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기간 한정 연애 1화

Prologue


서울 도심에 있는 고층 빌딩의 한 회의실.

아침부터 문성 그룹 회장을 주축으로 계열사 대표들이 모인 자리는 긴장감과 함께 낮은 한숨이 뒤섞였다.

얼핏 경영 회의로도 보이지만, 오늘의 주제는 집안의 막내인 송인석의 행보에 대한 논의다.

형제들과 많게는 열아홉 살, 적게는 열 살 차이가 나는 늦둥이로 나름 온 가족이 사랑을 주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상은 인석의 유년기에는 한참 회사가 크고 있을 때라 아버지 송정렬은 곁에 있지 못했고, 어머니는 인석이 다섯 살이 되던 해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나이 차가 나는 형제들은 아버지 밑에서 일을 배우거나 학업으로 정신이 없어 곁에 없었다. 대신 인석에게는 그를 완벽하게 돌봐 줄 사람이 함께했다.

그의 입에 들어가는 음식 하나하나를 신경 썼고, 어디 아픈 곳은 없을까 정기적으로 건강을 체크했으며, 공부와 취미도 최고의 상태에서 즐길 수 있도록 지원했다. 너무 오냐오냐 키우는 것이 아니냐는 주위의 우려도 있었지만, 인석은 바르게 자랐다고 가족들은 자부했다.

이렇게 신경 써 키운 만큼 인석은 한국 최고의 대학에 입학했고, 학기 중에 친구들과 사업에 뛰어들어 작지만 건실한 회사 하나를 키웠다. 졸업 후에는 형제들과 달리 문성에 바로 들어가지 않고, 가게를 운영해 보고 싶다며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레스토랑 경영에도 참여해 놀랄 정도의 성과를 냈다.

하지만 언제까지 인석을 밖에서 둘 수는 없었다. 제 눈에 안경이라 할지라도 가족에게 인석은 잘생기고, 착하고, 능력도 있다. 다만 걸리는 것이 조금 있어서 골치가 아팠다.

“인석을 회사로 부르긴 불러야 하는데, 그래도 첫째가 챙겨 주는 게 낫지 않느냐.”

송정렬에게 문성 건설의 대표인 첫째 아들은 가장 든든한 존재였다.

“아버님, 아시다시피 저희가 이번에 국가에서 진행하는 사업 입찰 준비로 정신이 없어 인석이를 제가 신경 쓰기 힘듭니다. 물론 막내야 알아서 제 할 일을 하는 아이죠. 저 역시 인석이 있으면 든든합니다. 하지만 그 아이 성격상 새롭고 다양한 걸 시도하고 싶어 하지, 반복적이고 진득한 일은 어렵습니다. 저로서도 아쉽지만 조금 더 그 아이와 어울리는 일을 하게 하죠.”

어렸을 때부터 인석은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졌고, 뭘 배우든 영재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잘했다. 다만 어떤 것이든 오래 관심을 두지는 않았다. 인석에게 건설 일은 분명 어울리지는 않았다.

정렬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번에는 문성 관광의 대표인 둘째 딸에게 시선을 돌렸다.

“전 인석이와 일해도 상관없어요. 하지만 괜히 관광 쪽에서 일하다가 어디에 꽂혀서 훌쩍 떠나도 괜찮으시겠어요? 기억나시죠? 걔 수능 끝나고 외국 나가서 한국에 안 오겠다고 한 거.”

정렬은 당시의 기억이 떠오르는지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열아홉 살의 인석은 수능이 끝나자 집에서 온종일 책만 읽었다. 다른 아이들이 해방되었다며 여행도 가고 영화나 게임을 즐겼을 때 인석은 차분히 책만 봤다. 워낙 조용한 아이긴 했다. 어릴 적부터 주변 어른들로부터 철이 빨리 들었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차분한 편이었다. 하지만 학교, 집 그리고 도서관만 드나들며 책만 붙들고 있으니 가족들은 불안했다. 분명 또 뭔가에 빠질 것 같았다.

그리고 결국 일이 터졌다. 도대체 무슨 책을 읽은 건지 여행 가겠다고 떠나더니, 마음 수행을 하고 싶다며 한국에 돌아오지 않겠다는 거다.

