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36화] 악연을 정리하다 (4)



장수군의 배반 소식은 뒤늦게 형주에 알려졌다.
형주자사 유표는 동맹관계였던 장수가 원수였던 조조의 산하로 들어가게 된 것에 대해서는 경악을, 그리고 여세를 몰아 군사를 몰고 형주를 공격하기 시작한 그의 행동에 대해선 분노를 느꼈다.
4만 대군이 남양군(南陽郡)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장수군은 남양군과 함께 사예주에 영향력을 걸치고 있는 세력이었는데, 유표군과 함께 남양군을 분할하고 있었으므로 그를 먹어치우기 위해 움직인 것이다.
1차적으로 신야현(新野縣)이 점령.
그리고 그 주변 고을들까지도 모두 떨어지면서 유표군 병사들은 남양군을 버리고 중요거점인 번성으로 퇴각하기에 이르렀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조조가 설마 장수의 손을 들어주다니, 그 둘은 서로 원수지간이 아닌가!”
장수가 조조의 아들과 조카를 죽인 것은 천하가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서로 같은 하늘에서 살 수 없다고 여긴 원수들이 손을 잡아버리다니.

과거의 유표는 총명하고 야심이 넘치는 인재였지만, 형주의 왕으로 군림하게 된 이후부터는 우유부단하고 결단력이 흐려진 상태였다.
형주에만 그 눈과 귀를 두고 있느라, 세상 돌아가는 것을 모른다.
원소군에 맞서 싸워야 하는 조조로서는 장수군의 조력이 무엇보다 필요했고, 장수로서는 여포와 원술이 멸망한 이후였기에 조조에게 감히 대들 생각조차 못했다.
조조가 장수의 모든 죄를 사면하고 중용하겠다고 발표하였으니, 장수로서는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조조의 산하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분명 조조는 장수를 이용해서 아군을 견제하기 위함일 겁니다!”
“아군이 원소와 동맹을 맺은 것을 조조가 알아챘습니다!”
괴월이 대뜸 나서며 말했다.
그 말에 괴량이 뒤에서 받쳐주면서 주장을 펼쳤다.

세력 형성도를 보면 지금이 천하이강(天下二强)의 구도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마등과 유장이 있겠지만, 그 둘은 중원에서 매우 거리가 먼 변방을 다스리고 있으니 천하를 도모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남은 것은 조조와 원소.
천하의 수많은 호사가와 문사들이 하남(河南)과 하북(河北)을 다스리는 군주들을 일컬어 차세대의 주인이 될 것이라 평가하였다.
이제 그 둘이 자웅을 겨루려 한다.
점점 확장해나가고 있는 두 세력들을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다.
조조와 원소 같은 야심가들에게 있어, 지금 다스리고 있는 땅은 너무 협소했다. 상대의 것을 빼앗고 싶다는 생각을 품었으며, 나아가 빼앗기 위한 과정으로서 전쟁을 선택하였다.

“견제를 하고 싶다는 건 잘 알겠소. 그런데 왜 아군을 공격한단 말이오?”
형주를 대표하는 대가문 채씨 일가.
일가의 장을 맡고 있는 채모가 물었다.
“아군이 감히 북쪽으로 군사를 보내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겁박이 아니겠습니까?”
“흥. 우리 형주인이 만만하게 보였나 보지?”
채모와 장윤은 형주 땅을 침범하여 성질을 건든 조조군을 당장 격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금까지 유표를 도와 형주 통일을 이뤄낸 장수들에게 있어, 형주의 평화를 방해하는 침입자는 더러운 도적이나 같았다. 천자를 모시는 조조에게 거역한다는 것은 두렵지만, 그렇다고 해서 꽁무니를 빼는 것은 대장부가 할 짓이 아니다.
“형님, 군사를 주시면 당장 저 침입자들을 격퇴하겠습니다.”
채모가 유표에게 제안을 건넸다.
그 제안을 들은 형주 장수들이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채모는 유표의 아내인 채씨의 남동생이었으며, 동시에 형주의 모든 군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형주 제일의 명문가 출신이고, 사실상 형주자사 유표보다도 더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장수들의 여론이 그를 지지하게 되었다.
“흐음. 어차피 신야현을 비롯한 그 이북 지역은 우리의 관할이라고 하기에도 어렵지 않은가?”
신야현을 비롯한 촌구석을 오랫동안 통치하지 않았음을 이유로 들어, 유표는 딱히 조조군이 형주를 공격한 것은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 말에 채모가 실망을 금치 못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이 무슨 패기 없는 말인가! 이미 코 밑까지 적병이 들이닥친 마당에 응당 요격하지 않고 망설이고만 있다니.
“조양과 의양까지 모두 빼앗기셔야 움직이실 겁니까? 신야현 다음으로는 드넓은 평야지대를 모두 빼앗기고 말 겁니다!”
“이미 빼앗겼습니다.”
채모의 격앙된 말에 괴량이 대답했다.
조조군의 신속한 강행군으로 보아하건대, 이미 조양과 의양에 세워진 성채들마다 조조군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을 게 뻔하다. 전광석화의 속도로 움직이는 조조군은 장기간의 점령이 아닌 단순한 땅따먹기를 하고 싶었는지, 그저 밑으로만 미친 듯이 내려오고 있었다.
“상대는 조조군에 투항한 여포군의 팔건장들입니다. 용맹하기가 남다르고, 천하의 모든 난적들과 싸워온 정예 중의 정예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들과 싸운다면 분명 이쪽도 그 피해가 상상을 초월할 겁니다.”

