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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 악연을 정리하다 (2)
여포군 멸망. 원술군 멸망.
천하무쌍이라 불리던 여포는 하비성에서 처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으며, 원술은 척박한 회남 지역에서 피를 토하며 비참하게 죽었다.
지금까지 조조군 포위망 역할을 하였던 두 개의 세력들이 잇따라 멸망하였으므로, 사실상 조조군은 남쪽으로 온전히 병력을 집중시킬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그동안 완성의 장수가 세력을 떨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조조군이 전 병력을 동원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 조조를 묶어주었던 여포와 원술은 없다. 다시 말해서 장수는 조정군을 자칭하는 조조군으로부터 집중공세를 견뎌내야 하는 애처로운 상황이 되었다는 뜻이다.
“이제 어찌해야 하는가!”
장수가 두려운 듯 떨었다.
동탁군 휘하에서 창의 기예를 뽐낸 맹장이었다고는 하나, 장수가 가진 능력은 군주를 칭하기에는 그 그릇이 부족했다. 호거아 등 수많은 장수들이 그를 추종하고 있었지만, 정작 군주로서의 덕목이 없었기에 가후 같은 명사를 두고 있음에도 그 세력이 완성을 벗어나질 못했다.
“싸웁시다! 우리가 언제 세력 불리한 걸 두고 망설였습니까?”
“호거아 장군의 말이 백 번 옳습니다!”
조조 따위 지난번처럼 완전히 무너뜨립시다!
호거아를 비롯한 장수들은 전쟁을 주장하고 나섰다.
지난번 조조의 아들과 조카를 죽였던 전투처럼, 이번에도 조조가 쳐들어온다면 응당 그에 대한 보복을 할 것이라며 필승의 의지를 높이고 있었다.
그들의 충성심은 매우 고마웠지만, 장수는 이미 중원 세력의 판도가 조조에게 흘러갔으니 완성에 겨우 자리를 꾸리고 있는 자신의 세력으로는 절대로 이기지 못할 것이라 확신했다.
“유표 놈! 이제 와서 내 제안을 거부하다니!”
장수와 유표는 오랜 동맹관계였다.
장수가 형주로 세력을 뻗으려는 조조의 공세를 막는 대신, 유표는 형주의 풍부한 물자들을 수송하여 장수를 지원한다. 평야지대의 완성을 본거지로 하는 장수였지만, 이미 사예주 인근 지역들은 동탁과 이각의 통치로 인해 풍비박산이 난 상황이었기에 척박한 황무지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유표가 갑자기 물자지원을 중단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유표군은 장수군과의 동맹을 일방적으로 철회하였으며, 형주에 웅크리고서 그 어떤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그건 아군이 조조의 아들과 조카를 죽였기 때문입니다.”
가후가 말했다.
완성 전투를 진두지휘한 책사는 유표가 아군과의 동맹을 철회한 이유가 바로 완성 전투에 있음을 꼬집었다.
“어째서인가! 우리들이 만약 조조를 배신하지 않았다면, 조조는 당장 형주까지 토벌하려고 했을 텐데!”
“예, 그렇습니다. 하지만 유표는 은혜를 모르고 본인의 안위만을 챙기는 성격입니다.”
아군이 조조의 원수가 되었으니, 그를 지원하면 조조에게 노려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 위험요소 때문에 아군을 지원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가후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장수군의 실수는 완성 전투에서 조조군을 완전히 붕괴시킨 그 결과에 있었다.
너무 잘 싸웠다. 너무 큰 피해를 조조에게 입혔다.
조조가 그저 적국의 수장이었자면 찬사를 받을 승전보였겠지만, 황제를 옹립하고 조정군을 주장하고 있는 대군벌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그것이 독으로 작용했다.
원술군과 여포군이 패망한 이상, 남쪽을 향해서만 온전히 전력을 집중할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두려운 유표군은 장수군을 버리고 동맹을 끊어버렸다.
“우리 보고 화살받이나 되라는 격이군!”
“그 말씀이 옳습니다. 과거의 유표는 황제가 되겠다는 꿈과 야망을 가진 인간이었지만, 지금은 노쇠하고 병들어 형주의 뒷방 늙은이에 불과합니다. 그런 늙은이에게 감히 조조를 상대로 싸울 수 있는 담력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장수가 참담한 듯 침음을 삼켰다.
유표의 지원 없이 자력만으로 조조를 막을 수 있을 리가 없다.