가족들은 협박도 하고, 달래기도 했다. 하지만 인석은 이미 수행자라도 된 듯 모든 건 하늘의 뜻에 맡기겠다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결국, 둘째와 넷째가 스리랑카에 있는 인석을 잡아 와 대학을 다니게 했고, 한 학기가 끝나자 서둘러 군대에도 보냈다.

“그래, 거긴 아니다. 셋째야, 넌…….”

“절대 안 돼요!”

문성 엔터테인먼트 대표인 셋째 딸은 정렬의 이야기가 나오기도 전에 막아섰다.

“엔터테인먼트 사업은 다른 곳보다 사람들 반응에 민감하고 가십이 많은 곳이에요. 인석이 아시잖아요. 나이 위아래로 신경도 안 쓰고 심지어 성별도 상관없이 다 만나고 다녀요. 걔 연예인도 여러 명 만났어요. 연예계에 섹스 스캔들 터지면 아시죠? 정치, 사회 문제보다 더 사람들 관심 끌기 쉬운 거. 수억짜리 사업 무너지는 건 금방이에요. 우리 문성 그룹 전체에 타격이 갈 수도 있어요.”

회의실 분위기는 한층 더 무거워졌다. 학창 시절부터 인석은 인기가 많았다. 또래보다 키도 컸고, 남자 연예인 누군가와 비슷하게 생겼다는 이야기도 자주 들었다. 잘사는 집안에서 부족한 것 없이 자랐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겸손하고 잘난 척하는 것도 없이 사람들과 잘 어울렸다.

그래서인지 인석은 사귀는 사람이 없던 날이 적었다. 딴에는 지킬 건 지킨다고 생각한 건지 한 번에 여럿을 만난 적은 없었다. 다만 남녀노소, 성별, 국적을 불문하고 다양한 사람을 만났다. 그렇게 만나는 것치고 길게 가지도 않았다. 이별을 신경 쓰지도 않았다.

가족들은 이제 범죄가 될 만한 상대만 아니면 괜찮다는 선에서 그가 누구를 만나든 간섭하지 않기로 했다.

“그럼 넷째는?”

정렬은 이제 아무런 기대도 없는 목소리로 문성 패션의 대표인 넷째 아들에게 물었다.

“M&F로 보내죠.”

“하지만 거기는…….”

체념이 섞인 말에 다른 형제들은 안타까운 얼굴을 했다.

후발 주자였지만 야심 차게 시작한 SPA 브랜드인 M&F는 지금 3년을 겨우 채우고 내부에서는 조심스럽게 사업 철수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제 손으로 사업을 문 닫는 경험은 꽤 쓰다. 앞으로도 크게 전망이 없는 사업이고, 끌고 갈수록 적자이니 당장 결단이 필요했다.

하지만 인석을 위해서라면, 인석이 이 사업을 맡아 냉혹한 현실을 맛보고 정신을 차린다면 수억의 손해를 보는 것도 감수할 결심을 한 거다. 그렇게만 한다면야 문성 그룹 집안의 막내 송인석의, 가족들이 보기에는 정말 작은 결함도 나아지지 않을까 기대했다.



1. 시작 (1)


“하다 하다 이제는 스물아홉 살짜리를 전무로 모셔야 하는 겁니까?”

“이래서 우리나라는 안 된다니까요. 그놈의 가족 경영. 솔직히 우리 상무님이 문성 그룹에서 몇 년을 일하셨습니까! 무려 14년입니다. 14년! 아니 그런데 회장 자식이라는 이유로 경험도 없는 어린 걸 전무로 딱 올리는 게 말이 되냐고요!”

남자는 과장된 목소리와 몸짓으로 의자에 앉은 상무 옆에서 언변을 토한다.

문성 패션에는 여러 브랜드가 있고 각각의 이사진이 대여섯 개의 브랜드를 맡아 관리했다. 이정모 상무는 M&F를 비롯해 10대, 20대 타깃의 브랜드를 몇 개 맡고 있다. 그런데 뜬금없이 그가 맡은 브랜드 중 하나인 M&F를 콕 집어 관리자라며 발령이 났고, 심지어 자신보다 직급이 높은 어린 전무가 온다고 하니 황당했다.

