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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수호는 내력을 끌어올려 놈의 어깻죽지에 날카로운 조각을 박아 넣었다.
“크아아악!”
어찌나 깊게 들어갔는지 놈은 손가락에 끼워둔 카람빗까지 떨어뜨렸다.
그런데도 검은 재킷은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놈은 상체를 높이 세우고는 체중을 실어 오른손에 든 카람빗으로 수호의 얼굴을 내리찍었다.
“……!”
카람빗의 휘어진 날이 눈앞에서 멈춰 있다.
마지막 순간, 수호가 놈의 팔목을 붙잡은 것.
“어쩌냐, 결정적인 기회를 놓치게 돼서.”
수호는 검은 재킷의 눈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너만큼 좋은 스킬은 아니지만 이럴 땐 쓸 만하단 말이지?”
수호는 칼날바람을 사용했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젠장.”
에너지가 없다.
아까 쓴 걸로 에너지가 바닥을 보인 것이다.
오늘도 평소처럼 에너지를 싹 다 내공으로 전환했고, 그런 뒤에 약속 장소로 나왔다.
평상시 회복량을 생각해 보면 스킬 세 번도 많이 쓴 거였다.
검은 재킷에게는 호재.
아직 죽일 기회는 남아 있다.
놈의 팔뚝에 힘이 들어갔다.
그렇게 둘 사이에 팽팽한 힘겨루기가 시작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서로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날 끝은 점점 수호 쪽으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때.
“수호야!”
시끄러운 소리에 무슨 일이 났나 해서 와봤던 화영이 두 사람을 발견한 것.
그런데 수호는 위기 상황.
웬 놈이 그의 위에 올라타 칼을 내리꽂으려 하고 있었다.
이를 본 그녀의 얼굴에 노기가 서렸다.
“너!”
화영이 손짓하자 검은 재킷이 그 자세 그대로 위로 들려졌다.
“저리 꺼져!”
투명 인간에게 업어치기를 당하기라도 한 듯, 검은 재킷은 강한 힘으로 메다꽂아졌다.
그리고 다시 손짓.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놈은 강제로 일으켜 세워졌다.
화영이 뿌리치듯 손을 내젓자 그는 어마어마한 속도로 튕겨져 나갔다.
와장창창!
검은 재킷은 벽을 줄줄이 깨부수며 날아가다가 결국 바닥에 처박혔다.
“괜찮아, 수호야?”
화영이 다가와 걱정스레 묻는다.
수호는 툭툭 털고 일어났다.
“어, 난 멀쩡해. 그 자식은?”
“멀쩡하다고?”
등에 칼이 박히고 깨진 거울 위에서 뒹구느라 티셔츠가 검붉게 물든 채다.
그 외에도 카람빗에 여기저기가 베여서 당장이라도 치료가 필요해 보였다.
“아, 그래. 멀쩡하지는 않지. 근데 그놈 잡아야 해. 어디 있어?”
화영이 깨진 거울벽 너머를 바라봤다.
수호가 벽을 넘어 다가가자 쓰러져 있던 검은 재킷이 벌떡 일어났다.
교차하는 둘의 시선.
놈은 1초쯤 생각하더니 등을 보이고 도망쳤다.
“어딜!”
수호 또한 몸을 날려 놈을 쫓아갔다.
이제부터는 추격전이다.
부서진 미로는 더 이상 미로일 수 없었다.
쉽게 출구를 찾아 나왔고 다음으로 이어지는 공간은 어두운 방이었다.
움직임이 감지되자 벽과 천장에 설치된 LED 조명이 켜졌다.
수백 개는 될 듯한 조명이 빛을 발하기 시작하고, 바닥에 깔린 거울이 이를 반사한다.
마치 우주 한복판에 떨어진 듯한 느낌을 주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수호는 여기엔 전혀 관심도 없이 멀어져 가는 놈의 뒷모습만 쏘아봤다.
“젠장!”
어째 거리가 더 벌어지기만 한다.
따라잡기는 늦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속도를 늦추지 않고 남은 방을 다 지나쳐 갔다.
‘어디지?’
밖으로 뛰쳐나와 사방을 둘러봤다.
검은 재킷은 보이지 않았다.
“방, 방금 그거 봤어?”
“그림자 같은 게 지나갔는데, 스킬 쓴 거 맞지?”
“각, 각성자?”
근처 행인들은 놀란 얼굴로 수군거리다가, 어트랙션에서 만신창이가 된 소년이 나오자 한 번 더 놀랐다.
“학생, 괜찮아요?”
30대쯤 돼 보이는 남자가 걱정스러운 듯 물어왔다.
“가까이 오지 마!”
그도 암살자일지 모른다.
수호가 소리치며 접근을 허용하지 않자 머쓱해진 남자는 다시 자기 갈 길을 갔다.
