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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가짜 황제 (4)



조정으로부터 평동장군, 평도후의 작위를 받은 여포는 공식적으로 서주목이 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
도겸의 뒤를 이어 선정을 펼친 유비를 쫓아낼 때만 하더라도 서주인들의 민심이 대단히 흉흉했지만, 조정에서 정식으로 서주목에 임명되었으니 더 이상 두려울 것 없었다.
과거 조조와 악연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것도 옛말이다.
난세에 영원한 아군도, 영원한 적군도 없다.
서주목이 된 여포는 원술을 멀리하고, 조조를 가까이하고 있었으므로 조조군이 식량 공급을 위해 서주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였다.

진궁이 말했다.
“장군! 조조는 속이 검고 교활한 자입니다! 필시 아군에 해가 될 것이니 그들을 내치십시오!”
“또 그 소리인가?”
여포는 사사건건 자신을 훼방 놓는 진궁을 몹시 불쾌하게 여겼다.
물론 복양성을 비롯한 연주 전선에서 조조를 상대로 귀신같은 책략으로 몰아넣은 전적이 있다고는 하지만, 매번 자신의 머리 꼭대기에 있는 것처럼 진궁이 고압적인 모습을 보이니 여포로서는 그저 불쾌한 잔소리꾼으로 보이는 것이다.
“맹덕은 식량이 필요하고, 우리는 벼슬을 받았으니 이걸로 끝난 거래가 아닌가.”
여포가 말했다.
승상 조조가 직접 황제에게 상주하여 벼슬을 내려주었기에 여포는 제법 조조에게 호의를 보내고 있었다.
과거에 싸웠다고는 하지만, 서주에 오고 나서부터는 그저 옛일이 되어버렸다.
천하통일이라든지 조조 토벌이라는 거대한 야망이 없는 여포로서는 지금처럼 서주의 왕처럼 군림하면서 안식을 취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치열하게 싸워온 나날 때문일까.
동탁군에서 활약한 천하무쌍의 무장은 서주의 평화에 빠져서 전쟁을 멀리하게 되었다.
물론 그의 무위와 팔건장들의 전력은 막강했지만, 구태여 다른 세력과 전쟁을 치를 이유는 없었다.
수개월 전에 원술군의 대대적인 침공을 막아낸 이래로 조조군과도 싸웠다. 이제는 조조군과 동맹하여 휴식기에 접어들었으니, 군마를 쉬게 하고 병사들을 조련하기 위해서라도 전쟁을 수행할 순 없었다.
“돈도 벌고, 우리로서는 나쁜 일도 아니지 않나.”
여포가 말했다.
군량 공급을 위해서 서주에 온 조비는 조홍에게 빌린 자금들을 서주 전역에 풀고 있었으므로, 고스란히 서주의 자금력이 되었다.
이제 백성들에게서 세금을 거두면 막대한 재산을 벌게 될 것이고, 지금으로서도 국고에 가득 재산들이 쌓이고 있었으므로 여포의 기분이 썩 좋았다.
어차피 서주에 식량은 많고, 매번 풍족하였으므로 조조군에게 인심을 베풀어주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니라고 여겼다.
“분명 이유가 있습니다! 절대로 조씨 일가를 믿어선 안 됩니다!”
진궁이 외쳤다.
그는 항상 조조를 경계하고, 그의 아들인 조비 또한 심상치 않은 인물이라 예견하였으므로 경계심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래서 문원을 보냈지 않은가.”
고작해야 관례도 치르지 않은 꼬맹이.
그 꼬맹이를 경계하기 위해서 장료를 보낸 진궁의 행동에 여포는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그따위 꼬맹이가 이끄는 3천 군세. 지금 당장 하비성을 벗어나 진격하는 순간 모두 쓸어버릴 수 있는 병력이다.
고작 그런 병력에 놀라 장료 같은 걸출한 장수를 보냈다는 것은 여러 모로 모양이 빠지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서주성은 항상 1개월 동안 넉넉하게 병력을 먹일 군량이 있으니 진궁은 나서지 말라.”
내가 바보로 보이는가?
여포가 짐짓 진궁을 꾸짖는 어조로 말했다.
전쟁에서 군량이 중요하다는 것은 여포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비록 병주 변방에서 태어나 군략을 전문적으로는 익히지 못했지만, 오랫동안 전쟁을 떠돌면서 기본적인 군략은 알고 있었다.
전쟁을 대비하여 항상 서주성과 여러 성채들에게 군량을 저장하라는 명령을 내려두었다.
저장한 군량들을 제외한 곡량만을 조조군에게 넘겨라.
조조군이 군량을 무기로 하여 언젠가 서주를 공격할지 모른다고 우려하여 내린 결정이었다.


