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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련(初戀) 2화

1장 (2)


그날, 정윤은 아비인 진초왕에게 넌지시 별궁에는 누가 사느냐고 물었다. 하지만 별궁에 대한 언급을 듣자마자 지금껏 보지 못했던 무서운 얼굴을 하고 그에 대해 어떻게 안 것이냐고 채근하는 아비의 반응에 산보를 하다가 우연히 발견했다고 털어놓았다.

아비가 그곳에서 사람을 보았느냐고 묻자 정윤은 아무도 보지 못했다고 답했다. 그러자 아비는 다소 안심했지만 여전히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잘 들어라, 정윤아. 거긴 대업을 치를 때마다 존귀하신 분을 모셔 공을 드리는 신당이다. 너 같은 어린아이가 자칫 가까이 갔다간 큰 변고가 생길지도 모르니, 앞으로는 절대로 그 근처에 얼씬거리지 말거라. 알겠느냐?」

너무도 무겁게 가라앉은 아비의 표정과 목소리에 정윤은 말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신당이라고? 그럼 그 사람이 신을 받은 신자라도 된다는 건가?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았지만, 별궁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무서운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던 아비의 모습 때문에 정윤은 더 이상 아무에게도 별궁에 대해 묻지 못했다.

하지만 어린아이의 호기심을 어찌 막을 수 있겠는가. 얼마 지나지 않아 정윤은 다시 팔각정 옆 교목으로 향했다. 성인 남성보다 높은 성벽 탓에 그 너머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또 나무를 탔다. 두 번째라 저번보다는 올라가기가 쉬웠다. 봉춘이 밑에서 망을 보고 원 남매는 처마 위에서 기척을 숨기고 성안 사람들과 진초왕, 당수연의 움직임을 관찰하며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원래라면 군주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니 중죄이지만, 이미 그들은 진초왕으로부터 ‘너희들의 주군은 내가 아닌 정윤이며 그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정윤의 안위를 우선시해야 한다’는 명을 받들었기에, 그대로 행동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장황하게 들키지 않게끔 준비를 하고 갔던 것인데 결국 그날엔 소년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정윤의 정체 모를 소년에 대한 관심은 점점 높아져만 갔다. 결국 정윤은 원 남매에게 소년의 정체에 대해 은밀히 구교할 것을 명했다.

하지만 엄연히 정윤의 호위 무사였던 그들인지라 보는 눈이 있으니 낮에는 정윤의 곁을 지켜야 했기에 늦은 밤에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원 남매는 본디 진초왕이 고심 끝에 골랐을 정도로 그 능력이 뛰어난 자들이었다. 다소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성안 곳곳의 눈을 피해서 그 소년에 대한 정체를 알아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약 육 년 전 궁에서 일을 하던 연로한 여관 하나를 찾아내 거금을 쥐여 주고 그 대가로 소년에 대한 증언을 받아 낼 수 있었다. 원 남매가 잠 안 자고 발로 뛰며 조사한 결과, 별궁의 정체는 신당이라던 진초왕의 말은 거짓이었다.

그리고 별궁에는 소년 혼자만 기거하는 것이 아니었다. 삼십 대 초중반 정도의 여종으로 보이는 자 또한 함께 지내는 것 같았다.

「뭐? 그럼 그 사람이 내 형님이란 말이냐?」

「주군, 말소리가 큽니다.」

「하지만, 하지만 형님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죽었다고…….」

야심한 시각이라 듣는 이는 단둘뿐인데 무슨 상관인가. 정윤은 소년의 정체가 자신의 친형일 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정윤은 엄연히 자신에게 다섯 살이나 많은 형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모두가 그러하듯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병으로 죽었고 더 이상 남아 있는 형제는 없다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어떻게 자신의 친형일 수가 있겠는가? 처음에는 그럴 리가 없다고 여겼지만, 별궁에 대해 언급하자마자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과한 반응을 보이고 끝내 거짓을 고하며 그곳에는 얼씬도 하지 말라던 아비의 모습을 생각해 보니 어쩌면 정말로 자신의 형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윤은 그 길로 원상을 통해 제 친형일지도 모르는 소년에게 서신을 보냈다. 자신을 보자마자 사색이 되었던 터라 원일은 소년에게 정윤의 서신을 직접 건네주진 못하고, 마당에 쪽지처럼 접은 것을 떨구기만 하고 몸을 숨긴 채 소년이 읽는지 안 읽는지 확인했다.

