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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마지막 선택지 (2)
여포에게 있어, 조조가 건넨 선택지는 최고의 복수였다.
그동안 여포가 걸어왔던 길은 자신의 목숨만을 챙긴 배신의 연속이었다.
병주(并州)의 궁핍한 환경을 저주하여 양아버지 정원을 죽이고 동탁군의 비장이 되었고, 초선을 독차지하기 위해서 왕윤과 손을 잡고 동탁을 죽였다. 서주로 받아들여준 은인 유비를 배반하고 서주목이 되기까지 하였으니, 그 인생은 분명 자신만의 안위만을 쫓는 구차한 삶이라 할 수 있었다.
“장료와 고순은 휘하의 장수로 편입시키고 싶습니다.”
조비가 간언했다.
장료는 말할 나위도 없고, 고순은 여포의 부장으로 함진영을 이끄는 대장이었으니 탐을 내는 것도 당연했다.
훗날 장료가 명성을 크게 떨쳐 역사에 깊은 이름을 새기게 되겠지만, 지금은 고순이 여포의 심복으로서 그 무명이 장료보다 윗줄에 있었다.
함진영을 이끌며 조조의 목숨을 노렸던 적도 있었고, 연주 공방전에서 여포를 대신하여 조조의 본진에 돌입하였을 정도로 용맹하였기에 조조군 장수들도 고순에 대해선 인정하고 있었다.
아군이 패망하였다는 소식에 스스로 항복하여 하비성까지 온 고순은, 자신을 마치 물건처럼 넘겨받으려는 조비의 언행에 욕설을 내뱉었다.
“애새끼의 노리개가 되라는 말이냐! 구차하게 사느니, 차라리 죽겠다!”
장료도 마찬가지였는지, 조조군에 대한 증오로 가득 찬 표정을 지었다.
연주를 빼앗지 못하고 서주로 쫓겨났다.
그리고 서주에서도 조조군에게 완패하여 패망하였으나, 그렇다고 해서 마음대로 자신들을 다룰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지나친 오만에 가까웠다.
“자기 주제를 모르는 것 같군.”
조비가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오랏줄에 묶인 고순과 장료 앞에 다가왔다.
고개를 숙이며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가 내 밑에 들어오지 않는다면 너희 주군의 처자식이 죽는 것을 보게 될 거다.”
협상보다는 협박이 어울리지.
특히 협박을 내놓는 당사자가 높은 자리에 있을 경우에는 더더욱.
이제 열다섯 살의 소년이 꺼낸 말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잔혹한 말이다.
그 말을 들은 고순과 장료는 조조의 아들도 과연 난세의 간웅이 될 기질을 가지고 있다고 여겼다. 분명 군주로서의 그릇은 여포보다도 이 어린 소년이 훨씬 뛰어났다.
“결정하라.”
조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하비성 처소에서 끌려 온 엄씨가 소리쳤다.
“고순 장군, 장료 장군! 우리들을 죽일 셈입니까! 어서 우리들을 구해주시오!”
여령기는 태연하게 죽음을 각오하고 있는 반면, 모친인 엄씨는 조조군에게 겁탈이라도 당할까 두려워 조조와 조비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서 그들에게 적극 협력하고 있었으며, 투항하지 않고 망설이는 자들에게 오히려 항복을 촉구하고 있었다.
‘뭐, 함진영과 고순이 아군이 되어준다면야.’
크흠.
당장 여포군 무장들을 죄다 죽이자는 하후돈이었지만, 고순과 장료가 아군이 되어준다면 매우 든든하다고 생각했다.
직접 싸워봤기에 알고 있다.
그들은 죽이기엔 너무 아까운 인재였고, 특히 같은 무장으로서 그 무명을 존중하고 있었다.
“비겁하구나. 정녕 이런 식으로 남을 협박하는 것 밖에 모르는가!”
“칼을 다루는 자에게는 세 치의 혀로, 붓을 다루는 자에겐 날카로운 칼로 다스린다. 그게 바로 협상의 기본이다.”
조비의 손이 고순의 어깨를 두드렸다.
