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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그렇게 해요.]
“예?”
[뭘 그렇게 놀라요? 본인만 괜찮다고 하면 못해볼 이유가 있어요?]
전대환이 마뜩찮아 하기에 조인아의 의견을 구하기로 한 것.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하자 뜻밖에도 그녀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밑져야 본전이니까, 해봐요.]
“그래도 위험할 수도 있고…….”
[위험하긴 누가요?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고 빨리 끝내기나 해요. 그거 말고도 골치 아픈 일은 넘치니까.]

* * *

한 시간 뒤.
다시 신원혁의 집 앞.
한 명이 더 늘어 이번에 차에서 내린 사람은 셋이었다.
그중 뒷문을 열고 나오는 사람은…….
화영이었다.
그녀가 수호에게 물었다.
“가서 대신 사과를 받아달라고만 하면 되는 거야?”
“그래, 402호고… 음음, 무리한 요구 들어줘서 고마워. 내가 생각해도 어처구니없지만.”
“아니야,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닌데 뭐. 오히려 내 진심을 알아줘서 고마워.”
“무슨? 아.”
기숙사 앞에서 화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사실 크게 기대는 안 했는데, 이렇게 부탁도 다 하고. 너 좀 바뀐 거 같다? 물론 좋은 쪽으로.”
‘조금 바뀐 정도가 아니지.’
다들 진수호란 인간에 대해서 완벽히 착각하고 있었다.
물론 지금까지는 그게 긍정적인 방향으로 작용하는 듯하지만.
“대신 내 부탁도 하나 들어주는 거야? 기브 앤 테이크, 잊으면 안 돼!”
수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 끝났냐?”
전대환이 눈꼴시다는 듯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른 앞에 두고 염장질은. 후딱 끝내고 와.”
“알았어요.”
화영은 신원혁의 집으로 올라갔다.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전대환이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이게 맞는 거겠지? 난 아직도 모르겠다.”
“선생님도 방 보셨잖아요. 벽에 덕지덕지 붙은 아이돌 그룹 포스터. 그룹명은 모르겠지만…….”
“아니, 걸프렌드를 모른다고? 요즘 인기 탑 걸그룹인데? 너 고등학생 맞냐?”
“저도 모르는데 선생님은 어떻게 아세요?”
“크흠, 난 조카가 하도 좋아해서. 굿즈 사주고 그러다 보니까 어찌어찌 알게 됐지.”
“굿즈요?”
“어, 그런 게 있어.”
둘은 서로에 대해서 의아해했다.
“흠흠, 어쨌거나 걸프렌드는 국민 아이돌이라고 불릴 정도니까, 팬질을 하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 그게 뭐가 문제야?”
“그리고 책장에 꽂혀 있던 책이요. <내 여동생이 안 귀엽다니 말도 안 돼>, <군필 취준생인 내가 15세 여중생이 되다니>. 죄다 이런 것뿐이던데, 그렇다는 건…….”
“신원혁이 미성년자만 노리는 변태 이상성욕자라는 거냐?”
“그… 런 뜻은 아닌데요. 본인 입으로 말한 것도 있고, 화영이 앞에서는 약해질 거 같아서요. 나 대신 가면 아무래도 얘기가 더 잘되지 않겠어요?”
“아니.”
전대환이 갑자기 심각해졌다.
“생각해 보니까 걸프렌드에서 가장 나이 많은 멤버가… 열아홉 살인데? 이거 위험한 놈이 분명해. 어째 얼굴부터가 범죄자상이더라니.”
그는 신원혁을 저질 중의 저질로 단정 지어 버렸다.
“안 되겠어, 이 작전은 취소다.”
수호가 그를 붙잡았다.
“만약 그렇다고 해도 걱정할 거 있어요? 두 사람 랭크 차이가 얼마나 나는데. 신원혁이 뭐라도 해보려고 했다간 작살나죠.”
“그런가? 하긴 그렇겠군.”
하지만 한참을 기다려도 화영이 나오지 않자 수호도 슬슬 걱정이 됐다.
“올라가 보죠.”
두 사람은 402호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그 안의 광경은…….
“뭐, 뭐야?”
놀란 신원혁의 눈이 커졌다.
툭.
벌어진 입에서 밥알 하나가 상 위로 떨어졌다.
그는 밥을 먹고 있었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화영이 뒤를 돌아봤다.
“왜 왔어요? 밑에서 기다리고 계시지.”
“아, 너무 오래 있길래.”
“얘기는 잘 됐어요. 그쵸, 원혁 오빠?”
