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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 한정 연애 3화

1. 시작 (3)


“회장님, 자네 아버지 말이다. 내가 그분을 자네와 비슷한 나이 때 만났지. 그분 역시 가만히 계셔도 부모에게 자리를 물려받을 수 있었지만, 다르셨어. 사업에 열정도 있고, 책임감도 느끼셨고. 그런 모습은 신기하게도 자네 형제들 모두 닮았더군. 자네는 어떤가?”

“저 역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 이번 M&F에 진행한 프로젝트는 나쁘지 않았네. 과감했고, 재미있어. 내가 현장에 있던 시절이야 감히 그런 마케팅은 상상도 할 수 없었겠지만, 세상은 변하는 거지. 지금까지 반응도 나쁘지 않다고 들었고. 그런데 송 전무.”

태규는 인석을 지금까지 보아 온 오랜 사업 파트너이자 친구인 정렬의 늦둥이 아들이 아닌, 직원으로서 불렀다.

“어차피 마케팅 방향은 각 BG 책임자에게 준 거니 내가 여기에는 간섭하지는 않겠지만, 이정모 상무와는 잘 지내게. 지난번처럼 일방적으로 일하다가는 적이 된다고. 같이 일하는 사람들끼리 그래서야 되겠어.”

“실적을 보면 오래 일했다고 대우해 주기에는 많이 부족해 보이던데요.”

“M&F는 여러모로 아쉽게 됐지. 나름 문성 패션에서 야심 차게 키우려 했었는데 시기적으로 맞지 않은 것도 있고. 그래도 이 상무가 맡은 다른 브랜드 실적은 꾸준히 상승하고 있어. 봐서 알겠지만.”

“실패한 브랜드에도 이렇게 관대하신 분인 줄은 몰랐네요.”

“사업은 말이야 기본이 숫자 싸움이긴 해. 어쨌든 매출은 높여야 하니까. 그런데 위로 올라갈수록 그것만 볼 수는 없어. 신입이나 중간 관리자 때까지야 유능한 개인이 눈에 띄지. 그런데 혼자 유능한 임원진? 그거 진짜 독불장군에 꼴불견이야. 뉴스에 심심치 않게 재벌가 2, 3세들이 회사 내부에서 문제 일으키지? 솔직히 그들이야 학벌 좋고 어릴 때부터 경영 수업 받았으니 능력도 있겠지. 설마 아무것도 모르는 걸 가져다 놨겠어. 그런데 문제는 그들은 하나같이 소통을 못 해. 어렸을 때부터 잘났다고 대접받으며 살았으니 남의 말을 들으려 하지를 않지. 상대가 모르면 답답해하고, 네가 몰라서 그런다고 소리치고. 그게 대체 뭐 하는 것들이야. 모르면 설득을 시켜야지. 의견이 다르면 우선 듣고, 어떤 게 더 사업에 이익이 되는지 재 보고. 직원은 내 명령을 무조건 따라야 하는 사람이 아니야. 그저 내게 결정권과 책임감이 더 있는 거지. 자네 아버지나 형제들은 그걸 아니 지금까지 말이 안 나오는 거고.”

길어지는 이야기에 인석은 어느새 젓가락을 내려놨다. 잔소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버지와 형제들이 따르는 사람인 만큼 분명 배울 게 있다고 생각해 집중하며 듣는데 태규는 허허 웃으며 말을 끊었다.

“이거 나도 말만 하지 영 행동은 못 하는군. 들게. 국 식겠네. 꼰대처럼 굴지 말자고 하면서도 이렇다니까. 요지는 편 가를 거 아니면 이 상무와 잘 지내. 그래도 그 사람이 직원들은 잘 챙기고 따르는 사람이 많으니.”

능글맞게 웃는 모습이나 자기에게 충성하는 직원을 옆에 끼고 있는 사람이라 인석에게 좋은 인상은 아니었다. 물론 가장 큰 문제는 M&F 실적이 좋지 않다는 것. 그런데도 태규는 그를 다르게 보고 있었다.

“송 전무가 영화제 관계자들과는 계속 연락하는 건가?”

“아닙니다. 그들과 인사는 초반에 했고, 그 후에는 마케팅팀에서 하고 있습니다.”