소년은 주로 실내에서 바깥으로 나오는 일이 드문 듯 보였다. 소년의 몸종은 서신을 발견할 때마다 불안한 눈빛으로 어쩔 줄 몰라 하며 품에 감추고는 서둘러 집 안으로 몸을 숨겼다.

저 몸종이 글을 읽을 줄 아는 확률은 극히 적었다. 내용을 알려면 소년에게 건네야만 할 테니 아마 그에게 보여 주었을 것이다. 정말로 자신의 형님이 맞느냐, 꼭 한번 만나 뵙고 싶으니 답신을 부탁드린다는 내용의 서신을 전달하길 총 스물한 번을 넘겼을 때, 기다리다 지친 정윤은 어미와 아비가 둘 다 성을 비운 시간을 이용해 행동으로 옮겼다.

고의적으로 자신을 무시한다면야, 직접 만나러 가면 되지! 그간 틈틈이 시간이 날 때마다 눈을 피해서 나무에 올라갔던 터라 나무를 타는 일은 이제 식은 죽 먹기다.

원양과 원상이 처마 위에서 성안 사람들의 움직임을 감시하고, 무슨 일이 있으면 곧바로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생각하며 정윤은 나무를 탔다. 열심히 나무에 기어올라 별궁 안이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의 높이까지 올라갔을 때, 이 층 툇마루에 서서 한껏 미간을 찌푸리고 이쪽을 응시하고 있는 소년과 눈이 딱 마주쳤다.

그에 정윤은 활짝 웃으며 미소로 화답했다.

「어엇……!」

한껏 인상을 찌푸리고 정윤을 바라보던 소년은 다시금 쏙 방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도망치는 이를 붙잡기라도 하듯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던 정윤은 실망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굳게 결심한 듯 조심조심 나뭇가지 끄트머리로 기어갔다.

「공자니임, 그러다 떨어지기라도 하시면……!」

나무 밑에서 아슬아슬하게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붙잡고 끙끙거리며 성벽으로 향하는 정윤을 바라보던 봉춘은 발을 동동 구르다 이내 못 보겠다는 듯 두 손으로 눈을 가려 버렸다.

공자님이 떨어져서 다치기라도 하시면 나는 죽은 목숨이네, 제발 그러지 말고 내려오시길 비네 호들갑을 떠는 봉춘의 목소리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정윤은 성벽 끝에 간신히 매달리는 것에 성공했다.

이제 성벽에서 조심조심 내려가기만 하면 된다. 다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이 들자 방심한 것인지, 정윤은 으악, 하고 짧은 비명을 내지르며 미끄러지고 말았다.

「아이고, 아야야…….」

떨어지면서 중간에 성벽 벽을 손으로 붙잡아 속도를 늦췄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크게 다칠 뻔했다. 엉덩방아를 찧은지라 보이는 곳에 상처가 남지 않아 천만다행이었다. 성벽 너머에서 차라리 안 보겠다며 눈을 가리고 벌벌 떨고 있던 봉춘은 정윤이 비명을 지른 순간부터 얼음이 되어 있었다.

「저, 고, 공자님……?」

「난 괜찮으니 거기서 망이나 보고 있어.」

「정말, 정말 괜찮으신 거죠? 다, 다치신 건 아니죠……?」

정윤은 혹시라도 자신이 다치진 않았을까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 봉춘에게 다시금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괜찮다 대답했다. 하여간, 봉춘이 저놈은 겁이 많아 탈이다. 저리 겁이 많은 몸종을 어디다 쓰겠나. 사내자식이 되어서 말이지.

쯧쯧 혀를 차며 옷을 털고 일어난 정윤은 순간, 전각 안에서 누군가가 나오자 반짝 눈을 빛냈다. 빨랫감을 한가득 품에 안고 마당으로 나온 이는 떡하니 서 있는 정윤을 보곤 화들짝 놀라며 뒤로 나자빠졌다.

「에구머니나!」

정윤은 사방에 흩어진 빨랫감들과 당황스러운 얼굴로 자빠져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여인네에게 뚜벅뚜벅 걸어갔다.

여인은 떡 벌린 입을 벙긋거리며 물어 왔다.

「뉘, 뉘, 뉘십니까……?」

놀랄 법도 했다. 이곳에 낯선 이가 찾아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으니 말이다. 찾아올 사람도 없고, 찾아올 수도 없으니 갑작스러운 정윤의 방문은 소운의 몸종 영순을 놀라 나자빠지게 만들기 충분했다.

