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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련(初戀) 4화

1장 (4)


「그러니 그런 말씀, 다시는 하지 마십시오. 형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면 제 가슴이 찢어집니다.」

그 후로도 소운은 정윤이 왕래를 할 때마다 부러 눈을 주지 않고, 이제는 오지 말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하지만 황소가 형님, 하고 넙죽 절을 할 정도의 고집을 가지고 있었던 정윤은 절대로 제 뜻을 꺾지 않았다.

비록 가례(家禮)를 익혀야 할 시기에 배움의 기회를 얻지 못했다 하나, 선한 인품만은 그대로였던 소운은 정윤에 대한 치졸하고 못난 감정을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그래서 더욱 정윤에게 벽을 쌓고 네 세상으로 돌아가라 이르기가 힘겨웠다. 남들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형님, 아우하며 우애 좋은 형제로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일까. 왜 우리는 업보라도 되는 양 이리 세상의 눈을 피해야만 하는 것일까.

천진한 정윤과는 달리, 소운은 깊은 근심으로 인해 하루하루 안색이 나빠지고 있었다.

“아기씨, 저 영순입니다.”

“들어와.”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는 소운을 위해 최대한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선 영순은 침대 옆 탁자에 탕약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탁자 위 한 켠에 놓여 있는 구절판에 관심을 보였다. 작은 군주님은 매번 올 때마다 이리 귀한 것을 가져오니 영순은 매일매일이 즐거웠다.

구절판 뚜껑을 열어 본 영순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설탕에 절인 복숭아가 아닙니까? 어찌 이리 귀한 것을.”

영순이 구절판 속 내용물에 호들갑을 떨든 말든, 소운은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듯 서책에만 시선을 주고 있었다. 영순은 그런 소운을 바라보며 못 말린다는 듯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탕약이 놓인 쟁반을 들고 참대로 향했다. 탕약을 내밀어도 여전히 책을 읽는 것에 빠져 있는 소운의 모습에 영순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약부터 드시고 보셔요. 속을 진정시켜 줄 겁니다.”

“나중에.”

“오늘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드셨잖아요. 그러다가 경을 칩니다.”

안 그래도 허약한 몸인데 끼니까지 거른다면 큰일이다. 체기가 단단히 들면 아무리 유순한 음식을 먹어도 속이 받아 주질 않으니 식사는 그렇다 쳐도, 약은 무조건 먹여야 했다. 그게 주인을 모시는 아랫것의 사명이니까.

영순이 계속해서 타박하자 소운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서책에 책갈피를 꽂고 옆으로 치웠다. 쟁반 위에 놓인 그릇을 손으로 들고 한 모금 들이켠 소운의 미간이 한껏 좁아졌다.

평소 먹는 약도 쓰긴 하다만, 이렇게 쓴 약이 속을 편안하게 해 줄 것이라니. 먹을 때마다 의심이 들었다. 입에서 부터 쓴 약이니 속에 들어가도 쓰지 않을까 하는 의심.

“너무 써.”

“입에 쓴 약이 몸에 좋은 법이지요. 자, 어서 마저 들이켜세요. 한 방울도 남기지 말고, 쭉.”

옆에서 감시하듯 하니 늑장을 부리지도 못한다. 소운은 결국 눈을 질끈 감고 어마어마하게 쓴 약을 쭉 들이켰다. 마지막까지 쭉 들이켜고 나니 하아, 하고 힘겨운 듯 거친 숨이 터져 나왔다.

“어떤 것을 드릴까요? 설탕에 절인 과일도 있고, 전병에 다식, 떡도 있네요.”

“아무거나.”

입 안에 맴도는 쓴 기운을 물리쳐 준다면야 뭔들 상관없었다. 소운의 대답에 잠깐 고민하던 영순은 겉에 설탕이 듬뿍 묻어 있는 당과를 건넸다. 당과를 받아 입에 털어 넣은 소운의 한쪽 볼이 삐죽 튀어나왔다.

입에 문 당과를 이리저리 굴리는 소운을 귀엽다는 듯 바라보던 영순은 빈 그릇을 들고 일어섰다.

“석반은 한술이라도 뜨셔야 합니다. 뭐 드시고 싶은 건 없으셔요?”

“없어.”

“나중에 드시고 싶은 게 생기면 바로 말해 주세요. 아셨죠?”

이미 다시 책에 빠져 있던 소운은 대답이 없었다. 다시금 가볍게 한숨을 내쉰 영순은 책을 읽는 소운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조용히 문을 열고 방을 나섰다.

