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14화]
수호는 늪 자르쿰들을 슥슥 지나쳐 갔다.
놈들은 침입자의 존재는 생각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늪의 음산한 분위기와 사방에 깔린 안개가 아직 성에 안 차는 경공 실력을 보완해 주고 있었다.
곧 늪지대도 끝이 보였다.
바닥이 슬슬 단단해지기 시작했다.
안개도 거의 걷혀서 시야가 멀리까지 확보되었다.
‘음?’
수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뜬금없이 솟아나 있는 높다란 돌벽이었다.
중턱에는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더 가까이서 보니 그건 동굴 입구였다.
‘저기군.’
바로 느낌이 왔다.
여긴 던전이다.
저런 눈에 띄는 장소가 아무 의미 없이 존재할 리는 없었다.
그는 늪 자르쿰들의 눈을 피해 돌벽으로 접근, 접근한 뒤에는 벽을 타고 올라갔다.
그렇게 들어간 동굴 안은 좁고 어두컴컴했다.
‘이런 곳에 보스가 있기는 한 걸까?’
살짝 자신의 감을 의심하던 차.
통로가 점점 벌어지더니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아늑하게 꾸며져 있는 누군가의 거처였다.
동굴 바닥에는 러그가 쫙 깔려 있고 취향을 알 수 없는 괴상한 장식물들도 보였다.
그 한가운데에서 대자로 뻗은 채 자고 있는 자르쿰.
“드르르릉… 쿰!”
천장을 뚫어버릴 듯한 기세로 코를 골고 있었다.
보스가 틀림없다.
놈을 보자마자 든 생각이었다.
누운 모습만 봐도 뭔가 다른 종류라는 게 느껴졌다.
‘엄청 크군.’
자르쿰들은 스테이지를 거듭할수록 커지더니 보스급에 와서는 거인이 되어버렸다.
수호는 소리 없이 다가가서 보스의 정면을 바라봤다.
놈의 얼굴은…….
‘뭐야?’
그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당연히 얼굴은 특별 관리가 필요할 정도로 못생겼다.
하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그건 별로 놀랄 일은 아니었다.
‘뭐 이런 생명체가…….’
그런데 놈의 어깨 위에 달린 머리의 개수.
둘도 아니고 셋이다.
그뿐만 아니라 몸체의 좌우로 팔이 두 개씩 더 달린, 그야말로 삼두육비의 괴물이었다.
“쿠우우움!”
보스가 숨을 토해내자 절로 얼굴이 찡그려졌다.
어쩐지 코 고는 소리가 말도 안 되게 시끄럽다 했더니, 3채널 스테레오 방식으로 골고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지척까지 쉽게 다가갈 수 있긴 했지만.
수호는 검을 들어 보스의 목 하나를 내리쳤다.
뎅겅!
이 칼질 한 번으로 보스의 머리가 두 개로 줄어들었다.
보스가 눈을 떴다.
“크어어엉!”
놈은 울부짖으며 일어났다.
몸을 세우자 키가 얼마나 되는지 가늠해볼 수 있었다.
‘3미터는 안 되겠고, 2미터 반쯤?’
아무튼 거대한 놈이었다.
보스는 광분하며 수호에게 달려들었다.
놈의 무기는 투박 그 자체였다.
가운데는 몽둥이, 오른쪽은 낫을 들고 있었는데, 일반적인 크기가 아닌 거인용이라 우습게 볼 것은 아니었다.
깡! 깡! 깡!
챙, 챙!
수호는 양방향에서 날아오는 공격을 막기에도 급급했다.
거인의 괴력, 그리고 두 개이자 하나인 몸으로 펼치는 연수합격술.
내력을 끌어올리지 않았더라면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머리 하나 자르고 시작하길 잘했군.’
보스의 왼쪽 두 팔은 축 늘어져 있었다.
그쪽을 관장하던 머리가 잘려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다.
받아내는 거야 그럭저럭 되고 있지만 이러다간 내공이 바닥나는 순간 끝장이었다.
뭔가를 해야 했다.
