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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섭섭함이 가득 담긴 말투.
수호는 살짝 당황하며 손을 내저었다.
“어… 아니.”
그도 바보가 아닌 이상, 화영이 대놓고 보이는 호감을 눈치 못 챌 리는 없었다.
그런데 쭉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게 하나 있었다.
“그건 아닌데 이해가 안 되는 건, 네가 너무 잘 대해 주잖아. 오늘 이것도 나로선 좀 얼떨떨하고.”
“그런 말을 하는 건… 내가 랭크가 높아서? 그래서 이해가 안 된다는 거야? 랭크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던 게 너잖아.”
“나는 그렇지.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아니니까.”
“나도 랭크 따위는 상관없어! 누군가가 괜히 신경이 쓰이고 같이 있고 싶고, 그러는 데 이유가 있어? 왜 이유를 찾으려는 거야?”
화영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수호는 말문이 막혔다.
좋아한다는 말만 안 했지, 이 정도면 거의 노골적인 고백이다.
그건 알겠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은 진수호가 된 서문환.
그는 자기가 천 년 뒤 미래, 그것도 타국의 까마득한 어린애 몸으로 들어온 것 치고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적응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물론 그건 진수호의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진수호의 기억과 서문환의 자아.
이 둘은 상호 보완 관계다.
자아를 잃은 진수호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각자가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고 있었다.
이방인에 불과한 서문환이 대한민국의 고등학생으로 살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진수호의 기억 덕분이었다.
또한 혈마제의 무공, 그리고 그의 판단력과 과단성 덕분에.
과거 D반의 왕따였던 진수호는 현재 C반의 에이스, 그리고 SSIS로부터 영입 제의까지 받는 수준이 됐다.
하지만 항상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건 아니었고 지금이 그런 때였다.
진수호는 숙맥 스타일이라고 할 순 없지만 워낙 어려서 연애 경험이 없었다.
서문환은… 마도의 지존으로서 황제와도 같은 삶을 살았다.
마제가 원한다는데 어떤 마도의 여인이 그를 거부할까?
힘과 권력을 다 가졌던 그에게 현대의 자유연애란 생소한 개념이었다.
결론적으로…….
수호는 환생 이후 가장 큰 어려움에 봉착했다.
‘뭐라고 해야 하지? 우리 그냥 친구로 지내? 나 좋아하는 애가 따로 있어?’
당연히 화영이 싫은 건 아니다.
아니지만, 누군가가 갑작스레 다가오면 한 발짝 물러나고 밀어내게 되는 것이 사람 심리다.
수호가 아이스크림을 든 채 한참이나 스턴 걸려 있으니 화영이 웃기 시작했다.
“푸훗, 다 녹잖아. 빨리 먹어.”
“어, 그, 그래.”
“뭘 그렇게 당황해하고 그래. 그러고 있으니까 화를 내려다가도 무슨 말을 못 하겠다.”
“아니. 음, 갑자기 너무 훅 들어와서 생각이 정지됐거든?”
“내가 좀 흥분했나 봐. 사실 무슨 말인지 알 거 같긴 해. 너무 갑작스럽다 이거지?”
“그, 그렇지?”
“잠깐만.”
화영이 수호의 볼에 손을 댔다.
엄지로 입가에 묻은 아이스크림을 닦는가 싶더니, 털어내지 않고 거리낌 없이 자기 입술로 가져갔다.
쪽.
“어…….”
자꾸 사람을 당황시키면서 당황하지 말라고 하는 건 뭔지 모르겠다.
화영이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실 이유는 있어. 이유가 뭔지는 잘 생각해 보면 알 텐데. 우리 처음 만난 날 기억 안 나?”
입학시험일.
그때 화영을 알게 됐다.
당시 기억을 되짚어 봤다.
강당에 모여 멀뚱거리는 응시생들.
그때의 이미지가 스쳐 지나갔다.
몇 달 전 일이라 선명하진 않았다.
그 다음은 화영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장면.
‘먼저 말을 건 사람이 누구였지? 진수호였나? 아니었나?’
‘특별한 건 없는데?’
영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화영이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이 얘기는 그만하자. 내가 쓸데없이 진지해졌네.”
“어…….”
좀 더 생각해 봤지만 역시 그녀의 말뜻은 알 수가 없었다.
“기왕 놀러 온 거, 이러지 말고 재밌게 놀다 가야지. 가자!”
그녀는 짐짓 쾌활한 척, 목소리 톤을 높이며 수호를 잡아끌었다.
“우리 어디로 갈까?”
“저긴 어때?”
수호는 근처에 있는 어트랙션을 가리켰다.
그건 지금까지 탄 놀이기구와는 다른 종류인, 기구라기보다는 시설에 더 가까운 건물이었다.
“거울의 집?”