“그럼 그건 앞으로 송 전무가 직접 맡아서 해. 현장 갈 일도 다 가고. 문화의 날에 직원들과 영화도 같이 보고 와. 문성 패션에 와서 처음 맡은 일이고, 아이디어도 냈는데 그 정도는 해야지 나중에 실무 경험 없는 임원이라는 소리 안 들어. 아직 젊으니 직원들과 말도 잘 통할 거 아닌가.”

인석은 그 말에 미묘한 얼굴이 됐다.

“형에게 무슨 부탁받으셨어요? 아니면 아버지요?”

“연락받은 것도 있고, 나도 어렸을 때부터 널 봤으니 알고.”

태규는 얼큰한 국을 한 숟가락 떠먹으면서 인석을 향해 웃었다. 그도 이제 나이가 든 건지 얼굴에 주름이 가득했다.

“인석아.”

호칭은 다시 송 전무에서 인석으로 바뀌었다.

“아직도 첫사랑 안 해 봤냐?”

알 수 없는 질문에 인석은 그저 어깨를 으쓱했다.



***



영화제 규모가 작다 보니 다행인 건지 아니면 아쉬워해야 하는 건지 우려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물론 영화제와 함께 SNS에 브랜드 홍보를 할 때마다 댓글로 M&F에 실망했다느니, 다시는 사지 않겠다는 반응도 있었다. 하지만 평소보다 더 많은 댓글이 달린 게시글에는 대부분 긍정적인 반응이었고, 공식 계정 SNS 팔로워 수가 지난달 대비 53% 증가했다. 이에 맞춰 M&F에서 낸 언론 기사에도 대체로 긍정적인 반응이었다.

한 달에 한 번 문화비로 지급되는 복지 비용을 영화제 이틀째 되는 오늘, 직원들이 모여 참여한 것도 기사로 나가게 될 거다. 영화제를 너무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거 아니냐는 말이 나올지라도 주최 측에서는 작년과 다르게 넉넉한 예산과 함께 많은 관객이 찾고 있어 성공적인 행사를 예상했다.

“전무님은 어떤 작품 보실 거예요?”

영화관 내에서 M&F 부스를 담당하는 직원에게 인사하고 돌아오자 티켓을 예매해야 한다며 볼 작품을 선정해 달라고 했다.

선택할 수 있는 작품은 세 개였다. 그중 하나는 황민기가 출연한 영화다. 내용도 밝고, 출연 배우도 멋있어 직원 대부분은 이 작품을 선택했다. 강희정 감독의 다큐멘터리를 선택한 사람도 있고, 일부 직원은 이스라엘 정부 주도의 세계적인 게이 축제와 그 이면에 있는 어두운 모습을 담아낸 해외 초청작을 선택하기도 했다.

“나도 이거로 할게요.”

헤어졌다고 해도 민기의 부탁으로 시작한 일인데 그의 작품은 봐 주자는 생각으로 선택하고 고개를 돌리자 눈에 익은 남자가 보였다. 며칠 전에 이곳에서 본 서진우다.

그도 자신이 번역한 작품을 보러 온 건지 손에 티켓을 들고 만지작거리면서 고개를 숙이고 있다. 무표정한 얼굴은 어쩐지 더욱 가라앉아 보였다.

“전무님 저희 먼저 들어가 볼게요.”

강희정 감독의 작품이 민기가 나오는 영화보다 20분 먼저 시작하기에 일부 사람들이 상영관 안으로 들어갔다. 직원들이 모두 들어갈 때까지도 진우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설마 다른 작품 보는 걸까? 하지만 강희정 감독 작품의 스케줄을 보면 나흘 동안 진행되는 영화제 중 오늘 상영되는 것이 전부였다. 설마 자신이 번역가로 참여한 것보다 더 보고 싶은 작품이 있는 건가. 어떤 작품을 보려는 건지 인석이 손에 든 영화제 스케줄을 보려는데 진우가 들고 있던 티켓을 의자에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그대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저대로 가는 걸까? 티켓을 실수로 흘렸다고 하기에는 그가 분명 제대로 의자에 티켓을 두었다. 그 티켓을 잠시 바라보기까지 하고 떠났다. 관심을 두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렸지만 이내 다시 시선은 의자에 덩그러니 놓인 영화 티켓으로 향했다. 저러다가 누군가 가지고 갈 것 같아 인석은 진우가 앉아 있던 자리로 가 티켓을 집었다.

