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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화] 악연을 정리하다 (1)



허도로 귀환한 조조군에게 희소식이 전해졌다.
회남 지역으로 쫓겨나 기사회생(起死回生)하여 재기를 기다리던 원술.
황제의 꿈을 꾸었으나 그 야망에 의해 스스로의 패망을 불러일으킨 원술이 병사하였다는 소식이 들린 것이다.
만에 하나라도 원술이 부활할 경우, 남쪽 지역이 또 다시 혼란스러워 질 수도 있다고 여긴 조조로서는 매우 큰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잇따른 패전과 정신적인 고통.
합비성의 폐쇄된 지형과 척박한 환경은 곱게 자란 원술에게 독이 되어 작용했다.
피를 토하며 급사해버리니, 원술의 남은 무리들은 조조를 두려워하여 여강태수 유훈에게 의존하여 떠나게 되었다.

“전국옥새도 다시 돌아왔습니다. 이로써 아군은 조정군으로서의 역할을 완수한 것이고, 황제의 명령을 빌려 대역적 원술을 토벌하는데 성공한 거나 다름없습니다.”
서황이 신이 난 듯 말했다.
황명을 받들어 역적을 토벌하였다. 무장에게 있어 이보다 더한 공훈이 어디 있겠는가?
원술과 여포를 잇달아 격파하면서 서주와 예주를 얻었으니, 조조군의 세력권이 한순간에 대폭 늘어나게 되었다.
“이게 옥새인가.”
조비가 원술의 보물이었던 전국옥새를 보며 중얼거렸다.
전국옥새는 다시 황제 유협에게 반환될 예정이었다.
반동탁 연합군이 득세하던 시절, 손견이 우물가에서 전국옥새를 주운 것을 시작으로 황실의 손을 떠나게 되었다가 다시 돌아온 셈이다.
동탁과 손견, 손책, 원술.
전국옥새는 수많은 주인의 손에 옮겨졌다가 드디어 제 주인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었다.
조비는 언젠가 황제가 될 자신의 운명을 직감하면서도, 눈부신 옥새를 지금만큼은 유협에게 잠시 맡기기로 하였다.
“옥새를 가졌다고 해서 황제가 되는 건 아니다.”
힘과 권력.
그게 제일이지.
조비는 황제의 권위와 정통성은 돌멩이 따위의 옥새가 아닌, 사람을 지배하고 짓누르는 힘과 권력에서 나오는 것이라 믿었다.
사람은 어리석고 교활하다.
그렇기에 그 수많은 사람들 위에서 군림하기 위해선 강제적으로 찍어 누를 수 있는 강제력이 필요했다. 그 강제력이 바로 힘과 권력이다.
그것만이 황제의 정통성이며, 권위의 상징이다.

“이 서공명은 비록 도련님께 힘과 권력이 없을지라도 영원히 따르겠습니다.”
“힘과 권력이 있어야 그대 같은 무장들에게 녹봉을 줄 게 아닌가?”
“진정한 주군을 섬기는데 녹봉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조비는 군부(軍部)에서 특히 인기가 많은 편이었다.
완성 전투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조조의 혈육이라는 점도 있겠지만, 원술 토벌전과 여포 토벌전에서 크게 활약하였기에 조조군 무장들에게 특히 신임을 받고 있었다.
조조의 그 어느 자식도 조비에게 미치진 못한다.
일단 나이가 어릴뿐더러, 전공과 공헌을 따지고 보더라도 조비보다 한참 아래였다. 지금부터 시작하더라도 조비에 미칠 바는 아니리라.
“나머지는 승상에게 인도해라. 옥새를 황실에 반환하는 일은 승상께서 맡으셔야 한다.”
상징적인 의미라고 할까.
황제를 대신하여 조정군을 이끌고 반란 진압에 나선 승상 조조.
승상이 대표자가 되어 황제에게 옥새를 반환한다는 그 행위에는 큰 상징성이 있었다.
이로써 조조는 천하의 충신이 되었으며, 황제를 대신하여 역적을 토벌하였으니 천하에 그 명성과 무명을 입증한 격이 되었다.

“용무가 모두 끝나셨습니까.”
내궁(內宮)을 벗어나자, 기다리고 있던 여령기가 다가왔다.
그녀는 조비의 호위장으로서 그가 내궁에서 볼일을 마치고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황제에게 옥새를 반납했다. 코흘리개도 아니고 잃어버린 물건을 일일이 가져다 줘야 하다니 참 우스운 노릇이지.”
“매우 무례한 발언이십니다만.”
“황제의 귀에 들릴 일은 없다.”
조정과 궁궐의 모든 사람들이 조조의 심복을 자청하는 자들이다.
조비는 그를 간접적으로 말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조조의 저택에 기웃거리는 자가 태반이고, 빈객이 되어 조조의 총애를 얻으려고 발악하는 자들이 대부분이다.
황실 관료는 물론이오, 황제의 수발을 드는 궁녀들조차도 조조에게 내통하여 황제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보고하고 있었다.
유협에게 자유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통제당하고 감시당하고 있다는 시점에서 볼 때, 우리 속의 짐승이나 다를 것 없는 삶이었다.

