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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련(初戀) 3화

1장 (3)


「말하거라. 당장.」

「아기씨께선… 글을 모르십니다…….」

더 이상 뜸을 들였다간 경을 칠 것이라는 의미에서 낮게 목소리를 깔고 명하자 영순은 기어가는 말투로 힘겹게 답했다. 영순의 대답을 들은 정윤의 얼굴이 묘하게 뒤틀렸다. 글을 모른다? 글을 모른다고? 어찌 그럴 수가 있지?

「그게 말이 되느냐? 형님의 나이가 몇이신데 글을 모른단 말이냐?」

「그것이…… 아기씨께선 다섯 살에 이곳에 오신지라.」

「글을 배우지 못했단 말이냐?」

「예.」

나이 다섯이면 한창 글을 배울 나이다. 그 나이에 글을 알 리가 없는 몸종과 이곳에 유폐되었다면, 글을 온전히 익힐 기회를 잃은 것이나 다름없다. 그제야 이해가 갔다는 듯 정윤은 짧게 탄식했다.

다른 이도 아니고, 군왕의 장자가 글을 모른다니. 어찌 그럴 수가 있는가. 근래에는 평민들도 금전적으로 풍족하기만 하면 학문에 뜻을 두고 배우는 이가 많다고 들었다. 평민들도 쉽사리 배우는 글을 그 나이가 되도록 조금도 배우지 못했다니.

정윤은 매일같이 글공부가 하기 싫어 온몸을 배배 꼬아 대며 농땡이를 부릴 기회만 엿보던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제 형님이 글을 배우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되자 한탄하는 정윤의 모습에 영순은 조심스레 덧붙였다.

「글을 배우고 싶어 하셨으나 배울 기회가 없었습니다.」

영순이 그리 말한 순간, 정윤은 발걸음을 돌렸다. 왔던 길을 돌아가는 정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영순은 입술을 잘근잘근 물어뜯었다. 이만 가시자 했건만 왜 또 들어가시는 겐지.

소운 또한 유순한 성격은 아니고 그를 잘 알고 있었던 영순은 제발 두 공자님의 사이가 틀어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랐다.

굳게 닫힌 창문 앞에 우두커니 서서 한참 동안 미동도 않고 있던 소운은 천천히 창문으로 손을 뻗었다. 돌아갔을까? 돌아갔겠지……. 문고리를 집으려던 손은 몇 번이나 멈칫했다. 조심스레 문고리를 쥐고 창문을 열려던 순간, 반대쪽에서 문이 큰 소리를 내며 열리자 소운은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찌……!」

「제가 글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너무도 뜬금없는 말이 들려오자 소운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그런 소운의 반응을 어떻게 받아들인 것인지, 정윤은 다급한 어조로 덧붙였다.

「소제가 글을 가르쳐 드릴 수 있습니다. 글을 배우고 싶지 않으십니까?」

소운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정윤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저 아이는 영순에게 읽지 못한 서신에 대해 물었을 것이고, 영순은 곧이곧대로 대답하다 보니 제 주인이 까막눈이라는 것을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겠지.

글. 글이라. 그래, 한때는 미치도록 배우고 싶던 적이 있었다. 이곳에 오고 난 후로는 그나마 공부했던 글자들도 다 잊어버려 아는 글자는 서른도 채 안 되었고, 제 이름 석 자도 쓸 줄 모른다는 현실이 괴로웠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는 달리 알고 있는 것이 하나 있었다.

「내가 글을 배워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데?」

「소제는 학문에 뜻을 이루는 데에 이유가 필요하다 생각지 않습니다. 글을 배움으로써 옳고 그름을 따지고, 만물의 이치를 배우며 자아를 성찰하면 되는 것이지요. 학문이란 그런 것이니까요. 그 이상 무슨 이유가 필요하겠습니까?」

스승님, 이 영악한 제자를 용서하십시오. 그간 글공부하기 싫다 투정 부린 것들 반성하겠습니다. 그러니 이번에만 눈감아 주십시오……. 정윤은 속으로 그리 생각하며 뻔뻔하게 낯짝에 철판을 깔았다.

아마 봉춘이 들었다면 입을 떡 벌리고 뒤로 넘어갔을 것이다. 양심도 없냐는 외침을 뒤로하고 말이다.

「죽은 사람이 글을 배워 뭐 하겠느냐.」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듯한 텅 빈 목소리였지만, 그 속에 담겨 있는 고통이 생생하게 느껴져 정윤은 주먹을 꽉 쥐었다. 왠지 모르게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돌아가거라.」

끝내 소운은 눈을 감으며 고개를 돌렸다.