4만에 달하는 대군.
그리고 그 대군을 지휘하는 장수들 또한 명장으로 이름이 높은 자들이다.
그런 대병력을 상대로 싸운다는 것은 형주로서도 명운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다.
형주자사 유표는 지형을 이용하여 대군에 맞서야 한다고 말했다. 번성과 양양성을 버리고 병력들을 출병시키는 일에 대해선 적극 반대하고 나섰다.
그 말에는 채모와 괴량도 동의했다.
육지에서만 싸운 조조군을 상대함에 있어, 강물을 이용해서 적의 침입을 막을 수 있는 번성과 양양성은 매우 지키기 좋은 천혜의 요새였다. 그런 요새를 버리고 평야전을 선택하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급보! 급보입니다!”
강하태수 황조의 휘하 장수였던 등룡이 급하게 내달려와 유표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 다급한 모습에 유표는 짙은 불안감을 느꼈다.
“무, 무슨 일인가! 설마 조조가 이 형주까지 온다고 하던가?”
“아닙니다! 그 아들 조비는 아직 신야현에 있습니다!”
그런가. 다행스러운 일이군.
유표는 조비가 신야현에 머무르면서 더 이상 군사들을 밑으로 내려 보내지 않는 것에서 안도를 느꼈다.
천하무쌍 여포까지 멸망시킨 그 무서운 야차 놈들을 상대하고 싶지 않다.
형주를 통일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전투와 싸움을 거쳐 왔던 유표였지만, 지금은 노쇠하고 병들어버려 전쟁을 멀리하고 두려워하게 되었다.
“대체 무슨 보고인지 상세히 말해보게!”
괴월의 으름장에 등룡이 급하게 고개를 숙였다.
“지금 신야현을 비롯해서 남양군 37현 전부가 조비의 손에 떨어졌습니다.”
비명을 토해내듯 보고했다.

북형주의 지붕이나 다름이 없었던 드넓은 남양군이 모두 조비에게 넘어가버렸다.
불과 사흘도 되지 않아서 북형주의 절반에 달하는 광대한 지역들이 적군에게 투항.
수십 명의 현령과 그 지방관들이 모두 조조군에게 귀의하였다는 소식은 유표에게 있어 절망적인 패전이나 다름없었다.


* * *


항복하는 자에게는 포상을.
저항하는 자에게는 죽음을.
이건 정복자로서 당연한 도리이며 원칙이다.
유표에게 충성하여 끝까지 저항한 현령과 그 병사들은 모두 목 없는 귀신이 되어 논두렁에 버려졌다.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른다.
깃발을 나부끼며 높은 성채들마다 꽂아두었다.
북형주 백성들은 모두 거리로 나와 천하가 조조의 것이 되었음을 직감하였다.
사흘밖에 되지 않았지만 백성들은 대부분 조조의 통치를 받아들이는 입장이 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유표는 지방관들만을 파견하였을 뿐, 직접적으로 남양군을 통치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얼굴도 모르는 형주자사보다야, 지금 당장 병사를 이끌고 앞마당까지 들이닥친 조비를 따르는 건 당연했다.
“소인은 누규라고 하옵니다.”
형주 남양군의 제일가는 호족이었던 누규가 가장 먼저 조조군에 투항했다.
특히 호족들이 가장 먼저 배반을 선택했다.
재산을 보호하고 가문을 지켜야 하는 의무가 있었으니, 실질적인 권력을 가진 자에게 빌붙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의리도 충절도 없다.
그저 순수하게 현실적인 이익에 따라서 투항을 결정하였을 뿐이다.
매우 속물처럼 보이는 투항이었지만, 조비는 그들을 환영했다.
힘과 권력을 따르는 추종자들만큼이나 믿음직스럽고 충성스런 자들도 없을 테니까. 힘과 권력을 계속해서 쥐고 있는 한, 이들이 배반할 일은 없다.