하지만 칼로 치명타를 내기에는 보스가 걸친 갑옷이 너무 튼튼해 보였다.
또다시 머리를 노리는 수밖에는 없는데…….
그것도 쉽지 않겠다고 생각하던 순간, 바닥에 놓인 랜스가 눈에 들어왔다.
왼쪽 머리의 무기인 듯했다.
“흐아아압!”
수호는 보스에게 검을 던졌다.
챙!
놈이 무기를 들어 막자 뒤로 물러나며 내공을 폭발시켰다.
수호는 랜스가 있는 쪽으로 몸을 날렸다.
“크르르룸!”
보스가 바로 뒤에 따라붙었다.
수호는 3미터가 넘는 기다란 창을 어렵지 않게 들어 올리고는 놈의 목에다 창끝을 찔러 넣었다.
“끅, 끄으윽…….”
“끼에에엑!”
찔린 쪽의 머리는 제대로 소리도 못 내고 끅끅거렸지만, 고통을 공유하던 오른쪽 머리는 힘껏 비명을 내질렀다.
그동안 수호는 던진 검을 집어 들고 보스의 뒤로 덮쳐 들어가고 있었다.
서걱!
목 하나가 또 떨어졌다.
수호는 놈의 등에서 내려와 반대편에 착지했다.
“끄, 끄으으으.”
보스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 듯했다.
놈의 불신으로 가득 찬 눈빛을 마주 보며, 수호가 씩 웃었다.
“개인적인 감정은 없지만… 잘 가라.”
랜스를 힘주어 밀어 넣었다.
창끝은 놈의 목을 뚫고 밖으로 빠져나왔다.
잠시 후.
보스의 몸이 허물어지자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레벨업 메시지가 떴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수호의 눈길을 끄는 게 있었다.
‘뭐지, 저건?’
쓰러진 보스의 시체, 옆구리 쪽에 반짝이는 뭔가가 있었다.
그 광채는 동굴 벽에 걸린 횃불보다도 밝아서 도저히 못 보고 지나칠 수가 없었다.
‘방금 전까지는 없었던 건데?’
수호는 다가가서 빛나는 물체를 주워들었다.
‘마정석?’
약간 얼떨떨해하는 중, 진수호의 기억이 밀려들어 왔다.
‘아니 이거, 대박이잖아?’
마정석은 쉽게 뜨는 물건이 아니다.
단 한 번의 보스킬로 드랍됐다는 건, 정말 운이 좋은 거였다.
방방 뛰고 공중제비까지 돌면서 동굴 안을 누빈다 해도 아무도 방정맞다고는 못할 일이었다.
보스에게서 나온 마정석은 자그마한 돌멩이만 한 크기였다.
손바닥 위에 올려놓으니 손 안쪽으로 딱 들어왔다.
“이걸 뭐… 어떻게 흡수해야 하는 거지?”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순간, 마정석이 더욱 밝게 빛났다.
그와 함께.
익숙한 기운이 수호의 몸으로 흘러들어왔다.
“아!”
절로 탄성이 흘러나왔다.
이건 마기다.
수호의 기감은 솜씨 좋은 소믈리에가 와인을 감별하듯 일순간에 마기의 순도를 측정해 냈다.
혈마제였을 당시 그의 내공은 고밀도의 마기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런데 이 기운은 그보다도 더 순수했다.
그게 가능한 건가 싶었지만 기감은 언제나 사실만을 말한다.
불순물이라고는 티끌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마의 정수, 그 자체였다.
‘마물한테서 나온 거라 그런가?’
문제는 각성자는 마물이 아니고 에너지 또한 마기와는 다르다는 것.
각성자는 마정석을 온전히 흡수할 수 없다는 게 정설이었다.
수호 또한 이를 느끼고 있었다.
‘안 돼!’
아까운 마기가 물에 탄 설탕처럼 사르르 녹아버리고 있었다.
결국 남는 건 얼마 안 되는 에너지였다.
그 에너지는 내부 깊숙한 곳으로 이동하여 전체 에너지의 일부로 받아들여졌다.
‘이대로 사라지게 놔둘 수는 없지.’