당장 원소에게 사신을 보내어 동맹의 체결은 물론 조조군을 견제해줄 것을 부탁하였지만, 곧바로 군사를 움직일 수 없다는 참담한 답변만을 받았을 뿐이다.
아들이 아파서 병사를 일으킬 수가 없다.
조조를 견제하려면 대군을 움직여야 하고, 대군을 움직이기 위해선 자신이 직접 지휘관으로 나서야 한다.
하지만 자신은 아들의 병치레 때문에 잠시도 자리를 벗어날 수 없었으니, 장수군에 대해서는 ‘매우 유감스럽게도 군사를 일으킬 여유가 없다.’라는 것이다.
엉터리 같은 말이었다.
“이런 빌어먹을 놈!”
아들 하나 병에 걸렸다고 군사를 못 일으켜?
그럼 완성에 있는 아군들을 다 같이 조조군과 싸우다가 죽으라는 거냐!
장수가 원소에게 받은 친필서한을 아무렇게나 바닥에 던져버렸다.
죽을병도 아니고, 그저 독감일 뿐이잖아!
아들도 많은 양반이 하나 정도는 죽어도 되잖아. 천하가 걸린 일인데 아들 하나 보살피겠다고 덩굴째 굴러들어온 기회를 걷어차 버리다니!
원소의 답변은 가후로서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답변이었다.
‘과거의 영웅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세력 형성도를 보더라도 원소군으로선 조조군의 후방을 도모할 장수군과의 동맹이 절실했다.
위와 아래에서 동시에 조조군을 공격한다.
원소군이 직접 동맹을 성사하는 순간, 조조가 두려워 형주에 박힌 유표도 결심하여 군사를 일으킬 것이니 여포와 원술의 사망으로 흩어졌던 조조군 포위망이 다시 결성될 수 있었다.
이번에는 어리석은 원술이 포위망의 맹주가 되는 것이 아닌, 현명하고 뛰어난 원소가 맹주가 되는 것이었으므로 어이없게 패배하는 일도 없겠지.
원소가 동맹을 체결하여 군사를 일으킨다는 선택지만 고르더라도 천하의 모든 패권이 그에게 자연스럽게 들어오게 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걸 걷어 차?
하북의 패자 원본초도 나이 앞에서는 장사 없다는 건가.
“이제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가문화! 유표도 틀렸고, 원소는 더더욱 틀렸어! 이제 도움을 요청할 세력도 없게 되었네!”
가후가 그 말을 듣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는지.
차라리 유표가 동맹을 계속 유지했더라면 형주의 물자를 제공받으며 항전을 벌인다는 선택지를 고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원소로부터 어이없는 답변을 듣게 될 일도 없었을 것이다.
모든 것들이 틀어졌다.
유포와 동맹하여 조조군의 남진을 막아선다는 가후의 책략이 완전히 무너졌다.
‘운이 너무도 좋구나, 조맹덕!’
하늘이 너를 돕고 있지 않느냐.
원소가 제 발로 복을 걷어차 버렸으니, 이제 네가 그 복을 안을 차례다.
* * *
“내가 조정의 사자로서 찾아온 것에 불만은 없겠지.”
조조군의 사자로서 찾아온 인물은 가후로서도 경악을 금치 못할 자였다.
도저히 생각 못했다.
천하의 기재라 불리는 가후였지만, 연이어 자신의 책략들이 어긋나기 시작하면서 자신감이 결여되고 말았다.
나도 늙은 건가?
아니, 그럴 일은 없을 텐데.
그렇다면 어째서 나는 이 자가 올 것을 미리 예견하지 못한 건가!
조조군의 사자로서 온 인물은 승상 조조의 장남이자 후계자인 조비였다.
그는 완성에 도착하자마자 현 장수군이 다스리고 있는 형주(荊州) 남양군(南陽郡)의 지리가 모두 기록된 지도를 요구했다. 그 말은 곧 남양군 전역의 땅을 조조군에게 그대로 내놓으라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어, 어디 안전이라고 감히……. 그런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장수가 네 발로 넙죽 엎드려선 고개를 조아렸다.
설마 조비가 직접 올 줄이야!
조조, 네놈은 벌써 몇 년 전의 일을 잊은 것이냐! 바로 이 완성에서 네 아들과 조카가 죽지 않았더냐! 그런데 다시 아들을 완성으로 보냈다고?