부사장에게 항의도 했지만 문성 그룹 회장의 아들을 막을 수 없는 데다가 지금 M&F 상황을 보면 곧 사업 철수 이야기가 나올 텐데, 후에 책임은 네가 아니라 송인석 전무에게 물을 테니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하란다.

하지만 이건 자존심 문제고, 그동안 쌓아 온 커리어가 달린 일이었다. 자신이 맡은 브랜드를 끝까지 책임지지 않으면 망해도 꼬리표는 붙고, 만약 새 전무가 와서 매출이라도 오르면 무능하단 소리를 듣는 건 뻔했다.

“자식이라도 멀쩡하면 다행이죠. 그 사람 또라이래요. 형제들도 손 놓고 있어서 일부러 망한…….”

남자는 슬쩍 상무의 눈치를 보다가 말을 고쳤다.

“아니, 어려운 브랜드에 보냈다는 이야기도 있던데요. 문성에서 아예 이거 해 버리려고.”

그는 손바닥으로 목을 긋는 흉내를 냈다. 회장 자식이 이사진으로 온다면야 누가 와도 낙하산이니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 사람이 송인석이라면 상황은 더욱 심각했다.

제멋대로에다가 고집은 세지만, 능력은 있어 상대하기가 여간 어렵다는 평가다. 그렇지 않아도 M&F 누적 적자가 늘어나 사업 철수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데, 구원 투수가 올 거란 기대와 달리 새 전무가 송인석이라니, 회사 분위기가 더욱 뒤숭숭해졌다.

“우리같이 성실하게 일하는 직원들이 왜 피해를 봐야 하는 겁니까. 이건 아닌 것 같아요. 새로 전무가 와도 저는 상무님 편입니다.”

“저도요. 앞으로 많이 가르쳐 주십시오.”

인석은 회의실에서 들려오는 세 사람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듣다가 살짝 열려 있는 문을 두드렸다.

“이야기 즐겁게 하고 계시는데 미안합니다. 방해하지 않으려 했는데, 내가 시간이 없어서요. 회의 좀 합시다.”

“누구시죠?”

어리둥절한 누군가의 질문에 인석은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뒤로 돌려 ‘들어갑시다’라고 말하고는 회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 뒤로 마케팅 3팀, M&F 담당자들이 따라 들어왔다.

낯선 남자의 등장에 조금 전까지 상무 앞에서 열변을 토하던 사람은 마케팅 직원 하나를 붙들고 누구냐며 작게 물었다.

“이번에 새로 오시는 전무님이시래요.”

순간 남자는 숨이 턱 막히는 것 같다. 함께 회의실에서 실컷 전무 욕을 하던 사람도 같은 심정인지 눈동자가 흔들리면서 그대로 굳어 있다.

“미안합니다. 다음 주부터 출근인데 급하게 진행했으면 하는 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송인석이라고 합니다.”

남자는 회의실 앞에 세워 둔 강연대 앞에 서 사람들을 향해 부드럽게 웃어 보이며 인사했다.

누군가의 눈에는 걸친 옷이 비싸 눈에 띄는 거라고 위안 삼고 싶겠지만, 분명 그는 어떤 옷을 걸쳐 놔도 잘 소화할 것 같은 큰 키에 훤칠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더욱이 입에 걸친 미소는 예의를 차린 거 같지만 여유가 넘쳤고, 진한 눈썹 아래로 보이는 또렷한 눈은 시선을 피할 생각이 없다는 듯이 상대를 똑바로 보고 있다.

그의 정체를 모르더라도 그 모습을 본다면야 어딘가에서 떠받들어지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 거다. 태어나서 아쉬운 것 하나 없이 살아온, 누구에게도 당당한 그런 부류의 인간이었다.

“시간 괜찮으시면 세 분도 함께 들어 주시죠. 어차피 상무님께서도 진행 상황을 아셔야 할 일이고, 다른 팀에게도 공유될 일입니다. 갑작스럽겠지만 다음 달 초 영화제 하나 후원하려 합니다. 마케팅팀에서는 일정이 빠듯하겠지만 준비해 주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거 너무 갑작스러운데. 그렇게 혼자서 결정하시면 안 되지. 우리도 절차라는 게 있는데.”