갑작스런 둘의 등장에 신원혁의 눈살이 찌푸려졌지만, 오빠란 호칭에 바로 풀어져 버렸다.
그는 헤벌어진 입을 겨우 다물며 대답했다.
“무, 물론이지.”
가만히 보고만 있던 수호가 밥상 위를 가리켰다.
“저건 뭔데?”
흰 쌀밥에 몇 가지 찬. 받침대 위에는 된장찌개가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화영이 말했다.
“내가 했어. 잘 끓였지? 여동생이 차려주는 밥 먹어보는 게 평생의 소원이라고 하셔서. 뭐, 난 친동생은 아니지만 그 정도는 해드릴 수 있잖아?”
어디서 찾아냈는지 그녀는 앞치마까지 두르고 있었다.
신원혁이 순식간에 바닥까지 비우자 화영이 밥공기를 가져갔다.
“더 드실 거죠?”
“당연! 배 터질 때까지 먹어야지.”
그런데 이 집에는 변변한 취사도구가 없어 한 그릇을 더 먹으려면 즉석밥을 데워야 했다.
신원혁은 전자레인지 앞에 선 화영의 뒷모습을 흘끔흘끔 보면서 말했다.
“솔직히 당신들 속내가 너무 뻔해서 어이가 없긴 한데, 화영이가 너무 예뻐서 할 말이 없다. 이렇게 내 방에 와 있으니까…….”
그의 시선이 걸프렌드의 브로마이드로 향했다.
“우리 걸둥이들이 저기서 튀어나온 것 같다니까.”
“걸둥이?”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그룹 멤버들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
공교롭게도 양쪽 다 교복 차림인데, 디자인도 비슷해서 화영을 저기 끼워 넣어도 전혀 위화감이 없을 것 같았다.
“아무튼, 의도는 불순해도 내 소원도 이뤘고 하니까 이쯤에서 봐줄까 하는데.”
“정말이에요?”
“그래, 기껏해야 레벨 3 던전. 깨봐야 랭크 올라가는 것도 아니고 경험치 주면 얼마나 준다고. 오늘 네가 해준 게 나한테는 더 의미가 있다. 바로 전화 때려줘?”
“그럼 감사하죠.”

* * *

신원혁은 김 팀장에게 전화를 걸어 수호의 사과를 받았다고 전했다.
그것으로 던전에서 친 대형 사고는 어느 정도 수습이 되는 듯했다.
대신 한 사람에게 빚을 졌지만.
‘기브 앤 테이크라. 뭐 별거 아니겠지.’
그런데 돌아가는 차 안.
화영이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나도 부탁할 거 있다고 했잖아? 좀 이른 감이 있긴 하지만, 이번 주 토요일에 시간 좀 내줬으면 하는데.”
“토요일이면… 이틀 뒤?”
“맞아. 그날 하루는 비워두는 게 좋을 거야.”
“무슨 일을 시키려고 하루씩이나?”
“있어, 그만큼 시간을 들여야 하는 거.”
“그렇게 진지하게 말하니까 좀 긴장되는데. 뭔데 그래?”
“글쎄, 그건 나와 보면 알게 될 거야.”
화영은 수호에게 새로운 고민거리를 던져줬다.
‘뭐지? 되로 주고 말로 받는 그런 상황인가?’
몇 번 더 물어봤지만 끝내 화영은 무엇 때문인지 말해주지 않았다.
수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내 능력이 필요한 건 아닐 테고. 뭐지, 그럼?”
그녀의 사정을 모르니 역시 알 수가 없다.
‘나와 보면 안다고 했으니 가보는 수밖에.’
현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아직 이른 저녁 시간.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버지는 회사, 수연은 학원일 테고…….
‘어머니는 시장 가셨나?’
불을 켜자 텅 빈 거실이 그를 반겼다. 그 사이 달라진 것은 없었다.
수호는 거실을 가로질러 자기 방으로 갔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려는데.
그가 문득 문손잡이를 놓았다.
“나와라, 죽고 싶지 않으면.”
낮지만 분명하게.
수호는 자기 의사를 전했다.
그런데 반응이 없다.
약간 겸연쩍을 수도 있는 상황.
개의치 않고 조용히 주방으로 향했다.
벽에 걸린 프라이팬을 집어 들고 뒤를 돌아봤지만, 여전히 혼자였다.
다른 사람, 혹은 그 존재를 추론해볼 수 있는 흔적 같은 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수호는 눈을 감고 집중했다.
분명 집 안에서 침입자의 기척을 느꼈다.