“못 잡았어?”
뒤에서 들리는 화영의 목소리.
수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라졌어.”
“몸은 어때, 많이 다친 건 아니지?”
그녀는 수호 곁으로 와서 상처를 살폈다.
“버틸 만은 해.”
“정말? 피가 계속 나는데…….”
“나 각성자야. 이 정도는 끄떡없어. 잠깐, 너도 각성자잖아?”
“나는 별로 안 다쳐 봐서.”
“음?”
“내가 근접전을 할 일이 잘 없거든. 스킬이 원거리에 특화된 편이라.”
“그건 그냥 네가 엄청 세서 그런 거 같은데?”
수호가 고전했던 검은 재킷을 손짓 한 번으로 날려버린 화영이다.
그녀는 쑥스러워하며 손을 내저었다.
“에이, 그런 거 아니야.”
“음, 아닌 게 아닌 거 같지만 그런 걸로 하자.”
“그런데 어떻게 된 거야? 그 남자는 왜 널 공격한 거고?”
“붙잡아서 그걸 알아내려고 했지. 안타깝게도 놓쳤지만. 그래도 짐작 가는 건 있어.”
“어떤?”
수호는 대답하려다 말고 뒤를 돌아봤다.
무전기를 든 경찰이 이쪽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이봐, 거기 둘!”
아마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것 같았다.
“엎친 데 덮친 격이군.”
가뜩이나 짜증이 솟구치는데 경찰까지 발목을 잡으니 말이 곱게 나올 리 없었다.
“뭐요?”
“칼! 용의자가 칼을 들고 있다! 야, 그거 내려놔!”
경찰이 말하는 칼이란 검은 재킷의 카람빗을 말하는 거였다.
쓸 데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 들고 나온 건데, 이게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경찰은 허리춤에서 리볼버를 꺼내 수호를 겨눴다.
“칼 안 내려놔? 그거 계속 들고 있으면 쏜다? 너 총 안 맞아 봤지?”
수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은 없는데요.”
온갖 종류의 무기에 찔리고 베여 보고, 각종 암기를 몸으로 받아낸 적도 있는 그였지만 총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맞으면 네 몸에 구멍 뚫리는 거야. 바람구멍 나는 거라고. 그러니까 좋은 말할 때 내려놔!”
“그러죠.”
수호는 카람빗을 바닥에 던졌다.
경찰은 그를 놀이공원 내에 설치된 응급의료실로 데리고 갔다.
간단한 처치를 마치자 경찰이 와서 이것저것을 캐물어 댔다.
“도대체 안에서 뭔 일이 있었길래 칼부림까지 하면서 싸운 거야?”
“그건 다짜고짜 와서 칼 꽂고 사라진 놈한테 물어보세요. 왜 그런 건지 나도 궁금하니까.”
“걔만 칼 쓴 게 아닌 거 같은데? 너도 들고 있었잖아. 피도 묻어 있었고. 같이 찌른 거 아냐?”
“글쎄, 그건 그 사람이 떨어뜨리고 간 거라니까요.”
“그럼 그대로 두지, 왜 그걸 들고 밖에까지 쫓아갔어?”
“말했잖아요. 그 인간이 칼 하나 더 들고 있었다고. 내 몸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져간 거죠.”
“흐음, 무슨 야인시대야? 요즘 누가 쌍칼을 들고 다녀? 솔직히 말해 봐, 그 사람이 여자 친구한테 집적거리고 뭐 그랬던 거 아냐? 그래서 홧김에 칼을 꺼낸 거고?”
경찰은 옆에 앉은 화영을 보며 되도 않는 추측을 했다.
“여자 친구 아니구요. 시비가 붙은 게 아니라 가만히 있는데 그쪽이 먼저 와서 칼로 쑤신 거라니까요.”
“아, 그래그래. 일단 부모님한테 연락부터 하자. 미성년자가 말이야, 겁도 없이 칼을 품고 다니고. 너 그러다 진짜 큰일 난다?”
“…….”
수호는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다른 수가 없음을 깨닫고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뚜우- 뚜우-.
뚝.
통화연결음이 끊겼다.
수호가 입을 열었다.
“연락 달라고 하셨죠? 그 조건, 지금도 유효한가요?”

* * *

전화 한 통의 효과는 상당했다.
파출소로 연행된 지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파출소장이 튀어나왔다.
“야, 방금 들어온 학생 어딨어?”
순경이 맞은편에 앉은 수호를 가리켰다.
“여기요.”
“어, 있네.”
파출소장이 수호에게 물었다.
“진수호 학생 맞아요?”
“여기 그렇게 쓰여 있네요.”
수호가 조서를 들고 흔들었다.
파출소장이 가까이 와서 손을 내밀었다.
수호는 별생각 없이 조서를 건넸다.