***



소운이 그리 매정하게 대했다고 해서 포기할 정윤이 아니었다. 정윤은 그 후부터 계속해서 소운을 찾아갔다. 천자문을 막 시작했을 무렵 봤던 서책들을 한가득 안고 소운에게 달려가 반강제로 떠넘기듯 했고, 머리끝까지 이불을 덮어쓰고 모른 척하는 소운의 앞에서 책을 읽거나 제 일상을 떠넘기듯 입에 담았다.

「형님, 금일은 스승님의 곰방대를 두 번이나 피했습니다. 물론 피한 게 괘씸하다고 다섯 번은 더 맞았지만요. 그래도 두 번이나 피한 게 어딥니까? 피했다는 것에 의의를 둬야지. 그렇지요?」

벽 쪽으로 몸을 돌린 채 누워 대답조차 들려주질 않는 소운의 가녀린 등을 바라보며 정윤은 나지막이 웃었다. 매정하게 무시당한다 해도 상관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정윤은 알고 있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는 자신의 목소리가 조금이라도 느려지거나 시무룩하게 가라앉기라도 하면 동요하듯 요동치는 소운의 반응을.

애써 모른 척하면서도 사실은 저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제 기분에 따라 다르게 반응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정윤은 조금도 속상하지 않았다.

「솔직히 저는 글공부보단 검술 훈련이 훨씬 더 재미있고 좋습니다. 활쏘기도 오늘은 열 발 다 과녁에 맞췄다니까요? 형님께서 옆에서 보고 계신다고 생각하고 쐈더니 하나도 빗나가지 않고 다 맞았습니다.」

「그만 돌아가거라. 이러다 들키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이러느냐.」

그토록 기다렸던 소운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정윤은 실망 어린 쓴웃음을 지어야만 했다.

물론 소운의 말이 맞았다. 이러다 들키게 되면 그것만큼 큰일이 없겠지. 해서 아비에게 들키지 않게끔 만반의 준비를 했다. 원양과 원상이 지붕 위에서 진초왕과 당수연의 움직임을 관찰하다가, 조금이라도 정윤을 찾는 움직임을 보이거나 하면 원일이 곧장 정윤을 안고 이목을 피해 운화각으로 향했다.

일각도 채 되지 않아 가솔들이 잘 이용하지 않는 길을 이용해 뒷문으로 쏙 들어가 버리니, 들킬 일이 없었다. 정윤은 최근 더욱 완벽하게 이 은밀한 만남을 숨기기 위해 경공을 익히고 있었다. 하루빨리 조금이라도 더 발이 빨라져야 들킬 확률이 적어지니까.

「소제를 걱정해 주시는 겁니까?」

「네가 아니라 나를 걱정하는 거다.」

「말로는 그리하셔도 절 걱정하시는 것 다 압니다.」

소운은 아이의 뻔뻔한 대꾸에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하루를 고사하고 이렇듯 계속해서 들이닥치니 이젠 대놓고 무시하는 것조차 버겁다. 매정하게 대하고자 하여도 악인이 아닌지라 매번 양심이라는 놈이 가슴을 쿡쿡 쑤신다. 소운은 벽에 시선을 고정한 채 낮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이는 예뻤다. 정말 그러했다. 어디 한 군데 모난 곳 없이 천진하고 착했다. 저가 아무리 차갑게 대해도 형님, 형님 곧잘 조잘거렸다. 기분 상해 더는 안 올 법도 한데 끊임없이 찾아와 책을 내밀고 이야기를 했다. 그러다 보니 등을 돌리고 있어도 온 신경이 정윤에게로 향했다.

정을 주지 않고자 마음을 다잡아도 정윤이 제 세계로 돌아가고 나면 아쉬움이 물 밀려오듯 찾아왔다. 어쩌다 하루 안 오기라도 하면 온종일 머릿속에서 정윤의 목소리가 떠나질 않았다.

정작 본인은 모르고 있는 것 같지만, 소운의 말투가 처음보다 다소 둥글어졌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정윤은 요즘 들어 하루하루가 너무나도 즐거웠다. 앉은 자리의 무게 때문에 친우 관계조차 나름의 위계가 잡혀 있었고, 형제자매 없이 쭉 홀로 지내 왔기에 외로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 유려한 형님께서 떡하니 나타나셨으니 어찌 좋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음 같아선 함께 격구도 하고 싶고, 활쏘기 내기나 말타기 내기도 해 보고 싶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고, 계속되는 정윤의 애정 공세에 소운 또한 점점 마음의 문을 여는 듯했다. 그렇게 열일곱에 처음 글을 배우기 시작한 소운은 일 년도 채 되지 않아 천자문을 모두 뗐다. 그동안 뜻이 있어도 이루지 못했던 학문에 한이라도 맺혔던 것인지 온종일 서책만 죽어라고 읽고 필사했다.

