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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양철호가 수호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죽이지는 않고… 사지 못쓰게 해서 학교에서 쫓겨나게 만들고 여러 가지 합병증으로 평생 고통스러운 삶을 살게 하는 정도? 진짜야! 생포해야 한다고 몇 번을 말했거든.”
수호가 헛웃음을 흘렸다.
“그게 죽는 것과 뭐가 다르지?”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말도 있잖아?”
“아니, 죽음보다 못한 삶이지. 하지만, 윤상현이 그걸 원했다면 나도 같은 걸 해줘야겠군.”
수호는 쓰러진 조상혁에게 다가가서 막힌 혈도를 풀어줬다.
“으으음.”
그가 천천히 눈을 떴다.
“양철호, 저 인간 챙겨서 나가. 밖에 윤상현 있으니까 같이 데리고 가고.”
“밖에?”
“지가 자초한 거긴 하지만, 멀쩡한 상태라고는 할 수 없게 됐거든. 살릴 수 있을지 없을지는 당신들 손에 달렸어.”
“자, 잠깐! 스킬을 풀어줘야 가지!”
“그거? 지금쯤이면 이미 풀렸을 걸?”
그 말에 양철호가 팔을 들어 보니 거짓말처럼 다시 움직여졌다.
“씨발, 다행이다.”
“뭐,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 거냐?”
양철호는 깨어난 조상혁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이번 의뢰는 완전히 조졌어. 여기 계속 있다가는 우리 인생도 같이 조질 판이고. 그러니까 얼른 빠져나가자.”
“우, 우리 이대로 보내 준대?”
조상혁이 곁눈질로 수호를 가리켰다.
수호가 한 마디 툭 던졌다.
“마음 바뀌기 전에 빨리 꺼져.”
“가, 가야지. 가자, 양철호.”
두 사람은 다급히 동굴 밖으로 향했다.
그들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수호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후우.”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일이 일어났다.
그 때문에 지친 것일까?
그것도 있지만, 다리가 풀릴 만한 일이었냐 하면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한창 운기하던 중에 방해를 받아 끝마무리가 확실하지 않았다.
그게 내내 마음에 걸렸다.
‘다행히 얼추 흡수가 끝나갈 때 들이닥쳐서 크게 손해는 안 봤지만.’
눈을 감고 확인해 보니 약간의 손실이 있었다.
아쉽긴 하지만 실망할 것은 아니었다.
자르쿰 보스가 마정석을 드랍하지 않았더라면, 또는 윤상현이 조금만 일찍 왔어도.
둘 중 하나만 안 좋게 됐어도 돌벽 아래 처박힌 건 윤상현이 아니라 자신이 됐을 거였다.
‘운이 좋았다, 이건.’
그렇게 생각하니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앞으론 좀 신중해져야겠다고 다짐하는데, 그를 부르는 소리가 동굴 벽을 타고 안으로 울려 퍼져 왔다.
“진수호! 너 거기 있냐!”
아는 목소리였다.
여기 있다고 대답하자 조금 뒤 전대환이 헐떡거리며 들어왔다.
그가 처음으로 본 것은 작은 동산만 한 보스의 시체였다.
전대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수호를 발견한 그가 물었다.
“이, 이거 네가 잡은 거야?”
“그럼요.”
“아니, 어떻게?”
“생각보다 약하던데요.”
“설마 그럼 밖에 죽어있는 늪 자르쿰들도?”
“전부 다는 아니겠지만 어느 정도는요?”
전대환은 자기 머리를 쥐어뜯었다.
“결국 이런 식으로 사고치는 놈이 나오는구나. 언젠가는 나올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하필이면 그게 우리 반, 그것도 너일 줄이야…….”
“저,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요?”
“너 궁금증 풀어주고 그럴 기분 아니다. 아, 이를 어쩐다.”
“혹시 오면서 다른 사람 못 보셨어요?”
“다른 사람 누구? 또 여기 들어온 애가 있다는 거냐?”
영문을 모르겠다는 그의 반응.
