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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자세히 설명해 주셔서 감사하긴 한데요. 덕분에 저도 진로를 이쪽으로 잡고 싶은 생각이 싹 사라졌는데요?”
“당연히 그렇겠죠. 그래서 우리가 진수호 군을 선택한 겁니다. 진수호 군은 라이선스만 따면 걱정이 없어요. 탄탄대로가 펼쳐진 거나 다름없는 셈. 보통 B등급을 라이선스 안정권으로 보니까, 그러면 사실상 A-란 말이죠? 이게 절대 낮은 랭크가 아니거든요. 현역 중에서도 꽤 괜찮은, 어딜 가도 무시당할 등급은 아니죠.”
김삼환은 수호를 띄워 주다가 너무 고도를 높였나 싶었는지 바로 위에서 떨어뜨렸다.
“하지만 라이선스 따기가 말처럼 쉬운가요? 1-C 클래스의 2년 뒤 라이선스 취득률은, 물론 1급 라이선스를 말하는 겁니다. 10%가 채 되지 않아요.”
수호가 어깨를 으쓱했다.
“저야 뭐, 사실상 B반으로 봐야 하니까.”
좀 건방져 보일 수 있겠지만 이건 맞는 말이었다.
“그건 인정합니다. 하지만 랭크가 B 클래스여도 소속이 C면 성장은 정체되기 마련이죠. 만약 저희와 함께한다면.”
탁.
김삼환이 파일을 닫았다.
나름대로 극적 효과를 주려는 듯했다.
“라이선스 취득은 물론이고, 그 이상의 랭크로 졸업할 거라고 장담할 수 있습니다.”
“키워줄 테니 은혜에 보답해라, 이런 말인가요?”
“그런 표현은 좀 그러네요. 서로에게 필요한 걸 줄 수 있는 사이니 같이 윈윈해 보자, 그렇게 받아들여 줬으면 합니다.”
“글쎄요, 무작정 받아들이기에는 제가 당한 것도 있고 해서.”
“당하긴요?”
김삼환이 화들짝 놀라자 수호가 고개를 돌렸다.
유리벽 밖에서 할로우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아, 그건 일반적인 정보수집 활동이었습니다. 저희도 직접 보고 판단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변명해 봤지만 수호의 표정은 영 별로였다.
김삼환이 얼른 말을 돌렸다.
“흠흠, 어쨌거나 진수호 군에게 남은 3년은 매우 중요해요. 물론 그건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진수호 군은 더더욱! 다른 학생들과는 다른 특별한 재능이 있는데 패시브가 약간 대기만성 타입이라 집중 케어가 필요하달까요?”
“집중 케어라. 어떤 걸 해줄 수 있는데요?”
“뭐든 다. 저희가 할 수 있는 선에서는 최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을 예정입니다.”
김삼환은 브리프 케이스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수호 앞으로 밀었다.
그가 볼펜을 건네며 말했다.
“읽어보시죠. 절대 나쁜 제안으로 느껴지진 않을 겁니다.”
수호는 시키는 대로 했다.
조금 지나자 김삼환이 은근한 태도로 물어왔다.
“어떠신가요? 나쁘지 않죠?”
“으음.”
“거기 밑에 사인만 하면 됩니다. 어떻게… 같이 가실 겁니까?”
수호가 볼펜을 내려놨다.
“아뇨.”
“예?”
“편한 길을 가는 것도 좋지만 역시 자기 앞길은 자기가 개척해야 하지 않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드네요.”
“아니, 그건 뭔…….”
김삼환은 허탈한 얼굴이 되었다.
이럴 거면 여태껏 떠든 건 뭔지.
그는 미련을 못 버리고 어떻게든 설득을 해보려 했다.
“그래도 좀 더 생각하고 결정하는 게…….”
“제 결심은 확고합니다. 바꿀 일 없으니 괜히 시간 낭비하지 말죠.”
수호는 그 싹을 망설임 없이 잘라버렸다.
김삼환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 * *
수호의 집 앞.
차에서 내리자 김삼환이 그를 불렀다.
“네?”
“이렇게 보내기가 좀 아쉽긴 하네요. 저희와 딱 맞는 학생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그가 창문 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손가락 사이에는 명함 한 장이 끼워져 있었다.