「하루가 지날수록 학식이 넓어지는 형님 탓에 제 눈에 병이 날 지경입니다.」

「내 학식이 넓어지는데, 왜 네 눈에 병이 난다는 것이냐?」

서책을 읽고 있던 소운이 의아함 어린 어조로 묻자, 정윤은 방긋 웃으며 답했다.

「왜긴요. 형님의 재주가 워낙 괄목하시니 드리는 말씀이지요. 형님을 뵐 때마다 눈을 수십 번씩 비비게 되니, 눈에 병이 나지 않고 배기겠습니까? 이제 소제가 형님께 글을 배워야 할지도 모릅니다.」

정윤이 눈빛 하나 바꾸지 않고 낯간지러운 칭찬을 퍼붓자 소운은 못 말린다는 듯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 아첨하는 재주는 어디서 배워 왔느냐?」

형님이 웃는다. 하나뿐인 형님이 저를 보고 웃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차갑게 내치기만 하시던 분이, 이제는 저를 보고 웃음을 지으신다. 덩달아 자신마저 웃음이 새어 나와 정윤은 배실배실 표정이 풀렸다.

나이 열둘에 처음 만난 형제가 뭐가 그리 좋은지. 아무리 피붙이라지만 아주 어렸을 적부터 가까이 지낸 것도 아닌데, 이리 곡진하게 대하니 소운으로선 어찌 할 방도가 없었다.

저 좋다고 쫄래쫄래 쫒아와 서책이며, 산해진미며 다 갖다 바치는 아우에게 매정히 대할 정도로 악인이 못 되었던 성정 탓에 소운은 정윤에게 마음을 많이 여는 중이었다.

「정윤아, 이 글자가 무엇이냐? 처음 보는 글자인데.」

「예, 보여 주십시오.」

소운은 서책을 읽고, 정윤은 그런 소운을 본다. 하루 중 한 시진도 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형제에게는 대화하는 시간보다, 책장을 넘기는 소리와 바람 소리, 가끔 들려오는 웃음소리가 전부인 시간이 더 많았다.

정윤으로선 서책을 읽는 형님을 오매불망 바라보는 것보다야 가져온 주전부리와 차를 들며 담소를 나누는 게 더 좋긴 하겠지만, 그저 소운과 함께하는 시간이면 충분했다.

모르는 글자가 나오면 자신에게 스스럼없이 그 뜻을 물어 오는 형님에게 답을 해 주는 것만으로도 정윤은 충분했다.

정윤은 소운에게 가까이 가 소운이 내미는 책으로 시선을 옮겼다. 가늘고 흰 손가락이 가리키는 글자를 본 정윤의 표정이 오묘하게 바뀌자 소운은 덩달아 눈을 깜빡였다.

「어, 그러니까…….」

「모르는 글자인 것이냐?」

몇천 자는 족히 뗀 자신조차 처음 보는, 잘 쓰이지 않는 글자였다. 이 정도면 제 스승조차 사전을 찾아봐야 할 것 같았다.

쉽사리 답을 하지 못하고 애꿎은 미간만 좁히는 정윤의 반응에 소운의 눈이 가늘어졌다.

「모르는 게로구나. 하긴. 정윤이 너도 아직 어리니 어려운 글자를 읽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겠지.」

「내일 당장 알아 오겠습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 모르는 글자가 하나 나온다고 해서 읽는 것에 방해가 되지는 않으니.」

어린 마음에 정윤은 속이 상하고 분통이 터졌다. 형님이 모르는 글자를 가르쳐 주면 제 체면도 서고, 왠지 모를 뿌듯함도 밀려오고, 마치 황제에게 칭찬을 들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정윤은 소운을 만난 이후부터 소운에게 글을 가르쳐 줄 때가 가장 행복했다. 자신이 어려운 글자를 모른다고 해서 형님이 눈에 띄게 실망한다거나, 비웃는다거나 하진 않는다지만, 그래도 이런 식으로 어린아이 취급을 당하면 꼴에 사내라고 자존심이 상했다.

그러다 보니 정윤은 늘상 어떻게 농땡이를 부려야 잘 부렸다고 소문이 날까 싶을 정도로 글공부를 게을리하던 시절은 엿 바꿔 먹은 듯 문무(文武)에 열심이었다. 정윤의 스승인 허 노인이 눈물까지 글썽이며 우리 소왕 저하께서 드디어 정신을 차리셨다고 감탄할 정도였다.

