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38화] 형주 (2)



고작 4만 군세로 유표군을 도모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대군이라 부를 수 있을 정도의 군세였지만, 그것은 평야전에 중점을 두고서 일컬은 것에 불과했다.

장강의 흐름을 이용해서 쌓은 수성(水城).
번성(樊城)과 양양성(襄陽城)은 오래전부터 형주의 입구 역할을 하고 있는 요새였다.
따라서 역대 형주자사들은 번성과 양양성을 크게 중요시하였는데, 장강을 해자(垓字)로 이용해서 지어진 성이면서도 절대로 적에게 수공(水攻)을 허락하지 않는 구조를 자랑했다. 분명 뛰어난 건축가와 장인들이 총동원되어 축조된 요새로 보였다.

그런 만큼 조비로서는 번성과 양양성 방면으로 군사를 보낼 생각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적도 마찬가지다.”
그 말에 고순이 보고했다.
“북형주의 남은 병력들이 모두 번성과 양양성으로 철수하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유표도 조조군과 싸울 생각이 없었다.
조비와 의견이 일치함에 따라, 신야현을 비롯한 남양군 37현은 모두 조조군에게 떨어지게 되었다.

전면전은 벌어지지 않는다.
조비와 유표, 둘 다 서로 전면전을 치르는 것을 껄끄럽게 여겼기 때문이다.
총대장이 결전을 바라지 않으니, 간혹 국경에서 사소한 분쟁과 접전이 벌어지기만 하였을 뿐이었다. 팔건장들로서는 어서 하루라도 빨리 공을 세우고 싶다며 전투를 바랐지만, 그들의 기대는 무참하게도 무너졌다.
“왜 적은 전면전을 선택하지 않는 거죠? 유표는 분명 형주를 통일한 군주일 텐데……. 병력을 따지고 본다면 아군의 배는 넘을 거예요.”
형주자사 유표에 대해서 어느 정도 들은 바가 있었는지, 여령기가 의문을 품었다.
형주에만 십만의 병마들이 존재한다.
물론 부풀려서 퍼진 소문이겠지만, 적어도 예비 병력까지 모두 돌린다면 그에 준하는 수준을 자랑할 것이다.
그런데도 유표는 외적(外敵)을 막으러 오지 않았다.
오히려 외적에게 땅을 내어주려는 것처럼 땅에서 병사들을 철수시키며 본거지의 방어를 강화했다.
“분명 유표는 호족들로부터 강한 압박을 받게 될 거다.”
자신의 땅을 지키려 들지 않는 군주.
그 군주의 무눙함과 나약함은 곧 호족들에게 있어 중앙 권력에 반발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모든 것을 꿰뚫어보시는 그 혜안에 이 장수도 감탄하였습니다!”
조비를 내심 못마땅하게 여긴 장수조차도 조비가 넓힌 북형주의 땅을 보고는 감탄을 금치 않았다.

이 자는 정말로 보통이 아니다.
장수 자신도 과거에 몇 번이나 유표로부터 영토를 빼앗기 위해서 여러 전투를 치른 적이 있었지만, 지금까지 성공한 바가 없었다.
하지만 조비는 고작 사흘 만에 그를 이루어냈으니, 장수로선 자신이 결코 조비에 비할 바가 아니었음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조비는 조정군으로서의 명분과 승상 조조의 명성, 그리고 장수군과 연합하여 결성한 대군을 이용해서 북형주를 점령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들 중 하나라도 없었다면 유표는 조비를 만만하게 여기면서 남양군을 되찾기 위한 전쟁을 선언하였으리라.
“시답잖은 장난이다. 늙은이의 심장을 떨게 만들었을 뿐.”
이건 동네 아이들의 장난에 불과하다.
집안의 어르신이 높은 사람이라고 겁박을 주면서 옆집 아이를 겁먹게 하는 수준의 장난.
그 과정을 풀어서 설명하면 어린애의 장난이겠지만, 전략이라는 것의 기본은 언제나 적을 속이고 기만하는 장난에서부터 시작된다. 전략의 기본을 두고 본다면 조비는 전략의 대가가 확실했다. 유표를 겁박하면서 남양군 37주를 모두 집어삼킴으로써 그를 증명해냈다.
“조정에 귀의한 것에 강한 믿음이 생겼습니다. 공자께서 계시는 한, 조정은 천년만대에 걸쳐서 빛날 게 틀림없습니다.”
장수는 조정의 사자로부터 열후(列侯)로 봉해졌다.
그렇기에 자신을 투항하게 만든 조비를 경외하고 있었고, 조비가 무너뜨린 고을들 중 몇을 봉토로 더하여 받았으므로 충성심이 무럭무럭 커져만 갔다.