티켓은 역시나 강희정 감독의 <허락>이었다. 일행을 기다린 것도 아닌지 티켓은 한 장이다. 이미 입장 시간도 지났다. 기다려 볼까 하다가 인석이 볼 영화도 입장 시간이 돼서 들어가야 했다. 이미 시간은 지났지만, 혹시 몰라 진우가 두고 간 티켓은 영화관 직원에게 맡기고 들어갔다.

영화 시작 전에 스크린에는 M&F 광고가 흘렀다. 화면을 빤히 보고 있던 인석의 눈앞에 무표정한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재미없어 보이는 얼굴이 환하게 웃는 건 상상의 범위를 넘어섰다. 웃기는 할까, 불쑥 드는 호기심에 이유는 없다. 지금까지도 그랬고, 궁금하면 직접 보면 됐다.

인석이 팔짱을 끼고 스크린을 보는데 불쑥 눈에 익은 얼굴이 나타났다.

황민기. 새삼스러운 말이지만 연기는 정말 잘한다.



***



쾅 닫히는 현관문 소리에 진우는 주방 식탁에서 보던 책을 덮고 눈살을 찌푸렸다. 벽에 걸린 시계는 새벽 1시 38분을 넘어섰다.

13년 된 25평 아파트는 방음이 좋지 않아 이 정도 소리라면 옆집까지 울렸다. 고3 수험생 아들이 있어 그렇지 않아도 신경이 예민해진 옆집에서 주의를 받은 적도 있었다.

“집에 남자 데리고 오지 말라고 했지!”

부엌을 나가면서 진우는 작게 소리쳤다. 확인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일에 찌들어 늘 힘없이 들어오는 상현이 정신없이 문을 닫을 때는 남자와 함께 올 때였다.

예상대로 현관에는 상현과 그보다 한 뼘 반쯤 작아 보이는 남자가 뒤엉켜 키스하고 있었다. 변명조차 할 생각이 없는 건지 두 사람은 정신없이 서로의 입술을 탐닉하느라 진우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 꼴을 못마땅하게 보고 있자, 상현은 자신의 목에 매달린 남자를 번쩍 안아 들어 올리고는 진우에게 방에 들어가겠다고 눈짓했다.

이미 꺼진 현관문 센서등에 상현과 함께 온 남자의 얼굴은 볼 수 없지만, 몸이 공중에 뜨자 재미있다는 듯이 까르르 웃는 소리를 들어 보니 나이가 어린 것이 분명했다. 멀쩡한 성인 남자가 저렇게 웃기란 힘들었다.

상현이 정신 나간 놈은 맞지만 10대와 붙어먹을 정도로 미친놈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진우는 함께 온 남자를 대략 20대 초반 정도로 추측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누구를 만나건 더는 상관은 없지만, 도대체 지키지도 않을 규칙은 왜 만든 건지 짜증이 밀려왔다. 진우는 다시 주방으로 들어가 식탁 위에 올려놓은 펜을 들어 냉장고에 붙은 하얀 종이 위에 오늘 날짜를 적어 넣었다.

식사, 청소, 쓰레기, 장 보기 칸에는 상현이 한 번, 진우가 두 번 지키지 못해 체크되어 있었다. 둘 다 일이 바쁘다 보니 매달 한두 번 정도는 이런 식으로 분담한 일을 하지 못할 때가 있었다. 그럴 때는 다음 달에 한 번 더 하면 되니 신경 쓰지 않았다.

문제는 ‘불청객’이라고 적혀 있는 공간. 텅 빈 진우의 칸과 달리 상현의 이름 아래로는 이미 세 개의 날짜가 적혀 있고 오늘로써 네 번째 칸도 채웠다.

오로지 상현 때문에 만든 규칙이고, 말로 한 경고가 통하지 않자 5만 원의 벌금을 걸었지만, 상현은 몇 번이고 규칙을 어겼다.

