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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 한정 연애 2화

1. 시작 (2)


***



하루의 일과를 섹스로 마무리하는 건 언제나 개운함을 줬다. 먼저 샤워를 끝낸 인석이 의자에 앉아 맥주를 거의 비워 갈 때쯤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남자 하나가 욕실에서 나왔다.

“다 씻었으면 맥주 한잔해.”

“가야 해. 내일 촬영 있어.”

“오후부터라며? 거기다 대사 다섯 마디라고 하지 않았어? 금방 외우잖아.”

남자는 인석의 말에 삐딱하게 웃으며 옷을 걸치고 소매의 단추를 채웠다.

“대사 다섯 마디여도 중요해.”

“안 중요하다고 한 거 아니야. 화내지 마. 미안. 내가 말실수했다. 집에 데려다줄게. 맥주나 한잔 마시자.”

“앞으로 너 만나러 안 올 거야. 우리 여기까지 하자.”

“뭘 여기까지 해?”

“이 짓 말이야.”

“이 짓?”

“못 하겠어. 너랑 이렇게 만나는 거.”

“침대에서는 좋아 죽더니 이제는 못 하겠다?”

“너랑 섹스하는 거야 좋지. 아니, 너랑 있는 거 좋아. 말했잖아. 난 너 좋다고. 그런데 넌 아니야.”

결국 재킷까지 걸쳐 입은 남자를 보고 인석은 눈썹을 긁적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억 안 나? 난 분명 우리 사이 밝힐 수 있다고 했어. 숨어서 만나고. 거절한 건 너야.”

“만난 지 두 달 만에 그것도 동성 애인을 발표하자는 놈이 정상이야?”

“기간이 뭐가 중요해? 너 좋아한다니까. 거기다가 너 출연하는 작품이 영화제 나간다고 해서 내가 출근도 전인 회사 쳐들어가서 후원하겠다고도 했어. 그거 해 주려고 내가 얼마나 머리 굴렸는지 알아? 아니면 영화제에서 프러포즈라도 해 줄까? 스크린으로 고백해 줘? 다 해 줄게. 그러니 앉아. 이 맥주 맛있네.”

“넌 늘 모든 게 쉽지. 내가 잃을 것들 생각 안 해?”

“그래서 내가 책임져 준다니까. 네가 벌어들이는 그 수입…….”

인석은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문다. 이 남자, 황민기는 3년 차 배우지만 이렇다 할 만한 대표작은 없었다. 잘생긴 얼굴에 연기 실력까지 갖췄지만 한 회에 나올까 말까 하는 조연을 맡은 게 전부였다. 수입이 넉넉할 리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민기는 남자와 만나는 걸 불안해하고 눈치를 봤다. 혹시나 세상에 알려져 그나마 하는 일도 못 하게 될까 봐 걱정했다. 그 모습이 답답해 혹시라도 문제 생기면 수입을 책임져 주겠다고 했다. 그런데도 거절한 건 민기였다. 인석은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그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게 돈에 관한 말은 도로 삼켰다.

“아무 일 없게 해 줄게.”

“문성 그룹 아드님께서 뭐가 겁나겠어. 직장 잃을 일도 없고. 너 눈치 보여서 쑥덕거릴 사람도 없겠지. 아니, 넌 애초 잃어도 아쉬울 만한 걸 가져 본 적 없잖아. 거기에 나도 포함되고.”

여전히 알 수 없는 말에 인석을 미간을 좁혔다.

“하지만 난 아니야. 배우가 되기 위해 중학교 때부터 수업 끝나면 학원에 다녔어. 밤늦게까지 연습하고 엑스트라부터 시작해서 여기까지 왔어. 선배들에게 굽신거리고, 사람 취급도 안 하는 감독 밑에서 한 장면이라도 출연하려고 억지로 웃었어. 네 눈에는 주연 하나 따지 못하는 내가 우습게 보이더라도 배우는 내 꿈이고, 내 인생의 전부야. 그런데 넌 그거 잃고 힘들어할 난 걱정했어? 내 생각 한 적 있어?”

“걱정돼. 생각했고. 좋아한다고. 너.”