장수를 물린 후, 조비는 자신을 찾아온 문사들을 살펴보던 가후를 불렀다.
조비가 부르리라 예상하였는지, 가후는 부르자마자 서둘러 조비에게 달려왔다.
“문화, 쓸 만한 인재는 구했는가?”
“예, 주공. 미관말직(微官末職)에 적합한 인재들은 많았지만, 중용할 정도의 특출한 인재는 없어 보였습니다.”
형주에는 사예주의 난리를 피해서 온 명사들이 많았다.
특히 유표는 유교를 숭상하는 학자였으므로, 자신들을 홀대하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에 이르러서는 유표군에 출사하려면 채씨 가문에 인연이 있어야 한다는 게 공공연했다. 그렇지 못하면 출세할 길이 없었다.
아주 소수의 운 좋은 인원만이 채씨 가문의 힘을 빌릴 수 있었을 뿐, 대다수는 헛걸음을 해야 했다.
그런데 남양군을 장악한 조비가 인재를 구한다는 벽서를 배포하니, 그에 호응하여 수많은 문사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그런데 그들을 모두 관료로 임명하실 생각이신지요?”
가후가 물었다.
형주는 분명 인재들의 고장으로 유명하지만, 너무 많이 뽑은 것은 아닌지 우려가 들었다.
이미 허도의 조정은 관료들로 자리가 꽉 찬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무리하게 관료들을 새로 뽑는다면 기존의 관료들로부터 강한 항의를 받을 수도 있는 일이다.
어떻게 해서든 조비를 지존(至尊)의 자리에 올리고픈 가후로선, 위험을 감수하려는 조비를 말리고 싶었다.
하지만 가후의 그런 생각을 미리 예견한 듯, 조비가 입을 열었다.
“가까운 시일 내로 조정의 관료들이 대폭 줄어들 예정이다.”
“이 가문화, 주공의 혜안에는 감탄을 금치 못하겠사옵니다!”
가후가 크게 소리치며 고개를 숙였다.
조비는 그저 짧게 말을 던진 것에 불과하였지만, 그를 알아듣지 못할 가후가 아니다. 그 말에 숨은 뜻을 헤아리고는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숙청이다!’
조정 관료들이 대거 물갈이가 된다.
그렇기에 조비는 새롭게 인재들을 뽑아서 그 빈자리를 채우려는 것이다.
갑자기 조정 관료들이 물갈이가 되는 이유.
그 이유는 단 하나밖에 없었다.
조조군에 충성하고 승상 조조를 어버이로 섬기는 자들은 살아남을 것이며, 황실에 충성하고 조조를 미워하는 자들은 숙청을 당한다.
삼보의 난을 피해서 황제 유협과 함께 살아남은 황실 관료들은 그대로 자리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그들이 주로 유협과 함께 작당을 하고 있었으므로 그를 쳐내는 것은 당연했다.
언젠가 사단이 벌어질 것이다.
가후는 허도로 가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음에도 그를 간파하고 있었다.
이제 곧 궁궐에서 변란이 벌어진다.
왜냐하면 조조가 드디어 숙적 원소가 자웅을 겨루려 하기 때문이다.
조조를 멸망시킬 수 있는 유일한 호적수가 바로 원소였으니, 중원 전쟁에 앞서서 황실의 권위를 되찾으려 하겠지.

반면 가후를 지켜보고 있던 장수들은 ‘쟤는 대체 왜 저러지?’라는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조비의 말에서 그 어떤 뜻도 헤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머리가 비상한 가후이기 때문에 조비의 단답으로부터 그 뜻을 간파한 것이지, 머리가 돌로 된 무장들은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 * *


“이미 자리는 다 찼수다. 그러게 좀 빨리 오지 그랬소?”
조비가 인재를 구한다는 소식을 들은 청년이 애써 신야현(新野縣)까지 발을 들였지만, 이미 시일은 한참이나 지났기에 위병으로부터 출입이 불가하다는 말을 들었다.
“인재를 구한다고 해서 왔습니다만.”
“형주에 인재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를 듣고 오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소?”
위병은 청년이 꾀죄죄하고 별 볼일 없는 행색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그저 밥 빌어먹기 위해서 온 인간으로만 보았다.

