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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마지막 선택지 (1)
여포는 신망을 잃었다.
그가 지금까지 군주로 군림할 수 있었던 이유,
천하무쌍을 자랑하며 전쟁터를 누볐기 때문이며, 패배의 두려움을 모르고 언제나 승리를 열망하던 광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전쟁을 추구하는 용맹.
배신, 패전을 겪고도 언제나 일어서는 불굴의 용기야말로 여포를 지탱해주는 지도자로서의 인망이었다.
그를 잊은 군주에게 기회는 없다.
부하들은 더 이상 그를 따르지 않으며, 식어버린 모닥불은 더 이상 주변을 밝히지 못한다. 주변을 밝히지 모닥불은 가치가 없으며, 누구도 찾아주지 않을 것이다.
“쳐라! 하비성의 성문이 열렸다!”
선봉장 하후돈이 소리쳤다.
분명 하비성의 성문이 열렸다. 이전과 우금이 서둘러 병력을 지휘하였고, 언제 성문이 다시 닫힐지 몰라 서둘러 성문을 점령했다.
“항복하겠소!”
여포의 부장이었던 후성과 위속이 두 손을 들며 항복을 선언하였다.
그들이 인솔하던 병사들도 모두 무장을 해제한 상태였으며, 순순히 하후돈의 지휘를 받았다.
성문과 성벽을 담당하고 있던 여포군 장수들이 잇따라 항복을 요청하면서 하비성을 점령하는 과정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여포는 어디 있는가!”
“산 채로 붙잡아 처소에 가둬놨습니다.”
하후돈으로선 지금 당장에 여포군의 모든 장수들을 도륙내버리고 싶었지만, 투항하는 자들에 한해서는 살려두라는 조조의 엄명이 있었기 때문에 그를 거스르지 않았다.
여포군은 장수는 물론이고, 병사들까지 모두 일당백(一當百)을 자랑하는 자들이다. 그들을 모두 흡수한다면 조조군으로선 더할 나위 없는 일이었고, 하북의 원소와 싸우는 데 있어 큰 공헌을 해줄 게 분명했다.
“숙부, 병사들을 나눠 하비성의 시가지를 점령하도록. 잔당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성벽과 성문을 모두 봉쇄하고, 여포의 신병을 최대한 빨리 확보해야 한다.”
“조카, 위험할지도 모르는데 불쑥 들어오면 어떡하자는 거냐고.”
“안 죽었잖아.”
조비가 뻔뻔스럽게 반응했다.
항복하였다고는 해도 하비성은 여포군의 본진이다.
언제 잔당들이 목숨을 노릴지 알 수 없는 판국에, 조조군의 후계자가 직접 선봉장의 뒤를 이어 하비성에 입성하였으니 어떻게 놀라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아직 조조는 안전을 이유로 하비성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조비는 그것을 무시하고는 하비성에 입성하여 주변을 점령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성벽 위의 모든 여포군 깃발들을 내리게 하고, 조정군이 차지하였음을 알리는 대장기를 꽂아라.”
“알겠습니다!”
우금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이 기쁜 소식을 서주 백성들에게 알려야 한다.
하비성 점령을 끝으로, 서주 전역은 완전히 조조군의 판도에 속하게 되었다.
서주 백성들은 분명 조조군의 승리를 기뻐하진 않겠지만, 여포군을 이겼다는 사실을 알림으로써 누가 서주의 승자가 되었는지를 보여줘야 했다.
“소인, 성렴이라 하옵니다.”
성렴이 예를 다하며 무릎을 꿇었다.
항장(降將)의 입장에서 볼 때, 자신의 생사여탈권을 가진 것은 조조와 그의 아들 조비였다.
조비는 아직 나이가 어리나 부도독의 관인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지금 이 하비성에 있는 모든 조조군 장수들 중에서 계급이 가장 높았다. 그렇기에 어린 소년에게 빌빌거리는 것도 당연했다.
“여포의 부인인 엄씨는 물론, 첩인 초선과 여식인 여령기까지 모두 가둬두었사옵니다.”
성렴이 말했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승자의 포식시간이 찾아온다.
모든 여인들은 전리품이 되며, 승자들을 즐겁게 해주는 재산이다. 심지어 승전국의 장수들끼리 여인들을 배분하는 과정에서 싸움이 간혹 벌어지기도 하니, 사내들에게 미녀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었다.