얼마 안 남은 흑위마공의 기운을 끌어올려 마기를 감쌌다.
보호막이 생기자 마기는 더 이상 손실되지 않았다.
그는 털썩 주저앉아 운기를 시작했다.
이건 갑자기 찾아온 행운이다.
전생의 표현을 빌리자면 기연을 맞닥뜨린 것.
지금은 정신을 한곳으로 모아야 할 때였다.
내공을 벗어나 에너지가 있는 쪽으로 올라가려는 마기를 제어하면서, 흑위마공의 구결대로 기를 운행했다.
웬만한 정신력으로는 안 되고, 심력 또한 꽤나 소모되는 일이다.
송골송골.
콧잔등에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미간에는 깊은 골이 파였다.
문득 수호의 안색이 더욱 찌푸려졌다.
집중을 깨는 잡음이 들린 탓이다.
저벅거리는 발소리, 그리고 두런거리는 소리도 들려왔다.
“제대로 살펴본 거 맞아? 이런 데를 누가 들어온다고.”
“확실히 살폈다고 이미 말했다. 그리고 너, 나이도 어린놈이 왜 자꾸 반말이지?”
“이 아저씨 웃기네. 난 지금 당신 고용주야.”
“무슨 고용주? 의뢰인이지.”
“그거나, 그거나. 내가 돈을 주고 당신을 샀다는 게 중요한 거지, 여기서 나이가 무슨 상관?”
“사긴 뭘 사. 판 적도 없다.”
“흐음, 당신 프로 맞아? 프로 의식이 너무 없는데?”
또 다른 음성이 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건 맞지. 하느님 위에 의뢰인인데, 말이 길건 짧건 그런 걸 신경 쓰는 거 보니까 조상혁이 요즘 좀 버나 봐? 갑자기 자존심을 챙기네?”
조상혁이라 불린 사람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 나 아마추어다. 됐냐? 그리고 벌긴 뭘 벌어. 벌면 내가 이따위 일을 하겠냐? 어, 잠깐! 저거 뭐야, 보스 아냐?”
“맞는… 것 같은데?”
세 사람은 쓰러진 보스를 보며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조상혁은 놈이 흘린 검붉은 피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따뜻하군. 멀리 가진 못했을 거다.”
“그 말이 맞긴 하네. 저기 있으니까.”
“뭐?”
조상혁이 고개를 돌리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수호의 모습이 보였다.
그가 의뢰인에게 물었다.
“저 친구 맞아?”
“…….”
“표정만 봐도 알겠군. 근데 왜 저러고 앉아 있지? 다쳤나?”
자기를 의뢰인이라고 말한 사내가 수호에게 다가가서 그를 툭툭 쳤다.
“야, 일어나.”
셋 중 하나는 낯선 목소리가 아니라고 생각하긴 했는데 가까이서 들으니 더 확실해졌다.
수호가 눈을 떴다.
자기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윤상현?”
“그래, 나다. 씹새끼야!”
“네가 왜 여기에?”
“놀랐냐? 여기서 내가 나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단 표정인데? 좋아, 그 얼굴.”
윤상현은 히죽거리며 수호를 내려다봤다.
수호는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은 채 눈만 움직여 그를 훑어봤다.
“병원에 있다더니 다 나았나 보네?”
“아직은 아니지.”
윤상현은 붕대가 감긴 팔을 들어 보였다.
“날 이렇게 만들고, 넌 네가 이겼다고 생각했겠지? 거기다 만년 F가 C반으로 승격까지. 요새 학교 다닐 맛 좀 났을 거야? 하지만 그것도 오늘로 끝이다.”
“저 두 사람을 믿고 이러는 거냐?”
“어. 내 힘으론 어렵다는 거 아니까. 형도 큰소리만 뻥뻥 칠 줄 알지 도움은 하나도 안 되고. 그러니 뭐, 남의 손이라도 빌려야지 어쩌겠어.”
“한심하군.”
“흥, 그게 너와 나의 결정적 차이다. 랭크 좀 올랐다고 눈에 뵈는 게 없지? 근데 세상은 랭크가 다가 아니거든? 결국 넌 나한테 안 돼.”