벌금을 올려야지,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진우는 식탁 위에 어질어진 짐을 챙겨 방으로 들어갔다. 방에서 작업하면 졸릴 게 뻔해 거실에서 한 건데, 그대로 있다면 얇은 벽으로 두 사람의 듣고 싶지 않은 소리까지 들려올 테니 차라리 졸음을 참는 쪽이 낫다.

불청객을 제외하고는 상현과 진우 사이에 정확히 분담된 집안일은 잘 지켜지는 편이었다. 조금 치사하다고 생각이 들 정도로 정확하게 나눠야 오히려 더 큰 싸움을 피할 수 있다는 것을 오랜 경험에서 알 수 있었다.

이 사이에 ‘불청객’이라고 간단하게 표기하고 세부 사항으로 섹스 파트너를 데리고 오지 않기와 애인 또는 친구를 데리고 올 때는 상대에게 사전에 ‘알리기’라는 규칙이 만들어진 건 작년 5월 말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이 완전히 헤어지기로 한 지 한 달이 넘어서는 날이기도 했다.

이제 와서 새삼 헤어진 이유를 떠올려 보라면 수백 가지는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서로에게 지쳐 있었다.

19년. 상현과 진우가 알고 지낸 시간이고 연인으로 지낸 건 11년이었다.

친구와 연인의 경계선도 불확실했다. 언젠가는 누가 먼저 고백했는지, 몇 살부터 사귀었는지를 떠올리다가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 말싸움으로까지 번진 적도 있었다. 서로 주장한 것을 도통 꺾을 생각이 없어 결국 대충 저쯤으로 정했고, 고백도 그냥 서로 눈 맞아서 사귄 거로 결론을 냈다.

어쨌든 대략 11년 전, 철없던 시절 사귀기 시작해 몇 번이나 헤어지고 다시 만났지만 정말 작년 그날, 모든 걸 끝냈다.

오래 사귄 만큼 주변에서는 두 사람 사이를 아는 사람도 많았다. 그들은 한결같이 상현과 진우가 곧 다시 만날 거라고 했다. 아직도 연인 사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여전히 같이 살고 있으니 그런 오해를 해도 어쩔 수 없다며 두 사람은 일일이 설명하지도 않았다.

서로의 마음이 정리되었는데도 같이 사는 이유는 현실적인 문제가 컸다. 2년 전, 이 집을 공동 명의로 샀고, 갚아야 할 대출이 앞으로 18년이나 남았다. 누구 하나 혼자서 빚과 집을 떠안겠다고 할 수도 없었고, 선뜻 이사 가겠다고 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고작 이별했다고 따로 살기에는 이미 두 사람은 가족과 같은 사이였다. 그깟 헤어졌다는 이유로 안 보고 사는 것도 웃기고, 더는 연인이 아니라는 것만 변했을 뿐 서로 함께 있는 건 당연했다.

19년. 인생의 절반 이상을 함께했다. 앞으로도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은 이상 얼굴은 보고 살지 않을까.

진우는 방으로 다시 들어와 책상 의자에 앉기 전에 기지개를 쭉 켰다. 역시나 방에 들어오니 의자 대신 침대에 눕고 싶은 유혹이 강했다. 그래도 마감이 내일 아침 10시까지이고 아직 마무리 짓지 못했으니 일은 해야 했다. 급하게 들어오는 일은 쳐 내야 하는 게 편한데, 이마저도 잘 들어오지 않아 일단 잡겠다고 생각한 게 실수였다.

스웨덴어 번역을 하는 진우는 한국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다. 그나마 작년에 한국에서 스웨덴 소설 하나가 크게 히트하고 난 후 작품이 들어오는 추세지만, 영미 소설이나 일본 소설에 비하면 턱없이 적었고 그마저도 미리 자리 잡은 경력 높은 번역가에게 돌아갔다.

결국 진우는 직접 스웨덴 책의 판권을 사 번역하고 출판하기 위한 일인 출판사를 차렸다.

그렇게 계약한 첫 번째 책의 번역을 한창 마무리 중에 들어온 의뢰는 당장 돈도 필요했고, 분량이 많지 않아 맡은 거였는데 문제는 낯선 목재 가공업 용어와 나무 이름을 찾다 보니 시간도 오래 걸렸고 머리가 지끈거릴 지경이었다.