아직 나이는 어리지만 전쟁에 참전한 사내다.
그렇기에 성렴은 조비가 경국지색의 미녀로 유명한 초선에게 큰 관심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조비는 성렴의 그런 예상을 완전히 벗어났다.
“진궁이 있는 곳으로 안내하라.”
“진궁 말씀이십니까?”
“그래.”
과연!
연주 공방전에서 진궁의 묘책에 의해 아비가 지독한 꼴을 당하였으니, 응당 그 아들이 복수를 하려는 모양이구나!
성렴은 자신의 생각이 짧았음을 깨달았다.
조비는 조조의 아들이며, 조조군의 후계자.
아비의 복수를 대신한다면 그것이야말로 후계자로서의 그릇을 알리는 좋은 전공이 될 것이다.
하지만 성렴의 예상은 또 다시 빗나가고 말았다.
당연하다고 여긴 그 예상이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조비는 사로잡힌 진궁을 보고도 그 어떤 해를 끼치지 않은 것이다.
하비 관아로 진궁을 끌고 온 조비는 그의 포박을 풀도록 명령했다.
그리고는 상석에 올라 진궁을 내려다보았다. 주변에는 조조군 무관들이 조비를 지키고 있었다.
진궁이 비릿한 웃음을 토해내며 말했다.
“맹덕의 자식 놈인 모양이구나.”
조비는 기억나지 않겠지만, 진궁은 그의 어린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조조군을 배반하고 여포군으로 넘어가기 이전에는 조조군 제1의 모사로서 활약한 적이 있었고, 조조로부터 직접 아들 조비를 부탁한다는 말까지 들은 적이 있었다. 조조는 아들 조비를 맡길 정도로 진궁에게 큰 기대와 신의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조조가 탁고(託孤)를 부탁할 정도로 아꼈던 아들.
그 아들에게 잡히고 말았다.
“나를 어떻게 죽일 셈이냐. 끓는 기름에 넣어 죽일 거냐, 아니면 생살을 모두 으깨서 죽일 거냐. 피부 가죽을 모두 벗겨낼 거냐.”
“글쎄. 내 아비를 궁지에 몰고 죽기 직전까지 몰아넣은 영웅을, 그렇게 더러운 방법으로 죽이고 싶진 않다.”
넌 경외를 받을, 존경을 받을 가치가 있는 인간이다.
조비는 아비의 원수라는 것을 떠나서, 진궁이 조조를 죽음 직전까지 몰아넣은 위인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아비를 죽일 뻔했다?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다. 이 천하에 난세의 간웅을 죽이지 못해 안달난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일일이 조맹덕의 목숨을 노린 자들에게 원한을 품는다면, 아마 서주의 모든 강물이 막혀버릴 정도의 시체가 산더미를 이루게 될 것이다.
“조정을 다시 따를 생각은?”
“맹덕 놈에게 장악당한 조정! 그따위에 고개를 숙이고 싶진 않다!”
얼른 죽여라!
진궁의 호기로운 외침에 하후돈은 당장 죽여 버리겠다며 검을 치켜들었지만, 이내 조비에 의해 제지되었다.
“참 아쉽단 말이지.”
조비가 중얼거렸다.
진궁은 역시 죽이기에는 너무 아까운 인재였다.
조조가 서주 정벌을 나선 사이에 진류태수 장막과 함께 연주 호족들을 배신하게 하였으며, 불과 몇 개의 고을을 제외한 모든 성과 마을들이 여포의 손에 떨어지게 만들었다.
타고난 두뇌.
마음을 움직이는 처세술은 물론, 대세를 움직이는 대국적인 전략까지.
모든 것들이 조조군 모사들을 능가하고 있었다. 어째서 조조가 순욱과 곽가를 제치고 진궁을 제1모사로 정하였는지를 알 것 같았다.
“여포 열 놈보다도 진궁 하나가 낫다.”
여포는 백 번의 전투에서 승리할지는 몰라도, 가장 중요한 전쟁에서는 패배할 놈이다.
반면 진궁은 백 번의 전투를 적에게 양보하더라도, 그 끝에는 반드시 전쟁에서 필승을 쟁취할 인물이다.
“날 죽여라! 죽이란 말이다!”
“일단 내 선에서 결정할 문제는 아니다.”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자세로 진궁이 소리쳤지만, 조비는 그의 목숨을 빼앗지 않았다.
결자해지(結者解之).