“너 나 안 좋아해. 넌 좋아하는 거 뭔지 몰라. 처음 만날 날부터 마치 내게 푹 빠져 있는 것처럼 굴어서 내가 착각했다. 서로 좋아 죽는 연인이라도 된 것 같았는데 정신 차려 보면 그냥 이건 놀이야. 너 만족을 위한 놀이.”

민기는 인석이 완벽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잘 맞춰 주고, 화내는 일 없고, 마치 자신을 위해 뭐든지 해 줄 것처럼 굴었다. 실제로 해 주기도 했다. 그런데 만날수록 어쩐지 가슴이 서늘했다. 촬영장에서 상대 없이는 죽을 것 같은 연인처럼 굴다가도 카메라가 꺼지면 돌아서는 배우 같았다. 만나면 언제든 그는 사랑에 빠진 역할에 들어갔지만, 돌아서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될 것 같았다.

“내가 뭐가 부족했는지 말해 봐. 그럼 고쳐 볼게.”

“나한테 키스해 봐.”

“…….”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서 있는 인석을 보며 민기는 그럴 줄 알았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두 달 동안 몸을 섞었어도 그와 키스를 해 본 적은 없었다.

“너 안 부족했어. 잘생겼고, 몸 좋고, 매너도 좋아. 그래, 내가 그동안 만난 사람 중에서 제일 좋았어. 다만 난 섹스뿐만이 아니라 연애할 사람을 만나고 싶어. 네가 불쌍해서 말해 주는 건데, 너도 사랑해라. 내가 떠나도 넌 아무렇지 않고, 잃을 거 없다고 생각하며 살겠지. 그런데 너도 언젠가는 잃는 게 무서워서 아파하는 날 왔으면 좋겠어. 그래야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 거야.”

민기는 그렇게 말하고 나가려다가 멈칫하고 뒤를 돈다.

“우리가 이렇게 됐어도 영화제 후원은 계속해 줘. 뻔뻔한 거 아는데, 부탁할게. 다들 열심히 준비했어. 사람들 관심이 많이 부족한데 네 결정이 큰 힘이 될 거야.”

“후원 번복할 생각 없어.”

“고맙다.”

민기는 그대로 호텔 방을 빠져나갔다.

기가 막힌 상황에 인석은 헛웃음을 내뱉었다. 텅 빈 방에서 되새겨 봐도 지금 상황을 이해할 수 없지만, 섹스 후 마시는 맥주는 여전히 맛있다.



***



영화제 위원회가 있는 건물은 생각보다 낡았다.

1층에는 커피 매장과 분식점, 2, 3층에는 작은 독립영화관이 있다. 그리고 그 건물 위로 영화제 위원회가 운영되고 있었다. 평소에는 영화관 관리 사무실로 사용됐지만, 영화제 기간에는 이쪽 일도 함께 처리한다고 했다.

건물이 낡은 만큼 주차장도 작고, 그나마 자리도 없어 인석은 조금 떨어진 곳에 차를 세워 놓고 여기까지 걸어왔다.

5월이 되면서 날씨가 부쩍 더워졌고, 햇살이 강해 인석은 얼굴을 찌푸리며 건물을 올려다봤다. 요즘에도 이런 영화관이 있다니 신기한 일이었다.

평소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영화제에 후원하겠다고 생각한 것은 애초 황민기 때문이었다. 원한다고 해서 해 줬고 헤어졌다고 이제 와 후원을 취소할 생각은 없지만, 일은 일대로 늘어나고 며칠간 섹스를 못 했더니 짜증이 쌓였다. 회사에 들어간 후로 새로 사람을 만날 시간이 없었다. 문성 직원과는 절대 만나지 말라는 가족의 부탁도 있었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인석 역시 사내 연애는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민기가 섹스는 나쁘지 않았지.’

인석은 더운 날씨 때문인지 갈증을 느끼며 4층 사무실로 올라갔다. 문을 두드리고 삐걱거리는 문을 열자 기다렸다는 듯이 남자 하나가 다가왔다.

“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영화제 집행위원장 이경환입니다.”