며칠 전이었다면 기분 탓인가 보다 하고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마정석의 마기를 흡수해 한층 발전한 상태였다.
무인의 감을 신뢰할 만한 경지에 오른 것.
‘있다!’
침입자의 존재는 확인, 그러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었다.
프라이팬을 쥔 손에 힘을 주고 의심 가는 쪽으로 향하자 이번에는 반응이 있었다.
바스락.
거의 무음에 가까운 소리.
하지만 수호의 청신경은 이를 잡아냈다.
휙!
지체 없이 몸을 날렸다.
이 정도면 나 여기 있다고 광고해준 격이나 마찬가지다.
수호는 자신의 감이 알려주는 대로 프라이팬을 휘둘렀다.
깡!
허공을 때렸는데 이런 소리가 났다.
‘음?’
정타를 먹였음에도 수호의 표정이 이상했다.
다다다닷!
침입자의 발소리가 들렸다.
“어딜!”
수호는 경공을 발휘해 먼저 앞질러 갔다.
그는 출구를 등지고 그 앞에 섰다.
“각성자인 거 다 알아. 들통 났으니까 그만 포기하고 나와.”
“우엥… 어떻게 알았지?”
목소리의 주인은 여자였다.
스킬을 해제하자 투명하던 신체가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곧 드러난 침입자의 모습.
“너… 뭐냐?”
그녀를 본 수호는 당혹감에 말을 잇지 못했다.
“아고고, 아파라.”
침입자는 머리를 감싸 쥔 채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수호도 어리지만 이 불청객은 그보다 서너 살은 더 어려 보였다.
많아 봐야 중학생 정도 느낌?
“어, 어린애?”
“누가 어린애야!”
그녀가 빽 소리를 질렀다.
뭔가 입장이 바뀐 거 같은데?
수호는 어이없어하며 그녀를 내려다봤다.
“요만한데 어린애가 아니면 뭐지?”
그는 손을 들어 자기 가슴팍으로 가져갔다.
“그, 그건 아직 성장이 덜된 것뿐이라고!”
그녀가 주먹을 치켜들고 한 발짝 다가왔다.
자그마한 체구에 고사리 같은 손.
전혀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았지만 수호는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더 들어오면 휘두를 생각으로 프라이팬에 내력을 둘렀다.
무림에는 이런 격언이 있다.
노인과 어린아이, 그리고 여자를 조심하라!
겉모습만 보고 상대를 판단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무공은 신체 능력을 초월한 힘을 발휘하게 해준다.
어리다고, 늙거나 병들어 보인다고 방심하다가는 목숨이 날아가도 할 말이 없는 게 무림이었다.
물론 여기는 무림이 아니고 무공도 실전된 지 오래지만, 각성자에게도 충분히 적용할 수 있는 말이었다.
도저히 칩입자라곤 생각되지 않는 그녀의 외모.
살짝 당황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긴장을 풀지는 않았다.
“다시 묻는다. 넌 누구고, 남의 집엔 왜 들어와 있는 거지?”
“난 할로우. 널 만나러 왔어.”
“헬로우?”
“아니, 할로우!”
“헬이든 할이든,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윤상현이 보냈나?”
“윤상현? 아, 사이 안 좋다는 그 친구? 아직도 안 좋아?”
“시치미 떼지 마.”
슈욱!
수호가 몸을 날렸다.
질문은 확실히 제압한 다음에 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스슷.
침입자, 아니 할로우의 몸이 다시 사라졌다.
이번에는 상대의 높이를 고려해 더 아래쪽으로 휘둘렀다.
하지만 지금 때린 허공은 진짜 허공이었다.
“쳇.”
수호는 현관문 앞으로 돌아가 퇴로를 막고 할로우의 다음 움직임을 기다렸다.
“잠깐, 잠깐!”
그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왜 자꾸 싸우려고 하는 거야? 난 싸우러 온 게 아닌데.”
“아, 평화적으로 남의 집에 몰래 들어와 있으려고만 했다? 그거 참 설득력 있군.”
“나도 이게 이상해 보인다는 거 알아. 아는데 다 설명해줄 테니까 그거 좀 내려놓을래?”
“뭘 믿고.”
“신분증 보여줄 테니까 가만히 있어.”
그녀는 품 안으로 손을 넣어 배지를 꺼내 보여줬다.
“특별재난관리부?”
“정식으로 소개할게. 특별재난관리부 산하 비밀정보국. 줄여서 SSIS. 난 아까도 말했다시피 할로우고 SSIS 소속이야.”
“음?”
수호의 눈이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