키는 저보다 아주 약간 작은 듯해 웬 청년인가 싶었는데, 가까이서 보니 얼굴이 아주 앳된 것이 어린아이인 듯했다. 그리고 행색을 보아하니 귀한 가문의 도련님이 틀림없었다.

「이름이 무엇이냐?」

「예? 제 이름이오?」

「그래.」

한평생 소운을 모시고 살았던 터라 아랫것의 처신머리가 몸에 뿌리 깊이 박혀 있었던 영순은 그 물음에 자신도 모르게 깍듯이 ‘여, 영순이라 하온데……’ 하고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영순의 대답에 흡족한 미소를 지은 정윤은 다시금 되물었다.

「그래, 영순아. 네가 모시는 주인을 한번 만나 뵈려 하는데. 안에 있느냐?」

「하, 한데 누구십니까? 존함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간신히 바닥에서 일어나 공손히 두 손을 모으고 상체를 숙인 영순은 다소 경계하는 듯한 얼굴로 조심조심 반문했다. 그러자 정윤의 얼굴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물은 것에만 대답해라. 안에 있느냐?」

「저, 저는 모시는 주, 주인이 없습니다. 뉘, 뉘신지 모, 모르겠으나 자, 잘못 아, 알고 찾아오신, 거, 것…….」

저보다 족히 열 살은 많아 보이는 이에게 자연스레 하대를 하는 것을 보아 귀한 집의 자제임이 분명한데, 대체 어인 일로 이곳에 온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애초에 이곳은 저 거칠고 울창한 숲을 지나지 않으면 올 수가 없는데 어찌 이 도령은 수발을 드는 이도 없이 덜렁 혼자서…….

호, 혹 산신의 현신이라도 되는 것인가? 정말 그런 것인가? 생각하면 할수록 영순의 머릿속은 점점 혼란의 도가니였다. 허나 누구인지 확실하지도 않은 이에게 제 주인의 존재를 덜컥 알려 줄 수는 없었다. 특히 세간의 눈을 피해 숨어 사는 처지이니 더더욱 그러할 수밖에 없었다.

높으신 분에게 거짓을 고했다는 죄로 고초를 겪게 될지언정, 입을 가벼이 놀릴 수는 없었다.

그런 영순을 바라보던 정윤은 쯧, 하고 짧게 혀를 차며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기정윤이다. 이제 알겠느냐?」

정윤의 이름을 들은 영순이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벌떡 들었다. 진초왕의 둘째 아기씨의 존함을 알지는 못하지만, 궁성 안에서 저런 복색을 하고 가진 성씨가 기씨라면 답은 하나였다.

「허, 허면 호, 혹…….」

「그래. 그 혹이 맞다.」

「그, 그럼 얼마 전부터 정체불명의 서신을 보내오신 것도…….」

「그래. 그 또한 내가 맞다.」

친히 이름 석 자까지 가르쳐 줬으면 눈치껏 알아먹을 것이지, 이리 확인까지 시켜 줘야 하나.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정윤은 참을 인을 가슴에 새기며 답해 주었다.

영순은 정윤의 답을 듣자마자 허업- 하고 크게 숨을 들이켜고는 어쩔 줄 몰라 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머리도 몸도 제대로 돌아가지 않은 듯 보여 정윤은 낮게 깐 음성으로 영순아, 하고 그녀를 불렀다.

아랫것들이 이런 모습을 보일 때에는 웃전이 차근차근 명을 내려 주는 것이 최고였다.

「들어가서 네 주인에게 나에 대해 고하고, 답을 받아 오거라. 알겠지?」

영순은 꿀꺽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웃전에게 고갯짓을 하는 것은 중죄이긴 하나 그녀는 제 심복도 아니거니와 어쩌면 제 형님일지도 모르는 이를 친히 보살핀 자였기에 너그러이 넘어가 주기로 했다. 기분 또한 좋고 말이다.

누가 쫒아올세라 허둥지둥 집 안으로 달려가는 영순의 뒷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정윤은 느긋한 눈길로 전각 주변을 쭉 둘러보았다.

그리 허름하지도, 낡지도 않다. 넓디넓고 자칫하면 길까지 잃을 정도로 넓은 규모의 성에서 평생을 살았던 정윤의 눈에는 작아 보였지만, 몸종과 단둘이서 숨어 살기에는 충분함을 넘어 다소 큰 크기의 집채였다.