“맞군.”
그는 이름란을 확인하고는 조서를 북북 찢어버렸다.
순경이 놀라서 물었다.
“뭐, 뭐 하시는 거예요? 조서는 왜 찢는 거예요?”
“보내줘.”
“예?”
“각성자라잖아. 방금 연락받았어.”
“각성자요?”
순경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그래도 제대로 된 절차는 거쳐야죠. 그냥 보내는 게 어디 있습니까?”
“몰라, 위에서 보내라는데 내가 뭐라고 하냐. 어차피 우리 관할도 아니고. 가라고 해.”
“아, 예…….”
순경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상관의 명령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그가 수호에게 말했다.
“각성자였으면 미리 말해주지 그랬어. 아까 일은 좀 미안하네.”
“아, 그래요?”
수호는 애매한 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거 가져가도 되죠?”
그는 지퍼백에 든 피 묻은 카람빗을 가리켰다.
순경이 옆을 보자 파출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 가져가도 좋아.”
수호는 지퍼백을 들고 주변을 둘러봤다.
파출소 안쪽, 의자에 멍하니 앉아 있는 화영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수호가 그녀에게로 가서 말했다.
“가자.”
“응?”
“가도 좋대.”
“정말?”
“봐, 저기 손도 흔들어 주잖아.”
수호가 손을 들자 순경이 어색한 표정으로 받아줬다.
“정말이네?”
“그러니까 가자. 죄지은 건 없지만 역시 오래 있을 데는 아닌 거 같아.”
파출소를 나오자 밖에서 김삼환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시 못 볼 거라 생각했는데 며칠 만에 또 보게 되네요?”
김삼환이 말을 걸어오며 씩 웃었다.
수호는 머리를 긁적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게요…….”
무안해질 수밖에 없었다.
SSIS의 제안을 딱 잘라 거절했던 게 겨우 이틀 전.
그러다 아쉬워지니 뿌리친 손을 다시 잡았고.
이거 모양새가 보통 빠지는 게 아니었다.
“…….”
스스로 생각해도 우습게 돼서 할 말이 없었다.
한편, 김삼환은 옆을 보더니 눈을 빛냈다.
“혹시 송화영 양 아니신가요?”
“네? 어떻게 아세요, 저를?”
“이 바닥에서 먹고 살려면 그 정도는 숙지하고 있어야죠. 1학년 최대 기대주이신데. 그런데 진수호 군과는 어떻게 아는 사이에요?”
“그냥, 친구… 죠.”
“아, 그래요.”
화영은 짤막하게 대답했다.
김삼환도 더 관심을 보이지는 않았다.
“여기 계속 있긴 그렇고. 일단 타세요, 두 분.”
그가 자기 차를 끌고 왔다.
두 사람은 뒷좌석에 탔다.
지하철역 앞.
김삼환이 여기 내려주겠다고 하자 화영이 수호와 눈을 맞췄다.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 건진 모르겠지만, 잘 해결됐으면 좋겠어. 혹시 내가 도울 일이 있다면 언제든 말해줬음 하고. 알았지?”
“고마워. 오늘 이렇게 헤어지기가 좀 미안하긴 한데…….”
“어쩔 수 없지, 일이 이렇게 된 걸. 대신, 다 끝나면 꼭 알려줘야 해?”
수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 약속!”
화영이 손가락을 내밀었다.
수호는 생전 처음 해보는 거라 약간 어리둥절해 하며 받아줬다.
그녀가 차에서 내렸다.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던 김삼환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보통 친한 사이 같지가 않은데요?”
“그런가? 그래 보여요?”
“매우! 근데 우리 어렸을 때와는 또 다르니까요. 요즘 친구들은 이게 보통일 수도?”
‘그건 아닌 거 같지만…….’
이 얘기는 더 하고 싶지 않았다.
수호가 스리슬쩍 화제를 돌렸다.
“지금 어디로 가는 건가요?”
“일단 본부로 가야죠. 거기가 안전하니까. 그런데, 우리가 모르는 데서 대체 무슨 일을 하고 있었던 겁니까?”
“딱히 뭘 하고 그러지는 않았는데요.”
“아무것도 안 했는데 왜 암살자가 붙어요?”
“그게 그러니까…….”
수호는 던전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말하려고 했다.
고작 교실에서 벌어진 사건 때문에 솔저까지 대동하는 형제들이다.
남의 손 빌리는 데에 전혀 거리낌이 없으니, 암살자라고 고용 못 할까?
이번 일의 배후 역시 윤상현, 윤상호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제가 인간관계가 별로 좋지가 않아서요.”
운을 떼면서 고개를 돌리는데 차창 너머로 검은색 SUV가 보였다.
수호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SUV가 차선을 넘어 이쪽으로 돌진해 오고 있었다.
“과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