“그래, 그런 정신승리는 아무나 할 수 없는 거긴 하지. 그건 진짜 널 따라갈 수가 없겠다.”
“뭐 이 새끼야?”
윤상현의 얼굴이 구겨졌다.
수호는 몸을 일으켰다.
그의 표정은 무척 편안해 보였다.
몇 달간 자길 괴롭혔던 같은 반 동기가 용역을 고용해 던전에까지 쫓아온 상황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너 진짜 재수 없다. 한 번도 아니고 어떻게 때마다 이러냐.”
“미친놈. 뭐라는 거야? 진수호, 넌 그냥 죽었다고 복창이나 하면 된다.”
“글쎄. 이제는 어려울 텐데?”
수호가 팔짱을 꼈다.
시선은 윤상현에게로 향하고 있지만 실은 내공이 얼마나 늘어났는지 내관(內觀)하는 중이었다.
‘미쳤군. 이게 마정석의 효과인가?’
속으론 크게 놀랐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척 말을 이어갔다.
“여길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건지… 집념 하나는 인정해 주지. 근데 어쩌냐? 넌 결정적인 실수를 했어.”
“……?”
“앞으로 승리감은 승리가 확실해진 뒤에나 만끽하라고. 설레발치기 전에 행동부터 했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지.”
정말이었다.
운기하는 중에 습격을 받았더라면 이런 여유를 보일 순 없었을 터였다.
“남이사 뭘 먼저 하든. 어차피 넌 끝났어.”
“미안하지만, 이제는 어렵게 됐다.”
잠깐만 운기해 봐도 알 수 있었다.
마정석을 흡수하기 이전과 이후.
비교하기도 민망할 만큼 달라졌음을.
“허세는.”
입가에 비웃음이 가득 떠올라 있었지만, 윤상현의 눈빛은 흔들리고 있었다.
수호에게서 두려움을 전혀 엿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물러나며 고용인들에게 명령했다.
“저 자식 담가 버려!”
수호는 늪 자르쿰들을 슥슥 지나쳐 갔다.
놈들은 침입자의 존재는 생각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늪의 음산한 분위기와 사방에 깔린 안개가 아직 성에 안 차는 경공 실력을 보완해 주고 있었다.
곧 늪지대도 끝이 보였다.
바닥이 슬슬 단단해지기 시작했다.
안개도 거의 걷혀서 시야가 멀리까지 확보되었다.
‘음?’
수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뜬금없이 솟아나 있는 높다란 돌벽이었다.
중턱에는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더 가까이서 보니 그건 동굴 입구였다.
‘저기군.’
바로 느낌이 왔다.
여긴 던전이다.
저런 눈에 띄는 장소가 아무 의미 없이 존재할 리는 없었다.
그는 늪 자르쿰들의 눈을 피해 돌벽으로 접근, 접근한 뒤에는 벽을 타고 올라갔다.
그렇게 들어간 동굴 안은 좁고 어두컴컴했다.
‘이런 곳에 보스가 있기는 한 걸까?’
살짝 자신의 감을 의심하던 차.
통로가 점점 벌어지더니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아늑하게 꾸며져 있는 누군가의 거처였다.
동굴 바닥에는 러그가 쫙 깔려 있고 취향을 알 수 없는 괴상한 장식물들도 보였다.
그 한가운데에서 대자로 뻗은 채 자고 있는 자르쿰.
“드르르릉… 쿰!”
천장을 뚫어버릴 듯한 기세로 코를 골고 있었다.
보스가 틀림없다.
놈을 보자마자 든 생각이었다.
누운 모습만 봐도 뭔가 다른 종류라는 게 느껴졌다.
‘엄청 크군.’
자르쿰들은 스테이지를 거듭할수록 커지더니 보스급에 와서는 거인이 되어버렸다.
수호는 소리 없이 다가가서 보스의 정면을 바라봤다.
놈의 얼굴은…….
‘뭐야?’
그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당연히 얼굴은 특별 관리가 필요할 정도로 못생겼다.