이정모 상무는 못마땅하다는 얼굴이다. 문성 그룹 회장의 아들이니 목이 뻣뻣한 건 알지만, 그렇다고 새파랗게 어리고 경력도 없는 사람에게 굽히기에는 자존심도 상했다. 더욱이 이렇게 쳐들어와 독단적으로 일을 진행한다는 건 말이 안 됐다.

“그 점은 다시 사과드리죠. 하지만 보내 주신 작년도 매출과 하반기 전략 잘 봤습니다. 모두 다 알다시피 작년에 M&F는 적자였습니다.”

“그거야 작년에 워낙 정부도 뒤숭숭하고 사회적으로 이슈가 많다 보니 패션 브랜드가 전체적으로 침체였죠.”

“사회 이슈가 없던 해가 있었습니까? 재작년 겨울에는 바이러스로 인해 사람들이 외출을 자제해서 매출이 오르지 않았고, 여름에는 이례적인 폭염을 문제 삼았죠. 매출이 오르지 않은 건 결국 마케팅 전략과 예측이 실패했다는 거고, 위기 대응마저 못 했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하반기 전략은 작년과 크게 다를 게 없더군요.”

여전히 인석의 입가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 있지만 직원들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내심 M&F는 망한 사업이고, 어차피 철수할 브랜드이니 대충 작년도 마케팅 전략을 그대로 가지고 와 적용한 건 사실이었다. 잘나가는 브랜드에 집중하기에도 일은 많았다.

“아니, 전무님이 이쪽 일을 안 해 보셔서 모르시나 본데, M&F에 광고비로 쓸 예산이 그렇게 많지 않아요. 다른 브랜드처럼 TV 광고도 하고, 연예인 협찬 들어가면 인지도가 팍팍 오르겠죠. 그런데 여기는 그게 어려워요. 워낙 저가 옷이라 단가도 안 맞고. 여기는 여기에 맞게 마케팅을 해야죠.”

상무는 실무 경험이 없을 게 뻔한 인석을 무시하는 말투로 말했다.

“비용만 내세워서는 달라지는 게 없습니다. 더욱이 요즘 SNS에 환경 문제와 저가 옷을 만들기 위해 착취되는 제3세계의 아동 노동 문제에 민감한데 무조건 저렴함만을 내세우며 공략할 수도 없습니다. 어려운 일이라는 거 압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가기 위해서는 결국 윤리적으로 지속 가능한 패션 브랜드라는 이미지를 만들어야 합니다. 앞으로는 거기에 맞춰 마케팅 전략을 짜 주시길 바랍니다.”

사람들은 인석의 말에 작게 웅성거렸다. 당장 오늘내일하는 브랜드를 장기적으로 끌고 갈 생각을 하다니, 다른 곳에서 일하다 온 사람이 와 저런 소리를 한다면야 아직 회사 파악이 되지 않았다며 뒤에서 욕을 할 수도 있지만, 회장 아들이니 안 되는 사업도 벌일 수 있고, 예산도 더 끌어 올 수 있는 일이었다.

거기다 회의실 앞에서 상무와 직원 둘이 하는 자신의 이야기를 재미있다며 웃는 얼굴로 듣는 모습을 보고 소문대로 사이코인가 싶었는데, 말하는 걸 보니 또 그렇지만은 않아 보였다. 막힘없이 설명하는 말투에는 힘이 있어 사람들을 집중시키기 충분했다.

“멀쩡하지 않다고 들었는데. 바보는 아닌가 본데요.”

“실력은 지켜봐야지. 괜찮을 수도 있고, 골치 아플 수도 있고. 아무튼 전무, 진짜 잘생겼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을 무시하고 인석은 말을 이었다.

“오늘 제가 여기 온 이유는 새로운 마케팅 전략의 첫 시작으로 다음 달에 열리는 LGBT 영화제에 후원하려 합니다.”