이건 사실 조금 전에 나왔어야 하는 거였다.
수호는 전대환의 태연한 척하는 연기를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 사람이 내부자군.’
* * *
윤상현은 죽지 않았다.
조상혁과 양철호는 그를 무사히 던전 밖으로 빼낸 다음, 윤상호에게 전화해 이 사실을 알렸다.
[병원! 빨리 병원으로 데려가!]
“안 그래도 지금 엄청 밟고 있어. 금방 도착한다.”
[당신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뭘 했길래 그 쉬운 일을 이렇게 만들어?]
“그건 내가 할 말이다! 뭐 C-? 지랄하고 있네. 너 겁대가리를 상실했니? 감히 의뢰 난이도를 후려쳐?”
[뭐, 뭔 소리야 그건?]
“네 동생, 인도적인 차원에서 병원까지 데려다주기는 한다만, 이걸로 끝이 아니야. 너 오늘 일, 확실히 보상해야 할 거다. 그렇지 않으면…….”
두 사람은 윤상현을 응급실에 떨어뜨려 놓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리고 12시간에 걸친 대수술이 끝났다.
수술실에서 집도의가 나오자 정유선이 그에게 매달리며 물었다.
“선생님! 우리 아들 어떻게 됐죠? 수술은 잘 끝났나요?”
“생명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정, 정말이에요?”
“네, 자제분께서 각성자라 다행이었습니다. 보통 사람이었으면 죽었어도 몇 번은 죽었을 치명상이었는데… 저희도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였고, 아드님도 끝까지 버텨준 덕분에 경과는 좋습니다. 다만…….”
“왜요?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다른 부상은 결국 시간이 해결해주겠지만 다리는… 경골과 비골이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아마 이 부위는 회복되기 어려울 겁니다.”
“그게 무슨 말이죠? 우리 상현이가 걷지 못하게 된다는 건가요?”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제 소견은 그렇습니다.”
“아아…….”
정유선은 다리에 힘이 풀린 듯, 휘청거리며 그 자리에 쓰러졌다.
“엄마!”
윤상호가 달려와 정유선을 부축했다.
“엄마, 좀 진정해요. 엄마까지 쓰러지면 어떡하라고!”
그는 정유선을 대기실 의자로 데려가 앉혔다.
“누나! 무슨 일이야?”
복도 끝에서 걸어오던 정진우가 이 광경을 보고 허겁지겁 뛰어왔다.
그는 정유선의 친동생이었다.
따라서 윤상현, 윤상호 형제에게는 외삼촌이 된다.
윤상호가 그에게 신경질을 냈다.
“수술 결과 나왔는데 어디서 뭐 하다가 이제야 오는 거예요?”
“아니, 중요한 전화가 와서……. 수술은 어떻게 됐는데?”
상호는 의사의 말을 간추려 전했다.
정진우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이런…….”
“삼촌.”
“왜?”
“아버지는 아직이죠?”
“어. 비서실에 연락해 봤는데 몇 달 전부터 정해진 스케줄이라 빼기 어렵다고 하시네.”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에요? 막내가 평생 휠체어 끌게 생겼다는데 그깟 회사 일이 뭐라고. 너무한다고 생각 안 해요?”
“난 뭐…….”
정진우는 대답도 못 하고 조카 눈치만 살폈다.
화제를 돌리기 위해 그가 다른 얘기를 꺼냈다.
“그건 그렇고 길드에서 연락이 왔거든?”
“벌써요?”
“어, 그 전화 받으러 갔다 온 거야. 내가 적당한 사람 있다고 했지? 바로 처리해 준다고 했어.”
“실력은 확실하겠죠?”
“그야 물론이지! 그쪽은 진짜 프로야. 네가 찾은 그 허접한 작자들하곤 급이 다르다니까? 지금 이 상황, 전부 해결해 주기로 했다. 그러니 걱정 말고 있어.”
* * *
던전에서 있었던 일로 수호는 일약 C반의 에이스로 등극해 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마지막 스테이지에 들어가서 자르쿰 보스를 때려잡는다?