“마음 바뀌면 언제라도 연락 줘요.”
명함을 받아든 수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국해양연구소 선임연구원 김삼환>
이상한 프로필.
김삼환이 웃으며 말했다.
“아, 그거요? 대외적으론 그렇게 활동하고 있어서. 그리고 아까도 말씀을 드렸지만 오늘 저희가 만난 일은 모두 비밀입니다. 기관의 위치, 어떤 제안을 받았는지 전부 다요.”
알았다고 하고서 돌아서는데 할로우가 수호를 따라왔다.
“왜?”
“잠깐 같이 걷자.”
“그러든지.”
수호는 할로우와 함께 골목길을 걸었다.
조금 지나자 그녀가 물었다.
“왜 안 하겠다고 한 거야?”
“하기 싫으니까.”
“그런 어린애 같은 이유 말고. 뭔가 있으니까 안 한다고 했을 거 아냐.”
“그런 거 아닌데.”
“그럼, 너 진짜 애구나? 같은 각성자 입장에서 봐도 우리 프로젝트는 꽤 괜찮아. 애초에 각성자가 충분히 메리트를 느끼게끔 기획한 프로젝트고, 거기 맞는 학생들을 고른 건데. 특히 넌 그중에서도 가장 우리와 시너지가 좋을 거라고 판단을 했거든.”
“그 말에는 동의해. 근데 비밀 요원이 되고 싶지는 않아서.”
이에 할로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너도 똑같구나?”
“뭐가?”
“네 또래 각성자들 보면 백이면 백, 다 유명 수호자가 되는 게 꿈이지.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대중들의 관심을 독차지하는. 그런데 그 100명 중에서 진짜 그렇게 되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둘? 셋? 좀 더 현실적으로 생각하는 것도 필요해.”
“언론에 나면 큰일이고 남들의 관심에선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는, 그런 칙칙한 현실이라면 사양하고 싶은데?”
“칙칙하긴, 그게 뭐가 어때서! 음지에서 묵묵히 일하는 무명의 헌신. 얼마나 숭고해. 우리 같은 사람들도 있어야 한다고!”
“아, 있긴 있어야 하지. 그렇지만 내가 그러기는 싫고.”
“…….”
할로우는 입을 다물고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자기가 하는 일에 상당한 자부심이 있는 듯했다.
수호는 그런 사람한테 면전에서 너무 싫은 티를 낸 게 아닌가 싶긴 했다.
“흐음.”
다른 사람이면 모르겠는데 할로우가 이러니까 어째 동생을 괴롭히는 못된 오빠가 된 느낌이었다.
수호는 한숨을 쉬었다.
“사실 싫은 건 아닌데, 난 수호자가 꼭 돼야만 하거든. 물론 유명해지거나 그러고 싶지는 않지만.”
“응?”
“나 때문에 꿈을 못 이루게 된 사람이 있어서. 본의는 아니었지만, 이제는 영영 가망이 없어진 상태고. 그래서 나라도 그 꿈을 실현시켜주고 싶단 말이지? 물론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포기할 수 없는 일이지. 알아, 그런 느낌?”
“그, 그런 일이 있었구나. 혹시 친구?”
“아니.”
수호는 고개를 저었다.
그 사람은 당연히 진수호다.
정보국 요원은 진수호가 그리던 미래와는 떨어져도 너무 동떨어져 있었다.
물론 수호는 자기가 뭐가 되건 딱히 상관이 없다.
하지만 진수호를 밀어내고 그로 살고 있는 이상, 최소한 그의 꿈 정도는 이뤄주고 싶었다.
“결국 가는 길이 다르다는 거잖아? 우리가 억지로 네 생각을 바꿀 수는 없는 거고. 또 그런 이유가 있다면 어려워도 쭉 밀고 나가야지.”
“그러려고 하고 있어.”
“흐음, 그리고 아까 내가 말한 건 잊어버려. 넌 할 수 있을 거야.”
“어, 고마워.”
갑자기 훈훈한 분위기로 바뀌자 둘 다 급 말이 없어졌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할로우였다.
그녀가 짐짓 화를 냈다.