사실은 하나뿐인 형님에게 글을 가르쳐 드리고, 모르는 글자가 나오면 그걸 멋들어지게 알려 주고 제 멋진 모습을 뽐내고 싶은 치기 어린 마음 때문이라는 것을 꿈에도 몰랐던 진초왕은 최근 들어 아들의 학문이 눈에 띄게 늘었으며 그 누구보다도 열심이라는 허 노인의 보고에 뿌듯해하며 칭찬 일색이었다.

「아참, 형님, 이것 보십시오. 백매화입니다. 아주 예쁘지요?」

「백매화?」

하염없이 소운을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하던 정윤은 무언가가 떠올랐다는 듯, 서둘러 가지고 온 강보를 열었다. 그 안에는 작은 나뭇가지가 하나 있었다. 나뭇가지는 작지만, 피어 있는 꽃은 결코 적지 않아 마치 꽃다발처럼 보이기도 했다.

소운의 시선이 새하얀 매화 가지에 팔려 있다는 것을 눈치챈 정윤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예. 아주 어여쁘게 피었더라고요.」

매화라, 매화…….

그러고 보니 꽃을 본 지도, 그 향기를 맡은 지도 아주 오래되었다. 사내가 꽃을 좋아해 무엇 하리.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만, 처지가 이렇다 보니 꽃을 접할 일이 없었다.

정윤이 내미는 매화 가지를 받아 든 소운은 자연스레 꽃을 코로 가져갔다. 한 번도 맡아 보지 못했던 은은한 꽃향기가 방 안을 가득 채우는 듯했다. 그러고 보니, 누군가에게서 꽃을 선물받는 것 또한 네가 처음이구나.

「사내에게 꽃을 주어서 뭐 하겠느냐. 나는 꽃을 좋아하지 않는다.」

쑥스러움에 자신도 모르게 아무렇게나 말을 내던지고 말았다. 평소 자신의 형님이 감정 표현에 서툴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정윤은 그 말에 상처받기는커녕 오히려 기쁘다는 듯 싱글벙글이었다.

「그럼 차를 담가 먹으면 되지요. 잎을 바짝 말려 차로 담가 먹어도 향이 좋습니다.」

「…….」

소운은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정윤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자신이 그 어떤 말을 해도, 이 아이는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법이 없었다. 오랫동안 사랑받고 컸다는 의미겠지. 그래서일까. 소운은 정윤을 보고 있자면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지면서도 한편으로는 쓰라렸다.

「정윤아.」

「예?」

「너는 내가 왜 좋은 것이냐?」

처음 만난 이후부터 지금까지 장장 다섯 해를 함께하면서도 이런 물음을 받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에 정윤은 놀라면서도 한편으로 당황하는 눈치였다. 그러더니 이내 으음…… 하고 턱을 쥐고는 나름대로 진지하게 생각을 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얼마간 생각을 하나 싶더니 묻는다는 게 고작 이것이다.

「이유가 있어야 합니까? 형님은 제 형님이시잖아요.」

형제라는 이유만으로 좋아한다는 것인가? 아무리 친형제자매라 해도 우애가 깊지 않거나 사이가 좋지 않은 경우도 많다 들었다. 한배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이유가 되지 못한다. 소운은 그렇게 생각했다.

기소운은 앞으로 봐도 뒤로 봐도, 어디로 보나 볼품없다. 자신이 생각해도 팔자 한번 사납다 싶을 정도로 병약해 부모에게 버림받았고, 이 나이가 되도록 글도 알지 못했었다. 이제 약관이 얼마 남지 않았건만 가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혼인도 하지 못하고 평생 이곳에서 썩어 갈 인생이다. 이리 볼품없는 형제가 창피할 법도 한데, 저를 올려다보는 저 눈동자 속에는 애정 어린 동경이 가득하다. 그게 소운은 정말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형님은 아름답습니다.」

「농담도 잘하는구나.」

「정말입니다. 아마 형님을 보는 사람들은 모두 형님에게 반할걸요?」

말도 안 되는 소리. 이리 볼품없는 사내를 보고 혀나 안 내두르면 다행이겠지. 소운은 작게 코웃음을 쳤다. 그러자 정윤은 ‘어어, 정말인데’ 하고 중얼거렸다.

