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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화] 악연을 정리하다 (3)



장수가 조조군을 신용하고 있는지, 조비의 손을 잡을 것인지에 대해선 가후에게 있어 아무래도 좋은 일이 되었다.
‘이 사람이야말로 천하의 주인이 될 자다!’
가후는 무위군(武威郡) 고장현(姑臧縣) 출신으로, 매우 척박하고 험난한 깡촌에서 태어났다.
출신이 옹주(雍州)이다보니, 출세를 위해 연을 쌓아가다가 동탁군에 임관하게 되었다. 동탁군의 모사로 들어가 옹주와 양주(凉州) 같은 변방에서만 활약하다가 상경한 동탁군을 따라서 사예주까지 왔지만 역적 취급을 당하면서 최악의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그럼에도 가후는 기지를 발휘하여 이각과 단외, 장제, 장수를 잇달아 섬기면서 천재로서의 두각을 드러냈다.
모든 것은 출세를 위해서.
가후는 권력욕의 화신이자, 명예욕과 출세욕으로 가득한 야심가라 할 수 있었다.
못 배우고 혈통도 별 볼일 없는 깡촌 출신으로서, 어디까지 출세하고 성공할 수 있는지를 보고 싶다.
변방 중에서도 오랑캐들이 들끓어 넘치고 가난하기로 유명한 옹주에서 태어났지만, 그런 불우한 환경조차도 자신의 출세에는 절대로 난관이 되지 못할 것이라 다짐했다.

“완성을 거점으로 타고 육수(六水)를 건너면 유표의 영역에 닿는다.”
“신야현(新野縣)을 도모하시려는 것이군요.”
조비의 말에 가후가 말했다.
유표는 북쪽의 방비를 오로지 장수군에게만 일임하고 있었으므로, 사실상 신야현을 비롯한 북형주 일대는 무주공산이나 다름없었다. 유표가 실질적으로 방어하고 있는 곳은 번성(樊城)과 양양성(襄陽城)이다.
군사를 배치한 두 곳 모두 신야현 이남이다. 따라서 그 이북 지역들은 원하기만 하면 모두 조조군의 영토가 될 수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지키기는 어렵다. 아군으로선 형주 일대까지 영향력을 행사할 수가 없다.”
“예, 그렇습니다. 그렇기에 주공께서는 시산혈해를 저에게 귀띔해주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미 가후는 조비를 두고 주공이라 불렀다.
오랫동안 함께 동고동락을 해 왔던 장수의 존재는 까맣게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자신의 출세에 도움은커녕 오히려 방해만 되는 존재였으니 이대로 잊어버리는 편이 좋았다.
가후는 오로지 조비에게 모든 것을 걸었고, 조비는 그런 가후를 환영했다.
조조를 죽일뻔한 책사.
진궁과 쌍벽을 이루는 조조의 숙적이었으니, 이미 그의 출중한 능력은 보장된 셈이다.

뛰어난 자는 환영한다.
그 자가 원수였던 은인이었든 간에 그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나에게 도움이 되느냐, 되지 않느냐.
그것만이 중요했다.

“북형주를 초토화시키면 유표, 그 늙은이의 간담이 서늘해지겠지.”
“과거의 모습과는 달리, 유표는 노쇠하여 쉽게 겁에 질려 떠는 인간이 되었습니다.”
집안을 단속하지 못하고, 형주의 거대 호족인 채씨 일가들에게 놀아나고 있으니 이미 유표는 천하인으로서의 그릇을 잃은 한낱 늙은이입니다.
가후가 유표에 대해서 신랄하게 비판했다.
과거에는 황제의 자리를 탐낼 정도로 야심가로서의 모습을 보였지만, 지금에 와서는 마누라 등살에 밀려서 빌빌거리는 늙은이가 되었으니 애석할 따름이다.
“이제 곧 아군 병력이 도착한다. 문화, 너는 지금 당장 장수를 설득하여 병사를 일으킬 준비를 하도록.”
“명을 받들겠습니다.”
허도에서 대기하고 있는 조비의 군단과 완성에 주둔하고 있는 장수의 군단.
두 개의 군단이 합세하여 연합을 결성한다면 자그마치 4만에 달하는 대군으로 발전하게 된다.
조비가 이끄는 군단은 불과 1만 안팎에 불과하였지만, 장수가 이끄는 병력은 언제나 조조군을 방비하기 위해서 세력을 키우고 있었기에 3만에 달하는 대군을 자랑했다.
조비는 조조군에 대비하기 위해 육성한 장수군을 수족처럼 다루면서 형주 정벌에 앞장세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주군을 헌신짝처럼 버리는군.”
조비가 물었다.
그 말에 가후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으며 답하였다.
“이 난세에 배신은 언제나 있었던 일입니다. 주군이 더 이상 이 가문화의 출세에 도움이 되지 않으니, 어찌하겠습니까? 이 가문화는 언제나 승자의 편에 서서 벼락출세를 하고 싶습니다.”
오히려 안심이군.
출세만을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가후의 욕망에 조비는 오히려 안도했다.

