층 복도 맨 끝 방에 있을 거야.”
여태 세인의 통통한 손목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여자가 경호 대신 대답했다. 세인이 기다렸다는 듯 방긋 웃으며 곧장 소년이 사라진 2층으로 달려 올라갔다. 쭉 이어진 복도 양쪽으로 여러 개의 방문이 마주 보고 있었고, 여자가 말했던 가장 마지막 방의 문이 비스듬히 열린 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문 앞에 서서 긴장으로 땀이 찬 손바닥을 연신 옷깃에 비비던 세인이 노크했다. 안에서 아무런 기척이 없어 한참을 서성댄 끝에 슬그머니 문을 밀었다.
“오빠야……?”
침대 위에 앉아 있는 소년이 입을 꾹 다문 채 날카로운 눈으로 세인을 응시했다. 그 시선에 주춤거리면서도 세인은 결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소년은 그녀가 코앞에 다가올 때까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동상처럼 그 자리를 지켰다.
“……오, 오빠, 안녕?”
세인이 손을 흔들며 살갑게 인사했지만 소년은 그저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것 말고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부끄러워진 세인이 서둘러 손을 내렸다.
“우리 친하게 지내자! 나는 일곱 살인데, 오빠는 몇 살이야?”
대꾸가 없는 소년을 보며 세인은 차라리 곰 인형과 얘기하는 게 낫겠단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쉽게 물러날 세인이 아니다. 뭔가 같이 가지고 놀 만한 장난감이 없을까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녀는 탁자 위 천사 모양의 크리스털 장식물을 발견하곤 반짝 눈을 빛냈다.
“이야, 진짜 예쁘다!”
섬세하고 정교하게 세공된 조각이었다. 어른 손바닥보다 더 큰 크기의 장식물을 신기한 듯 관찰하던 세인은 천사의 발치 아래 양각으로 새겨진 글자를 찾아내곤 소리 내어 읽었다.
“이…도…여.”
마지막 한 글자를 발음하려던 찰나, 세인은 뭔가가 깨지는 요란한 소음과 함께 옆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소년이 그녀를 거칠게 밀어 버린 것이다.
세인이 울먹이며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작은 손에는 넘어질 때 반사적으로 움켜쥐었던 테이블보가 들려 있었다. 세인은 뒤늦게 바닥에 산산조각 나 뒹구는 크리스털을 보곤 아뿔싸 혀를 깨물었다. 곧 우당탕하는 소리를 들은 경호와 여자가 뛰어 들어왔다.
“세상에. 어디 다친 데 없니?”
여자가 세인을 번쩍 안아 들며 물었지만 그녀는 잔뜩 얼어붙어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부서진 크리스털 조각을 들고 소년이 세인을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작 일곱 살짜리가 감당하기엔 너무나 무서운 시선이었다. 세인은 경호의 야단보다 말없이 그녀에게 꽂혀 있는 그 새카만 눈동자가 더 겁이 나서 왈칵 눈물을 쏟고 말았다.
그렇게 세인에게 소년의 첫인상은 동화 속 왕자님에서 심술대마왕 악당으로 강등되었다.
그리고 곧 세인은 이 저택의 주인이자 소년의 엄마인 중년 여성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도련님’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머지않아 세인 역시 자연스럽게 그를 도련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면 그가 휙휙 눈을 흘기곤 했는데 그때마다 세인은 불현듯 떠오르는 첫 만남의 악몽에 습관처럼 잔뜩 긴장하고 말았다.
그랬던 그가 세인의 인사에 처음으로 대꾸해 준 것이, 그러니까 정확히 말하면 실어증을 앓던 그의 말문이 터진 것이 그녀와 그녀의 아버지인 경호가 그 집안에 들어가 살게 된 지 꼬박 4년 후의 일이었으니, 세인의 마음고생이란 말로 다 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후에도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도균은 유난히 세인에게만 쌀쌀맞게 굴었고 그녀는 그런 그를 어려워했다.
그렇게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내면서 세인의 마음속엔 절대 불변의 진리 같은 것이 자리를 잡았다.
‘도련님, 그러니까 이도균은 나를 끔찍이 싫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