하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그건 별로 놀랄 일은 아니었다.
‘뭐 이런 생명체가…….’
그런데 놈의 어깨 위에 달린 머리의 개수.
둘도 아니고 셋이다.
그뿐만 아니라 몸체의 좌우로 팔이 두 개씩 더 달린, 그야말로 삼두육비의 괴물이었다.
“쿠우우움!”
보스가 숨을 토해내자 절로 얼굴이 찡그려졌다.
어쩐지 코 고는 소리가 말도 안 되게 시끄럽다 했더니, 3채널 스테레오 방식으로 골고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지척까지 쉽게 다가갈 수 있긴 했지만.
수호는 검을 들어 보스의 목 하나를 내리쳤다.
뎅겅!
이 칼질 한 번으로 보스의 머리가 두 개로 줄어들었다.
보스가 눈을 떴다.
“크어어엉!”
놈은 울부짖으며 일어났다.
몸을 세우자 키가 얼마나 되는지 가늠해볼 수 있었다.
‘3미터는 안 되겠고, 2미터 반쯤?’
아무튼 거대한 놈이었다.
보스는 광분하며 수호에게 달려들었다.
놈의 무기는 투박 그 자체였다.
가운데는 몽둥이, 오른쪽은 낫을 들고 있었는데, 일반적인 크기가 아닌 거인용이라 우습게 볼 것은 아니었다.
깡! 깡! 깡!
챙, 챙!
수호는 양방향에서 날아오는 공격을 막기에도 급급했다.
거인의 괴력, 그리고 두 개이자 하나인 몸으로 펼치는 연수합격술.
내력을 끌어올리지 않았더라면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머리 하나 자르고 시작하길 잘했군.’
보스의 왼쪽 두 팔은 축 늘어져 있었다.
그쪽을 관장하던 머리가 잘려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다.
받아내는 거야 그럭저럭 되고 있지만 이러다간 내공이 바닥나는 순간 끝장이었다.
뭔가를 해야 했다.
하지만 칼로 치명타를 내기에는 보스가 걸친 갑옷이 너무 튼튼해 보였다.
또다시 머리를 노리는 수밖에는 없는데…….
그것도 쉽지 않겠다고 생각하던 순간, 바닥에 놓인 랜스가 눈에 들어왔다.
왼쪽 머리의 무기인 듯했다.
“흐아아압!”
수호는 보스에게 검을 던졌다.
챙!
놈이 무기를 들어 막자 뒤로 물러나며 내공을 폭발시켰다.
수호는 랜스가 있는 쪽으로 몸을 날렸다.
“크르르룸!”
보스가 바로 뒤에 따라붙었다.
수호는 3미터가 넘는 기다란 창을 어렵지 않게 들어 올리고는 놈의 목에다 창끝을 찔러 넣었다.
“끅, 끄으윽…….”
“끼에에엑!”
찔린 쪽의 머리는 제대로 소리도 못 내고 끅끅거렸지만, 고통을 공유하던 오른쪽 머리는 힘껏 비명을 내질렀다.
그동안 수호는 던진 검을 집어 들고 보스의 뒤로 덮쳐 들어가고 있었다.
서걱!
목 하나가 또 떨어졌다.
수호는 놈의 등에서 내려와 반대편에 착지했다.
“끄, 끄으으으.”
보스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 듯했다.
놈의 불신으로 가득 찬 눈빛을 마주 보며, 수호가 씩 웃었다.
“개인적인 감정은 없지만… 잘 가라.”
랜스를 힘주어 밀어 넣었다.
창끝은 놈의 목을 뚫고 밖으로 빠져나왔다.
잠시 후.
보스의 몸이 허물어지자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레벨업 메시지가 떴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수호의 눈길을 끄는 게 있었다.
‘뭐지, 저건?’
쓰러진 보스의 시체, 옆구리 쪽에 반짝이는 뭔가가 있었다.
그 광채는 동굴 벽에 걸린 횃불보다도 밝아서 도저히 못 보고 지나칠 수가 없었다.
‘방금 전까지는 없었던 건데?’