영순은 소운의 나이 세 살 때부터 그를 모셨다. 얼굴에 큰 화상이 있어 면포 자락으로 얼굴의 절반을 가리고 다니는 영순은 소운의 하나뿐인 심복이었다.

원체 어렸을 적부터 몸이 허하고 틈만 나면 잔병치레를 겪는지라 소운을 모시는 것이 여간 힘이 드는 게 아니었다. 진초왕은 버린 아들을 신경 쓰지 않았고, 소운을 모시는 데에 필요한 모든 물자는 영순 혼자 알아서 조달해야만 했다.

바로 옆이 친부모가 사는 곳인데 어찌 그럴 수가 있겠느냐만은, 진초왕은 소운을 유폐할 시절부터 소운의 몸종에게 둘이서 평생 먹고살기에 부족하지 않은 돈을 쥐여 주고 왕래를 끊었다.

아들의 몸종이 돈을 들고 도망가진 않을까 염려하지도 않았다. 혹여나 정말로 돈만 들고 도망가고 그로 인해 아들이 굶어 죽는다 해도 상관없었다. 그저 사방이 높은 담벼락으로 꽉 막혀 있긴 하지만 기거할 집과 돈, 종년 하나를 붙여 주는 것만으로 할 도리는 다 했다고 여긴 것이다.

그 이후에 아들이 어떻게 살든 죽든 운명에 맡겼다. 다행히도 영순은 죽을 각오로 소운의 곁을 지켰다.

소운이 여섯 살 때에, 열이 급격히 올라 영순이 진초왕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별궁은 본궁과 출입구가 연결되어 있지 않았고 성벽 또한 지을 때에 의도적으로 훨씬 높게 지었기에 넘어갈 수조차 없었다. 해서 진초왕과 그 왕비를 알현할 방법은 성문을 통해 입궁하는 수밖에 없었다.

영순은 결국 성문을 넘어가지도 못하고 쫓겨났고, 그 이후부터는 소운에게 어떠한 일이 생겨도 진초왕을 찾아가지 않았다.

소운이 기거하는 별궁은 높은 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는 넓디넓은 대궐의 구석에 보일 듯 말 듯 지어져 있었다. 한쪽 성벽은 궁과 이어져 있으나, 나머지 삼면의 성벽 너머는 숲과 절벽뿐이다. 때문에 영순은 물자를 조달할 때마다 험한 숲길을 해쳐 나가야만 했고, 왕래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 탓에 먹을 것이 귀했다. 때문에 군왕의 장자임에도 소운은 평민들처럼 간솔하게 차려 먹어야만 했다.

하지만, 오 년 전부터 작은 군주인 정윤이 이 별궁으로 잠행해 올 때마다 갖가지 책과 식료품, 진귀한 물건들을 가져오니 한결 숨을 돌릴 수가 있었다. 정윤 덕분에 소운에게 올릴 밥상은 예전보다 훨씬 풍족해져 영순은 먹을거리 걱정으로 하루하루를 지내던 시절을 잊은 지 오래였다.

소운은 술시(戌時)가 다 되어서야 석반 상을 들였다. 쌀죽과 푹 퍼질 정도로 오래 익힌 무나물, 조기구이, 콩 조림이 다인 소박한 상차림이지만 이 정도도 예전에 비하면 양호한 것이었다.

늦은 시각이 다 돼서야 침상에서 일어난 소운은 저녁상을 마주하고 앉았다. 입맛이 없어 수저를 드는 것을 머뭇거리는 소운에게 영순은 걱정 어린 어조로 말했다.

“다 드시지 않아도 되니까 몇 술만이라도 드세요.”

차린 이의 성의를 봐서 조금이라도 먹어야 하건만, 그제 단단히 체기가 들어 하루 종일 고생을 했던 터라 음식을 먹는 것에 거부감이 일었다. 한참 동안 탁자 위 음식들을 그림의 떡처럼 바라보기만 하던 소운은 어렵사리 숟가락을 들었다.

“그러고 보니, 곧 아기씨의 생신이네요. 세월이 어찌 이리 빠른지.”

“아버님에게서는 아직 소식이 없느냐?”

“……예.”

소운의 물음에 영순은 잠시나마 멈칫하더니, 이내 천천히 답했다. 제 대답에 풀이 죽을 것을 염려했으나 소운의 표정은 딱히 변화가 없었다. 그저 조용한 목소리로 ‘그래’ 하고 혼잣말하듯 대답했을 뿐.