“LGBT요? 전무님, 한국에서는 그건 아직 조심스러운 것 같습니다. 거부감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고, 얼마 전에 그렇지 않아도 보수 단체에서 관련 반대 시위도 크게 있었고요.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행사에 참여한다고 해도 외국계 기업 정도나 관심을 보이지 국내 기업은 잘 참여하지 않습니다.”

마케팅 직원 하나가 의견을 조심스럽게 내놓았다.

“안 한다고 거부감을 일으키는 사람이 우리 옷을 사지는 않겠죠. 하지만 이 시장에 뛰어들면 잡을 수 있는 고객은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LGBT 시장을 8천억 달러 이상으로 보고 있고, 일본도 6조 엔 이상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한국은 그 규모보다는 작겠지만 분명한 건 시장성이 있다는 겁니다. 더욱이 국내의 다른 기업이 뛰어들지 않았다면 우리가 선두 주자가 되는 것도 좋군요. 팀장님, 일정이 빠듯하지만 영화제 준비 가능할까요?”

가능하지 않다고 해도 인석이 물러설 것 같지는 않았다. 갑작스럽게 일정을 만들면 어떻게 하느냐고 기 싸움을 해도 소용없다. 상무도 불만스러운 얼굴을 할망정 입을 다물고 있지 않은가. 거기다 회장 아들이라면 전무 자리에서 끝나지 않을 거다. 이왕이면 잘 보이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 마케팅 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짧은 기간이지만 시도해 볼 건 있었다.

“네, 괜찮습니다. 스태프 티셔츠 지원과 영화관 밖에 홍보 부스 만드는 거야 금방 할 수 있는 거고, 영화 시작 전에 스크린 홍보가 가능하다면 기존에 만들어 놓은 광고를 넣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SNS 이벤트는 기간이 짧아서 진행은 어렵지만, 영화제에 출품되는 작품과 함께 브랜드 홍보는 들어갈 수도 있고요.”

“좋습니다. 예산 편성 관련해서는 나중에 팀장님과 따로 이야기할 테니 일단은 해 볼 수 있는 것들은 다 뽑아 보세요.”

마케팅팀에서는 대체로 긍정적인 반면 상무의 얼굴은 조금 전보다 더 어두워졌다.

“아니, 한국에 영화제도 많은데 왜 하필…….”

“하필이라는 건 어떤 의미죠?”

“LGBT라는 거, 그거 아닙니까? 남자끼리 붙어먹고 이런 거. 그거는 좀 아닌데. 안 그런가?”

상무는 옆에 앉은 직원에게 동의를 구하듯 물었다. 직원은 상무와 전무 얼굴을 번갈아 보며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

“용어부터 잘못 알고 계신 것 같은데 그건 제가 따로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팀장님, 경영지원팀에 연락해 다음 주 제가 다시 오기 전까지 직원들 전원을 대상으로 진행할 직장 내 성 소수자 인권 교육해 줄 강사 알아봐 달라고 해 주세요. 영화제 시작하면 현장 가서 활동할 인력도 필요한데, 괜히 잘못된 인식으로 가면 오히려 안 하느니만 못한 결과를 만들 겁니다.”

“네, 알겠습니다.”

상무의 헛소리에 일만 늘어난 것 같아 팀장은 굳어지는 얼굴을 감추며 대답했다.

“갑작스러운 방문에 시간 빼앗아서 미안합니다. 영화제가 얼마 남지 않아 급하게 왔습니다. 영화제 위원진과는 제가 연락하고 있으니 그동안 마케팅팀에서는 행사에 바로 들어갈 수 있도록 준비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럼 다음 주에 봅시다.”

인석은 회의실 밖으로 나갔다. 몇몇 사람이 사무실 문 앞까지 나와 인사하려 했지만, 인석은 괜찮다며 그들을 들어가게 했다.

지하 주차장으로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인석은 벽에 달린 거울을 보며 턱을 들어 보였다. 이 정도면 꽤 괜찮지 않았을까. 어차피 예정된 출근 첫날 가 봤자 낙하산이라며 하는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을 거다. 그럴 바에는 이렇게 쳐들어가 하고 싶은 걸 하는 쪽이 제대로 먹힐 거라는 생각에 벌인 일이었다. 인석은 입가에 여유 있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차에 올라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