그다지 아름답진 않지만 나름대로 연못도 있고. 이만하면 마당도 충분히 넓다. 저 높은 성벽이 유일한 흠이군…….

나무 위에서 볼 때에는 몰랐는데, 막상 안에 들어와 보니 정말 성벽 너머 풍경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작정하고 가둬 놓은 것만 같아 정윤의 얼굴에 씁쓸함이 깃들었다.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왜 이렇게 늦나 싶은 생각이 들기 시작할 무렵 영순이 문을 열고 나왔다. 들어갈 때보다 다소 차분해진 모습이었지만, 어인 일인지 표정이 어두웠다.

「그래, 뭐라 하시더냐?」

「그것이…… 만나 뵙고 싶지 않으시답니다.」

「나에 대해 이야기했느냐?」

「예에.」

그렇단 말이지. 정윤은 오묘한 얼굴로 흐응- 하고 짧게 탄식했다. 자신이 어떤 이인지 알고 있음에도 만나 보지 않겠다는 것은 확실히 천인이나 평민의 태도는 아니다. 만약 신분이 미천했다면 설사 만나기가 싫다 하더라도 맨발로 뛰쳐나와 허리를 숙였겠지.

저를 동등한 지위에 선 자를 대하듯 하는 태도를 보니 더욱 확신이 섰다. 씩 입꼬리를 올린 정윤은 어쩔 줄 몰라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영순을 뒤로하고 문을 향해 성큼성큼 거침없이 발을 내디뎠다.

제 주인의 뜻은 그러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천하에 소왕의 앞길을 어찌 막을 수 있겠는가. 영순은 정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엄지손톱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입구를 벌컥 연 정윤은 이 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힐끗거렸다. 일 층에는 영순이 묵고 있는 침실과 부엌이 다인 듯했다. 최대한 느긋하게 나무 계단을 오른 정윤은 소운의 침실로 보이는 문을 벌컥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툇마루 쪽 창문을 향해 서 있던 소운이 몸을 돌린다.

영순은 단 한 번도 이런 식으로 말없이 문을 연 적이 없었다. 항상 ‘소운 님, 영순입니다’ 하고 미리 언질을 한 후 허락을 받으면 그때 아주 조심스럽게 문을 연다.

방의 주인이 허락을 내리지 않았음에도 저리 문을 벌컥 열다니. 소운의 얼굴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정윤은 그런 소운의 얼굴을 응시하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었다. 아무래도 제 형님께서 화가 많이 나신 듯했다.

「지금 누구 허락을 받고 마음대로 들어온 것이지? 당장 나가거라.」

「소제는 기정윤이라 합니다.」

「당장 나가래도!」

소운이 언성을 높여도 정윤의 눈빛은 변함이 없었다. 절대로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한 기세로 꼿꼿이 서서 자신을 똑바로 응시하는 정윤의 기백에 소운은 미간을 좁혔다.

아우? 자신의 아우라고? 저 아이가?

「소제의 형님이 맞으십니까?」

「나가라고 했다.」

「알려 주십시오. 알고 싶습니다. 지금껏 저는 하나뿐인 형님이 돌아가신 줄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아이의 물음에는 아무런 악의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저 순수한 마음으로 알고 싶을 뿐이라는 시선 속에는 설렘만이 가득했다. 대체 왜 찾아온 것일까. 아니, 어떻게 알고 찾아온 것일까.

어차피 읽지도 못하는 서신 따위를 은밀히 보내왔던 것을 보아하니 부모 몰래 저지른 짓인 듯싶은데, 대체 어쩌자고 이리 찾아온 것일까. 정말 저 아이가 제 친아우인지 아닌지 확실하게 밝혀진 것은 없지만, 소운은 저도 모르게 떨리는 음성으로 중얼거리듯 내뱉었다.

「그걸 내가 어찌 아느냐. 난 널 모른다.」

「허면 질문을 바꾸겠습니다. 부친께서 낙양성의 성주 진초왕 전하가 맞습니까?」

끝까지 포기를 모르는 정윤이었다. 소운은 그에 답하지 않고 반문했다.