결국 진궁을 살리는 것도 죽이는 것도.
모두 조조가 풀어야 할 숙제였기 때문이다.
조조는 진궁을 두고, 중모현에서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자 연주를 통일하도록 도와준 일등공신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진궁의 목숨을 빼앗는다? 조조에게 있어 진궁을 죽이는 것은 그에게 찾아온 난관이나 다름없었다.
조비는 자신의 아비가 가장 교분이 두터웠던 친구를 죽이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친구라 할지라도, 은인이라 할지라도.
배신자는 죽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를 죽이지 못하다면 조조는 천하를 차지할 그릇이 아닐 것이다.
* * *
“아버지!”
여령기가 소리치며 압송당하는 여포에게 달려갔다.
하지만 그 움직임은 병사들에게 가로막히고 말았다.
여령기가 위속과 송헌을 매몰차게 노려보았다.
아버지의 부하라고 해서, 전쟁을 함께 종군한 전우라고 믿었건만 결국 그들은 배반하여 조조에게 성문을 열었다.
여씨 일가를 배반하고 하비성을 적에게 넘겼다.
지금까지 용감하게 싸워 여포에게 승리를 가져다준 맹장들이었지만, 결국 자신이 불리해지자 성문을 열고 항복해버린 소인배였다.
“미안하다. 어쩔 수 없었다.”
적에게 항복한 장수들이 말했다.
딸처럼 여겼던 여령기를 배반한 것이 미안했는지, 그녀와 시선을 맞추길 꺼려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남은 사람이라도 목숨을 부지해야 한다.
끝까지 하비성에서 저항해봤자, 군량이 부족한 판국이라 얼마 버티지 못하고 함락 당했을 것이다. 항전을 이어나갔다면 야차와도 같은 조조군은 이 성에 있는 모든 생명들을 도륙 내어 버렸겠지.
살아남을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
그것은 항복밖에 없었다.
조조군은 항장에 한해서는 관대하였기에 항복을 요청한 장수들에 한해서는 모두 사면령이 내려졌다.
과거 동탁군에 몸을 담았던 장수들까지도 모두 조정의 이름으로 그 죄를 사하였으니, 죄인의 신분에서 벗어나 조정군의 장수가 될 수 있었다.
“승상, 줄이 억세니 조금만 풀어줄 순 없겠소?”
여포가 말했다.
그 말에 상석에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던 조조가 비웃음을 던졌다.
“어찌 너 같은 짐승을 봐줄 수 있겠느냐.”
조조에게 있어, 여포를 살려두고픈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결국에는 짐승.
은혜를 모르고 사람을 배반하며, 양아버지를 죽여 온 짐승 따위에게 인정을 베푼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었다. 하비성으로 들어온 유비 또한 여포를 죽여야 한다며 찬성에 표를 던졌다.
“승상께서 보병을 이끄시고, 내가 기병을 이끈다면 하북의 원소 따위는 단숨에 해치워버릴 수 있소! 어찌 그를 모른단 말이오!”
여포가 소리쳤다.
원소를 숙적으로 둬야할 조조로서는 매우 솔깃한 제안이었지만, 반면 언제 배신할지 모르는 여포에게 기병대를 맡긴다는 것에서 꺼림칙함을 느꼈다.
언제나 도망칠 궁리만 하고 살아남을 궁리만 한다.
전쟁에서 천하무쌍이라는 무명을 얻은 비장이 맡는지 궁금해질 정도로 삶에 대한 구차함이 강했다.
조조가 말했다.
“네가 여기서 얌전히 죽는다면 처자식들을 모두 살려줄 것이나, 끝까지 버틴다면 네 처자식들이 먼저 죽는 것을 보게 될 거다.”
선택해라.
매번 진궁이 건넨 선택지들을 거부하고, 안전하고 편한 것만을 추구하다가 끝내 멸망을 겪게 된 너에게 주는 마지막 선택지다.
조조가 건넨 잔인한 선택지.
그를 들은 여포는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자신을 조롱하는 조조를 노려보았다.
나에게 복수를 하기 위함이다.
조조는 자신의 목숨과 처자식들의 목숨.
이 두 가지의 추들을 저울에 각자 올리면서, 어느 쪽으로 저울이 기울어져야 할지를 묻고 있었다.
연주 공방전에서 겪었던 위기들.
그를 복수하기 위해서 조조가 여포에게 선택지를 건넸다.