힘과 권력.
그것들을 손에서 놓지 않는다면 가후는 언제나 측근으로서 수많은 책략들을 헌상할 것이다.
필요에 따라서 주군을 언제든지 버릴 수 있는 권력욕의 화신.
오히려 인의(仁義), 도덕(道德), 성품(性品)처럼 같잖고 애매모호하며 덧없는 것들을 추구하는 머저리들(서서, 방통, 제갈량)보다야 훨씬 현실적이고 이해하기 쉬워서 좋았다.

“끼리끼리 모였네요.”
조비의 호위장이었던 여령기가 독설을 날렸다.
그녀를 본 가후가 급히 고개를 숙였다.
“이거 실례. 주공의 안주인이 되실 분께서 계셨을 줄은.”
사내처럼 갑옷을 걸치고 있는 여자 장수라니.
주공의 취향도 제법 독특하신 모양이군.
여령기는 사내들의 눈길을 단번에 끌 정도로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다. 대부분 남장하고 다니는 여성들은 얼굴이 모나고 투박한 면이 많았지만, 그녀는 오히려 씩씩한 건강미를 뿜어내고 있는 미인이었다. 당연히 가후로선 여령기가 조비의 여인이라 생각했다.
항상 측근에 둬야하는 호위장.
조비의 호위장인 여령기를 본 가후는 당연히 ‘그쪽 방면’에서 활약하는 무장이라 여겼다.

“저는 그딴 기생이 아닙니다만!”
당장이라도 가후의 얼굴에 주먹을 날리고 싶다는 듯, 여령기의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아비 여포를 닮아서 힘이 장사인 여령기에게 얻어맞는다면, 태생이 샌님인 가후는 평생을 곰보 얼굴이 되어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럼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천하무쌍으로 유명하신 여봉선의 따님이신데, 제가 어찌 감히 그런 망발을 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일전에 여봉선 님과 같은 전투에서도 활약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가요?”
가후의 청산유수 같은 말에 여령기가 반색하면서 나름 반갑다는 모습을 보였다. 아비의 무명에 찬사를 보내면서 그 부하였던 자라고 하니, 썩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뭔 소리를 하고 있는 건지.’
그를 듣던 조비가 떨떠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여포와 같은 전투에서 활약해?
틀린 말은 아니다. 거짓은 아니지만 야바위 식으로 설명했다.
가후는 여포와 같은 전투에서 활약한 것이 확실하다.
물론 여포와 정반대되는 입장에 선 이각군에서 활약한 책사라는 점에서 우스운 이야기다.
이각에게 붙어서 옹주, 양주의 병사들을 이끌고서 동탁을 죽이고 장안성을 점령한 여포를 몰아냈다. 사도 왕윤을 죽였으며, 황실 관료들까지 모두 살해했다.
악마적인 두뇌를 가진 가후는 책략만으로 천하무쌍을 장안성에서 몰아내 방랑군으로 만들었으니, 여령기의 원수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 당시의 여령기는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가후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었다.
“나중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장담 못한다.”
이 녀석이 화를 내면 무섭다.
아비의 오랜 친우를 만났다며 싱글벙글한 모습을 보이는 여령기를 보며 말했다.


