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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수호의 머릿속에는 성질이 다른 두 가지 기억이 공존하고 있다.
하나는 이 몸의 원래 주인인 진수호의 낯선 기억.
무려 17년 치다.
다른 하나는 그의 정체성을 이루는 전생의 기억인데, 이쪽은 그 세 배를 훌쩍 넘는다.
실제 겪었던 인생이니만큼 그보다 익숙할 수 없지만, 켜켜이 쌓인 기억은 낡고 변질되어 이제는 떠올려지지 않는 것도 있었다.
하지만 첫 실전은 아직까지도 생생했다.
눈을 감으면 그때의 이미지가 선명히 그려진다.
검이 상체를 관통하자 일그러지는 사내의 얼굴.
손잡이를 타고 전해져 오는 살인의 감촉이 생경했다.
이윽고 퍼지는 코를 찌를 듯한 혈향.
‘당황해서 내력도 제대로 끌어올리지 못했었지. 출수가 조금만 늦었어도…….’
그랬더라면 무림의 공포로 군림한 혈마제의 신화는 채 몇 페이지를 넘겨보기도 전에 마침표를 찍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풋내기의 몸인 것은 전생과 같지만 알맹이에 든 정신은 산전수전 다 겪은 고인물 중의 고인물!
그런데.
‘음?’
퍽!
수호가 인상을 찡그렸다.
윤상호의 주먹이 복부를 강타한 것.
그는 이 한 방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퍽퍽! 퍽!
묵직한 타격음.
극심한 통증이 연이어 내부를 뒤흔들었다.
팔다리가 꽁꽁 묶인 채 샌드백처럼 되어버린 수호였다.
경태는 전대환에게 가서 걱정스레 물었다.
“승패가 갈린 거 같은데요. 슬슬 말려야 하지 않을까요?”
“뭘 얼마나 했다고. 한쪽은 아직 스킬도 안 썼잖아. 좀 기다려 봐.”
“기다린다고 뭐가 달라져요?”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이런 말 못 들어봤어?”
전대환은 가볍게 일축하고는 두 사람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누가 봐도 상황은 종료된 듯 보였다.
하지만 수호는 소리 없이 웃고 있었다.
윤상호가 어이없어하며 물었다.
“왜 쪼개지? 마조히스트냐?”
“아니, 나한텐 웃긴 일이라서.”
수호가 퉤 하고 피를 뱉어냈다.
“……?”
“머리는 팽팽 돌아가는데 몸이 말을 안 들어서 말이야. 잊고 있었어. 내가 형편없이 약해졌다는 걸.”
“뭐라는 거야?”
“안타깝지만 받아들여야겠지.”
이해할 수 없는 말에, 윤상호는 대화를 포기하고 다음 공격을 준비했다.
“약간 맛이 간 거 같은데, 맞다 보면 제정신이 돌아오겠지… 음?”
소매를 걷어붙이고 고개를 든 윤상호의 표정이 일순 변했다.
그와 같은 변화는 이 광경을 지켜보던 모든 이에게서 일어났다.
“……!”
“저, 저기 봐!”
파사사삭!
수호를 구속하던 검은 손들이 갈가리 찢겨 나갔다.
자유의 몸이 된 수호는 앞을 바라봤다.
윤상호는 아직도 여유가 있었다.
“뭘 어떻게 한 거지? 못 봤으니까, 다시 봐야겠는데?”
사아아아!
윤상호의 스킬, 죽은 자의 손길이 재차 발동됐다.
하지만 손이 올라오는 순간, 수호는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팟!
찰나지간에 간격을 건너뛰어 윤상호의 코앞으로 다가왔다.
“엇!”
당황한 윤상호는 뒷걸음질 쳤다.
내력을 실은 수호의 주먹이 뒤따라가 그의 얼굴에 처박혔다.
퍼억!
윤상호의 뺨이 주먹에 눌려 찌그러졌다.
충격이 안쪽으로 파고들자 뿌리까지 뽑힌 치아가 밖으로 튀어나왔다.
“이런 씨발!”
분노한 윤상호가 입에서 피를 질질 흘리며 덤벼들어 왔다.
조금 전에는 따라갈 수 없었던 그 움직임.
‘어림없지!’
흑위마공의 기운이 전신혈맥을 타고 사지백해로 퍼져 나갔다.
인간은 연약한 존재다.
날카로운 이빨도, 특출난 괴력도 없다.
하지만 도구를 사용할 수 있는 지능 덕분에 이 행성의 지배자가 됐다.
따지고 보면 무공도 도구다.
인류의 잃어버린 유산.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고자, 극의에 이르고자 불태웠던 무림인들의 집념과 열정.