수더분해 보이는 남자는 인석이 등장하자 반갑다는 듯이 외쳤다. 그도 그럴 것이 3회째 맞는 영화제는 2년 연속 적자였고, 올해도 그다지 나아진 것 없이 빠듯한 예산으로 꾸려 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후원하고 싶다는 기업이 나타났다. 그동안 후원 모집 글을 올려도 대부분은 성인용품을 파는 쇼핑몰이나 속옷 가게, 근처 음식점이 다였다. 이들에게 당연히 고마운 마음은 있지만, 영화제를 운영하는 입장에서는 조금 더 큰돈을 대 줄 곳이 필요했었다. 그러던 중 인석에게 연락이 온 거다. M&F에서 후원하고 싶다는 말이었다. 그렇게 큰 업체에서 후원하는 것도 처음이었고, 제시한 돈도 상당했다.

영화제를 더욱 크게 키우고 싶은 경환에게 인석은 반드시 잡아야 할 사람이었다. 속내를 감추고 감사의 의미로 밥 한번 먹자고 끈질기게 말한 덕에 인석이 여기까지 왔다. 물론 시간이 없어 식사까지는 무리고 잠시 들른 거라 했지만, 그것만으로도 맨발로라도 뛰어나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앉으세요. 오시느라고 고생하셨어요. 밖에서 저희가 제대로 대접하고 싶었는데요.”

“아닙니다. 저도 여기 둘러보고 싶어서 왔습니다.”

“조금 작죠? 그래도 저희가 여기뿐 아니라 이 근처 몇 군데 영화관이랑 계약해서 상영관은 더 많아요. 찾아오는 사람도 많고요.”

이미 영화제에 관해 설명은 했지만 혹시나 이제 와 후원을 취소하거나 규모를 줄일까 봐 경환은 다시 한번 강조했다.

“네, 좋습니다.”

하지만 인석의 대답은 긍정적이고 깔끔했다. 경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인석을 위에서부터 쓱 살폈다.

훤칠한 키에 뚜렷한 이목구비. 꽤 신경을 썼을 것 같은 머리 스타일과 화려하거나 과하지는 않지만 전부 명품으로 휘감은 옷차림. 겉에서 봤을 때도 어디 하나 군살 없이 탄탄할 것 같은 몸. 거기다 시원시원한 말투에서 나오는 성격까지.

영화제 운영을 3년째 하면서 대부분 무명이거나 신인이지만 배우들을 꽤 봤다.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고 해도 배우는 배우. 일반인보다 미남이라고 칭해지는 이들을 수없이 봤는데도 인석은 그들과 비교해도 절대 손색이 없었다.

일은 일이고, 취향으로만 따져 봐도 인석이 마음에 들어 경환은 옆에 함께 앉은 희정을 향해 씩 웃다가 그녀를 소개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다.

“아, 여기는 저희 운영진이기도 하고 영화제에 참여하는 감독입니다. 마침 오늘 회의가 있어서 온 김에 전무님 오신다고 해서 인사드리려고 같이 기다렸습니다. 강희정 감독입니다.”

“반가워요. 영화제 함께해 주신다니 감사합니다.”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는 작은 체구였지만 강한 인상에 고집 있어 보였다. 사람 좋은 얼굴로 웃어 보이지만, 모르긴 몰라도 함께 일하는 스태프들은 고생할 것처럼 느껴졌다. 절대로 대충 넘어가는 일이 없을 것 같은 모습은 개인적으로 인석이 좋아하는 타입이긴 했다.

“반갑습니다.”

낮은 목소리로 인사하는 인석을 보며 희정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재벌 2세의 젊은 전무라고 해서 부모 잘 만나서 편하게 사는 사람일 거라 생각했는데, 그의 첫인상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같이 일하려면 골치 좀 아플 것 같았다.

“자세한 건 저희 마케팅 직원과 이야기 나누셨다고 들었습니다. 준비 기간이 짧지만 최대한 서로 홍보 효과를 볼 수 있는 쪽으로 잘해 보죠.”

“저희야 사실 이런 쪽은 잘 모르니 전무님이 많이 이끌어 주세요. 이거 드시면서 천천히 말씀하세요.”