“근데 너 왜 계속 반말이니?”
“내가 그랬나?”
“지금도 그러고 있잖아. 과장님한테는 예쁘게 말하면서 나한테만 그러는 건, 어려 보이면 어른도 아니라는 거야?”
“그건 아닌데… 요. 처음부터 관계 설정이 이상하게 돼 버린 감이 있어서 그런지…….”
“다음부턴 조심해. 어떻게 하나 지켜볼 거다.”
다음이 있기는 할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알겠다고 했다.
벌써 동네를 한 바퀴나 돌았다. 차 안에서 김삼환이 지루한 듯 하품을 하고 있었다.
할로우가 말했다.
“들어가 봐. 과장님께는 내가 말씀 잘 드려볼게. 저래 봬도 은근 끈질긴 데가 있으시거든? 아마 포기 안 하려고 할 텐데, 안 된다는 거 알았으니까.”
“네, 근데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응?”
“그 코드네임, 할로우. 그건 무슨 뜻이에요?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몰라? 할로우맨? 투명 인간 나오는 영화잖아. 케빈 베이컨 나오는.”
전혀 기억에 없다.
케빈 베이컨은 또 누군지?
수호가 고개를 저었다.
“어릴 때 재밌게 본 기억이 있거든. 그래서 이걸로 정했지.”
그때 진수호는 태어나기나 했을까?
이런 데서 세대 차이가 느껴지는 걸 보면, 확실히 그녀가 나이가 많긴 한 거 같았다.
* * *
이틀 뒤, 정학이 풀렸다.
하지만 수호는 학교로 돌아가지 않았다.
정학 날짜가 지나자 바로 주말이어서 집에서 시간을 더 보내고 갈 생각.
그리고 오늘은 화영과의 약속이 있었다.
수호는 만나기로 한 장소로 나와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교칙상 교내로의 휴대폰 반입은 불가능해 별로 사용해볼 일은 없었다.
그래도 정학 기간 동안 쓰다 보니 꽤나 익숙해졌다.
띠링.
마침 화영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나 너 뒤에 있어.]
돌아보니 정말 그녀가 있었다.
“아, 안녕?”
수호가 어색한 인사를 건넸다.
“응, 학교 밖에서 보는 건 처음이지?”
“그건 아니지. 우리 전에 봤을 때도 밖이었잖아.”
“아, 그렇긴 하네.”
그런데 사복 차림을 보는 건 오늘이 처음이 맞다.
화영은 하늘거리는 원피스에 작은 크로스백을 메고 나왔다.
반면 수호는 뭐 때문에 부른 건지 몰라서 청바지에 아무 티셔츠나 주워 입은 상태였다.
“어…….”
멍하니 그녀를 보던 수호가 입을 열었다.
“어디 소풍 가? 너무 산뜻한 거 아냐?”
“그 비슷한 거. 내가 왜 여기로 불렀겠어?”
“여기가 뭔데?”
약속 장소는 4호선 대공원역이었다.
“설마?”
“뭐야, 그 표정은? 오늘 하루 놀아달라고 부른 거야. 예상 못 했어?”
“난 좀 더 거창한 걸 생각했지.”
“이걸로도 좋아.”
그렇게 말하면서 화영이 갑자기 팔짱을 껴왔다.
수호는 놀라서 팔을 빼려고 했지만 내력을 끌어올리지 않은 상태라 화영의 힘이 더 셌다.
그녀가 놔주지 않으니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다 좋은데 우리 안전거리는 유지하는 게…….”
“뭐가 어때서? 여기가 학교도 아니고.”
“그건 그렇지만.”
“그리고 학교면 또 어때?”
“뭐?”
“아니, 일단 가자. 내가 표도 끊어놨거든.”
화영이 휴대폰 화면을 보여줬다.
* * *
놀이공원은 생각보다 재밌었다.
기억에 의하면 진수호는 울렁거리는 걸 싫어해 이런 곳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지만.
수호는 아무것도 모르고 끌려오긴 했어도 막상 와 보니 나쁘지 않다고 느꼈다.
전생에 그의 경신술 수준은 인간의 몸으로는 불가능한 움직임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내곤 했다.