C급 서넛이 조를 이뤄도 그렇게 하긴 쉽지 않았다.
그걸 단신으로 해냈으니 C반 수준을 넘어선 것만은 분명했다.
“어, 수호다!”
교실에 들어서자 경태와 친구들이 그를 맞았다.
전과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이야, 우리 에이스 왔어?”
경태가 웃으며 반겼고.
“가방은 나한테 줘.”
기훈은 수호의 가방을 빼앗다시피 해서 가져갔다.
“뭘 이렇게까지…….”
수호가 부담스러워하자 경태는 고개를 저었다.
“고마워서 그러지. 네가 우리 C-의 위상을 올려줬잖아. 뭐? 각성자는 등급만 높으면 장땡이라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한테 가서 말해주고 싶다. C급 애들도 못 하는 걸 네가 해냈다고. 난 너무 통쾌해서 어제 잠도 제대로 못 잤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이어지는 칭찬 퍼레이드에 경빈이 찬물을 끼얹었다.
“물에 빠진 사람 취급할 때는 언제고? 너 엄청 부정적으로 봤잖아. 저게 뭐 하는 짓이냐고.”
“그러는 너는? 무리수 둔다고 하지 않았냐?”
둘은 티격태격.
유치한 입씨름을 계속하는 중에 누군가가 둘 사이로 파고들었다.
그는 두 사람의 어깨에 팔을 걸치며 말했다.
“내가 보기엔 너희들이 좋아할 일이 아닌 거 같은데, 왜들 호들갑이냐?”
“뭐라고?”
“그렇잖아. 누가 보면 너네가 보스 잡은 줄 알겠다? 사실 너희가 한 건 아무것도 없는데.”
끼어든 사람은 최현일이라는 녀석이었다.
경태가 C-를 대표한다면 그는 C등급의 구심점이라고나 할까?
비슷한 포지션의 등장에 경태의 얼굴이 굳었다.
“지금 시비 거는 거야?”
“사실을 말한 건데 그게 왜 시비? 그리고 애초에 너희들이 좋아할 일이 아니라니까. 보스 경험치까지 먹었는데 아직도 C-겠어?”
최현일은 둘 사이를 빠져나와서 수호에게 어깨동무를 했다.
“내 말 맞지?”
“뭐, 랭크가 오르긴 했는데…….”
그 말에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졌다.
세 사람 다 표정이 안 좋은데 최현일 혼자 미소를 짓는다.
“너도 이제 우리 쪽이야. 너 같은 실력자는 당연히 환영이고. 앞으로 잘 지내보자.”
그러고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데 수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 쪽? 랭크업하고 그게 무슨 상관이지?”
“그, 그러게. 무슨 결혼정보업체야 뭐야? 랭크 맞는 사람끼리만 친하게 지내라는 법 있나?”
“하여간 C급 애들은 이상한 엘리트 의식이 있단 말이지? 아, 물론 수호 넌 예외고.”
이렇게 말은 하지만 다들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수호는 이들의 이런 태도가 우스운 한편 이해가 되기도 했다.
친구 사이라는 건 서로 동등한 관계에서만 성립되는 법이다.
그건 천 년 전에도 그러했다.
초절정고수와 삼류 무인 사이에 우정이 꽃필 수 있을까?
차라리 백면서생이라면 그건 그럴 수 있다.
아예 분야가 다르니까.
하지만 위와 같은 사례는 듣도 보도 못했다.
‘그렇다곤 해도 C-와 C가 그 정도 차이인지는…….’
최현일이 초를 쳐준 덕분에 다들 분위기가 급 다운되어 버렸다.
전부 입을 다물고 있던 그때, 교내방송 시그널이 울렸다.
[1-C 진수호 학생, 지금 바로 교무실로 오세요.]
‘올 것이 왔군.’
가슴이 덜컥 내려앉지는 않았다.
이런 어색한 분위기에서 빠질 수 있게 돼 오히려 고맙게 느껴졌다.