어차피 영화제의 규모가 작아 M&F의 매출을 눈에 띄게 높일 수 있는 것도 아닌데도 마치 큰 비즈니스 장에 나와 있는 것 같아 경환은 긴장하다가 인석이 한입 크기로 잘라 내놓은 빵을 입에 넣는 모습을 보고서야 겨우 숨이 트이는 것 같았다.

“경환 씨, 저희 초대장 있지 않아요? 전무님도 드려요.”

“그럼요. 드려야지. 전무님뿐 아니라 직원분들도 오시라고 저희가 넉넉하게 드리겠습니다.”

“초대장은 괜찮습니다. 회사에 문화의 날이 있는데 날짜가 영화제와 겹치더군요. 관심 있는 직원들이 올 겁니다. 어차피 회사에서는 써야 하는 복지 예산이니 이왕이면 이곳에 쓰면 좋죠.”

“전무님 말씀하시는 게 어쩜 이렇게 다 멋지실까.”

이렇게 깨어 있는 사람이라면 여름에 진행될 퍼레이드에도 후원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경환은 욕심이 났다. 그렇다고 벌써 그 이야기를 꺼내기에는 속 보이고, 조금씩 친해지기 위해 마치 이제 막 떠올랐다는 듯이 경환은 아, 외치며 손뼉을 부딪쳤다.

“영화제 폐막식하고 쫑파티 하는데 그때 오세요. 가볍게 술 마시고, 저녁 먹으면서 놀려고요. 스태프랑 배우도 오고 관객들도 초대했어요.”

“네, 시간이 되면 가 보죠. 전 그럼…….”

오늘은 어차피 찾아오겠다는 경환의 말이 귀찮아 근처에 볼일도 있어 잠시 들렀을 뿐이었다. 더 있다가는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 인석이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하고 자리를 뜨려는데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한 남자가 들어왔다. 그는 안으로 더 들어올 생각을 하지 않고 삐걱거리는 문손잡이를 잡고 서 있었다.

“어머, 진우 왔네.”

“너 왜 이렇게 얼굴 보기가 힘든 거야. 전무님 잠시만 실례할게요.”

두 사람 모두 아는 사람인 건지 반가운 얼굴로 일어났다. 그에 비해 진우라고 불린 남자는 무표정했다.

얇게 진 쌍꺼풀에 눈이 크고 또렷한 남자다. 희정과 나란히 섰을 때 조금 더 어깨가 올라가는 정도이니 그리 큰 편은 아닌 것 같은데, 마른 체형 때문인지 문을 열었을 때는 키가 꽤 커 보였다. 붉고 가는 입술이 살짝 다물려 고개만 끄덕이는 남자는 전반적으로 재미없어 보이는 인상이었다. 보는 사람에 따라 내 이야기를 제대로 듣고 있는 건 맞나, 싶을 정도로 무기력해 보였다.

계속 보고 있는데도 낯선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 건지, 아니면 일부러 무시하는 건지 인석에게 시선 한번 주지 않은 남자는 손에 든 서류 봉투를 전해 주더니 그대로 다시 문밖으로 나갔다.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해요. 일 때문에 잠시 이야기하느라고요.”

“괜찮습니다. 스태프인가요?”

“방금 온 남자요? 희정 감독 작품 번역해 준 사람이에요.”

“그렇군요. 표정이 안 좋아서 영화제에 무슨 문제 생긴 줄 알았습니다.”

“문제라니요. 그런 거 없어요.”

경환은 손까지 흔들며 부인했다. 희정도 전혀 아니라며 웃어 보였다.

“쟤가 좀 딱딱해서 그래요. 영상 번역 맡겼을 때도 어찌나 웃지도 않고 말이 없는지. 일하기 싫어하나 했는데 결과물은 꼼꼼하고 실력 있어요. 몇 번 만나 보니 원래 그게 성격이라는 것도 알겠고요.”

“저 사람도 쫑파티에 오나요?”

이상한 관심이었다. 물론 당사자인 인석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오는 사람을 거절하지 않는 만큼 눈에 드는 사람에게도 관심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자신감이기도 하고, 그동안 흥미 있는 것은 망설이지 않고 해 봤으니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애초 남의 눈치를 보며 살지도 않았다.