색이 바랜 쇠숟가락이 죽을 헤집는다. 숟가락 끝에 아주 살짝만 죽을 떠낸 소운은 입으로 가져가 천천히 씹기 시작했다. 씹고, 또 씹고. 풀어진 쌀이 치아에 짓눌리고 짓눌리다 못해 물처럼 묽어질 때까지 소운은 씹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한참 동안 씹은 끝에 겨우 한 숟가락이 목을 타고 넘어갔다. 힘겨운 얼굴이었지만 죽을 삼키는 것을 확인한 영순의 얼굴이 다소 안심한 듯 가라앉는다.

젓가락으로 콩을 이리저리 건드리며 소운은 영순에게 말을 건넸다.

“정윤이, 이제부터 들이지 마라.”

“예?”

“들이지 말고 돌려보내.”

소운의 말이 의외라는 듯, 영순의 얼굴에 당혹감이 깃든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지금껏 소운은 영순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불청객이 내키지 않는다면 불청객에게 직접 고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 탓이었다.

하지만 그 아이는 아무리 오지 말라, 어서 돌아가라 일러도 듣질 않으니 어찌하겠는가. 마음 같아선 그 아이의 심복에게 직접 말을 하고 싶지만 그 아이의 심복은 혹여나 들킬까 주변을 감시하느라 매번 모습을 보이지 않기에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아버님에게 직접 고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정윤 공자님이 싫으십니까?”

“싫고 자시고 할 게 뭐가 있느냐? 아우인데. 그저…….”

점잖게 말을 잇던 소운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미간을 찌푸린 소운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들키기라도 하면 곤란하니까 그러지.”

정윤은 자신이 죽은 줄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아버님도, 어머님도 그 누구도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해 준 적이 없었다고. 아버님이 자신의 존재를 그 아이에게 숨긴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이다.

약관(弱冠)까지 장성한다면 전하 또한 소운 님을 돌아보실 거예요. 그러니 희망을 잃으시면 안 됩니다. 영순이 그리 말했었다. 약관은 이미 훌쩍 넘긴 지 오래였다. 영순은 세월이 빠르다고 말했지만, 새벽같이 일어나 책과 경전을 읽고 필사를 하는 것이 삶의 전부인 소운에게 세월이란 그저 느리기만 했다.

“싫으신 건 아닌 거죠?”

“…….”

무언은 곧 긍정이라는 말도 있기에 영순은 작게 미소 지었다.

“제가 들이지 않는다고 안 오실 분도 아닌데 어쩌겠습니까.”

“아무튼, 올 때마다 가라고 해.”

“안 가시면요?”

“돌이라도 던지든가.”

소운이 퉁명스럽게 반문하자 영순은 화통하게 웃으며 ‘그런 짓을 했다간 목이 날아갈 겁니다. 감히 소왕께 어찌 그런 짓을’ 하고 맞받아쳤다.

“그만 먹으련다.”

“좀 있다 탕약을 들이겠습니다.”

죽 그릇을 절반도 비우질 않았다. 만족스럽지 못했지만 이 정도도 애를 쓴 것이라는 것을 잘 알기에 억지로 더 뜨라 권할 수는 없었다. 영순은 별말 없이 가지고 온 쟁반에 그릇을 옮겨 담았다.

입맛이 까다로운 주인 탓에 남기는 음식이 많아 뜻하지 않게 포식하는 건 영순이었다. 물론, 잘 먹질 못하는 주인을 두고 배불리 포식할 정도로 양심을 팔아먹은 몸종은 아닌지라 맘 편히 먹지는 못했지만.

“입맛이 없으면 정윤 공자님이 가져온 주전부리라도 드세요.”

양손으로 쟁반을 든 영순은 그렇게 문을 나섰다. 문이 닫히고, 다시 방 안에 적막이 흐르자 소운은 의자에서 일어나 침대로 향했다. 침대 옆 협탁에 놓인 등에 불을 켜고, 침대에 앉아 베갯머리에 놓인 서책을 펼쳐 들었다.

야심한 시각에 등빛에 의지해 글을 읽으면 눈이 안 좋아진다고 매번 영순이 잔소리를 했지만, 소운의 독서 사랑은 여간 이기기가 힘들었다.

한 글자, 한 글자를 꼼꼼히 눈과 머리에 새기듯 읽어 내리던 소운은 천천히 책을 덮었다. 영순은 자신이 책을 읽느라 정신이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그렇지 않았다. 글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글을 읽고 있음에도 머릿속엔 다른 생각뿐이었다.

방금 전 무엇을 읽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아 두 번째 장에서 첫 장으로, 몇 장 넘겼다가 다시 첫 장으로. 돌아오길 반복했다. 잡념을 버려야 한다는 생각을 해도 책의 내용은 머릿속에 들어오질 않았다.