교무실에 들어가자 조인아가 팔짱을 낀 채 수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왔네. 내 방으로 와. 전 선생님도요.”
수호는 조인아의 책상 맞은편에 앉았다.
전대환은 벽에 기댄 채 안절부절못하고 서 있었다.
조인아가 입을 열었다.
“조만간 다시 볼 거란 예감은 들었는데 이렇게까지 빠를 줄은 몰랐어. 너 사람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구나?”
화가 난 건지 안 난 건지 구분이 안 되는 말투, 표정이었다.
“뭘요.”
수호가 씩 웃자 전대환이 언성을 높였다.
“너 지금 이게 장난인 줄 알아? 심각한 상황이니까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게 좋을 거다.”
조인아가 그의 말을 받았다.
“심각하긴 하지. 우선 넌 인솔 교사의 지시를 어겼어. 보스 스테이지에 들어가도 좋다고 누가 그랬지?”
“들어가지 말라고 한 적도 없는데요.”
“말장난할 생각 마. 교사의 허락 없이는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가선 안 된다는 거, 분명히 알고 있었을 거야. 전 선생, 사전에 공지했죠?”
“그럼요. 던전에 입장한 뒤에도 반복해서 말했습니다.”
“아.”
이렇게 되면 할 말이 없다.
“무슨 재판 당하는 것 같은 기분인데요.”
“같은 게 아니라 사실 그게 맞아. 널 어떻게 할지는 내 손에 달렸으니까. 그리고 이 건은 네가 교사의 지시를 어긴 게 맞고. 인정하니?”
“인정할 수밖에 없겠네요.”
이런 질책 정도는 각오한 부분이었다.
그만한, 아니 그 이상의 성과를 얻었으니까.
“그럼 이걸로 된 건가요?”
조인아가 고개를 저었다.
“단순 지시 위반이면 너하고 내가 마주 보고 있을 리가 없겠지? 보스 스테이지에 들어간 것까지는, 나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 당연히 호기심이 생겼겠지. 가장 중요한 건 거기까지는 학교 안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는 거야. 그런데 거길 싹 쓸어버린다?”
이 부분에서 그녀는 이를 꽉 깨물었다.
“그때는 협회로 문제가 넘어가는 거지. 우린 그 스테이지에 권한이 없거든.”
“으음.”
“그렇게 사고 친 대가로 얼마나 성장했는지 확인해 볼까?”
조인아가 랭크 측정기를 꺼내 앞으로 내밀었다.
당연히 수호는 어떤 결과가 나올지 알고 있었다.
‘역시 철저한 성격이란 말이지.’
랭크 측정기에 손을 올리자 수호의 랭크가 표시되었다.
“축하해, 랭크 올랐구나. 한 가지 아쉬운 건… 마정석은 안 나왔나 보네?”
“예, 뭐 다행히도.”
“다행이라고 생각해? 물론 마정석이 나왔는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아. 네가 협회 측 각성자가 차지해야 할 몫을 가져갔다는 게 중요한 거지.”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진짜 심각한 거 같긴 한데요. 그럼 전 어떻게 되는 거죠?”
갈수록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슬슬 걱정이 됐다.
‘이러다 퇴학이라도 당하는 거 아냐?’
그런데 뜻밖에도 조인아가 미소를 짓는 거였다.
“그 전에, 개인적인 궁금증을 풀고 가고 싶은데?”
“무슨……?”
“전에도 비슷한 질문을 했었지? C급, 아니 랭크업 전이니까 C-지. 그 랭크가 트리플 헤드 자르쿰에 도전하러 갔어. 사실 실려 나오는 게 맞거든? 그런데 어떻게 정반대의 결과가 나온 건지, 이것도 설명이 필요할 거 같은데?”
“어째 매번 해명해야 할 게 있네요.”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사실대로 말해.”
“당연히 그래야죠.”
수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있는 그대로 말하진 않을 것이다.
이럴 때를 위해 적당히 생각해둔 게 있었다.