항복을 종용하는 손길이었고, 고순은 고개를 숙이며 침음을 몇 번을 흘리다가 결국 조비가 건넨 그 손을 잡아야 했다.
“언젠가 그대를 죽일지도 모른다.”
“너에게 죽는다면 나 또한 그것뿐인 그릇이라는 것이지.”
여포의 처자식을 이용해서 협박하자, 고순은 여포를 향한 충성심에 고민하다가 결국 그의 처자식을 지키는 쪽을 선택했다.
이 자리에서 주군과 함께 처형되는 것은 쉬운 일이다.
함께 처형장으로 끌려가 교수형을 당하던지, 아니면 참형을 당하면 될 뿐인 이야기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주군의 처자식은?
여령기는 시집을 가지 않은 묘령의 소녀였고, 아직 보살핌이 필요했다. 고순은 딸아이와 같은 여령기를 지키고자 조조군에 협력하여 배신자가 되는 길을 선택하였다.
괴롭겠지.
분명 후회하게 되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스로의 깨끗한 무명을 남기기 위해 무책임하게 죽을 순 없었다.
“오라를 풀어라.”
병사들이 다가와 고순과 장료의 몸을 구속하던 줄을 풀었다.
이걸로 함진영을 손에 넣었다.
조조는 고순과 장료의 신변을 완전히 조비에게 넘겼고, 조조군을 두렵게 만들었던 함진영 부대는 조비의 개인 사병이 되었다.
아직 충성도는 확인할 수 없었다.
엄씨와 초선, 그리고 여령기를 인질로 삼아서 강제로 다루는 것이었으니 충성을 기대하는 것은 매우 안일한 생각이었다.
분명 저 마음속에는 주군의 처자식으로 협박을 건 조비를 죽여 버리겠다는 살의가 있을 것이며, 언젠가 그 기회를 노리겠다는 앙심 또한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공대, 그대는 어찌할 생각인가?”
조조가 물었다.
죽이기를 아직 망설이는 듯, 조조의 얼굴에서는 진궁에 대한 미련으로 가득했다.
“맹덕. 네가 마지막에 이겨서 이 꼴이 되었지만, 두 번 다시는 너를 따르지 않겠노라고 다짐했다. 넌 필요에 따라서 인의를 이용하고 배신하는 악인 중의 악인이다. 너를 따르느니 죽어버리겠다.”
그에게 엄씨와 여령기의 목숨을 이용한 협박은 소용이 없었다.
만약 진궁이 따르지 않겠다고 하여, 여기서 엄씨와 여령기를 죽인다면 장료와 고순을 다룰 수 없게 될 것이다. 따라서 진궁에게는 그런 협박 따위는 통하지가 않았다.
진궁은 여포를 따라서 죽겠노라고 다짐하였고, 그를 실천에 옮기려고 했다.
“여포는 우둔하고 미련하나, 너처럼 교활하진 않았다.”
진궁이 스스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처형장으로 걸어가기 시작하였는데, 그를 본 조조가 말했다.
“너의 처자식은 책임지도록 하겠다.”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겠다, 맹덕.”
여포를 따라 죽겠다고 나선 모사는 진궁밖에 없었다.
다른 장수들은 모두 조조군에 투항하였으며, 여포를 따랐던 모사와 관료들 역시 조조군에 기꺼이 항복하였다.
결국 여포에 대한 충정을 가슴에 품고서 스스로 죽겠다고 나선 이는 진궁뿐이었던 것이다.
“봉선 님, 함께하겠습니다.”
처자식을 위해서라도 결단을 내리십시오.
진궁의 말에 여포가 어금니를 빠득 갈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래, 다 끝났다.
하비성이 함락되면서부터 자신의 목숨은 끝난 것일지도 모른다.
남은 것이라고는 조조가 건넨 자비.
매우 자존심 상하고 무명에 어긋나는 일이지만, 여포는 그 근거 모를 자비를 따르기로 결정했다.
“맹덕, 약속은 지켜라!”
여포가 등을 돌리며 진궁과 함께 처형장으로 스스로 걸어갔다.