그것도 천 년이 지나자 세월에 묻혀 스러져 버렸다.
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서, 수호의 손에 의해 재현되고 있었다.
“이, 이건 말도 안 돼!”
윤상호가 눈을 부릅떴다.
대등?
수호는 전혀 밀리지 않고 윤상호의 기세를 감당해 냈다.
‘아니, 그 이상!’
우드드득!
수호는 정면으로 날아오는 윤상호의 주먹을 손바닥으로 감싸고 그대로 손목을 꺾어 버렸다.
“크아아악!”
고통에 찬 괴성은 수호에겐 아름다운 선율처럼 들렸다.
하지만 이걸로 만족할 수는 없다.
수호는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우선 안면에 한 방 더!
그리고 복부에는 맞은 만큼!
“우욱!”
일권을 꽂고 한 대 더 날리려는 찰나, 둘 사이로 전대환이 끼어들었다.
“그만! 그만!”
그는 몸을 틀어 윤상호를 가리면서 손을 뻗어 수호가 다가오지 못하게 했다.
“예? 왜요?”
“됐어! 그만하면.”
“되긴 뭘 돼요. 이제 시작인데.”
“내가 보기엔 결판이 났다. 네가 이겼어, 진수호.”
“…….”
“왜? 불만 있어?”
수호가 인상을 썼다.
“무지하게 있구만. 근데 뭐 어쩔 거야. 내가 심판인데.”
전대환이 수호의 손을 들어줬다.
“자, 진수호 승리!”
그가 선언하자 양측의 반응이 극명하게 갈렸다.
2학년들은 이마를 짚은 채 암담해 했고, 수호에 호의적인 반 친구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좋아했다.
경태가 흥분된 표정으로 달려왔다.
“야, 뭐냐! 왜 이렇게 잘 싸워?”
“내가 뭐?”
“움직임 미쳤던데? 홀딩은 어떻게 풀어낸 거야? 스킬을 쓴 것처럼 보이진 않았는데. 그래도 쓴 건 맞지? 에너지 드레인이 완벽하지 않았나?”
내력을 운용해 순간적으로 힘을 폭발시켰다, 라고 해봐야 뭔 개소리냐는 반응만 돌아올 게 뻔했다.
“어…….”
수호는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뭐가 됐든 진짜 대단했어! 다 끝난 줄 알았는데 홀딩 풀고 명치에 빡! 속이 뻥 뚫리더라.”
“활명수도 아니고 뭔…….”
흥분 상태인 건 경태뿐만이 아니었다.
짜릿한 역전승은 수호를 무시하던 학생들의 시선도 바꿔 놓았다.
경태 덕분에 친구들을 꽤나 사귀었지만, C랭크 애들은 여전히 수호를 본척만척했다.
하지만 조금 전 승리에는 감명을 받았는지 지나가면서 한 마디씩 던졌다.
“야, 진수호. 다시 봤다?”
“생각보다 괜찮게 하네?”
띄워주는 분위기에도 수호는 입가에 웃음기조차 띄우지 않았다.
벼락처럼 뒤집은 한판으로 보이지만, 실은 무공을 안 써서 밀렸던 것뿐.
마땅히 이겨야 할 싸움에서 이긴 거라 역전의 쾌감 같은 건 없었다.
더 쥐어 패서 찍소리도 못 내게 했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해서 온전히 일을 보지 못한 듯한 찝찝한 기분이었다.
“괜찮아? 의무동 가야 하는 거 아냐?”
전대환은 윤상호에게 가서 그의 상태를 살피고 있었다.
“아, 됐어요. 내가 알아서 해요. 야, 가자!”
윤상호가 꺾인 손목을 부여잡고 수호 곁을 지나쳐 갔다.
“이게 끝이라고 생각하지 마. 두고 보자!”
“몇 번째 두고 보자인지……. 응원할 테니까 잘 좀 해봐.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고 했으니까.”
주먹으로는 못 때리니 말로라도 때려 준다.
최대한 밉살스럽게 비꼬아 주자 윤상호가 씩씩거리며 받아쳤다.
“방금 한 말, 후회하게 될 거다!”
마지막까지 살기등등한 윤상호였다.
그의 친구들은 힘의 차이를 느꼈기 때문인지, 쪽팔려서 고개를 못 드는 건지 패잔병처럼 기가 죽어서 훈련장을 떠났다.
“대결 끝났다. 교실로 돌아가. 바로 수업 시작할 거니까.”
전대환이 손을 휘휘 젓자 다들 해산했다.
교실로 향하는 중, 경태가 수호의 곁에 붙어서 의아한 듯 물었다.
“이겼는데, 안 기뻐? 표정이 왜 그러냐?”
“아니, 기쁜데.”