장수의 몸이 애처롭게 떨렸다.
그 굳건한 체격을 가진 호거아조차도 조비의 등장에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맹장 전위를 때려죽인 호거아였지만, 조비 앞에서는 고양이 앞의 쥐처럼 조신하게 굴었다.
그 눈이 너무 무섭다.
공포와 두려움이라고는 전혀 없는 눈동자.
도저히 인간의 것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분명 자신의 형제가 죽는 것을 보았고 들었을 터!’
가후가 침음을 삼켰다.
조비 또한 죽은 조앙, 조안민과 함께 완성 전투에 참전한 것으로 안다.
그런데도 이 완성에 오고 나서부터 두렵다는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에게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없는 것일지도 모르고, 그도 아니면 두렵다는 감정 자체를 억누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조비가 왕의 그릇으로 부족함이 없다는 것을 증명해주었다.
공포와 두려움을 참고 인내하는 것. 자 세력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그것을 극복하고 나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군주의 도리이며, 그것이 제왕의 마음가짐이다.
조비를 처음 본 순간, 가후는 눈치 챘다.
이 사람이 바로 자신이 지금까지 기다려왔던 완벽한 그릇을 가진 군주라는 것을.
동탁. 이각. 단외. 장제. 장수.
수많은 인물들을 섬기고 고개를 조아렸던 가후였지만, 지금처럼 머리를 강타하는 자극을 받진 못했다. 분명 조비는 제왕의 그릇을 가지고 있다.
“손을 잡아라. 잡을 기회를 주겠다.”
조비가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바로 그의 앞에서 두 팔과 두 다리를 굽히며 넙죽 절을 하고 있던 장수가 두려운 듯 고개를 들었다.
“예?”
“내 형 조앙과, 내 사촌형 조안민. 네가 빼앗은 그 목숨 값을 청산할 기회를 주겠다.”
“그것이 무엇인지… 귀를 씻고 듣겠습니다…….”
장수가 몸을 심하게 떨었다.
나는 이 사람이 너무 무섭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아들뻘밖에 안 되는 이 청년이 너무도 두렵다.
명령을 내리면 사방에서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이 달려와 이 젊은 청년의 사지를 찢어죽일 수 있다. 하지만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자신의 형과 사촌형의 죽음을 이용해서 빚을 청산하라고 명령하는 인간을 과연 인간이라 할 수 있을까? 마치 오래 묵은 요괴를 보는 듯하였다.
“내게 이 남양군을, 그리고 모든 군세를 맡겨라.”
그렇게만 한다면 너에게 부귀영화를 약속하겠다.
아군과의 오랜 원수지간을 청산할 수 있을 것이며, 조씨 일가와 교분을 틀 수 있는 기회도 주겠다.
장수로선 마치 천당을 걷는 것처럼 귀가 솔깃해지는 제안들이 아닐 수 없었다.
지금까지 남양군 완성에서 쌓아왔던 모든 것들을 넘기는 대신, 황제가 기거하는 수도에서 부귀영화를 제공하겠다는 그 말은 도저히 견딜 수 없을 정도였다.
“헌데 아군의 군세들로 어찌 하려는 것인지요?”
가후가 물었다.
마치 조비를 시험하려는 듯한 태도가 가득 담겨져 있었다.
외교적으로 큰 결례다.
승상의 아들이 직접 동맹을 맺고자 왔건만, 겨우 장수의 책사 따위가 의심을 가득 담은 웃음을 지으며 그 이유를 물어보다니.
하지만 조비는 불쾌하다는 기색이 전혀 없이 자신의 목표를 밝혔다.
“형주를 불바다로 만들겠다.”
그 말에 가후가 미소 만연한 모습을 하며 두 손을 모았다.
“지당하신 결정이십니다.”
원소와의 전쟁에 앞서, 후방 교란의 원흉이 될 수 있는 유표를 공격한다.
비록 형주를 차지하는 데는 여력이 부족하여 성공할 순 없겠지만, 유표가 감히 군사를 일으키지 못하도록 철저히 때려눕히고, 늙은이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 수는 있었다.
“어떻게 유표를 놀라게 하실 예정이신지요?”
“시산혈해(屍山血海).”
조비는 조금의 막힘도 없이 가장 끔찍한 답변을 주었다.
그 말에 가후는 벌벌 떨기는커녕, 오히려 그 답변이 완벽하다며 찬사를 내놓았다.