그 뒷모습을 여령기가 붙잡으려 하였지만, 병사들에게 가로막혀 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다.
딸의 울음소리가 처소를 가득 메웠다. 초선도 흠뻑 눈물로 얼굴을 적시고 있었으며, 엄씨는 지아비가 죽는 뒷모습을 보며 애석한 듯 고개를 돌렸다.
군웅할거를 거친 영웅치고는 몹시 처량하다.
그를 보며 조비가 중얼거렸다.
* * *
“왕 사도는 나와 친한 벗이었고, 역적 동탁을 죽이기 위해 모의한 동료였다.”
여포가 처형장으로 끌려가 목이 잘린 뒤,
조조는 사도 왕윤의 양녀였던 초선에 한해서는 사면령과 함께 극진한 대접을 약속했다.
그 말에도 초선은 슬픈 표정만을 지을 뿐,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조조가 극진한 대접을 약속하였음에도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초선은 10대의 어린 나이에 여포에게 시집을 오게 되었다.
그래서 여령기와도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 묘령의 여성이었다. 아직 창창한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은 미망인이 되어버렸으니 매우 딱한 처지라 할 수 있었다.
‘하여간 내 아비지만 대단한 양반이군.’
특히나 여인을 밝히는 그 고질증이 또 돋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조조는 여포의 첩이었던 초선을 풀어주며 귀빈으로 대접하였다.
스스로를 동탁을 암살할 뻔한 의인으로 알림과 동시에, 과거의 인연이었던 왕윤의 양녀에게 자비를 베푸는 위정자라는 점을 강조하여 서주 백성들에게 호의를 얻기 위함이었다.
과연 정치의 달인이다.
뻔뻔스러울 정도로 호인으로서의 모습을 보이는 조조. 그를 보며 조비가 생각했다.
“여포의 딸은 네가 알아서 해결하거라.”
내게 귀찮은 일을 던지기는.
여령기에 대한 처우를 맡기겠다는 조조의 말에 조비가 내심 침음을 삼켰다.
부친을 잃은 뒤, 조조군에 항복한 장수들을 시작으로 아비의 죽음에 관여된 모든 조조군 인물들을 증오하고 있는 여령기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난감했다.
여심을 다루는 건 취향이 아니다. 애초에 관심도 없었고.
조비에겐 매우 어려운 난관이 아닐 수 없었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
조비가 손을 건넸다.
그를 본 고순과 장료는 탐탁지 않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결국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어쩔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우리들은 상관없소. 그 어떤 전쟁이든 맡은 바의 임무를 모두 모두 완수하겠으니. 하지만 명심하시오. 이건 모두 봉선 님의 따님을 위해서 내린 결정이니.”
여령기의 처우가 그에게 달려있다.
여인을 전리품으로 삼는 전쟁의 법칙에 따라 여령기를 첩으로 삼든지 몸종으로 삼든지가 결정이 되겠지만, 고순과 장료는 여령기를 보살펴 줄 것을 조비에게 요구했다.
물론 그 제안은 기꺼이 받아들였다.
고작 여자아이 한 명을 살리는 것만으로 고순과 장료의 충성심을 얻을 수 있다면 매우 효율적인 거래였다.
“성가신 여자를 대하는 방법은 아비에게 배운 적이 없다.”
여포의 부하였던 진의록의 처 두씨를 새로운 첩으로 삼은 조조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 미색이 아름다워서 감히 초선에게 비할 정도라는 진의록의 부인에 대한 소문을 듣고는 곧바로 그녀를 첩으로 삼아버렸다. 초선은 왕윤의 양녀라 감히 건드릴 수 없었지만, 항복을 요청한 장수의 아내는 달랐다.
승자가 되었으니 패자의 재산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었고, 그 재산들 중의 하나에 아내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난 적어도 부하의 아내에게 치근덕거리진 않을 거다.”
하필이면 저 인간에게 유일하게 배우지 못한 것이 여인을 다루는 재주였다. 세 치의 혀로 여인의 마음을 녹이는 조조와는 달리, 조비에게는 절망적일 정도로 재주가 없었다.