* * *


“그런데 서주 지도는 어찌하여?”
서황이 물었다.
조비가 서주 지형을 상세하게 기록한 지도를 요구하자, 서황은 어렵사리 서주의 지형도를 구해왔다.
지도는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소였기에 제법 큰 노력을 다 해서야 구할 수 있었다.
“동해군(東海郡), 낭야국(琅邪國)의 곡량들을 모두 쓸어 담고, 하비국(下邳國)과 광릉군(廣陵郡)에서는 손을 떼라.”
“모두 사들이는 것이 아닙니까?”
“누구 좋으라고 군자금을 펑펑 쓰겠나.”
조조군이 서주 전역을 돌면서 군량을 쓸어 담은 탓에, 서주에서는 곡량의 가격이 천정부지 수준으로 오르게 되었다.
하지만 서주의 호족들은 당장에 중원의 재화들을 가득 벌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하였기에 오히려 조조군에게 자신의 드넓은 정원에서 재배되는 곡량들을 모두 팔았다.
서주의 촌놈 호족이 중원의 부유한 재산들을 거머쥘 기회는 많지 않았다. 그래서 여포가 따로 명령하여 저장하라던 군량까지도 모두 털어서 조조군에 팔 것을 지시했다.
하비국과 광릉군의 호족들은 어째서 자기 지역의 곡량들을 사들이지 않냐 반발했지만, 조비는 이미 공급을 모두 마쳤으니 필요 없다는 답변만을 내놓을 뿐이었다.
“정석대로 병장기를 들고 싸우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다. 상대가 우둔하고 용렬하다면 머리를 사용해서 싸우고, 상대가 뛰어난 혜안을 가진 자라면 무력으로 지배해야 한다. 적이 능숙하지 않은 방면을 선택하여 전쟁에서 승리한다. 그게 전략이다.”
우리에겐 명분이 있다.
진궁이 제아무리 의심을 한다고 한들, 조조군은 원술의 수춘성을 공략한다는 명분이 있으니 대규모의 군량 사들이기는 나름의 정당성을 가지고 있었다.
여포는 조조군이 장기간 공성전을 위해서 군량을 사들이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것은 절반만 맞는 경우였다. 조비는 수춘성은 물론, 서주의 여포를 멸망시킬 수 있는 방법을 궁리했다.

조조군은 하남을 주름잡고 있는 세력이다.
따라서 수많은 세력을 동시에 상대해야 하는 형편이었고, 하나의 적을 상대하기 위해서 전력을 기울일 수 없었다. 장기간 공성전은 터무니없는 노력과 시간을 잡아먹으니, 공성전을 치르다가는 자칫 타 세력으로부터 공격을 받게 될 수도 있었다.
“원소가 공손찬을 순식간에 점령하고 하북을 통일할 거다. 그리고 대군벌 원소의 시선은 하남으로 향하겠지. 여남원씨의 가주는 절대로 호락호락한 자가 아니니, 서둘러 중원을 모두 평정하고 강성한 전력을 손에 넣어야 한다.”
이건 시간 싸움이다.
조조군에게 있어 진정한 적은 원술도, 여포도 아니다.

원소.
하북의 패자를 자청하는 원소가 대군을 동원하여 중원을 침공하려 들 것이다. 그 전에 전력을 손에 넣지 못한다면 원소군에 패배하는 수밖에 없었다.
조비는 자신이 나서지 않더라도 승상 조조라면 분명 원소에게서 이길 수 있을 것이라는 미래를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선택이었다.
최대한의 노력을 다한다.
원소를 가장 완벽하게 쓰러트리는 방법. 조조군이 크게 열세였던 관도대전을 보다 유리하고 수월한 방면에서 진행될 수 있도록 힘을 보태야 했다.

“소인, 진규라 하옵니다.”
초로의 노인이 조비의 앞에 엎드렸다.
진규는 오래전부터 서주의 패상(沛相)으로 일하였으며, 또한 명문가의 자손이라 원술과도 친분이 있었다. 도겸과 유비, 그리고 여포로 서주의 주인이 바뀌면서 모두 섬겼다.
진규는 이제 서주의 주인이 바뀔 것이라 예견하고는 옛적부터 조조를 따르며 내응을 약속하였다.
진규의 아들인 진등은 조조에 의해 광릉태수가 되었고, 여포가 서주에서 무겁게 세역을 거두었으므로 여러 불만이 많았다.
진규와 진등 부자는 조조의 아들인 조비가 굳이 서주로 와서 군량들을 모두 사들이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왜 조비가 광릉군과 하비국에서는 곡량을 사들이지 않는지 또한 알고 있었다.
“광릉군은 호응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조정군이 서주로 오게 된다면 저와 제 아들이 광릉군에서 저항할 겁니다.”
어차피 광릉군은 여포군으로부터 완전히 돌아선 지역이다.
전쟁이 벌어지는 순간 가장 먼저 여포군을 배신하겠지.
어차피 여포에게서 등을 돌린 곳이었으니, 그 곳의 곡량들을 사들일 필요는 없었다.
한편 이익을 거두지 못한 광릉군의 호족들에 그에게 불만이 깊다고 생각하게 함으로써, 여포를 속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기도 하였다.

마지막으로 남은 하비국.
조비가 동해국과 낭야국의 곡량들을 모두 사들였으니, 결국 여포는 자신이 다스리는 하비국에서 저장된 곡량만 남은 격이 되어버렸다.
자신에게 드리워진 위협조차 모르고 당장에 큰 거금을 벌었다며 좋아하고 있었으니, 진규가 보기엔 여포는 그저 용렬한 무장에 지나지 않았다.
지방관이 되기엔 너무도 부족한 그릇.
전쟁에서는 뛰어난 장수일지도 모르나, 한 세력을 맡은 군주라 하기에는 적의 속임수를 꿰뚫어 보는 혜안이 없었다.
진궁이 조비를 내치라고 간언하였지만, 여포는 듣지 않았다.
조정에서 받은 벼슬과 제후직, 그리고 당장 눈앞에 보이는 황금.
그것만이 눈에 보일 뿐이다.
“모두 끝났다면 수춘성으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