여포군 멸망. 원술군 멸망.
천하무쌍이라 불리던 여포는 하비성에서 처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으며, 원술은 척박한 회남 지역에서 피를 토하며 비참하게 죽었다.
지금까지 조조군 포위망 역할을 하였던 두 개의 세력들이 잇따라 멸망하였으므로, 사실상 조조군은 남쪽으로 온전히 병력을 집중시킬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그동안 완성의 장수가 세력을 떨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조조군이 전 병력을 동원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 조조를 묶어주었던 여포와 원술은 없다. 다시 말해서 장수는 조정군을 자칭하는 조조군으로부터 집중공세를 견뎌내야 하는 애처로운 상황이 되었다는 뜻이다.
“이제 어찌해야 하는가!”
장수가 두려운 듯 떨었다.
동탁군 휘하에서 창의 기예를 뽐낸 맹장이었다고는 하나, 장수가 가진 능력은 군주를 칭하기에는 그 그릇이 부족했다. 호거아 등 수많은 장수들이 그를 추종하고 있었지만, 정작 군주로서의 덕목이 없었기에 가후 같은 명사를 두고 있음에도 그 세력이 완성을 벗어나질 못했다.
“싸웁시다! 우리가 언제 세력 불리한 걸 두고 망설였습니까?”
“호거아 장군의 말이 백 번 옳습니다!”
조조 따위 지난번처럼 완전히 무너뜨립시다!
호거아를 비롯한 장수들은 전쟁을 주장하고 나섰다.
지난번 조조의 아들과 조카를 죽였던 전투처럼, 이번에도 조조가 쳐들어온다면 응당 그에 대한 보복을 할 것이라며 필승의 의지를 높이고 있었다.
그들의 충성심은 매우 고마웠지만, 장수는 이미 중원 세력의 판도가 조조에게 흘러갔으니 완성에 겨우 자리를 꾸리고 있는 자신의 세력으로는 절대로 이기지 못할 것이라 확신했다.
“유표 놈! 이제 와서 내 제안을 거부하다니!”
장수와 유표는 오랜 동맹관계였다.
장수가 형주로 세력을 뻗으려는 조조의 공세를 막는 대신, 유표는 형주의 풍부한 물자들을 수송하여 장수를 지원한다. 평야지대의 완성을 본거지로 하는 장수였지만, 이미 사예주 인근 지역들은 동탁과 이각의 통치로 인해 풍비박산이 난 상황이었기에 척박한 황무지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유표가 갑자기 물자지원을 중단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유표군은 장수군과의 동맹을 일방적으로 철회하였으며, 형주에 웅크리고서 그 어떤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그건 아군이 조조의 아들과 조카를 죽였기 때문입니다.”
가후가 말했다.
완성 전투를 진두지휘한 책사는 유표가 아군과의 동맹을 철회한 이유가 바로 완성 전투에 있음을 꼬집었다.
“어째서인가! 우리들이 만약 조조를 배신하지 않았다면, 조조는 당장 형주까지 토벌하려고 했을 텐데!”
“예, 그렇습니다. 하지만 유표는 은혜를 모르고 본인의 안위만을 챙기는 성격입니다.”
아군이 조조의 원수가 되었으니, 그를 지원하면 조조에게 노려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 위험요소 때문에 아군을 지원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가후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장수군의 실수는 완성 전투에서 조조군을 완전히 붕괴시킨 그 결과에 있었다.
너무 잘 싸웠다. 너무 큰 피해를 조조에게 입혔다.
조조가 그저 적국의 수장이었자면 찬사를 받을 승전보였겠지만, 황제를 옹립하고 조정군을 주장하고 있는 대군벌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그것이 독으로 작용했다.
원술군과 여포군이 패망한 이상, 남쪽을 향해서만 온전히 전력을 집중할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두려운 유표군은 장수군을 버리고 동맹을 끊어버렸다.
“우리 보고 화살받이나 되라는 격이군!”
“그 말씀이 옳습니다. 과거의 유표는 황제가 되겠다는 꿈과 야망을 가진 인간이었지만, 지금은 노쇠하고 병들어 형주의 뒷방 늙은이에 불과합니다. 그런 늙은이에게 감히 조조를 상대로 싸울 수 있는 담력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장수가 참담한 듯 침음을 삼켰다.
유표의 지원 없이 자력만으로 조조를 막을 수 있을 리가 없다.