여포에게 있어, 조조가 건넨 선택지는 최고의 복수였다.
그동안 여포가 걸어왔던 길은 자신의 목숨만을 챙긴 배신의 연속이었다.
병주(并州)의 궁핍한 환경을 저주하여 양아버지 정원을 죽이고 동탁군의 비장이 되었고, 초선을 독차지하기 위해서 왕윤과 손을 잡고 동탁을 죽였다. 서주로 받아들여준 은인 유비를 배반하고 서주목이 되기까지 하였으니, 그 인생은 분명 자신만의 안위만을 쫓는 구차한 삶이라 할 수 있었다.
“장료와 고순은 휘하의 장수로 편입시키고 싶습니다.”
조비가 간언했다.
장료는 말할 나위도 없고, 고순은 여포의 부장으로 함진영을 이끄는 대장이었으니 탐을 내는 것도 당연했다.
훗날 장료가 명성을 크게 떨쳐 역사에 깊은 이름을 새기게 되겠지만, 지금은 고순이 여포의 심복으로서 그 무명이 장료보다 윗줄에 있었다.
함진영을 이끌며 조조의 목숨을 노렸던 적도 있었고, 연주 공방전에서 여포를 대신하여 조조의 본진에 돌입하였을 정도로 용맹하였기에 조조군 장수들도 고순에 대해선 인정하고 있었다.
아군이 패망하였다는 소식에 스스로 항복하여 하비성까지 온 고순은, 자신을 마치 물건처럼 넘겨받으려는 조비의 언행에 욕설을 내뱉었다.
“애새끼의 노리개가 되라는 말이냐! 구차하게 사느니, 차라리 죽겠다!”
장료도 마찬가지였는지, 조조군에 대한 증오로 가득 찬 표정을 지었다.
연주를 빼앗지 못하고 서주로 쫓겨났다.
그리고 서주에서도 조조군에게 완패하여 패망하였으나, 그렇다고 해서 마음대로 자신들을 다룰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지나친 오만에 가까웠다.
“자기 주제를 모르는 것 같군.”
조비가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오랏줄에 묶인 고순과 장료 앞에 다가왔다.
고개를 숙이며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가 내 밑에 들어오지 않는다면 너희 주군의 처자식이 죽는 것을 보게 될 거다.”
협상보다는 협박이 어울리지.
특히 협박을 내놓는 당사자가 높은 자리에 있을 경우에는 더더욱.
이제 열다섯 살의 소년이 꺼낸 말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잔혹한 말이다.
그 말을 들은 고순과 장료는 조조의 아들도 과연 난세의 간웅이 될 기질을 가지고 있다고 여겼다. 분명 군주로서의 그릇은 여포보다도 이 어린 소년이 훨씬 뛰어났다.
“결정하라.”
조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하비성 처소에서 끌려 온 엄씨가 소리쳤다.
“고순 장군, 장료 장군! 우리들을 죽일 셈입니까! 어서 우리들을 구해주시오!”
여령기는 태연하게 죽음을 각오하고 있는 반면, 모친인 엄씨는 조조군에게 겁탈이라도 당할까 두려워 조조와 조비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서 그들에게 적극 협력하고 있었으며, 투항하지 않고 망설이는 자들에게 오히려 항복을 촉구하고 있었다.
‘뭐, 함진영과 고순이 아군이 되어준다면야.’
크흠.
당장 여포군 무장들을 죄다 죽이자는 하후돈이었지만, 고순과 장료가 아군이 되어준다면 매우 든든하다고 생각했다.
직접 싸워봤기에 알고 있다.
그들은 죽이기엔 너무 아까운 인재였고, 특히 같은 무장으로서 그 무명을 존중하고 있었다.
“비겁하구나. 정녕 이런 식으로 남을 협박하는 것 밖에 모르는가!”
“칼을 다루는 자에게는 세 치의 혀로, 붓을 다루는 자에겐 날카로운 칼로 다스린다. 그게 바로 협상의 기본이다.”
조비의 손이 고순의 어깨를 두드렸다.