오 년 전, 정윤과 처음 만났던 날이 떠오른다. 찌뿌드드한 몸을 풀 겸 침상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툇마루로 나가 바람을 쐬었다. 날씨가 맑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 기분이 좋았다.

이 층이긴 하지만 성벽 너머로 보이는 것은 그저 울창한 수풀과 푸르른 하늘이 전부였다. 맑은 하늘을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을 하던 중 본궁 방향, 정확히 성벽 너머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나뭇가지 위에 아슬아슬하게 올라타 있는 정윤의 호위 무사와 정윤을 봤을 때에는 그 행색 때문에 괴한으로 오해해 겁을 먹었었다. 방 안으로 돌아와 문을 닫고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혹여 살변이라도 당하는 건 아닌지 가슴 졸이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 아이가 자신의 친동생일 것이라곤 꿈에서조차 상상하지 못했는데.

물론 평소 자신에게 형제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남몰래 했었다. 다섯 살 때까지의 기억으로 보아, 나이 많은 형제자매는 없었던 것 같으니 만약 정말 있다면 자신보다 어릴 것이라 추정해 왔다.

어떻게 생겼을까, 어여쁜 누이일까? 아니면 개구쟁이 남동생일까. 혹시 자신처럼 병약해 어미 아비의 속을 썩이지는 않을까. 그런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 나무에서 봤던 소년이 제 아우일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세간에서는 자신이 죽었다고 되어 있으며 아비 어미조차 자신의 존재에 대해 그리 설명했다는 사실을 알고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아팠다.

소운은 침상에서 일어나 탁자 위에 놓여 있는 고급스러운 다식판의 뚜껑을 열었다. 알록달록, 입뿐만 아니라 눈까지 호강시켜 주는 간식거리를 하나 들어 입에 가져갔다. 달콤한 맛과 향내가 입 안 가득 퍼져 나간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이리 귀한 주전부리는 이곳에서 살기 시작한 후 아예 접하지 못했었다. 정윤이 찾아오기 시작한 이후부터는 항상 탁자 위에 놓여 있는 것이지만. 입맛에 맞지 않는 것은 아니다만, 단것을 찾을 정도로 좋아하지는 않기에 이걸 먹음으로서 감격스럽다거나 그런 느낌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왜일까. 정윤의 웃음기 어린 앳된 얼굴이 떠오르며 가슴 한쪽이 아려 왔다.

다섯 살. 궁을 마지막으로 떠날 때 당시의 기억은 흐릿하지만 머릿속에 어렴풋이 남아 있었다. 드문드문 남아 있는 기억 중에서 또렷하게 떠오르는 것은, 잘 움직이지 못하고 주로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던 시야와 자신을 바라볼 때에 한없이 무거운 아비의 표정이었다.

‘아비를 용서하지 말거라.’

아버님은 그리 말씀하셨다. 만일 용서해 달라고 했다면 부모 자식 간의 인연을 완전히 끊지 못하고 나중에라도 돌아봐 주시지 않을까 하는 헛된 바람을 품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끝까지 자신을 용서하지 말라는 말이 항상 가슴을 후벼 팠다. 열이 오르고 숨을 쉬기가 힘들 때에, 이마를 쓰다듬어 주는 이가 어머니가 아니라는 현실이 원망스러웠으며 아무리 아파도 어머니를 뵐 수 없다는 사실을 믿기 힘들었다.

다섯 살배기에게 어미와의 생이별이란 그런 것이었다. 일 년 삼백육십오 일 중 삼백육십오 일을 눈물로 지샜다. 울지 않은 날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안 그래도 병약한 몸은 갑작스러운 부모와의 이별과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제 주인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아무리 울어도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부터는 다소 편안해졌던 것 같다. 모든 것을 내려놓게 되는 통달의 경지를 소운은 고작 한 자릿수의 나이에 겪었다.



***



이게 무슨 일이지.

잠에서 깨어나 벌떡 몸을 일으킨 정윤은 멍하니 넋을 놓은 얼굴로 그리 중얼거렸다. 묵직하고 축축한 아랫도리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한 정윤은 덮고 있던 침금을 확 걷어 냈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은 한동안 변화가 없었다. 질끈 눈을 감고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린 정윤은 몇 번 헛기침을 해 목소리를 가다듬고 나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

“밖에 누구 있느냐?”

“예, 부르셨습니까?”