양철호가 수호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죽이지는 않고… 사지 못쓰게 해서 학교에서 쫓겨나게 만들고 여러 가지 합병증으로 평생 고통스러운 삶을 살게 하는 정도? 진짜야! 생포해야 한다고 몇 번을 말했거든.”
수호가 헛웃음을 흘렸다.
“그게 죽는 것과 뭐가 다르지?”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말도 있잖아?”
“아니, 죽음보다 못한 삶이지. 하지만, 윤상현이 그걸 원했다면 나도 같은 걸 해줘야겠군.”
수호는 쓰러진 조상혁에게 다가가서 막힌 혈도를 풀어줬다.
“으으음.”
그가 천천히 눈을 떴다.
“양철호, 저 인간 챙겨서 나가. 밖에 윤상현 있으니까 같이 데리고 가고.”
“밖에?”
“지가 자초한 거긴 하지만, 멀쩡한 상태라고는 할 수 없게 됐거든. 살릴 수 있을지 없을지는 당신들 손에 달렸어.”
“자, 잠깐! 스킬을 풀어줘야 가지!”
“그거? 지금쯤이면 이미 풀렸을 걸?”
그 말에 양철호가 팔을 들어 보니 거짓말처럼 다시 움직여졌다.
“씨발, 다행이다.”
“뭐,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 거냐?”
양철호는 깨어난 조상혁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이번 의뢰는 완전히 조졌어. 여기 계속 있다가는 우리 인생도 같이 조질 판이고. 그러니까 얼른 빠져나가자.”
“우, 우리 이대로 보내 준대?”
조상혁이 곁눈질로 수호를 가리켰다.
수호가 한 마디 툭 던졌다.
“마음 바뀌기 전에 빨리 꺼져.”
“가, 가야지. 가자, 양철호.”
두 사람은 다급히 동굴 밖으로 향했다.
그들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수호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후우.”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일이 일어났다.
그 때문에 지친 것일까?
그것도 있지만, 다리가 풀릴 만한 일이었냐 하면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한창 운기하던 중에 방해를 받아 끝마무리가 확실하지 않았다.
그게 내내 마음에 걸렸다.
‘다행히 얼추 흡수가 끝나갈 때 들이닥쳐서 크게 손해는 안 봤지만.’
눈을 감고 확인해 보니 약간의 손실이 있었다.
아쉽긴 하지만 실망할 것은 아니었다.
자르쿰 보스가 마정석을 드랍하지 않았더라면, 또는 윤상현이 조금만 일찍 왔어도.
둘 중 하나만 안 좋게 됐어도 돌벽 아래 처박힌 건 윤상현이 아니라 자신이 됐을 거였다.
‘운이 좋았다, 이건.’
그렇게 생각하니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앞으론 좀 신중해져야겠다고 다짐하는데, 그를 부르는 소리가 동굴 벽을 타고 안으로 울려 퍼져 왔다.
“진수호! 너 거기 있냐!”
아는 목소리였다.
여기 있다고 대답하자 조금 뒤 전대환이 헐떡거리며 들어왔다.
그가 처음으로 본 것은 작은 동산만 한 보스의 시체였다.
전대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수호를 발견한 그가 물었다.
“이, 이거 네가 잡은 거야?”
“그럼요.”
“아니, 어떻게?”
“생각보다 약하던데요.”
“설마 그럼 밖에 죽어있는 늪 자르쿰들도?”
“전부 다는 아니겠지만 어느 정도는요?”
전대환은 자기 머리를 쥐어뜯었다.
“결국 이런 식으로 사고치는 놈이 나오는구나. 언젠가는 나올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하필이면 그게 우리 반, 그것도 너일 줄이야…….”
“저,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요?”
“너 궁금증 풀어주고 그럴 기분 아니다. 아, 이를 어쩐다.”
“혹시 오면서 다른 사람 못 보셨어요?”
“다른 사람 누구? 또 여기 들어온 애가 있다는 거냐?”
영문을 모르겠다는 그의 반응.