당장 원소에게 사신을 보내어 동맹의 체결은 물론 조조군을 견제해줄 것을 부탁하였지만, 곧바로 군사를 움직일 수 없다는 참담한 답변만을 받았을 뿐이다.
아들이 아파서 병사를 일으킬 수가 없다.
조조를 견제하려면 대군을 움직여야 하고, 대군을 움직이기 위해선 자신이 직접 지휘관으로 나서야 한다.
하지만 자신은 아들의 병치레 때문에 잠시도 자리를 벗어날 수 없었으니, 장수군에 대해서는 ‘매우 유감스럽게도 군사를 일으킬 여유가 없다.’라는 것이다.
엉터리 같은 말이었다.
“이런 빌어먹을 놈!”
아들 하나 병에 걸렸다고 군사를 못 일으켜?
그럼 완성에 있는 아군들을 다 같이 조조군과 싸우다가 죽으라는 거냐!
장수가 원소에게 받은 친필서한을 아무렇게나 바닥에 던져버렸다.
죽을병도 아니고, 그저 독감일 뿐이잖아!
아들도 많은 양반이 하나 정도는 죽어도 되잖아. 천하가 걸린 일인데 아들 하나 보살피겠다고 덩굴째 굴러들어온 기회를 걷어차 버리다니!
원소의 답변은 가후로서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답변이었다.
‘과거의 영웅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세력 형성도를 보더라도 원소군으로선 조조군의 후방을 도모할 장수군과의 동맹이 절실했다.
위와 아래에서 동시에 조조군을 공격한다.
원소군이 직접 동맹을 성사하는 순간, 조조가 두려워 형주에 박힌 유표도 결심하여 군사를 일으킬 것이니 여포와 원술의 사망으로 흩어졌던 조조군 포위망이 다시 결성될 수 있었다.
이번에는 어리석은 원술이 포위망의 맹주가 되는 것이 아닌, 현명하고 뛰어난 원소가 맹주가 되는 것이었으므로 어이없게 패배하는 일도 없겠지.
원소가 동맹을 체결하여 군사를 일으킨다는 선택지만 고르더라도 천하의 모든 패권이 그에게 자연스럽게 들어오게 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걸 걷어 차?
하북의 패자 원본초도 나이 앞에서는 장사 없다는 건가.
“이제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가문화! 유표도 틀렸고, 원소는 더더욱 틀렸어! 이제 도움을 요청할 세력도 없게 되었네!”
가후가 그 말을 듣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는지.
차라리 유표가 동맹을 계속 유지했더라면 형주의 물자를 제공받으며 항전을 벌인다는 선택지를 고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원소로부터 어이없는 답변을 듣게 될 일도 없었을 것이다.
모든 것들이 틀어졌다.
유포와 동맹하여 조조군의 남진을 막아선다는 가후의 책략이 완전히 무너졌다.
‘운이 너무도 좋구나, 조맹덕!’
하늘이 너를 돕고 있지 않느냐.
원소가 제 발로 복을 걷어차 버렸으니, 이제 네가 그 복을 안을 차례다.
* * *
“내가 조정의 사자로서 찾아온 것에 불만은 없겠지.”
조조군의 사자로서 찾아온 인물은 가후로서도 경악을 금치 못할 자였다.
도저히 생각 못했다.
천하의 기재라 불리는 가후였지만, 연이어 자신의 책략들이 어긋나기 시작하면서 자신감이 결여되고 말았다.
나도 늙은 건가?
아니, 그럴 일은 없을 텐데.
그렇다면 어째서 나는 이 자가 올 것을 미리 예견하지 못한 건가!
조조군의 사자로서 온 인물은 승상 조조의 장남이자 후계자인 조비였다.
그는 완성에 도착하자마자 현 장수군이 다스리고 있는 형주(荊州) 남양군(南陽郡)의 지리가 모두 기록된 지도를 요구했다. 그 말은 곧 남양군 전역의 땅을 조조군에게 그대로 내놓으라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어, 어디 안전이라고 감히……. 그런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장수가 네 발로 넙죽 엎드려선 고개를 조아렸다.
설마 조비가 직접 올 줄이야!
조조, 네놈은 벌써 몇 년 전의 일을 잊은 것이냐! 바로 이 완성에서 네 아들과 조카가 죽지 않았더냐! 그런데 다시 아들을 완성으로 보냈다고?