“이제 슬슬 관복도 새로 맞춰야겠군.”
서주 정벌전이 종결된 지, 한 달이 지났다.
조비는 비교적 부쩍 자라서 아비인 조조를 내려다볼 정도가 되었다.
워낙에 조조가 왜소한 체형이라는 점도 있겠지만, 그 아들인 조비는 아비와는 달리 성장이 빠르고 체격도 왕성하게 자랐다.
당장 관례를 치러도 될 정도로 사내다운 모습이 된 조비는 황실 궁녀들의 마음을 설레게 만들 정도로 세련된 용모가 되었지만, 과로에 따른 흔적을 지울 순 없었는지 눈 밑에 음영이 짙게 깔려 있었다.
“저택으로 돌아가시는 겁니까?”
“물론 그렇겠지.”
조비는 서주 정벌전이 끝난 이후로 기존의 본가와는 결별하고 새롭게 저택을 마련했다. 본가와 헤어져 스스로 자립하게 되었음을 의미하였다. 이제 성년이 멀지 않았으니, 어미의 품을 벗어나 새롭게 집을 마련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가족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공간에서 여인과의 삶을 보낸다.
여령기와 초선을 가지게 된 이후, 조조가 그 아들에게 새로운 집을 마련하여 가족의 이목이 닿지 않도록 해준 것에선 당연히 그 음흉한 의도가 깔려 있었다.
“어서 오세요, 상공. 관복을 새로 맞춰야겠네요. 내일까지 새것을 대령하겠습니다.”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초선이 반갑게 나와서 맞이해주었다.

경국지색(傾國之色)의 미녀.
역적 동탁에게 멸망을 가져다주었으며, 중원사(中原史)를 바꾸는데 가장 큰 기여를 한 여인.
사도 왕윤의 양녀였던 초선은 허도로 돌아온 이후, 조비의 저택을 도맡아서 관리하고 있었다.

조조는 전쟁이 끝나자마자 여포의 정실부인 엄씨와 첩 초선, 그리고 딸 여령기를 모두 조비에게 주었다.
당연히 그 의도의 이면에는 ‘직계 혈육을 번창시켜라.’라는 의미가 있었겠지만, 조비가 초선과 여령기 같은 미녀들을 대함에 있어서 흑심을 드러내는 일은 없었다.
욕심이 없다기보다는, 딱히 관심이 없다.
그렇게 정의를 내리는 편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손님께서 올 겁니다.”
“예, 접객에 실수가 없도록 준비해두겠습니다.”
초선이 고개를 숙이며 뒤로 물러섰다.
한편 여령기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진 않지만, 어찌 되었던 둘째어머니라고 할 수 있는 초선이 조비에게 매우 조신하게 굴고 있는 것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새로 시집을 온 것도 아니고.
지아비를 죽인 원흉의 아들을 맞이하고 있는데, 얼굴을 붉히면서 쑥스러워 하는 반응이나 보이다니. 마치 여포의 죽음 자체를 잊은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너도 이만 쉬어라.”
어차피 여령기와는 같은 저택에서 머물고 있다.
동거 아닌 동거 생활을 하게 되었다고 할까. 여령기는 그에 대해선 생각하고 싶지 않다는 듯, 조비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조비는 저택에 도착하기 전, 사람을 보내어 손님을 불렀다.
그 손님은 조비의 저택에 오자마자 본당으로 들어와 조비에게 알랑방귀를 뀌기 시작했다.
“대단하시군, 조카님. 경국지색의 미녀를 두게 될 줄이야!”
조홍이 신이 난 듯 외쳤다.
여포가 애지중지하던 애첩을, 천하에 그 아름다움이 명성이 자자한 경국지색을 곁에 두고 있다는 것은 사내로서 매우 부럽고 질투 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주인공이 된 조비를 짓궂게 놀리는 것도 당연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저택에는 미녀로 유명한 초선과 여령기가 있지 않은가. 종종 조조군 무장들이 음탕한 농담을 꺼내들 때마다 그녀들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는 했다.
육욕에 관심이 없는 조비라 해도 미녀들 앞에서는 한 마리의 야수가 될 거라는 둥, 이로써 조씨 일가의 직계 번창은 따 놓은 당상이라는 말까지 했다. 저 미녀들을 앞에 두고 표리부동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테니까.
“아무 일도 없었다만.”
“실례지만 조카님, 혹시 도 닦으러 가실 생각은? 서천(四川)에 오두미도(五斗米道)가 유행이라던데.”
저 미녀들을 두고 있으면서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조홍은 조조에게 달려가 “직계 번창은 망했습니다. 조카가 남자 구실을 못합니다.”라고 토로하고픈 심정이었다.