“롤러코스터도 시시하다며. 차라리 저런 게 낫지 않을까?”
“으음, 그건 그럴지도? 가보자 그럼.”
여기도 대기 인원이 꽤 있었다.
두 사람은 줄이 없어질 때까지 기다린 뒤, 검표원에게 이용권을 보여주고 안으로 들어갔다.
거울의 집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처음부터 벽 대신 거울로 둘러싸인 통로가 나타났다.
여기를 지나자 다음은 거울 미로였다.
안내원이 입구에 서서 영업용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이곳은 신비로운 거울 미로입니다! 한 분씩 입장해 주세요.”
수호가 안내원에게 물었다.
“저희는 같이 왔는데, 그래도 따로 가야 하나요?”
“아, 물론 두 분이 들어가셔도 되죠. 하지만 미로는 혼자 힘으로 탈출하시는 게 재밌지 않을까요?”
“그래요? 그럼 너 먼저 갈래?”
화영에게 말하자 그녀는 그러겠다고 했다.
3분쯤 지나 수호도 뒤따라 들어갔다.
어지럽게 갈라진 통로 몇 개를 지나자 진짜 미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곳도 사방이 거울이라 마치 수호가 분신술을 쓴 것처럼 보였다.
“이런 게 재밌는 건가? 취향 참 독특하네.”
수호는 무슨 기관진식 안에 들어온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GPS를 통해 실시간 위치파악이 되고, 길을 잃으면 지도앱을 켜면 그만인 시대라 이런 걸 색다른 체험으로 여기는 걸까?
하여간 현대인들이란 이해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며 나가는 길을 찾았다.
간단한 미로의 일반적인 파해법은 좌수 혹은 우수법이다.
한쪽 손을 벽에 붙이고 계속 걷다 보면 결국 출구가 나온다.
느리지만 최소한 헤매지는 않을 수 있는 방법이다.
수호는 우수법으로 나가기로 하고, 오른손으로 벽을 짚은 채 발걸음을 옮겼다.
이 방법의 문제점이라면 역시나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것.
한참 지나도 미로의 끝은 보이지 않았다.
살짝 후회가 되기 시작했다.
‘그냥 감을 믿을 걸 그랬나?’
그래도 투자한 시간이 아까워서 가던 대로 가기로 했다.
모퉁이를 돌자 긴 통로가 펼쳐졌다.
맞은편 끝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멀리서 봐도 장신임을 알 수 있는 상당한 체구.
그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수호는 별생각 없이 걸어갔다.
남자와 가까워지자 수호가 한 마디를 툭 던졌다.
“이쪽으로 가면 출구 안 나와요.”
괜히 시간 낭비하지 말라고 말해준 건데, 남자는 들은 체도 않고 계속 다가왔다.
검은 재킷을 입은 남자.
선글라스에 가려진 그의 얼굴을 본 수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 아까도 보지 않았어요? 롤러코스터 같이 탔던 거 같은데.”
수호가 걸음을 멈췄다.
뭔가 이상했다.
롤러코스터 근처의 어트랙션이 몇 개 안 되기 때문에 다음 행선지가 겹치는 건 있을 수 있는 일이긴 하다.
하지만 화영과 대화하느라 꽤 시간을 보냈는데?
이런 절묘한 타이밍에 마주친 것도 그렇고, 남자가 엄청 수상해 보이는 것도 한몫을 했다.
경계하며 뒤로 물러나자 검은 재킷이 양팔을 내렸다.
스륵!
카람빗 한 쌍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
“……!”
설마 하긴 했지만 이렇게 나올 줄은.
수호는 내력을 끌어올리며 대응할 준비를 했다.
쉬익!
검은 재킷이 몸을 날렸다.
그런데 놈의 움직임이 말이 안 됐다.
‘뭐가 이렇게 빨라?’
다가드는가 싶더니 어느새 지척에서 카람빗을 휘둘러 온다.
‘뭐지?’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았다.
하지만 눈꺼풀을 여닫는 사이에 좁혀오는 게 가능할 정도로 가깝지도 않았다.
슉! 슈우욱!
검은 재킷은 쌍검을 차례로 휘두르며 수호를 압박했다.
그는 철저히 급소만을 노렸다.
몸놀림을 보면 일단 프로인 것만은 확실했다.
그리고 매 합마다 깃든 살기.
무슨 의도를 가지고 왔는지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살수. 아니, 암살자군.’
양철호나 조상혁 같은 어중이떠중이가 아니란 얘기다.
‘그리고 실력도.’
흑위마공의 기운을 최대한 끌어올려 응수하는데도 여전히 칼날 위에 선 듯 조마조마했다.
‘무기라도 있으면 몰라도.’
그간 성취가 있긴 했지만 도검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수준에 이르지는 못했다.