* * *


완성에 도착하기 시작하는 조비의 군단을 보며 장수는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지금까지 이 완성에 수많은 노력을 쏟아 부었다.
숙부 장제의 휘하에서도, 그리고 숙부로부터 모든 것을 물려받았을 때도.
언제나 완성에 모든 것을 쏟아 부으면서 최선을 다해왔다.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을 조비에게 바칠 생각을 하니, 갑자기 배가 아파왔다.
조조군에 투항하기로 결정하였지만, 내심 마음속에서는 왜 조조 따위에게 머리를 숙이며 복종해야 하는 것인지 탐욕이 치솟기 시작했다.
일전에 나에게 죽을뻔한 자다.
수절을 지키려 했던 내 숙모를 기생처럼 여기며 동침을 했고, 죽은 숙부를 모욕했다.
‘대세를 따라야 하는 것인가.’
망설여진다.
그 귀신처럼 무서운 조조의 아들을 보는 것도 꺼려진다.
그런 인간의 밑에 있다가 과거의 원한을 끄집어내서 죽이려 드는 것은 아닌지 두렵다.
장수가 가후를 불러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 논의했다.

‘하찮은 촌부 같으니라고!’
아직도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는 장수.
그를 본 가후는 자신의 출셋길을 막으려 드는 장수를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
이제 드디어 시골을 벗어나 황제의 수도에서 빛을 보는가 싶었는데, 장수가 아직도 망설이면서 배신을 논의하고 있으니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직은 이 자가 필요하다.
3만에 달하는 병력들. 그 병력을 모두 조비에게 넘기기 위해선 장수를 구슬릴 필요가 있었다. 조비에게 넘기게 될 그 지휘권은 앞으로 자신이 조비의 측근으로 활약하기 위한 좋은 패가 되어줄 것이다.
“주군, 저희는 잡을 수 있는 손이 없습니다. 유표는 이미 변절했고, 원소는 병든 아들을 버리고 떠나지도 못하는 우유부단한 인물입니다.”
“우, 우리가 조조를 막을 수도 있는 일이 아닌가.”
특히 그 아들을 인질로 잡는다던지.
장수는 조비를 인질로 잡으면서 조조군의 침공을 막겠다는 계책을 내놓았다. 조조군의 후계자가 스스로 완성에 왔으니, 인질로 잡아버린다면 냉혈한 조조도 군사를 일으키진 못하겠지.
가후가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주군, 조조의 슬하에 자식들이 몇이나 되는지 아십니까? 아들만 하더라도 스물이 넘고, 딸을 합친다면 그 곱절은 됩니다. 비록 조비가 후계자로서 유명하다고는 하나, 조조의 다른 아들들도 모두 총명하고 자질이 뛰어나니, 조조로선 아쉬울 게 없습니다.”
오히려 원한만 더 키울 뿐입니다.
조조는 아들 조앙과 조카 조안민의 죽음을 간신히 참고 아군에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손을 뿌리치고 아들 조비까지 잇따라 죽인다면, 조조군은 분명 모든 군세를 몰아 완성을 불바다로 만들 것입니다.

가후의 말에 장수는 그럴 듯하다고 여겼다.
자기 자식의 죽음조차도 이용하는 냉혈한이 아니던가.
아들과 조카가 죽었음에도 거들떠도 보지 않았고, 맹장 전위의 죽음만을 애도하면서 장수들의 마음을 얻었다. 지독한 성격의 냉혈한이 아들이 죽을까 두려워 완성 침공을 머뭇거린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았다.
“주군, 결단을!”
“알겠네. 조조를 따르겠어. 내 성과 영토, 그리고 모든 병력들을 조비에게 양도하도록 하지.”

진작에 그럴 것이지.
한숨을 푹 내쉬면서 몇 년은 더 늙어 보이는 장수의 얼굴을 보며 가후가 생각했다.
하마터면 내 출셋길에 지장이 있을 뻔 했잖아.
가후는 허도에 도착하여 벼슬길에 오르는 즉시, 장수와의 모든 관계를 철회하겠노라 다짐했다.
“우선 조비의 곁에서 그를 염탐하도록 하겠습니다. 아군 병력을 고스란히 먹어치울지도 모르니까요.”
“잘 부탁하겠네, 문화.”

장수로서는 오랫동안 함께 해온 친우와 같은 가후를 굳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가후는 말한 것과는 정반대의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대로 장수군의 모든 지휘권을 조비에게 양도하는 것은 물론, 조비의 곁에서 그가 성공할 수 있는 방법과 책략들을 바칠 생각이다.
조비를 염탐한다는 것을 핑계로, 그의 곁에 머물 수 있는 명분을 얻었다.
이제 가후에게 있어 장수는 빈껍데기에 지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