수호는 다가가서 빛나는 물체를 주워들었다.
‘마정석?’
약간 얼떨떨해하는 중, 진수호의 기억이 밀려들어 왔다.
‘아니 이거, 대박이잖아?’
마정석은 쉽게 뜨는 물건이 아니다.
단 한 번의 보스킬로 드랍됐다는 건, 정말 운이 좋은 거였다.
방방 뛰고 공중제비까지 돌면서 동굴 안을 누빈다 해도 아무도 방정맞다고는 못할 일이었다.
보스에게서 나온 마정석은 자그마한 돌멩이만 한 크기였다.
손바닥 위에 올려놓으니 손 안쪽으로 딱 들어왔다.
“이걸 뭐… 어떻게 흡수해야 하는 거지?”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순간, 마정석이 더욱 밝게 빛났다.
그와 함께.
익숙한 기운이 수호의 몸으로 흘러들어왔다.
“아!”
절로 탄성이 흘러나왔다.
이건 마기다.
수호의 기감은 솜씨 좋은 소믈리에가 와인을 감별하듯 일순간에 마기의 순도를 측정해 냈다.
혈마제였을 당시 그의 내공은 고밀도의 마기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런데 이 기운은 그보다도 더 순수했다.
그게 가능한 건가 싶었지만 기감은 언제나 사실만을 말한다.
불순물이라고는 티끌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마의 정수, 그 자체였다.
‘마물한테서 나온 거라 그런가?’
문제는 각성자는 마물이 아니고 에너지 또한 마기와는 다르다는 것.
각성자는 마정석을 온전히 흡수할 수 없다는 게 정설이었다.
수호 또한 이를 느끼고 있었다.
‘안 돼!’
아까운 마기가 물에 탄 설탕처럼 사르르 녹아버리고 있었다.
결국 남는 건 얼마 안 되는 에너지였다.
그 에너지는 내부 깊숙한 곳으로 이동하여 전체 에너지의 일부로 받아들여졌다.
‘이대로 사라지게 놔둘 수는 없지.’
얼마 안 남은 흑위마공의 기운을 끌어올려 마기를 감쌌다.
보호막이 생기자 마기는 더 이상 손실되지 않았다.
그는 털썩 주저앉아 운기를 시작했다.
이건 갑자기 찾아온 행운이다.
전생의 표현을 빌리자면 기연을 맞닥뜨린 것.
지금은 정신을 한곳으로 모아야 할 때였다.
내공을 벗어나 에너지가 있는 쪽으로 올라가려는 마기를 제어하면서, 흑위마공의 구결대로 기를 운행했다.
웬만한 정신력으로는 안 되고, 심력 또한 꽤나 소모되는 일이다.
송골송골.
콧잔등에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미간에는 깊은 골이 파였다.
문득 수호의 안색이 더욱 찌푸려졌다.
집중을 깨는 잡음이 들린 탓이다.
저벅거리는 발소리, 그리고 두런거리는 소리도 들려왔다.
“제대로 살펴본 거 맞아? 이런 데를 누가 들어온다고.”
“확실히 살폈다고 이미 말했다. 그리고 너, 나이도 어린놈이 왜 자꾸 반말이지?”
“이 아저씨 웃기네. 난 지금 당신 고용주야.”
“무슨 고용주? 의뢰인이지.”
“그거나, 그거나. 내가 돈을 주고 당신을 샀다는 게 중요한 거지, 여기서 나이가 무슨 상관?”
“사긴 뭘 사. 판 적도 없다.”
“흐음, 당신 프로 맞아? 프로 의식이 너무 없는데?”
또 다른 음성이 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건 맞지. 하느님 위에 의뢰인인데, 말이 길건 짧건 그런 걸 신경 쓰는 거 보니까 조상혁이 요즘 좀 버나 봐? 갑자기 자존심을 챙기네?”
조상혁이라 불린 사람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 나 아마추어다. 됐냐? 그리고 벌긴 뭘 벌어. 벌면 내가 이따위 일을 하겠냐? 어, 잠깐! 저거 뭐야, 보스 아냐?”