이건 사실 조금 전에 나왔어야 하는 거였다.
수호는 전대환의 태연한 척하는 연기를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 사람이 내부자군.’
* * *
윤상현은 죽지 않았다.
조상혁과 양철호는 그를 무사히 던전 밖으로 빼낸 다음, 윤상호에게 전화해 이 사실을 알렸다.
[병원! 빨리 병원으로 데려가!]
“안 그래도 지금 엄청 밟고 있어. 금방 도착한다.”
[당신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뭘 했길래 그 쉬운 일을 이렇게 만들어?]
“그건 내가 할 말이다! 뭐 C-? 지랄하고 있네. 너 겁대가리를 상실했니? 감히 의뢰 난이도를 후려쳐?”
[뭐, 뭔 소리야 그건?]
“네 동생, 인도적인 차원에서 병원까지 데려다주기는 한다만, 이걸로 끝이 아니야. 너 오늘 일, 확실히 보상해야 할 거다. 그렇지 않으면…….”
두 사람은 윤상현을 응급실에 떨어뜨려 놓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리고 12시간에 걸친 대수술이 끝났다.
수술실에서 집도의가 나오자 정유선이 그에게 매달리며 물었다.
“선생님! 우리 아들 어떻게 됐죠? 수술은 잘 끝났나요?”
“생명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정, 정말이에요?”
“네, 자제분께서 각성자라 다행이었습니다. 보통 사람이었으면 죽었어도 몇 번은 죽었을 치명상이었는데… 저희도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였고, 아드님도 끝까지 버텨준 덕분에 경과는 좋습니다. 다만…….”
“왜요?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다른 부상은 결국 시간이 해결해주겠지만 다리는… 경골과 비골이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아마 이 부위는 회복되기 어려울 겁니다.”
“그게 무슨 말이죠? 우리 상현이가 걷지 못하게 된다는 건가요?”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제 소견은 그렇습니다.”
“아아…….”
정유선은 다리에 힘이 풀린 듯, 휘청거리며 그 자리에 쓰러졌다.
“엄마!”
윤상호가 달려와 정유선을 부축했다.
“엄마, 좀 진정해요. 엄마까지 쓰러지면 어떡하라고!”
그는 정유선을 대기실 의자로 데려가 앉혔다.
“누나! 무슨 일이야?”
복도 끝에서 걸어오던 정진우가 이 광경을 보고 허겁지겁 뛰어왔다.
그는 정유선의 친동생이었다.
따라서 윤상현, 윤상호 형제에게는 외삼촌이 된다.
윤상호가 그에게 신경질을 냈다.
“수술 결과 나왔는데 어디서 뭐 하다가 이제야 오는 거예요?”
“아니, 중요한 전화가 와서……. 수술은 어떻게 됐는데?”
상호는 의사의 말을 간추려 전했다.
정진우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이런…….”
“삼촌.”
“왜?”
“아버지는 아직이죠?”
“어. 비서실에 연락해 봤는데 몇 달 전부터 정해진 스케줄이라 빼기 어렵다고 하시네.”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에요? 막내가 평생 휠체어 끌게 생겼다는데 그깟 회사 일이 뭐라고. 너무한다고 생각 안 해요?”
“난 뭐…….”
정진우는 대답도 못 하고 조카 눈치만 살폈다.
화제를 돌리기 위해 그가 다른 얘기를 꺼냈다.
“그건 그렇고 길드에서 연락이 왔거든?”
“벌써요?”
“어, 그 전화 받으러 갔다 온 거야. 내가 적당한 사람 있다고 했지? 바로 처리해 준다고 했어.”
“실력은 확실하겠죠?”
“그야 물론이지! 그쪽은 진짜 프로야. 네가 찾은 그 허접한 작자들하곤 급이 다르다니까? 지금 이 상황, 전부 해결해 주기로 했다. 그러니 걱정 말고 있어.”
* * *
던전에서 있었던 일로 수호는 일약 C반의 에이스로 등극해 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마지막 스테이지에 들어가서 자르쿰 보스를 때려잡는다?