“글쎄요. 사람 많은 데를 안 좋아해서 오라고 해도 올지는…….”

희정은 말끝을 흐리며 경환을 봤다. 경환은 어깨를 으쓱했다. 의아해하는 두 사람과 달리 인석은 태연한 얼굴로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다음 일정이 있어서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대접도 제대로 못 했는데 죄송하네요. 식사라도 같이하시면 좋았을 텐데요.”

“아닙니다. 빵 맛있었습니다.”

구체적인 진행 상황은 마케팅팀과 공유하기로 하고 인석은 낡고 좁은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1층까지 이대로 내려가려다가 영화관을 한번 둘러볼까 싶어서 2층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밖으로 나가자 안에는 몇몇 사람이 영화를 기다리고 있다. 낯선 독립영화의 상영을 알리는 영상이 작은 브라운관을 통해 나오고, 그 아래로 전단이 꽂혀 있다. 겉에서 봤을 때도 예상은 했지만, 내부는 정말 작았다. 한눈에 보이는 실내 벽 한쪽에는 이번 LGBT 영화제 홍보를 위한 포스터가 나란히 붙어 있다.

인석은 홍보 포스터들을 하나씩 보다가 ‘허락’이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 앞에 섰다.

강희정 감독의 작품으로 스웨덴의 한 광장에서 두 남자가 키스하고 있고, 그 뒤로 무지개 깃발을 든 여러 사람이 환호하는 장면이다. 포스터 하단에는 작은 글씨로 감독 이름과 함께 음향, 조명 등 스태프 이름이 나열되어 있고 중간쯤에 번역이라는 글자가 있다. 그리고 그 옆에 ‘서진우’라는 이름이 쓰여 있다.

그 이름을 잠시 보다가 여기서 시간 낭비할 수 없다고 깨달은 인석은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하고 1층으로 내려갔다.



회사로 다시 복귀한 인석은 일에만 몰두했다. 출근 후부터는 늘 그랬다. 지금 당장 문성 패션 내부 사정에 대해 질문해도 막힘없이 대답할 자신도 있고, 같은 업종의 타사 브랜드에 대해서도 훤히 알고 있었다. 그 덕에 직원 몇 명은 보고서를 들고 인석에게 갔다가 다시 그의 사무실을 방문하는 걸 꺼리게 되었다.

문성 패션의 전반을 관리하는 것도 아니고, 그 아래 사업팀 담당도 아닌, 영&캐쥬얼 BG 중 하나인 M&F만 담당한 그의 위치를 비웃던 사람들은 이제 슬슬 이번 인사는 보여 주기용이 아니냐는 말을 했다. 최종적으로 문성 패션의 부회장 자리가 송인석에게 갈 거라 하는 사람도 있었다.

“소문 신경 쓰이세요?”

인석은 문성 패션 부회장인 오태규와 점심을 먹으러 나왔다. 대부분은 인석 혼자 점심을 먹는 편이었지만, 오늘은 태규가 먼저 같이 먹자고 제안했다.

태규는 인석의 아버지이자 문성 그룹의 회장인 송정렬과 오랜 사업 파트너고, 문성 패션의 회장인 인석의 넷째 형에게 경영을 가르친 사람이었다. 문성 패션 회장으로 정렬의 넷째 아들이 임명되었을 때도 태규가 그 자리에 적임자라 말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런데 이제는 그 집 막내아들까지 와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누군가는 부회장을 완전히 밀어내려는 속셈이라는 말도 했다.

“소문? 네가 부회장이 될 거란 거? 그런 깜냥은 있고?”

태규는 재미있는 농담이라도 들었다는 듯이 웃었다. 적대감도 없고 비웃는 것도 아니다. 정말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어렸을 때부터 인석이 아저씨라고 부르며 얼굴을 익혔기에 그리 어려운 사이도 아니었다.

“우리나라가 언제 깜냥 있는 사람을 임원 자리에 앉혔나요. 회장 자식으로 태어나면 되는 거지.”

인석은 자조하듯 웃어 보였다. 태규는 종업원이 가지고 온 음식을 테이블 위에 다 내려놓을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