“그게 기쁜 거면 우울할 땐 어떻다는… 걱정돼서 그래?”
“무슨 걱정?”
“마지막으로 남긴 말. 칼 제대로 갈아서 갚아주러 올 것 같던데? 그거 때문 아냐?”
“넌 축구 선수 했으면 성공했겠다.”
“……?”
“헛다리짚기 잘하네. 젓가락을 갈아 봐야 송곳이지. 그런 건 신경 안 써.”
“그럼 뭔데?”
수호는 말할까 말까 하다가 그냥 말했다.
“윤상호하고 손속을 겨룬 거, 이번이 처음이 아니거든.”
“손속이 무슨 말이냐? 혹시 손 속도… APM?”
“싸워 봤다고.”
경태가 고개를 이리저리 옮겼다.
“그런 표현도 있나?”
무림에서는 흔히 쓰이던 말이지만, 지금에 와선 무척 낡은 표현이었다.
수호가 입을 다물자 경태가 대화를 이어 붙였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싸워 봤는데 뭐?”
“이상할 정도로 강해졌어.”
“이 갈고 열심히 수련했나 보지.”
“그런 수준이 아니야. 아예 랭크가 달라진 듯한? 일주일 사이에 그렇게 될 수가 없잖아.”
아까부터 수호의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는 의문이었다.
경태를 가볍게 날려 버릴 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붙어 보니 그게 이상할 게 아니었다는 데에 더 놀랐다.
“뭐야, 난 또 심각한 거라고.”
경태는 별 고민 없이 툭 답을 내놓았다.
“그 D반 금수저네 친형 아냐? 그럼 뻔하네 뭐. 부모님이 마정석 해준 거겠지.”
“마정석을 해줘?”
아니, 애초에 마정석이란 게 뭐지?
진수호의 기억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마정석 - 죽은 마물에게서 드물게 드랍되곤 하는 물체.
각성자에겐 보약과도 같은 아이템이다.
보유 에너지를 늘려주고 레벨, 랭크업에도 관여.
당연히 더럽게 비싼 가격으로 거래된다.]
“금수저니까, 엄마 휴대폰 바꿔줘, 그래픽 카드 사줘… 가 아니라 랭크업하게 마정석 구해줘~ 인 거지. 집에서는 그걸 또 해주는 거고.”
“흐음.”
“그래서 있는 집 애들하고는 안 엮이는 게 좋다니까? 당장은 별거 없어 보여도 부모님이 큰맘 먹고 지갑 한 번 열어주면? 바로 전세 역전되는 거지.”
경태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이 반응을 보면 그는 있는 집 자식은 아닌 모양이다.
그런 반면, 수호는 입꼬리가 점점 올라가고 있었다.
“너 일부러 그러냐? 이거엔 또 왜 그렇게 좋아하는데?”
“아니, 옛날 생각이 나서.”
돈으로 랭크를 살 수 있다라.
대체 어떻게 된 시대일까 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천 년 전 무림에도 금수저라는 건 있었다.
운 좋아서 좋은 핏줄, 좋은 배경을 타고난 이들.
성장기부터 영약을 무슨 비타민제 먹듯 복용하고, 때가 되면 가문의 비전절기를 전수받아 손쉽게 고수의 반열에 오른다.
하지만 서문환은 그들을 부러워하지 않았다.
‘진짜 초고수는 온실 속에서 탄생하는 게 아니지.’
그의 신념이었고,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해 혈마제로 군림이라는 결과로 당당히 증명해 냈다.
‘뭐, 각성자가 무림인은 아니니까. 더 강해지긴 해야겠군.’
문제는 달리 뾰족한 수가 없다는 거다.
하던 대로 하는 수밖에.
일단은 현질로 강해져서 돌아온 윤상현을 가볍게 꺾었다는 걸로 만족해야 했다.
* * *
“월요일에 실습 나가는 거 다 알지?”
반에 들어온 전대환이 학생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실습이란 말이 나오자 평소와는 달리 다들 그에게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네에~.”
여기저기서 대답이 흘러나왔다.
전대환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갔다.
“컨디션 조절은 잘하고 있을 거라 생각한다. 주말 동안 외출 자제하고, 딴짓 하지 말고 일찍들 자. 체력, 에너지 모두 최상인 상태로 들어가야 하니까.”
그의 잔소리는 거기까지였다.
“뭐, 실습 한두 번 나가는 것도 아니고 알아서들 잘하겠지? 믿는다.”
하지만 그 한두 번에도 포함이 안 되는 학생이 한 명 있었다.
전대환은 교실을 나서면서 수호를 밖으로 불러냈다.
두 사람은 복도에 섰다.
전대환이 물었다.