“이 땅에 유표를 섬기는 자들이 얼마나 되는가?”
조비의 말에 우물거리던 누규가 고개를 푹 숙였다.
당장 말하지 않거나 대답을 피하면 그대로 조비에게 목이 달아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박망현(博望縣)의 현령이 유표의 가문 사람이고, 노양현(魯陽縣)과 산도현(山都縣)의 현령은 유표의 사위들입니다.”
그들이 아직 통치를 받아들이지 않고 저항하고 있습니다.
양양성에 연락하여 지원군을 부르는 한편, 성을 중심으로 백성들을 불러 모으며 결사항전을 준비하고 있다는 정보를 들었습니다.
누규는 사실대로 고했다.
조비가 다음에 무엇을 할지 예상도 못했을뿐더러, 사실대로 고하지 않으면 당장 조비에게 무슨 짓을 당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가.”
누규의 보고를 들은 조비는 매우 짧게 단답했다.
그리고는 장료와 고순 등 여러 장수들에게 명령하여 누규가 보고한 군현들을 치도록 명령하였다. 4만 대군을 자랑하는 군대였으므로, 따로 부대를 나누어 보내면 능히 당일 내로 군현을 함락할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북형주에는 번성과 양양성을 제외하면 번듯한 성과 요새가 없었다.
유표가 형주를 통일한 직후, 지방 세력들이 반란을 일으킬지 모른다는 의심을 품고 북형주의 두터운 성과 요새를 모두 헐어버렸기 때문이다.
어차피 유표군은 번성과 양양성, 강하성, 강릉성을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하였으니, 이북 지역에는 관심도 없었다. 사예주 인근의 지역이라 발전도 미비할뿐더러, 도적떼들이 항상 출몰하여 사람이 온전히 다스릴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모조리 다 죽여라!”
위속과 조성이 이끄는 기병대들이 허름한 움막 수준의 성채를 때려 부수고 그 안의 군현을 약탈하였다.
유표와의 신의를 지키기 위해 항전을 선택한 군현에 한해서는 무자비한 살육과 방화가 이어졌다.
유표의 가문 사람이었던 현령은 물론이고, 그를 따르던 일파들까지도 모두 죽임을 당했다. 심지어 산 채로 땅에 묻어버리는 짓까지 저지를 정도로 무자비했는데, 차마 그 참극을 두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
형주에서 조조군의 악명이 자자했다.
“심한 짓을 하시네요. 서주에서 벌인 대학살을 재현할 셈인가요?”
여령기가 날카롭게 그를 지적했다.
학살을 저지르면 당장에는 공포의 대상이 되겠지만, 결국에는 저항의 불씨만 더욱 키워주는 셈이 된다.
그래서 조조가 서주 통치에 애를 먹고 있는 것이 아닌가.
유비를 몰아내고 여포를 죽였음에도 서주 백성들은 지금까지도 조조를 두려워하고 원망했다. 반란 봉기가 그치질 않았고, 호족들이 복수를 명분으로 칼을 빼들었다.
분명 형주도 서주처럼 반란의 땅이 될 것이다.
여령기의 거침없는 독설에 장료와 고순이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반면 조비는 그녀의 말에 콧방귀를 뀔 뿐이었다.
“너무 한심하고 비루한 말이라 잠시 콧방귀가 나왔다. 용서해라.”
“뭐라고요?”
그 말에 여령기가 쌍심지를 켜며 노려보는 것도 당연했다.
조금은, 아주 조금은 걱정되는 의미에서 꺼낸 말이었는데 정면에서 무시당해버렸다. 여령기로선 조비가 자신을 모욕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남양군 37현 중에서 겨우 3현만 짓밟았다.”
다수를 살려주는 대신, 소수를 진압하고 토벌했다.
과연 다수에 속하게 된 군현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여령기의 말처럼 3개의 군현에 대한 복수를 하려고 들까.
아니, 천만에. 오히려 자신이 본보기로 선택되지 않았다며 안도의 한숨을 돌리고 있을 것이다.
사람이란 그렇다. 자신이 다수라고 생각되면, 자신에게 이로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소수에 몰린 사람들로부터 고개를 돌리고 만다.
그게 인간의 이기적인 마음이다.
조조가 서주 대학살로 인해 낭패를 본 이유는, 다수와 소수 가릴 것 없이 모조리 싸잡아서 도륙을 내버렸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 어떤 선택조차 받지 못하고 죽임을 당한 백성들 입장에서는 분노할 수밖에.
“물론 살육만 해선 안 된다. 오로지 공포로만 천하를 다스린다는 것은 지나친 오만이지.”
조비는 인간의 이기적인 마음을 동원해서 구슬리고 이용할 줄 알았다.
형주의 호족들을 자신의 심복으로 만들고, 투항하는 이들에 한해서는 포상과 함께 조정의 이름으로 벼슬을 하사한다. 반면 저항하는 이들에게는 죽음보다도 두려운 형벌로 다스리니 이것이야말로 완벽한 통치라 할 수 있었다.
“인간은 어리석다. 그렇기에 통치라는 것이 가능하지.”

인간의 눈과 귀, 입을 막아버리는 것.
그것이 바로 통치의 기본 요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