여포는 신망을 잃었다.
그가 지금까지 군주로 군림할 수 있었던 이유,
천하무쌍을 자랑하며 전쟁터를 누볐기 때문이며, 패배의 두려움을 모르고 언제나 승리를 열망하던 광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전쟁을 추구하는 용맹.
배신, 패전을 겪고도 언제나 일어서는 불굴의 용기야말로 여포를 지탱해주는 지도자로서의 인망이었다.
그를 잊은 군주에게 기회는 없다.
부하들은 더 이상 그를 따르지 않으며, 식어버린 모닥불은 더 이상 주변을 밝히지 못한다. 주변을 밝히지 모닥불은 가치가 없으며, 누구도 찾아주지 않을 것이다.
“쳐라! 하비성의 성문이 열렸다!”
선봉장 하후돈이 소리쳤다.
분명 하비성의 성문이 열렸다. 이전과 우금이 서둘러 병력을 지휘하였고, 언제 성문이 다시 닫힐지 몰라 서둘러 성문을 점령했다.
“항복하겠소!”
여포의 부장이었던 후성과 위속이 두 손을 들며 항복을 선언하였다.
그들이 인솔하던 병사들도 모두 무장을 해제한 상태였으며, 순순히 하후돈의 지휘를 받았다.
성문과 성벽을 담당하고 있던 여포군 장수들이 잇따라 항복을 요청하면서 하비성을 점령하는 과정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여포는 어디 있는가!”
“산 채로 붙잡아 처소에 가둬놨습니다.”
하후돈으로선 지금 당장에 여포군의 모든 장수들을 도륙내버리고 싶었지만, 투항하는 자들에 한해서는 살려두라는 조조의 엄명이 있었기 때문에 그를 거스르지 않았다.
여포군은 장수는 물론이고, 병사들까지 모두 일당백(一當百)을 자랑하는 자들이다. 그들을 모두 흡수한다면 조조군으로선 더할 나위 없는 일이었고, 하북의 원소와 싸우는 데 있어 큰 공헌을 해줄 게 분명했다.
“숙부, 병사들을 나눠 하비성의 시가지를 점령하도록. 잔당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성벽과 성문을 모두 봉쇄하고, 여포의 신병을 최대한 빨리 확보해야 한다.”
“조카, 위험할지도 모르는데 불쑥 들어오면 어떡하자는 거냐고.”
“안 죽었잖아.”
조비가 뻔뻔스럽게 반응했다.
항복하였다고는 해도 하비성은 여포군의 본진이다.
언제 잔당들이 목숨을 노릴지 알 수 없는 판국에, 조조군의 후계자가 직접 선봉장의 뒤를 이어 하비성에 입성하였으니 어떻게 놀라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아직 조조는 안전을 이유로 하비성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조비는 그것을 무시하고는 하비성에 입성하여 주변을 점령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성벽 위의 모든 여포군 깃발들을 내리게 하고, 조정군이 차지하였음을 알리는 대장기를 꽂아라.”
“알겠습니다!”
우금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이 기쁜 소식을 서주 백성들에게 알려야 한다.
하비성 점령을 끝으로, 서주 전역은 완전히 조조군의 판도에 속하게 되었다.
서주 백성들은 분명 조조군의 승리를 기뻐하진 않겠지만, 여포군을 이겼다는 사실을 알림으로써 누가 서주의 승자가 되었는지를 보여줘야 했다.
“소인, 성렴이라 하옵니다.”
성렴이 예를 다하며 무릎을 꿇었다.
항장(降將)의 입장에서 볼 때, 자신의 생사여탈권을 가진 것은 조조와 그의 아들 조비였다.
조비는 아직 나이가 어리나 부도독의 관인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지금 이 하비성에 있는 모든 조조군 장수들 중에서 계급이 가장 높았다. 그렇기에 어린 소년에게 빌빌거리는 것도 당연했다.
“여포의 부인인 엄씨는 물론, 첩인 초선과 여식인 여령기까지 모두 가둬두었사옵니다.”
성렴이 말했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승자의 포식시간이 찾아온다.
모든 여인들은 전리품이 되며, 승자들을 즐겁게 해주는 재산이다. 심지어 승전국의 장수들끼리 여인들을 배분하는 과정에서 싸움이 간혹 벌어지기도 하니, 사내들에게 미녀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었다.