그랬던 그도 360도로 회전하며 질주하는 롤러코스터 같은 건 느껴보지 못했던 색다른 경험이었다.
주말이라 그런지 줄이 꽤 길었다.
몇 개 타지도 않았는데 두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우리 좀 쉴래?”
어트랙션에서 내려와 다른 곳으로 이동하던 중, 화영이 물었다.
마침 수호도 그러고 싶었던 참이었다.
“저기 앉자.”
수호가 벤치를 가리켰다.
“그래, 잠깐만.”
화영은 어디론가 가더니 소프트아이스크림 두 개를 들고 돌아왔다.
“자.”
“어, 고마워.”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아이스크림만 먹었다.
먼저 입을 뗀 건 화영이었다.
“재미있어?”
“뭐, 그럭저럭.”
“그럼 다행이네. 난 사실 좀 지루했거든.”
“저게?”
수호는 앞에 세워진 롤러코스터 트랙을 가리켰다.
때마침 탑승객들을 가득 태운 열차가 맹렬한 속도로 지나갔다.
다들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모아 꺄악하고 소리를 지른다.
“나도 저 사람들 같을 줄 알았어. 어릴 적에 왔을 때는 무서워서 죽을 것만 같았고, 악을 너무 써서 목도 쉬고 그랬는데. 지금은 시시하고 이게 뭔가 싶고. 내가 변한 거겠지?”
“변했다기보다는, 익숙해진 거겠지. 던전 들어가서 마물 잡다가 놀이공원 와서 떨면 그게 더 이상한 거 아닐까? 나도 딱히 스릴 넘치거나 하진 않아. 신기한 쪽에 더 가깝고.”
“음?”
“아니, 난 어릴 때 못 와봐서. 부모님이 바쁘셨거든.”
화영이 피식 웃었다.
“미안해. 괜히 분위기만 다운시켰네. 모처럼의 데이트인데.”
“데이트?”
“그럼 뭐라고 생각했어?”
“음, 고마움에 대한 보답?”
그 말에, 화영의 표정이 싹 변했다.
“정말 그렇게밖에 생각 안 해?”
“자세히 설명해 주셔서 감사하긴 한데요. 덕분에 저도 진로를 이쪽으로 잡고 싶은 생각이 싹 사라졌는데요?”
“당연히 그렇겠죠. 그래서 우리가 진수호 군을 선택한 겁니다. 진수호 군은 라이선스만 따면 걱정이 없어요. 탄탄대로가 펼쳐진 거나 다름없는 셈. 보통 B등급을 라이선스 안정권으로 보니까, 그러면 사실상 A-란 말이죠? 이게 절대 낮은 랭크가 아니거든요. 현역 중에서도 꽤 괜찮은, 어딜 가도 무시당할 등급은 아니죠.”
김삼환은 수호를 띄워 주다가 너무 고도를 높였나 싶었는지 바로 위에서 떨어뜨렸다.
“하지만 라이선스 따기가 말처럼 쉬운가요? 1-C 클래스의 2년 뒤 라이선스 취득률은, 물론 1급 라이선스를 말하는 겁니다. 10%가 채 되지 않아요.”
수호가 어깨를 으쓱했다.
“저야 뭐, 사실상 B반으로 봐야 하니까.”
좀 건방져 보일 수 있겠지만 이건 맞는 말이었다.
“그건 인정합니다. 하지만 랭크가 B 클래스여도 소속이 C면 성장은 정체되기 마련이죠. 만약 저희와 함께한다면.”
탁.
김삼환이 파일을 닫았다.
나름대로 극적 효과를 주려는 듯했다.
“라이선스 취득은 물론이고, 그 이상의 랭크로 졸업할 거라고 장담할 수 있습니다.”
“키워줄 테니 은혜에 보답해라, 이런 말인가요?”
“그런 표현은 좀 그러네요. 서로에게 필요한 걸 줄 수 있는 사이니 같이 윈윈해 보자, 그렇게 받아들여 줬으면 합니다.”
“글쎄요, 무작정 받아들이기에는 제가 당한 것도 있고 해서.”
“당하긴요?”
김삼환이 화들짝 놀라자 수호가 고개를 돌렸다.