C급 서넛이 조를 이뤄도 그렇게 하긴 쉽지 않았다.
그걸 단신으로 해냈으니 C반 수준을 넘어선 것만은 분명했다.
“어, 수호다!”
교실에 들어서자 경태와 친구들이 그를 맞았다.
전과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이야, 우리 에이스 왔어?”
경태가 웃으며 반겼고.
“가방은 나한테 줘.”
기훈은 수호의 가방을 빼앗다시피 해서 가져갔다.
“뭘 이렇게까지…….”
수호가 부담스러워하자 경태는 고개를 저었다.
“고마워서 그러지. 네가 우리 C-의 위상을 올려줬잖아. 뭐? 각성자는 등급만 높으면 장땡이라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한테 가서 말해주고 싶다. C급 애들도 못 하는 걸 네가 해냈다고. 난 너무 통쾌해서 어제 잠도 제대로 못 잤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이어지는 칭찬 퍼레이드에 경빈이 찬물을 끼얹었다.
“물에 빠진 사람 취급할 때는 언제고? 너 엄청 부정적으로 봤잖아. 저게 뭐 하는 짓이냐고.”
“그러는 너는? 무리수 둔다고 하지 않았냐?”
둘은 티격태격.
유치한 입씨름을 계속하는 중에 누군가가 둘 사이로 파고들었다.
그는 두 사람의 어깨에 팔을 걸치며 말했다.
“내가 보기엔 너희들이 좋아할 일이 아닌 거 같은데, 왜들 호들갑이냐?”
“뭐라고?”
“그렇잖아. 누가 보면 너네가 보스 잡은 줄 알겠다? 사실 너희가 한 건 아무것도 없는데.”
끼어든 사람은 최현일이라는 녀석이었다.
경태가 C-를 대표한다면 그는 C등급의 구심점이라고나 할까?
비슷한 포지션의 등장에 경태의 얼굴이 굳었다.
“지금 시비 거는 거야?”
“사실을 말한 건데 그게 왜 시비? 그리고 애초에 너희들이 좋아할 일이 아니라니까. 보스 경험치까지 먹었는데 아직도 C-겠어?”
최현일은 둘 사이를 빠져나와서 수호에게 어깨동무를 했다.
“내 말 맞지?”
“뭐, 랭크가 오르긴 했는데…….”
그 말에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졌다.
세 사람 다 표정이 안 좋은데 최현일 혼자 미소를 짓는다.
“너도 이제 우리 쪽이야. 너 같은 실력자는 당연히 환영이고. 앞으로 잘 지내보자.”
그러고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데 수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 쪽? 랭크업하고 그게 무슨 상관이지?”
“그, 그러게. 무슨 결혼정보업체야 뭐야? 랭크 맞는 사람끼리만 친하게 지내라는 법 있나?”
“하여간 C급 애들은 이상한 엘리트 의식이 있단 말이지? 아, 물론 수호 넌 예외고.”
이렇게 말은 하지만 다들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수호는 이들의 이런 태도가 우스운 한편 이해가 되기도 했다.
친구 사이라는 건 서로 동등한 관계에서만 성립되는 법이다.
그건 천 년 전에도 그러했다.
초절정고수와 삼류 무인 사이에 우정이 꽃필 수 있을까?
차라리 백면서생이라면 그건 그럴 수 있다.
아예 분야가 다르니까.
하지만 위와 같은 사례는 듣도 보도 못했다.
‘그렇다곤 해도 C-와 C가 그 정도 차이인지는…….’
최현일이 초를 쳐준 덕분에 다들 분위기가 급 다운되어 버렸다.
전부 입을 다물고 있던 그때, 교내방송 시그널이 울렸다.
[1-C 진수호 학생, 지금 바로 교무실로 오세요.]
‘올 것이 왔군.’
가슴이 덜컥 내려앉지는 않았다.
이런 어색한 분위기에서 빠질 수 있게 돼 오히려 고맙게 느껴졌다.