장수의 몸이 애처롭게 떨렸다.
그 굳건한 체격을 가진 호거아조차도 조비의 등장에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맹장 전위를 때려죽인 호거아였지만, 조비 앞에서는 고양이 앞의 쥐처럼 조신하게 굴었다.
그 눈이 너무 무섭다.
공포와 두려움이라고는 전혀 없는 눈동자.
도저히 인간의 것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분명 자신의 형제가 죽는 것을 보았고 들었을 터!’
가후가 침음을 삼켰다.
조비 또한 죽은 조앙, 조안민과 함께 완성 전투에 참전한 것으로 안다.
그런데도 이 완성에 오고 나서부터 두렵다는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에게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없는 것일지도 모르고, 그도 아니면 두렵다는 감정 자체를 억누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조비가 왕의 그릇으로 부족함이 없다는 것을 증명해주었다.
공포와 두려움을 참고 인내하는 것. 자 세력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그것을 극복하고 나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군주의 도리이며, 그것이 제왕의 마음가짐이다.
조비를 처음 본 순간, 가후는 눈치 챘다.
이 사람이 바로 자신이 지금까지 기다려왔던 완벽한 그릇을 가진 군주라는 것을.
동탁. 이각. 단외. 장제. 장수.
수많은 인물들을 섬기고 고개를 조아렸던 가후였지만, 지금처럼 머리를 강타하는 자극을 받진 못했다. 분명 조비는 제왕의 그릇을 가지고 있다.
“손을 잡아라. 잡을 기회를 주겠다.”
조비가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바로 그의 앞에서 두 팔과 두 다리를 굽히며 넙죽 절을 하고 있던 장수가 두려운 듯 고개를 들었다.
“예?”
“내 형 조앙과, 내 사촌형 조안민. 네가 빼앗은 그 목숨 값을 청산할 기회를 주겠다.”
“그것이 무엇인지… 귀를 씻고 듣겠습니다…….”
장수가 몸을 심하게 떨었다.
나는 이 사람이 너무 무섭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아들뻘밖에 안 되는 이 청년이 너무도 두렵다.
명령을 내리면 사방에서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이 달려와 이 젊은 청년의 사지를 찢어죽일 수 있다. 하지만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자신의 형과 사촌형의 죽음을 이용해서 빚을 청산하라고 명령하는 인간을 과연 인간이라 할 수 있을까? 마치 오래 묵은 요괴를 보는 듯하였다.
“내게 이 남양군을, 그리고 모든 군세를 맡겨라.”
그렇게만 한다면 너에게 부귀영화를 약속하겠다.
아군과의 오랜 원수지간을 청산할 수 있을 것이며, 조씨 일가와 교분을 틀 수 있는 기회도 주겠다.
장수로선 마치 천당을 걷는 것처럼 귀가 솔깃해지는 제안들이 아닐 수 없었다.
지금까지 남양군 완성에서 쌓아왔던 모든 것들을 넘기는 대신, 황제가 기거하는 수도에서 부귀영화를 제공하겠다는 그 말은 도저히 견딜 수 없을 정도였다.
“헌데 아군의 군세들로 어찌 하려는 것인지요?”
가후가 물었다.
마치 조비를 시험하려는 듯한 태도가 가득 담겨져 있었다.
외교적으로 큰 결례다.
승상의 아들이 직접 동맹을 맺고자 왔건만, 겨우 장수의 책사 따위가 의심을 가득 담은 웃음을 지으며 그 이유를 물어보다니.
하지만 조비는 불쾌하다는 기색이 전혀 없이 자신의 목표를 밝혔다.
“형주를 불바다로 만들겠다.”
그 말에 가후가 미소 만연한 모습을 하며 두 손을 모았다.
“지당하신 결정이십니다.”
원소와의 전쟁에 앞서, 후방 교란의 원흉이 될 수 있는 유표를 공격한다.
비록 형주를 차지하는 데는 여력이 부족하여 성공할 순 없겠지만, 유표가 감히 군사를 일으키지 못하도록 철저히 때려눕히고, 늙은이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 수는 있었다.
“어떻게 유표를 놀라게 하실 예정이신지요?”
“시산혈해(屍山血海).”
조비는 조금의 막힘도 없이 가장 끔찍한 답변을 주었다.
그 말에 가후는 벌벌 떨기는커녕, 오히려 그 답변이 완벽하다며 찬사를 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