유리벽 밖에서 할로우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아, 그건 일반적인 정보수집 활동이었습니다. 저희도 직접 보고 판단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변명해 봤지만 수호의 표정은 영 별로였다.
김삼환이 얼른 말을 돌렸다.
“흠흠, 어쨌거나 진수호 군에게 남은 3년은 매우 중요해요. 물론 그건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진수호 군은 더더욱! 다른 학생들과는 다른 특별한 재능이 있는데 패시브가 약간 대기만성 타입이라 집중 케어가 필요하달까요?”
“집중 케어라. 어떤 걸 해줄 수 있는데요?”
“뭐든 다. 저희가 할 수 있는 선에서는 최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을 예정입니다.”
김삼환은 브리프 케이스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수호 앞으로 밀었다.
그가 볼펜을 건네며 말했다.
“읽어보시죠. 절대 나쁜 제안으로 느껴지진 않을 겁니다.”
수호는 시키는 대로 했다.
조금 지나자 김삼환이 은근한 태도로 물어왔다.
“어떠신가요? 나쁘지 않죠?”
“으음.”
“거기 밑에 사인만 하면 됩니다. 어떻게… 같이 가실 겁니까?”
수호가 볼펜을 내려놨다.
“아뇨.”
“예?”
“편한 길을 가는 것도 좋지만 역시 자기 앞길은 자기가 개척해야 하지 않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드네요.”
“아니, 그건 뭔…….”
김삼환은 허탈한 얼굴이 되었다.
이럴 거면 여태껏 떠든 건 뭔지.
그는 미련을 못 버리고 어떻게든 설득을 해보려 했다.
“그래도 좀 더 생각하고 결정하는 게…….”
“제 결심은 확고합니다. 바꿀 일 없으니 괜히 시간 낭비하지 말죠.”
수호는 그 싹을 망설임 없이 잘라버렸다.
김삼환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 * *
수호의 집 앞.
차에서 내리자 김삼환이 그를 불렀다.
“네?”
“이렇게 보내기가 좀 아쉽긴 하네요. 저희와 딱 맞는 학생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그가 창문 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손가락 사이에는 명함 한 장이 끼워져 있었다.
“마음 바뀌면 언제라도 연락 줘요.”
명함을 받아든 수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국해양연구소 선임연구원 김삼환>
이상한 프로필.
김삼환이 웃으며 말했다.
“아, 그거요? 대외적으론 그렇게 활동하고 있어서. 그리고 아까도 말씀을 드렸지만 오늘 저희가 만난 일은 모두 비밀입니다. 기관의 위치, 어떤 제안을 받았는지 전부 다요.”
알았다고 하고서 돌아서는데 할로우가 수호를 따라왔다.
“왜?”
“잠깐 같이 걷자.”
“그러든지.”
수호는 할로우와 함께 골목길을 걸었다.
조금 지나자 그녀가 물었다.
“왜 안 하겠다고 한 거야?”
“하기 싫으니까.”
“그런 어린애 같은 이유 말고. 뭔가 있으니까 안 한다고 했을 거 아냐.”
“그런 거 아닌데.”
“그럼, 너 진짜 애구나? 같은 각성자 입장에서 봐도 우리 프로젝트는 꽤 괜찮아. 애초에 각성자가 충분히 메리트를 느끼게끔 기획한 프로젝트고, 거기 맞는 학생들을 고른 건데. 특히 넌 그중에서도 가장 우리와 시너지가 좋을 거라고 판단을 했거든.”
“그 말에는 동의해. 근데 비밀 요원이 되고 싶지는 않아서.”
이에 할로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너도 똑같구나?”
“뭐가?”
“네 또래 각성자들 보면 백이면 백, 다 유명 수호자가 되는 게 꿈이지.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대중들의 관심을 독차지하는. 그런데 그 100명 중에서 진짜 그렇게 되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둘? 셋? 좀 더 현실적으로 생각하는 것도 필요해.”
“언론에 나면 큰일이고 남들의 관심에선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는, 그런 칙칙한 현실이라면 사양하고 싶은데?”
“칙칙하긴, 그게 뭐가 어때서! 음지에서 묵묵히 일하는 무명의 헌신. 얼마나 숭고해. 우리 같은 사람들도 있어야 한다고!”