인재를 구한다고 알린 벽서.
그를 보고 찾아온 인간들이 어찌나 많았는지! 위병은 평생 볼 사람을 요 근래에 들어서 다 봤다면서 치를 떨었다.
동탁의 폭정으로 인해 재야로 내려간 문사부터 시작해서, 한문도 모르는 주제에 스스로를 인재라 주장하는 자칭 신동도 보았다. 혹시나 조조군에 자리를 받을 수 있을까 기대감을 품고 온 야심가들이 적어도 수천 명은 넘는다.
“그렇습니까…….”
청년이 아쉬운 발걸음을 돌렸다.
그는 다 닳은 삼베옷을 입고 있었지만, 허리춤에 매여진 검만큼은 날카롭게 빛났다.
위병은 혹시 협객(俠客)으로 보이는 이 청년이 불만을 품고 칼을 뽑아드는 것은 아닌지 걱정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청년은 위병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고는 집으로 다시 내려가려고 했기 때문이다.

예주(豫州) 영천군(穎川郡).
청년의 고향이다. 예주 영천군에는 황제의 궁궐이 있는 허도가 있었으므로, 사실상 조조군의 본거지가 고향인 셈이었다.
여기서 조조군에 임관하여 고향으로 금의환향(錦衣還鄕) 하는가 싶었더니, 결국 헛걸음만 한 셈이 되어버렸다.
‘하긴 죄를 지은 내가 무슨 출세를 하겠냐만.’
사람을 죽이고 도망쳤다.
그저 친구의 원수를 갚아주기 위한 일이었다.
하지만 살인죄를 저지른 셈이 되었고, 청년은 홀어머니와 함께 관리들의 눈을 피해 형주로 달아났다.
이른바 도망자 신세.
만약 죄인이 벼슬을 구하고자 하였다는 것이 알려진다면 벼슬은커녕 목이 날아갈 판이었다.
“집에 돌아가면 어머니한테 뭐라고 해야 할지.”
집이 잘 사는 것도 아니고, 고향에서 도망쳐서 형주로 온 것에 불과하였으므로 어느 곳에 연고도 없었다.
청년은 매우 불우한 가정에서 자랐다.
친척도 없고, 아버지도 없다. 이런 난세에 연고도 없는 외톨이라는 것은 매우 큰 위기였다. 논두렁 같이 맬 사람도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제 슬슬 집안의 식량도 바닥났다.
당장 일거리라도 구하지 않으면 홀어머니가 쫄쫄 굶게 될 게 뻔했다.
“수경선생한테 배운 게 아무 소용도 없구만.”
형주 최고의 문사라고 소문이 자자한 인물로부터 사사를 받았지만 결국 현실에서는 아무 짝에 쓸모없는 재주가 되어버렸다.
하여간 왜 그따위 글귀나 익히라고 한 건지.
집안에 마지막으로 남은 재산들을 모두 털어서 수경선생의 문하생으로 보낸 어미의 선택이 밉다고 여겼다. 그 돈으로 차라리 곡식을 샀다면 이번 겨울까지는 버틸 수 있었을 테니까.

“거 뭐하시오?”
나무 그늘에 시원한 정자(亭子)에 앉은 남자가 형주가 그려진 지도를 보고 있었다.
지도는 매우 귀중하다.
군사적으로 크게 용이하기 때문이며, 특히 그러한 점에서 첩자들에게 악용될 위험성이 높았다. 지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매우 수상쩍은 일이다. 지도의 배포와 기록은 엄금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청년은 지도를 보고 있는 남자를 기이하게 보았다.
남자는 그다지 나이 많아 보이진 않았다. 자신보다도 어려 보였다.
“꺼져라. 선객 있다.”
어린놈이 입 한 번 사납기도 하지.
남자의 말에 청년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면서도 정자에 앉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남자의 것으로 보이는 기름에 튀긴 주먹밥을 한 움큼 집었다.
“준다고 안 했다.”
“그것 참. 가난한 거지한테 적선 좀 하시구려.”
그렇게 말했지만 청년은 옷소매에 주먹밥을 넣기만 하였을 뿐, 입에 대지는 않았다.
집에 홀어머니가 배를 곯고 있으니 가져다줄 생각이었다.
“젊은 놈이 팔다리가 멀쩡하면 일이나 해라.”
“나보다 어린놈에게 듣고 싶진 않소.”
청년은 남자가 입고 있는 의복이 고급스런 원단으로 만들어진 것을 보고선 귀족가 도련님이 아닐까 생각해보았지만, 입에 걸레를 문 수준으로 험한 사람에게 고개를 숙이고 싶진 않다는 오기가 생겼다.
“이름이나 들읍시다. 어디 귀족가문이오? 채씨 가문이신가?”
“조자환(曹子桓)이라 한다.”
“조 같은 놈이구먼.”

검을 찬 청년, 서서가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