“그래서 이 숙부를 부른 이유는 뭐지? 이 숙부는 대충 그 이유가 짐작은 되지만 우선 물어봐야 할 것 같은데.”
“돈을 꾸고 싶다.”
아니나 다를까.
조비는 또 다시 조홍에게서 돈을 꾸고 싶다는 말을 했다.
물론 조홍으로선 나쁘지 않은 이야기였다.
조비는 서주에서도 돈을 빌렸다가 이자를 포함해서 몇 배에 달하는 이익을 안겨주지 않았던가.
조조군 무장이었음에도 재물 불리기를 우선시하는 조홍은 조씨 일가를 통틀어 제일의 부자였으며, 연주를 대표하는 거부라 할 수 있었다. 그 누구도 조홍에 미칠 정도의 금력을 가진 인물은 없었다. 더욱이 조홍이 그를 용납하지도 않을 것이고.
그렇기에 조홍에게는 돈을 빌리러 오는 사람이 많았다.
입 놀리기를 좋아하는 장사치라든지, 황실 관료와 유명한 지방관 등이 넘쳐나 일일이 그 이름을 열거할 수도 없을 정도였다.
“무슨 이유로 돈을 빌려려 하지?”
“내가 그걸 말해줘야 하나.”
“물론 말할 필요는 없지. 그저 이 숙부가 궁금해서 물어본 것뿐이네.”
돈을 빌리기 위해선 그에 걸 맞는 담보가 필요한 법이지.
조홍은 매번 돈을 빌리러 오는 자들에게 담보를 요구하곤 했다.
돈을 빌렸다가 탕진하고 딴 소리를 지껄이는 자들이 많았으므로, 조홍은 빌리는 돈에 합당한 담보를 거둬들였다.
“그나저나 담보가 필요한데. 이번에는 액수가 커서······. 서주에서 거둔 총이익에 달하는 금액을 빌리고 싶다면 그만한 큰 담보를 줘야 하는데······.
당장 조홍으로선 아리따운 초선과 여령기를 담보로 잡고 싶어 했지만, 그 누구도 아닌 형님 조조에게 목이 달아나고 싶지 않다면 절대로 꺼내선 안 되는 말이었다.

조조는 일부러 초선과 여령기를 아들 조비에게 준 것이다.
그녀들로 하여금 자손들을 번창시킬 것. 조비는 명실상부한 조조의 후계자였고, 훗날을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었다.
그런데 아들에게 마련한 여인들을 조홍이 야바위처럼 빼앗아갔다?
조홍은 난세의 간웅이 혈육을 죽이는 꼴을 바로 눈앞에서 영접하게 되리라.

“담보는 없다. 딱히 줄 것도 없을뿐더러 당장 갚을 생각도 없다.”
얼굴에 철판을 깔았나.
조비의 말에 조홍이 무심코 대답했다.
“하지만 내가 출세하게 된다면, 지금 빌려준 재산과 재물에 아깝지 않을 정도의 영광을 약속할 수 있다.”
“영광을 약속? 그런 애매모호한 태도는 돈 빌리는 입장에선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인데, 조카님.”
상인은 절대로 미지(未知)에 돈을 걸지 않는다.
새로운 사업이라고 해도 수많은 연구와 도전을 통해서 창출되는 것이지, 그 어떤 근거도 없는 미지에 돈을 걸 정도로 조홍은 얼간이가 아니었다.
무장이면서도 상인의 근본을 가진 조홍은 재물에 민감하고, 자신의 재산을 잃는 일을 죽는 것보다도 싫어한다. 그런 조홍에게 조비가 꺼낸 이야기는 허무맹랑해서 말조차 나오지 않을 정도로 당혹스러운 제안이었다.

“그래서 받아들일 건가? 숙부가 아니더라도 내게 돈 빌려줄 사람은 많다.”
아쉬운 건 너지, 내가 아니다.
기회를 주었으니, 손을 잡을지 아니면 내칠지를 결정해라.
조비는 오히려 돈을 빌리는 입장이었음에도, 항상 명령하는 쪽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