“아, 있긴 있어야 하지. 그렇지만 내가 그러기는 싫고.”
“…….”
할로우는 입을 다물고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자기가 하는 일에 상당한 자부심이 있는 듯했다.
수호는 그런 사람한테 면전에서 너무 싫은 티를 낸 게 아닌가 싶긴 했다.
“흐음.”
다른 사람이면 모르겠는데 할로우가 이러니까 어째 동생을 괴롭히는 못된 오빠가 된 느낌이었다.
수호는 한숨을 쉬었다.
“사실 싫은 건 아닌데, 난 수호자가 꼭 돼야만 하거든. 물론 유명해지거나 그러고 싶지는 않지만.”
“응?”
“나 때문에 꿈을 못 이루게 된 사람이 있어서. 본의는 아니었지만, 이제는 영영 가망이 없어진 상태고. 그래서 나라도 그 꿈을 실현시켜주고 싶단 말이지? 물론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포기할 수 없는 일이지. 알아, 그런 느낌?”
“그, 그런 일이 있었구나. 혹시 친구?”
“아니.”
수호는 고개를 저었다.
그 사람은 당연히 진수호다.
정보국 요원은 진수호가 그리던 미래와는 떨어져도 너무 동떨어져 있었다.
물론 수호는 자기가 뭐가 되건 딱히 상관이 없다.
하지만 진수호를 밀어내고 그로 살고 있는 이상, 최소한 그의 꿈 정도는 이뤄주고 싶었다.
“결국 가는 길이 다르다는 거잖아? 우리가 억지로 네 생각을 바꿀 수는 없는 거고. 또 그런 이유가 있다면 어려워도 쭉 밀고 나가야지.”
“그러려고 하고 있어.”
“흐음, 그리고 아까 내가 말한 건 잊어버려. 넌 할 수 있을 거야.”
“어, 고마워.”
갑자기 훈훈한 분위기로 바뀌자 둘 다 급 말이 없어졌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할로우였다.
그녀가 짐짓 화를 냈다.
“근데 너 왜 계속 반말이니?”
“내가 그랬나?”
“지금도 그러고 있잖아. 과장님한테는 예쁘게 말하면서 나한테만 그러는 건, 어려 보이면 어른도 아니라는 거야?”
“그건 아닌데… 요. 처음부터 관계 설정이 이상하게 돼 버린 감이 있어서 그런지…….”
“다음부턴 조심해. 어떻게 하나 지켜볼 거다.”
다음이 있기는 할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알겠다고 했다.
벌써 동네를 한 바퀴나 돌았다. 차 안에서 김삼환이 지루한 듯 하품을 하고 있었다.
할로우가 말했다.
“들어가 봐. 과장님께는 내가 말씀 잘 드려볼게. 저래 봬도 은근 끈질긴 데가 있으시거든? 아마 포기 안 하려고 할 텐데, 안 된다는 거 알았으니까.”
“네, 근데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응?”
“그 코드네임, 할로우. 그건 무슨 뜻이에요?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몰라? 할로우맨? 투명 인간 나오는 영화잖아. 케빈 베이컨 나오는.”
전혀 기억에 없다.
케빈 베이컨은 또 누군지?
수호가 고개를 저었다.
“어릴 때 재밌게 본 기억이 있거든. 그래서 이걸로 정했지.”
그때 진수호는 태어나기나 했을까?
이런 데서 세대 차이가 느껴지는 걸 보면, 확실히 그녀가 나이가 많긴 한 거 같았다.
* * *
이틀 뒤, 정학이 풀렸다.
하지만 수호는 학교로 돌아가지 않았다.
정학 날짜가 지나자 바로 주말이어서 집에서 시간을 더 보내고 갈 생각.
그리고 오늘은 화영과의 약속이 있었다.
수호는 만나기로 한 장소로 나와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교칙상 교내로의 휴대폰 반입은 불가능해 별로 사용해볼 일은 없었다.
그래도 정학 기간 동안 쓰다 보니 꽤나 익숙해졌다.
띠링.
마침 화영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나 너 뒤에 있어.]