“맞는… 것 같은데?”
세 사람은 쓰러진 보스를 보며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조상혁은 놈이 흘린 검붉은 피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따뜻하군. 멀리 가진 못했을 거다.”
“그 말이 맞긴 하네. 저기 있으니까.”
“뭐?”
조상혁이 고개를 돌리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수호의 모습이 보였다.
그가 의뢰인에게 물었다.
“저 친구 맞아?”
“…….”
“표정만 봐도 알겠군. 근데 왜 저러고 앉아 있지? 다쳤나?”
자기를 의뢰인이라고 말한 사내가 수호에게 다가가서 그를 툭툭 쳤다.
“야, 일어나.”
셋 중 하나는 낯선 목소리가 아니라고 생각하긴 했는데 가까이서 들으니 더 확실해졌다.
수호가 눈을 떴다.
자기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윤상현?”
“그래, 나다. 씹새끼야!”
“네가 왜 여기에?”
“놀랐냐? 여기서 내가 나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단 표정인데? 좋아, 그 얼굴.”
윤상현은 히죽거리며 수호를 내려다봤다.
수호는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은 채 눈만 움직여 그를 훑어봤다.
“병원에 있다더니 다 나았나 보네?”
“아직은 아니지.”
윤상현은 붕대가 감긴 팔을 들어 보였다.
“날 이렇게 만들고, 넌 네가 이겼다고 생각했겠지? 거기다 만년 F가 C반으로 승격까지. 요새 학교 다닐 맛 좀 났을 거야? 하지만 그것도 오늘로 끝이다.”
“저 두 사람을 믿고 이러는 거냐?”
“어. 내 힘으론 어렵다는 거 아니까. 형도 큰소리만 뻥뻥 칠 줄 알지 도움은 하나도 안 되고. 그러니 뭐, 남의 손이라도 빌려야지 어쩌겠어.”
“한심하군.”
“흥, 그게 너와 나의 결정적 차이다. 랭크 좀 올랐다고 눈에 뵈는 게 없지? 근데 세상은 랭크가 다가 아니거든? 결국 넌 나한테 안 돼.”
“그래, 그런 정신승리는 아무나 할 수 없는 거긴 하지. 그건 진짜 널 따라갈 수가 없겠다.”
“뭐 이 새끼야?”
윤상현의 얼굴이 구겨졌다.
수호는 몸을 일으켰다.
그의 표정은 무척 편안해 보였다.
몇 달간 자길 괴롭혔던 같은 반 동기가 용역을 고용해 던전에까지 쫓아온 상황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너 진짜 재수 없다. 한 번도 아니고 어떻게 때마다 이러냐.”
“미친놈. 뭐라는 거야? 진수호, 넌 그냥 죽었다고 복창이나 하면 된다.”
“글쎄. 이제는 어려울 텐데?”
수호가 팔짱을 꼈다.
시선은 윤상현에게로 향하고 있지만 실은 내공이 얼마나 늘어났는지 내관(內觀)하는 중이었다.
‘미쳤군. 이게 마정석의 효과인가?’
속으론 크게 놀랐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척 말을 이어갔다.
“여길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건지… 집념 하나는 인정해 주지. 근데 어쩌냐? 넌 결정적인 실수를 했어.”
“……?”
“앞으로 승리감은 승리가 확실해진 뒤에나 만끽하라고. 설레발치기 전에 행동부터 했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지.”
정말이었다.
운기하는 중에 습격을 받았더라면 이런 여유를 보일 순 없었을 터였다.
“남이사 뭘 먼저 하든. 어차피 넌 끝났어.”
“미안하지만, 이제는 어렵게 됐다.”
잠깐만 운기해 봐도 알 수 있었다.
마정석을 흡수하기 이전과 이후.
비교하기도 민망할 만큼 달라졌음을.
“허세는.”
입가에 비웃음이 가득 떠올라 있었지만, 윤상현의 눈빛은 흔들리고 있었다.
수호에게서 두려움을 전혀 엿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물러나며 고용인들에게 명령했다.
“저 자식 담가 버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