항복을 종용하는 손길이었고, 고순은 고개를 숙이며 침음을 몇 번을 흘리다가 결국 조비가 건넨 그 손을 잡아야 했다.
“언젠가 그대를 죽일지도 모른다.”
“너에게 죽는다면 나 또한 그것뿐인 그릇이라는 것이지.”
여포의 처자식을 이용해서 협박하자, 고순은 여포를 향한 충성심에 고민하다가 결국 그의 처자식을 지키는 쪽을 선택했다.
이 자리에서 주군과 함께 처형되는 것은 쉬운 일이다.
함께 처형장으로 끌려가 교수형을 당하던지, 아니면 참형을 당하면 될 뿐인 이야기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주군의 처자식은?
여령기는 시집을 가지 않은 묘령의 소녀였고, 아직 보살핌이 필요했다. 고순은 딸아이와 같은 여령기를 지키고자 조조군에 협력하여 배신자가 되는 길을 선택하였다.
괴롭겠지.
분명 후회하게 되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스로의 깨끗한 무명을 남기기 위해 무책임하게 죽을 순 없었다.
“오라를 풀어라.”
병사들이 다가와 고순과 장료의 몸을 구속하던 줄을 풀었다.
이걸로 함진영을 손에 넣었다.
조조는 고순과 장료의 신변을 완전히 조비에게 넘겼고, 조조군을 두렵게 만들었던 함진영 부대는 조비의 개인 사병이 되었다.
아직 충성도는 확인할 수 없었다.
엄씨와 초선, 그리고 여령기를 인질로 삼아서 강제로 다루는 것이었으니 충성을 기대하는 것은 매우 안일한 생각이었다.
분명 저 마음속에는 주군의 처자식으로 협박을 건 조비를 죽여 버리겠다는 살의가 있을 것이며, 언젠가 그 기회를 노리겠다는 앙심 또한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공대, 그대는 어찌할 생각인가?”
조조가 물었다.
죽이기를 아직 망설이는 듯, 조조의 얼굴에서는 진궁에 대한 미련으로 가득했다.
“맹덕. 네가 마지막에 이겨서 이 꼴이 되었지만, 두 번 다시는 너를 따르지 않겠노라고 다짐했다. 넌 필요에 따라서 인의를 이용하고 배신하는 악인 중의 악인이다. 너를 따르느니 죽어버리겠다.”
그에게 엄씨와 여령기의 목숨을 이용한 협박은 소용이 없었다.
만약 진궁이 따르지 않겠다고 하여, 여기서 엄씨와 여령기를 죽인다면 장료와 고순을 다룰 수 없게 될 것이다. 따라서 진궁에게는 그런 협박 따위는 통하지가 않았다.
진궁은 여포를 따라서 죽겠노라고 다짐하였고, 그를 실천에 옮기려고 했다.
“여포는 우둔하고 미련하나, 너처럼 교활하진 않았다.”
진궁이 스스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처형장으로 걸어가기 시작하였는데, 그를 본 조조가 말했다.
“너의 처자식은 책임지도록 하겠다.”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겠다, 맹덕.”
여포를 따라 죽겠다고 나선 모사는 진궁밖에 없었다.
다른 장수들은 모두 조조군에 투항하였으며, 여포를 따랐던 모사와 관료들 역시 조조군에 기꺼이 항복하였다.
결국 여포에 대한 충정을 가슴에 품고서 스스로 죽겠다고 나선 이는 진궁뿐이었던 것이다.
“봉선 님, 함께하겠습니다.”
처자식을 위해서라도 결단을 내리십시오.
진궁의 말에 여포가 어금니를 빠득 갈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래, 다 끝났다.
하비성이 함락되면서부터 자신의 목숨은 끝난 것일지도 모른다.
남은 것이라고는 조조가 건넨 자비.
매우 자존심 상하고 무명에 어긋나는 일이지만, 여포는 그 근거 모를 자비를 따르기로 결정했다.
“맹덕, 약속은 지켜라!”
여포가 등을 돌리며 진궁과 함께 처형장으로 스스로 걸어갔다.