변수를 만들 방법은 하나뿐이다.
‘칼날바람!’
양손 가득 회오리가 만들어졌다.
움찔!
검은 재킷이 반응을 보였다.
칼날바람을 휙 던지자 그가 뒤로 몸을 날렸다.
이때 생긴 틈.
잠깐이지만 시간을 벌었다.
수호는 역공을 선택하지 않고 몸을 돌려 달아났다.
‘일단은 여기서 나가자.’
암살자가 몇이나 더 있는지도 모르고, 놈과 사생결단을 낼 이유도 없다.
피하는 게 상책.
속도를 높이는데 수호의 등에서 피가 치솟았다.
‘이건……?’
화끈거리는 통증이 물에 떨어뜨린 잉크처럼 삽시간에 전신으로 번져나갔다.
하지만 고통을 곱씹고 있을 여유 따위는 없었다.
뒤를 돌아보자 검은 재킷이 무표정한 얼굴로 계속 찔러오고 있었다.
잔뜩 피를 머금은 카람빗의 날 끝.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순간이동 스킬인가?’
분명 거리를 꽤나 벌렸고 경공으로 달려 나가는 중이었다.
그런데도 뒤를 잡혔다는 건 그것 외에는 설명이 불가능했다.
수호는 오른손을 들어 놈의 공격을 차단했다.
동시에 스킬을 발동, 왼손을 놈의 얼굴에 가져다 댔다.
“캬악!”
회오리가 검은 재킷의 턱과 뺨을 마구 할퀴어 댔다.
후두두둑!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놈은 얼굴을 감싸 쥐고 뒤로 물러났다.
수호는 도망갈 생각을 버리고 놈에게로 파고 들어갔다.
검은 재킷은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봤다.
“……!”
약간 당황한 표정.
눈앞이 붉게 물들어 시야가 제대로 확보되지 않는 듯했다.
“큭!”
순간 그의 몸이 흐릿해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통로 뒤쪽으로 이동해 있었다.
이 역시 눈 깜빡할 사이에 벌어진 일.
“스킬 좋구만. 근데 생각보다 좋지는 않네.”
움직임이 너무 빨라서 당연히 순간이동인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 보니 그건 아니었다.
눈을 부릅뜨고 최대한 안력을 돋우어 놈의 움직임을 주시한 결과.
‘단순히 빠르기만 한 거군.’
그 빠르기가 엄청나 몸을 날리는데도 잔상이 남을 정도.
하지만 잔상이 생긴다면 순간이동이 아니었다.
“쓰읍!”
눈을 비비던 검은 재킷이 다시 공격 자세를 취했다.
스슷!
먼저 움직인 쪽은 검은 재킷이었다.
수호는 양손에 칼날바람을 생성한 채, 대기하고 있다가 가까워지자마자 놈에게 던졌다.
검은 재킷은 피하지 않고 몸으로 삭풍을 받아냈다.
찌지지직!
칼날바람을 뚫고 나온 놈의 모습은 엉망진창이었다.
재킷은 걸레짝이 됐고 피부 또한 사정없이 긁혀 팔뚝과 어깨에서 피가 줄줄 흘렀다.
하지만 이건 단순 찰과상에 불과했다.
놈은 살짝 인상만 썼을 뿐, 신음 한 번 내뱉지 않고 돌진해 왔다.
‘이런!’
상대의 스킬을 파악한 것은 수호뿐만이 아니었다.
검은 재킷 역시 칼날바람의 위력이 대단할 게 없다는 걸 알아채고 적극적으로 덤벼온 것이다.
쉬이이익!
카람빗이 미간을 노리고 쇄도해 왔다.
수호가 몸을 틀었다.
후끈거리는 등줄기에 뭔가 차가운 게 닿았다.
간발의 차.
아슬아슬한 차이로 머리통이 뚫리는 것은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뒤이어 놈이 덮쳐오는 것까지 막지는 못했다.
쨍그랑!
미로에서 빠져나오는 가장 쉬운 방법은 벽을 부수는 거다.
엉킨 둘이 몸소 시범을 보여줬다.
벽을 깨고 튀어나온 두 사람.
“꺄아아악!”
건너편에 있던 여자가 비명을 질렀다.
피투성이 남자 둘이 갑자기 나타났으니 놀라는 게 당연했다.
검은 재킷은 목격자가 있건 말건 아랑곳하지 않고 아래 깔린 수호를 내리찍는 데에만 집중했다.
까앙! 깡! 깡!
카람빗은 애꿎은 미로의 바닥만 파냈다.
수호는 상체를 요리조리 움직여 계속 피해냈다.
그러면서 그는 바닥을 더듬고 있었다.
피하기만 해서는 답이 없다.
깨진 거울 조각이 손에 잡히자 수호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거나 먹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