「저는 형님이 제 형님이라 좋습니다.」

「…….」

아이가 활짝 미소 짓는다. 아무런 흑심도 담겨 있지 않은 순수한 웃음. 그 웃음을 마주할 때마다 소운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확실한 것은, 이 아이가 자신의 삶에 끼어든 이후부터는 공허한 시간이 줄었다는 것이었다.

경서부터 시작해 운문, 산문, 희곡 등 가리지 않고 서책이라면 달달 외울 때까지 읽고, 또 읽었다. 글을 배우기 시작한 지 다섯 해도 채 되지 않아 그 어렵다는 대경서에도 눈을 돌리니, 정윤은 그 재능이 실로 아깝기 그지없다고 한탄했다.



정윤의 학문 수준으로서는 소운에게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게 되자마자 소운은 고민에 빠졌다. 그간 글에 미쳐 미처 보이지 않던 것들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정윤은 이제 지학(志學)을 훌쩍 넘겨 열일곱이 되었다. 소운 또한 약관을 넘긴 지 오래다. 아우는 지금 배워야 할 것이 많은 중요한 시기다. 다른 자리도 아니고, 장차 군왕의 자리에 걸맞는 인품과 덕을 쌓아 현명한 통치를 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런 아이를 제 욕심 때문에 과하게 붙잡아 둔 것이 아닌가. 아비가 친히 자신의 존재를 죽었다 알렸다면 분명 그 이유가 있을 텐데, 이리 은밀한 만남을 계속 이어 나가도 되는 것일까.

「이제 오지 말거라.」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소운은 정윤에게 그리 통보했다. 최대한 담담한 어조로 차근차근 설명하듯. 예상했던 대로 아이는 이해하기 힘들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글에 대한 욕심 때문에 너를 이리 잡아 두었다만, 이제는 그리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안다.」

「형님.」

「네 나이도 이제 열일곱이고, 그 때문에 예전보다 바빠졌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배울 것도 많고 식견을 넓혀야 하는 시기에 이리 시간을 허비하면 어찌하겠느냐. 이제부턴 오지 말거라.」

그리 말하는 소운은 정윤을 똑바로 마주 보지 않고 있었다. 형님. 정윤은 다시금 조용히 소운을 불렀다. 그럼에도 근심으로 가득한 눈동자는 자신을 향하지 않았다.

「싫습니다.」

「정윤아.」

「싫습니다. 왜 멀쩡히 살아 계신 형님을 두고 제가 공우지척(拱右之慽)을 겪어야 합니까? 저는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자그마치 다섯 해였다. 오 년이라는 시간 동안 제 아우는 이런 식으로 언성을 높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에 소운의 눈동자가 희미하게 흔들렸다.

「혹, 이제 제가 필요 없어진 것입니까? 더 이상 글을 가르쳐 드릴 수 없는 소제는 필요가 없어진 겁니까?」

「무슨 그런 해괴한 말을 하느냐! 그런 것이 아니다. 나는, 나는 그저…….」

오 년 전의 정윤은 지금보다 훨씬 앳되고, 작은 체구를 가지고 있었다. 사내아이는 하루가 다르게 쑥쑥 큰다더니, 언제 이렇게 컸을까 싶을 정도로 정윤은 어느덧 장성해 있었다.

그래 봤자 열일곱이라 할 수 있겠다만, 이미 키는 자신을 훌쩍 넘어선 지 오래다. 대가댁 여식들이 본다면 발그레 볼을 붉힐 정도로 풍채 좋은 어엿한 미청년이 되었다.

곧 내자도 들일 것이고, 본격적으로 후계자 교육 또한 받게 되겠지. 그렇게 된다면 어차피 이곳으로 오는 발길은 느슨해질 것이고, 느슨해지다 보면 어느샌가 끊길 것이다.

자신에게 세월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 네게 흠이 될 것이다. 나는 네게 흠이 되고 싶지 않다.

담담히 말하는 소운을 품에 가둔 정윤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

「제가 언젠가 보위를 물려받게 된다면, 그때는 정식으로 형님을 모실 것입니다.」

「정윤아.」

「지금은 비록 아무런 힘도 없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만경을 지배하게 되겠지요. 그때가 되면 그 누구도 형님의 존재를 부정하고 흠이라 칭하지 못하도록 할 것입니다.」

그리 말하는 정윤의 모습은 처음 보는 사내처럼 느껴질 정도로 낯설었다. 자신을 품에 안고 있는 이가 천진하게 웃던 그 어린아이가 맞나 싶을 정도로.

언제나 형님, 형님 병아리처럼 재잘거리며 활짝 웃기만 하던 어린 아우가 갑자기 낯선 사내로 보였다. 그래, 자신은 명백히 그 기백에 눌렸다. 그래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