그래도 출근하는 것보다는 낫겠지, 진우는 스스로를 위로하며 다시 빼곡하게 인쇄된 종이를 손에 쥐었다. 어쨌든 이 일은 진우에게 잘 맞았다.

사람 만나는 걸 어려워했기에 혼자 집에서 할 수 있는 직업을 찾았고, 수능이 끝나고 두꺼운 진로 탐색 책을 상현과 함께 보며 선택한 전공과 직업이었다. 번역가가 어떤 일을 하는지 구체적으로 몰랐지만, 당시에는 사람들을 만나지 않는 조건이면 충분했었다.

결과적으로 이 직업도 인맥 관리 잘하고 타인과 잘 어울리는 사람에게 일이 몰렸지만, 진우로서 후회는 없었다. 아직 경력이 길지 않은 것치고는 먹고살 정도의 일은 했다.

하지만 오늘은 한계였다. 진우는 방으로 들어와 꼬박 한 시간을 더 일하다가 감기는 눈을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펜을 놨다. 그나마 집중해 일은 거의 마무리는 됐다. 새벽에 일어나 다시 한번 보자는 생각으로 침대에 누웠고 바로 잠이 들었다.



다시 눈을 뜬 건 다음 날 아침 7시가 조금 넘어서였다. 언제 꺼진 건지 6시에 맞춰 둔 알람은 이미 해제되어 있었다. 그나마 상현이 방으로 들어와 아침 차리라고 하지 않았으면 세상모르게 잤을 거다.

진우는 놀라 벌떡 일어나서 책상 위에 남은 분량을 확인했다. 알람을 듣지 못하고 이 시간까지 잔 사실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정신만 제대로 차리면 제시간 안에 끝낼 수 있다.

작게 입을 벌려 하품하며 진우는 주방으로 갔다. 아침 당번은 사실 진우에게 좀 억울한 편이었다. 진우는 대체로 이 시간에 음식이 먹히지 않았다. 주로 밤늦게까지 작업하다 보니 늦은 시간에 간식을 챙겨 먹었고, 아침이 되면 깨기도 힘들고 더부룩함에 커피 정도만 마셨다.

아침은 오로지 상현을 위한 거였다. 그렇다고 이걸 문제 삼기에는 온종일 집에 있는 진우와 달리 상현은 출퇴근했고, 그 외의 시간에도 주로 밖에서 놀기 때문에 집에서 잠만 자고 나가는 날이 많았다.

심지어 방 세 개 중 각자의 방을 제외하고 남은 하나는 대부분 진우가 보는 책이 쌓여 있었다. 진우가 아침 식사 당번을 빼는 대신 상현이 청소를 덜 하겠다고 하면 할 말이 없다. 이런 거로 따지고 들면 끝도 없다. 차라리 뭐든지 공평하게 나누는 게 편했다.

“안녕하세요.”

간단한 토스트를 만들기 위해 냉장고에서 식빵을 꺼내고, 계란 두 개를 깨서 프라이팬에 올리는데 이제 막 샤워를 끝낸 남자가 친근하게 말을 걸어왔다. 진우는 아무 말 하지 않고 끄덕이며 남자를 봤다. 머리 전체를 노란색으로 염색한 남자는 예상대로 정말 어려 보였다.

“저도 같이 먹어도 되는 거죠?”

대꾸하지 않았지만, 진우는 이미 그의 몫까지 생각해 준비하고 있었다. 어차피 상현이 데리고 오는 남자 열의 아홉은 이런 식으로 아침이면 말을 걸어왔고 식탁에 앉았다.

“형 옛 애인이라면서요? 신기하다. 헤어졌는데 어떻게 같이 살아요?”

“…….”

“헤어져도 섹스하고 싶을 때는 같이해요? 상현이 형 엄청 잘하던데.”

“…….”

“11년 사귀었다면서요? 부러워요. 나도 그렇게 오래 연애하고 싶은데.”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대꾸하지 않는 진우를 보고 눈치 있는 사람이라면 말 거는 걸 그만두는데 금발의 남자는 그럴 생각이 없는 건지 계속 혼자 떠들었다.

진우는 듣다못해 빵 위에 계란프라이 하나를 올린 접시를 탁 소리 내며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그제야 뭔가 실수를 했다고 생각했는지 남자는 입을 벌리고 멍하니 진우를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