「내게 그런 것을 묻는 연유가 무엇이냐? 설사 맞다 하더라도 그 사실이 무슨 소용이 있다고.」

「소제에겐 중요합니다.」

「어찌해서?」

「부모 형제의 연은 천륜이라 하였습니다. 피붙이가 멀쩡히 살아 있는 것을 알고도 어찌 모른 척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어린 것이 말 하나는 똑 부러지게 잘한다. 한술 더 떠 인간으로서의 도리 운운하며 받아쳐 오니, 소운으로선 뭐라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난 그딴 건 모른다고 답한다면 인간으로서 마땅히 치켜야 할 도리를 지키지 않으니 스스로를 짐승이라 여기는 것과 다를 바가 없고, 그렇다고 어찌 이제 왔느냐며 두 팔 벌리고 환영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솔직히 말해 소운은 정윤의 등장이 반갑지 않았다. 같은 배에서 태어난 형제임에도 병약한 몸 탓에 자신은 내쳐졌지만 저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모든 것을 누리고 살았을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그렇다. 머리로는 저 아이에겐 아무런 잘못도 없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마음으로는 그게 잘 안 된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새어 나오는 열등감과 부모를 향한 원망 탓에 소운은 정윤을 좋은 눈으로 볼 수가 없었다.

「죽은 줄 알았다고?」

「예.」

「전하께서 직접 그리 말씀하셨겠지?」

소운은 부러 거리감을 두고자 살아생전 단 한 번도 입에 담지 않은 단어를 입에 올렸다. 그 위화감을 어린 정윤 또한 느낀 것인지, 정윤은 다소 굳은 표정으로 ‘그렇습니다’ 하고 답했다.

「그럼 너 또한 죽은 것으로 여겨라. 부모가 친히 세간에 죽은 사람이라 일렀으니, 나는 죽은 사람이다.」

「형님.」

「그렇게 부르지 말거라. 나는 네 형이 아니다. 네 형은 죽었다. 돌아가거라.」

소운은 매정하게 등을 돌렸다. 천륜? 도리? 그게 무슨 소용인가. 부모에게 인정받지 못한 자식이 어찌 자식이라 할 수 있겠는가. 그런 부모 자식, 형제지간에도 천륜이라는 게 존재할 리가 없다.

‘약관(弱冠)까지 무탈히 장성하시면 부왕께서도 분명 아기씨를 돌아보실 것입니다.’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저리 건강하고 기백이 단단한 사내아이가 소왕 자리를 떡하니 지키고 있는데, 저를 찾을 이유 따위가 있겠는가. 병약한 첫째 아들 따위야 이미 잊었을지도 모르지. 제 이름이 무엇인지는 기억하고 계실까.

「형님.」

정윤이 다시금 소운을 불렀다. 등을 돌리고 선 소운은 대답이 없었고, 뒤에서 보다 못한 영순이 조심스레 말을 전해왔다.

「송구스럽지만 공자님. 아기씨께선 지금 몸이 좋지 못하십니다. 금일은 이만 돌아가시지요.」

몸이 좋지 않으니 쉬어야 한다는 뜻을 담은 영순의 말에 정윤은 잠깐 입을 달싹거렸다가 이내 다소 풀이 죽은 얼굴로 몸을 돌렸다. 귀한 손님을 홀로 돌아가시게 하는 것은 예우에 어긋나니, 영순은 침실의 문을 조심스레 닫고 곧장 정윤의 뒤를 따랐다.

마당으로 나온 정윤의 발걸음이 멈추자 한 걸음 뒤에서 뒤따르던 영순 또한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숙였다. 정윤은 고개를 들고 이 층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쉽사리 걸음이 떨어지질 않는 모양이었다.

「형님께서 첫 서신을 보고 뭐라 하시더냐?」

「아, 저 그것이…….」

한참 동안 소운의 침실 쪽을 응시하던 정윤이 영순에게 물었다. 그러자 영순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당황하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혹시라도 서신을 전하는 데에 있어 차질이 있었던 것인가 싶어 정윤은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혹 서신을 전하지 않은 것이냐?」

「그, 그럴 리가요! 그게 아니라, 그, 그것이…….」

당최 무슨 말을 하려기에 저리 모은 손을 가만두질 못하는지. 정윤은 답답함에 미간을 찌푸렸다. 단단히 결심을 하고 발걸음을 하였는데 정작 제 형님은 저더러 네 형님은 죽은 것으로 여기라며 문전박대했다. 몇 마디 섞지도 못하고 돌아가려니 안 그래도 배 속이 뒤틀리는데, 아랫것까지 성질을 긁으니 정윤의 속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