아직 나이는 어리지만 전쟁에 참전한 사내다.
그렇기에 성렴은 조비가 경국지색의 미녀로 유명한 초선에게 큰 관심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조비는 성렴의 그런 예상을 완전히 벗어났다.
“진궁이 있는 곳으로 안내하라.”
“진궁 말씀이십니까?”
“그래.”
과연!
연주 공방전에서 진궁의 묘책에 의해 아비가 지독한 꼴을 당하였으니, 응당 그 아들이 복수를 하려는 모양이구나!
성렴은 자신의 생각이 짧았음을 깨달았다.
조비는 조조의 아들이며, 조조군의 후계자.
아비의 복수를 대신한다면 그것이야말로 후계자로서의 그릇을 알리는 좋은 전공이 될 것이다.
하지만 성렴의 예상은 또 다시 빗나가고 말았다.
당연하다고 여긴 그 예상이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조비는 사로잡힌 진궁을 보고도 그 어떤 해를 끼치지 않은 것이다.
하비 관아로 진궁을 끌고 온 조비는 그의 포박을 풀도록 명령했다.
그리고는 상석에 올라 진궁을 내려다보았다. 주변에는 조조군 무관들이 조비를 지키고 있었다.
진궁이 비릿한 웃음을 토해내며 말했다.
“맹덕의 자식 놈인 모양이구나.”
조비는 기억나지 않겠지만, 진궁은 그의 어린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조조군을 배반하고 여포군으로 넘어가기 이전에는 조조군 제1의 모사로서 활약한 적이 있었고, 조조로부터 직접 아들 조비를 부탁한다는 말까지 들은 적이 있었다. 조조는 아들 조비를 맡길 정도로 진궁에게 큰 기대와 신의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조조가 탁고(託孤)를 부탁할 정도로 아꼈던 아들.
그 아들에게 잡히고 말았다.
“나를 어떻게 죽일 셈이냐. 끓는 기름에 넣어 죽일 거냐, 아니면 생살을 모두 으깨서 죽일 거냐. 피부 가죽을 모두 벗겨낼 거냐.”
“글쎄. 내 아비를 궁지에 몰고 죽기 직전까지 몰아넣은 영웅을, 그렇게 더러운 방법으로 죽이고 싶진 않다.”
넌 경외를 받을, 존경을 받을 가치가 있는 인간이다.
조비는 아비의 원수라는 것을 떠나서, 진궁이 조조를 죽음 직전까지 몰아넣은 위인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아비를 죽일 뻔했다?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다. 이 천하에 난세의 간웅을 죽이지 못해 안달난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일일이 조맹덕의 목숨을 노린 자들에게 원한을 품는다면, 아마 서주의 모든 강물이 막혀버릴 정도의 시체가 산더미를 이루게 될 것이다.
“조정을 다시 따를 생각은?”
“맹덕 놈에게 장악당한 조정! 그따위에 고개를 숙이고 싶진 않다!”
얼른 죽여라!
진궁의 호기로운 외침에 하후돈은 당장 죽여 버리겠다며 검을 치켜들었지만, 이내 조비에 의해 제지되었다.
“참 아쉽단 말이지.”
조비가 중얼거렸다.
진궁은 역시 죽이기에는 너무 아까운 인재였다.
조조가 서주 정벌을 나선 사이에 진류태수 장막과 함께 연주 호족들을 배신하게 하였으며, 불과 몇 개의 고을을 제외한 모든 성과 마을들이 여포의 손에 떨어지게 만들었다.
타고난 두뇌.
마음을 움직이는 처세술은 물론, 대세를 움직이는 대국적인 전략까지.
모든 것들이 조조군 모사들을 능가하고 있었다. 어째서 조조가 순욱과 곽가를 제치고 진궁을 제1모사로 정하였는지를 알 것 같았다.
“여포 열 놈보다도 진궁 하나가 낫다.”
여포는 백 번의 전투에서 승리할지는 몰라도, 가장 중요한 전쟁에서는 패배할 놈이다.
반면 진궁은 백 번의 전투를 적에게 양보하더라도, 그 끝에는 반드시 전쟁에서 필승을 쟁취할 인물이다.
“날 죽여라! 죽이란 말이다!”
“일단 내 선에서 결정할 문제는 아니다.”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자세로 진궁이 소리쳤지만, 조비는 그의 목숨을 빼앗지 않았다.
결자해지(結者解之).