교무실에 들어가자 조인아가 팔짱을 낀 채 수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왔네. 내 방으로 와. 전 선생님도요.”
수호는 조인아의 책상 맞은편에 앉았다.
전대환은 벽에 기댄 채 안절부절못하고 서 있었다.
조인아가 입을 열었다.
“조만간 다시 볼 거란 예감은 들었는데 이렇게까지 빠를 줄은 몰랐어. 너 사람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구나?”
화가 난 건지 안 난 건지 구분이 안 되는 말투, 표정이었다.
“뭘요.”
수호가 씩 웃자 전대환이 언성을 높였다.
“너 지금 이게 장난인 줄 알아? 심각한 상황이니까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게 좋을 거다.”
조인아가 그의 말을 받았다.
“심각하긴 하지. 우선 넌 인솔 교사의 지시를 어겼어. 보스 스테이지에 들어가도 좋다고 누가 그랬지?”
“들어가지 말라고 한 적도 없는데요.”
“말장난할 생각 마. 교사의 허락 없이는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가선 안 된다는 거, 분명히 알고 있었을 거야. 전 선생, 사전에 공지했죠?”
“그럼요. 던전에 입장한 뒤에도 반복해서 말했습니다.”
“아.”
이렇게 되면 할 말이 없다.
“무슨 재판 당하는 것 같은 기분인데요.”
“같은 게 아니라 사실 그게 맞아. 널 어떻게 할지는 내 손에 달렸으니까. 그리고 이 건은 네가 교사의 지시를 어긴 게 맞고. 인정하니?”
“인정할 수밖에 없겠네요.”
이런 질책 정도는 각오한 부분이었다.
그만한, 아니 그 이상의 성과를 얻었으니까.
“그럼 이걸로 된 건가요?”
조인아가 고개를 저었다.
“단순 지시 위반이면 너하고 내가 마주 보고 있을 리가 없겠지? 보스 스테이지에 들어간 것까지는, 나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 당연히 호기심이 생겼겠지. 가장 중요한 건 거기까지는 학교 안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는 거야. 그런데 거길 싹 쓸어버린다?”
이 부분에서 그녀는 이를 꽉 깨물었다.
“그때는 협회로 문제가 넘어가는 거지. 우린 그 스테이지에 권한이 없거든.”
“으음.”
“그렇게 사고 친 대가로 얼마나 성장했는지 확인해 볼까?”
조인아가 랭크 측정기를 꺼내 앞으로 내밀었다.
당연히 수호는 어떤 결과가 나올지 알고 있었다.
‘역시 철저한 성격이란 말이지.’
랭크 측정기에 손을 올리자 수호의 랭크가 표시되었다.
“축하해, 랭크 올랐구나. 한 가지 아쉬운 건… 마정석은 안 나왔나 보네?”
“예, 뭐 다행히도.”
“다행이라고 생각해? 물론 마정석이 나왔는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아. 네가 협회 측 각성자가 차지해야 할 몫을 가져갔다는 게 중요한 거지.”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진짜 심각한 거 같긴 한데요. 그럼 전 어떻게 되는 거죠?”
갈수록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슬슬 걱정이 됐다.
‘이러다 퇴학이라도 당하는 거 아냐?’
그런데 뜻밖에도 조인아가 미소를 짓는 거였다.
“그 전에, 개인적인 궁금증을 풀고 가고 싶은데?”
“무슨……?”
“전에도 비슷한 질문을 했었지? C급, 아니 랭크업 전이니까 C-지. 그 랭크가 트리플 헤드 자르쿰에 도전하러 갔어. 사실 실려 나오는 게 맞거든? 그런데 어떻게 정반대의 결과가 나온 건지, 이것도 설명이 필요할 거 같은데?”
“어째 매번 해명해야 할 게 있네요.”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사실대로 말해.”
“당연히 그래야죠.”
수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있는 그대로 말하진 않을 것이다.
이럴 때를 위해 적당히 생각해둔 게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