그 뒷모습을 여령기가 붙잡으려 하였지만, 병사들에게 가로막혀 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다.
딸의 울음소리가 처소를 가득 메웠다. 초선도 흠뻑 눈물로 얼굴을 적시고 있었으며, 엄씨는 지아비가 죽는 뒷모습을 보며 애석한 듯 고개를 돌렸다.
군웅할거를 거친 영웅치고는 몹시 처량하다.
그를 보며 조비가 중얼거렸다.
* * *
“왕 사도는 나와 친한 벗이었고, 역적 동탁을 죽이기 위해 모의한 동료였다.”
여포가 처형장으로 끌려가 목이 잘린 뒤,
조조는 사도 왕윤의 양녀였던 초선에 한해서는 사면령과 함께 극진한 대접을 약속했다.
그 말에도 초선은 슬픈 표정만을 지을 뿐,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조조가 극진한 대접을 약속하였음에도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초선은 10대의 어린 나이에 여포에게 시집을 오게 되었다.
그래서 여령기와도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 묘령의 여성이었다. 아직 창창한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은 미망인이 되어버렸으니 매우 딱한 처지라 할 수 있었다.
‘하여간 내 아비지만 대단한 양반이군.’
특히나 여인을 밝히는 그 고질증이 또 돋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조조는 여포의 첩이었던 초선을 풀어주며 귀빈으로 대접하였다.
스스로를 동탁을 암살할 뻔한 의인으로 알림과 동시에, 과거의 인연이었던 왕윤의 양녀에게 자비를 베푸는 위정자라는 점을 강조하여 서주 백성들에게 호의를 얻기 위함이었다.
과연 정치의 달인이다.
뻔뻔스러울 정도로 호인으로서의 모습을 보이는 조조. 그를 보며 조비가 생각했다.
“여포의 딸은 네가 알아서 해결하거라.”
내게 귀찮은 일을 던지기는.
여령기에 대한 처우를 맡기겠다는 조조의 말에 조비가 내심 침음을 삼켰다.
부친을 잃은 뒤, 조조군에 항복한 장수들을 시작으로 아비의 죽음에 관여된 모든 조조군 인물들을 증오하고 있는 여령기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난감했다.
여심을 다루는 건 취향이 아니다. 애초에 관심도 없었고.
조비에겐 매우 어려운 난관이 아닐 수 없었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
조비가 손을 건넸다.
그를 본 고순과 장료는 탐탁지 않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결국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어쩔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우리들은 상관없소. 그 어떤 전쟁이든 맡은 바의 임무를 모두 모두 완수하겠으니. 하지만 명심하시오. 이건 모두 봉선 님의 따님을 위해서 내린 결정이니.”
여령기의 처우가 그에게 달려있다.
여인을 전리품으로 삼는 전쟁의 법칙에 따라 여령기를 첩으로 삼든지 몸종으로 삼든지가 결정이 되겠지만, 고순과 장료는 여령기를 보살펴 줄 것을 조비에게 요구했다.
물론 그 제안은 기꺼이 받아들였다.
고작 여자아이 한 명을 살리는 것만으로 고순과 장료의 충성심을 얻을 수 있다면 매우 효율적인 거래였다.
“성가신 여자를 대하는 방법은 아비에게 배운 적이 없다.”
여포의 부하였던 진의록의 처 두씨를 새로운 첩으로 삼은 조조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 미색이 아름다워서 감히 초선에게 비할 정도라는 진의록의 부인에 대한 소문을 듣고는 곧바로 그녀를 첩으로 삼아버렸다. 초선은 왕윤의 양녀라 감히 건드릴 수 없었지만, 항복을 요청한 장수의 아내는 달랐다.
승자가 되었으니 패자의 재산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었고, 그 재산들 중의 하나에 아내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난 적어도 부하의 아내에게 치근덕거리진 않을 거다.”
하필이면 저 인간에게 유일하게 배우지 못한 것이 여인을 다루는 재주였다. 세 치의 혀로 여인의 마음을 녹이는 조조와는 달리, 조비에게는 절망적일 정도로 재주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