돌아보니 정말 그녀가 있었다.
“아, 안녕?”
수호가 어색한 인사를 건넸다.
“응, 학교 밖에서 보는 건 처음이지?”
“그건 아니지. 우리 전에 봤을 때도 밖이었잖아.”
“아, 그렇긴 하네.”
그런데 사복 차림을 보는 건 오늘이 처음이 맞다.
화영은 하늘거리는 원피스에 작은 크로스백을 메고 나왔다.
반면 수호는 뭐 때문에 부른 건지 몰라서 청바지에 아무 티셔츠나 주워 입은 상태였다.
“어…….”
멍하니 그녀를 보던 수호가 입을 열었다.
“어디 소풍 가? 너무 산뜻한 거 아냐?”
“그 비슷한 거. 내가 왜 여기로 불렀겠어?”
“여기가 뭔데?”
약속 장소는 4호선 대공원역이었다.
“설마?”
“뭐야, 그 표정은? 오늘 하루 놀아달라고 부른 거야. 예상 못 했어?”
“난 좀 더 거창한 걸 생각했지.”
“이걸로도 좋아.”
그렇게 말하면서 화영이 갑자기 팔짱을 껴왔다.
수호는 놀라서 팔을 빼려고 했지만 내력을 끌어올리지 않은 상태라 화영의 힘이 더 셌다.
그녀가 놔주지 않으니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다 좋은데 우리 안전거리는 유지하는 게…….”
“뭐가 어때서? 여기가 학교도 아니고.”
“그건 그렇지만.”
“그리고 학교면 또 어때?”
“뭐?”
“아니, 일단 가자. 내가 표도 끊어놨거든.”
화영이 휴대폰 화면을 보여줬다.
* * *
놀이공원은 생각보다 재밌었다.
기억에 의하면 진수호는 울렁거리는 걸 싫어해 이런 곳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지만.
수호는 아무것도 모르고 끌려오긴 했어도 막상 와 보니 나쁘지 않다고 느꼈다.
전생에 그의 경신술 수준은 인간의 몸으로는 불가능한 움직임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내곤 했다.
그랬던 그도 360도로 회전하며 질주하는 롤러코스터 같은 건 느껴보지 못했던 색다른 경험이었다.
주말이라 그런지 줄이 꽤 길었다.
몇 개 타지도 않았는데 두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우리 좀 쉴래?”
어트랙션에서 내려와 다른 곳으로 이동하던 중, 화영이 물었다.
마침 수호도 그러고 싶었던 참이었다.
“저기 앉자.”
수호가 벤치를 가리켰다.
“그래, 잠깐만.”
화영은 어디론가 가더니 소프트아이스크림 두 개를 들고 돌아왔다.
“자.”
“어, 고마워.”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아이스크림만 먹었다.
먼저 입을 뗀 건 화영이었다.
“재미있어?”
“뭐, 그럭저럭.”
“그럼 다행이네. 난 사실 좀 지루했거든.”
“저게?”
수호는 앞에 세워진 롤러코스터 트랙을 가리켰다.
때마침 탑승객들을 가득 태운 열차가 맹렬한 속도로 지나갔다.
다들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모아 꺄악하고 소리를 지른다.
“나도 저 사람들 같을 줄 알았어. 어릴 적에 왔을 때는 무서워서 죽을 것만 같았고, 악을 너무 써서 목도 쉬고 그랬는데. 지금은 시시하고 이게 뭔가 싶고. 내가 변한 거겠지?”
“변했다기보다는, 익숙해진 거겠지. 던전 들어가서 마물 잡다가 놀이공원 와서 떨면 그게 더 이상한 거 아닐까? 나도 딱히 스릴 넘치거나 하진 않아. 신기한 쪽에 더 가깝고.”
“음?”
“아니, 난 어릴 때 못 와봐서. 부모님이 바쁘셨거든.”
화영이 피식 웃었다.
“미안해. 괜히 분위기만 다운시켰네. 모처럼의 데이트인데.”
“데이트?”
“그럼 뭐라고 생각했어?”
“음, 고마움에 대한 보답?”
그 말에, 화영의 표정이 싹 변했다.
“정말 그렇게밖에 생각 안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