결국 진궁을 살리는 것도 죽이는 것도.
모두 조조가 풀어야 할 숙제였기 때문이다.
조조는 진궁을 두고, 중모현에서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자 연주를 통일하도록 도와준 일등공신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진궁의 목숨을 빼앗는다? 조조에게 있어 진궁을 죽이는 것은 그에게 찾아온 난관이나 다름없었다.
조비는 자신의 아비가 가장 교분이 두터웠던 친구를 죽이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친구라 할지라도, 은인이라 할지라도.
배신자는 죽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를 죽이지 못하다면 조조는 천하를 차지할 그릇이 아닐 것이다.
* * *
“아버지!”
여령기가 소리치며 압송당하는 여포에게 달려갔다.
하지만 그 움직임은 병사들에게 가로막히고 말았다.
여령기가 위속과 송헌을 매몰차게 노려보았다.
아버지의 부하라고 해서, 전쟁을 함께 종군한 전우라고 믿었건만 결국 그들은 배반하여 조조에게 성문을 열었다.
여씨 일가를 배반하고 하비성을 적에게 넘겼다.
지금까지 용감하게 싸워 여포에게 승리를 가져다준 맹장들이었지만, 결국 자신이 불리해지자 성문을 열고 항복해버린 소인배였다.
“미안하다. 어쩔 수 없었다.”
적에게 항복한 장수들이 말했다.
딸처럼 여겼던 여령기를 배반한 것이 미안했는지, 그녀와 시선을 맞추길 꺼려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남은 사람이라도 목숨을 부지해야 한다.
끝까지 하비성에서 저항해봤자, 군량이 부족한 판국이라 얼마 버티지 못하고 함락 당했을 것이다. 항전을 이어나갔다면 야차와도 같은 조조군은 이 성에 있는 모든 생명들을 도륙 내어 버렸겠지.
살아남을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
그것은 항복밖에 없었다.
조조군은 항장에 한해서는 관대하였기에 항복을 요청한 장수들에 한해서는 모두 사면령이 내려졌다.
과거 동탁군에 몸을 담았던 장수들까지도 모두 조정의 이름으로 그 죄를 사하였으니, 죄인의 신분에서 벗어나 조정군의 장수가 될 수 있었다.
“승상, 줄이 억세니 조금만 풀어줄 순 없겠소?”
여포가 말했다.
그 말에 상석에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던 조조가 비웃음을 던졌다.
“어찌 너 같은 짐승을 봐줄 수 있겠느냐.”
조조에게 있어, 여포를 살려두고픈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결국에는 짐승.
은혜를 모르고 사람을 배반하며, 양아버지를 죽여 온 짐승 따위에게 인정을 베푼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었다. 하비성으로 들어온 유비 또한 여포를 죽여야 한다며 찬성에 표를 던졌다.
“승상께서 보병을 이끄시고, 내가 기병을 이끈다면 하북의 원소 따위는 단숨에 해치워버릴 수 있소! 어찌 그를 모른단 말이오!”
여포가 소리쳤다.
원소를 숙적으로 둬야할 조조로서는 매우 솔깃한 제안이었지만, 반면 언제 배신할지 모르는 여포에게 기병대를 맡긴다는 것에서 꺼림칙함을 느꼈다.
언제나 도망칠 궁리만 하고 살아남을 궁리만 한다.
전쟁에서 천하무쌍이라는 무명을 얻은 비장이 맡는지 궁금해질 정도로 삶에 대한 구차함이 강했다.
조조가 말했다.
“네가 여기서 얌전히 죽는다면 처자식들을 모두 살려줄 것이나, 끝까지 버틴다면 네 처자식들이 먼저 죽는 것을 보게 될 거다.”
선택해라.
매번 진궁이 건넨 선택지들을 거부하고, 안전하고 편한 것만을 추구하다가 끝내 멸망을 겪게 된 너에게 주는 마지막 선택지다.
조조가 건넨 잔인한 선택지.
그를 들은 여포는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자신을 조롱하는 조조를 노려보았다.
나에게 복수를 하기 위함이다.
조조는 자신의 목숨과 처자식들의 목숨.
이 두 가지의 추들을 저울에 각자 올리면서, 어느 쪽으로 저울이 기울어져야 할지를 묻고 있었다.
연주 공방전에서 겪었던 위기들.
그를 복수하기 위해서 조조가 여포에게 선택지를 건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