문 너머에서 궁관 하나가 대답을 해 왔다. 후우, 하고 깊게 숨을 들이마신 정윤은 최대한 태연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봉춘이 좀 불러 갈아입을 속곳과 의복을 가져오라 일러라.”

“예.”

봉춘이 이놈은 이 시간까지 뭘 하는 거야. 제 주인이 일어나기 전부터 문밖에서 빠릿하게 기다리고 있어야지. 정윤의 표정이 더욱 살벌하게 가라앉았다.

봉춘이 환복 할 옷가지들을 가지고 올 동안, 정윤은 곰곰이 깊은 생각에 빠졌다. 분명 음탕한 꿈을 꾸었으니 몽색(夢色)을 한 것일 터. 그런데 아무리 지난밤 꿨던 꿈을 떠올리려 애써 봐도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정윤은 나이 열셋에 처음 색(色)을 접했다. 아비의 손에 이끌려 낙양 최고의 기생집 모란각(牡丹閣)에 발걸음을 하였고, 거기서 마음에 드는 기녀를 골랐다. 꽃다운 나이 열일곱의, 체구만큼이나 가슴이 작고 흰 피부의 연약해 보이는 기녀였다.

화초를 올린 지 얼마 되지 않아 동기(童妓)나 다름없으니 방중술에 능한 다른 기녀를 고르라는 아비의 만류에도 정윤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예로부터 귀족가 사내아이는 열다섯이 채 되기 전에 밤일 교육을 받는다. 고위 가문 도령들의 방중술 교육에 힘쓴 기녀들은 그 보상으로 큰 부를 얻는 대신, 불임 약을 먹고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 된다. 가문에 천한 피가 섞인 서자가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부러 금욕을 한 건 아니었으나, 여색에 큰 관심이 없었던 터라 교육이 끝난 이후로 여인을 안은 적은 없었다. 대개 사내들은 주기적으로 양기를 빼 주지 않으면 몸에 열이 올라 병에 걸린다고들 하던데, 몸의 양기는 무공으로 다스리다 보니 그런 증상이 나타난 적도 없어 여색을 멀리하는 데에 그리 심각성을 가지지도 않았다.

너무 오랫동안 육욕을 멀리했나. 그래서 간밤에 몽마(夢魔)라도 다녀간 것인가. 그건 그렇다 쳐도 이 나이에 침금을 더럽히다니, 이 무슨 추태란 말인가.

“공자님, 봉춘입니다.”

“들어와라.”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온 봉춘은 오늘따라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 제 주인의 냉담한 낯빛에 움찔 발걸음을 멈췄다. 삐딱한 자세로 침대에 앉아 턱을 괴고 있는 정윤에게 봉춘은 우물쭈물 물음을 건넸다.

“어디 편찮은 곳이라도…….”

“뭐 하는데 이리 늦어? 지금이 몇 시냐?”

“아직 묘시도 채 되지 않았는데요?”

“허어, 네가 요즘 덜 맞았지?”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아직 해가 밝지 않아 어두컴컴한 것이 보였다. 봉춘은 맞는 말을 하고도 타박을 맞은 것이 억울한 것인지 입을 삐죽거리고 있었다.

“됐으니 어서 속곳이나 이리 내.”

“직접 하시게요?”

군말 없이 지시하는 대로 따를 것이지, 뭐 저리 말이 많나. 몸종으로 살며 눈칫밥 얻어먹은 짬이 얼만데 저리 눈치 없이 구는가. 안 그래도 더러운 기분에 기름을 퍼붓는 격이라 정윤의 눈에서는 살기가 흘러넘치고 있었다.

그제야 침실 안 공기가 심상찮다는 것을 직감한 것인지, 봉춘은 합- 하고 입을 꾹 다문 채 공손히 정윤에게 의복을 건넸다.

“나가.”

“예엡!”

신경질적으로 옷을 낚아챈 정윤이 싸늘한 어조로 명령하자 봉춘은 꽁무니를 내빼듯 서둘러 침실을 나갔다. 장지문이 닫히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정윤은 금침을 걷어 내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다행히도 토정한 양이 그리 많지는 않아 이불보까지 젖지는 않았다. 젖은 침의와 속곳을 한 번에 끌러 내리고 바닥에 아무렇게나 패대기친 정윤은 곧장 새 속곳을 입으려다, 이내 무언가가 떠올랐는지 얼굴을 구기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곤 문 너머로 봉춘을 불렀다.

“봉춘아.”

“예에!”

“당장 가서 영견과 소셋물을 가져와라.”

고간에 진득하니 말라붙은 백탁액을 그대로 두고 그 위에 속곳을 걸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제기랄…….

정윤은 나지막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