“우리 클래스에서는 첫 실습인데, 어떨 것 같아?”
“뭐, 똑같지 않을까요?”
“그래도 갑자기 던전 난이도가 확 올라가 버린 거니까, 네 입장에선 이게 좀 나중에 잡히는 게 좋았을 텐데. 스케줄이 너무 빨리 나왔어.”
그가 제안을 했다.
“이번은 적응하는 셈 치고 교사들 옆에 붙어 있을래?”
“신경 써 주시는 건 감사하지만, 그렇게까지 안 해도…….”
“왜? 괜찮을 거 같아?”
“어차피 한 번은 제대로 겪어봐야 하는 거잖아요. 지금 하나 나중에 하나 차이가 있을까요?”
“그건 그렇긴 하지.”
“제 랭크가 걱정하실 정도로 낮은 편은 또 아니니까요. 큰 문제는 없을 거 같은데요.”
“그럼, 일단 똑같이 참여하는 걸로 할게. 대신, 하나만 약속해 줘. 무리다 싶으면 현장에서 곧바로 알려줘야 한다?”
“네, 그럴게요.”
대답을 하고 수호는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던전이라……. 재밌겠는데?’
수호의 머릿속에는 성질이 다른 두 가지 기억이 공존하고 있다.
하나는 이 몸의 원래 주인인 진수호의 낯선 기억.
무려 17년 치다.
다른 하나는 그의 정체성을 이루는 전생의 기억인데, 이쪽은 그 세 배를 훌쩍 넘는다.
실제 겪었던 인생이니만큼 그보다 익숙할 수 없지만, 켜켜이 쌓인 기억은 낡고 변질되어 이제는 떠올려지지 않는 것도 있었다.
하지만 첫 실전은 아직까지도 생생했다.
눈을 감으면 그때의 이미지가 선명히 그려진다.
검이 상체를 관통하자 일그러지는 사내의 얼굴.
손잡이를 타고 전해져 오는 살인의 감촉이 생경했다.
이윽고 퍼지는 코를 찌를 듯한 혈향.
‘당황해서 내력도 제대로 끌어올리지 못했었지. 출수가 조금만 늦었어도…….’
그랬더라면 무림의 공포로 군림한 혈마제의 신화는 채 몇 페이지를 넘겨보기도 전에 마침표를 찍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풋내기의 몸인 것은 전생과 같지만 알맹이에 든 정신은 산전수전 다 겪은 고인물 중의 고인물!
그런데.
‘음?’
퍽!
수호가 인상을 찡그렸다.
윤상호의 주먹이 복부를 강타한 것.
그는 이 한 방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퍽퍽! 퍽!
묵직한 타격음.
극심한 통증이 연이어 내부를 뒤흔들었다.
팔다리가 꽁꽁 묶인 채 샌드백처럼 되어버린 수호였다.
경태는 전대환에게 가서 걱정스레 물었다.
“승패가 갈린 거 같은데요. 슬슬 말려야 하지 않을까요?”
“뭘 얼마나 했다고. 한쪽은 아직 스킬도 안 썼잖아. 좀 기다려 봐.”
“기다린다고 뭐가 달라져요?”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이런 말 못 들어봤어?”
전대환은 가볍게 일축하고는 두 사람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누가 봐도 상황은 종료된 듯 보였다.
하지만 수호는 소리 없이 웃고 있었다.
윤상호가 어이없어하며 물었다.
“왜 쪼개지? 마조히스트냐?”
“아니, 나한텐 웃긴 일이라서.”
수호가 퉤 하고 피를 뱉어냈다.
“……?”
“머리는 팽팽 돌아가는데 몸이 말을 안 들어서 말이야. 잊고 있었어. 내가 형편없이 약해졌다는 걸.”
“뭐라는 거야?”
“안타깝지만 받아들여야겠지.”
이해할 수 없는 말에, 윤상호는 대화를 포기하고 다음 공격을 준비했다.
“약간 맛이 간 거 같은데, 맞다 보면 제정신이 돌아오겠지… 음?”
소매를 걷어붙이고 고개를 든 윤상호의 표정이 일순 변했다.
그와 같은 변화는 이 광경을 지켜보던 모든 이에게서 일어났다.
“……!”
“저, 저기 봐!”
파사사삭!
수호를 구속하던 검은 손들이 갈가리 찢겨 나갔다.
자유의 몸이 된 수호는 앞을 바라봤다.
윤상호는 아직도 여유가 있었다.
“뭘 어떻게 한 거지? 못 봤으니까, 다시 봐야겠는데?”
사아아아!
윤상호의 스킬, 죽은 자의 손길이 재차 발동됐다.
하지만 손이 올라오는 순간, 수호는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팟!
찰나지간에 간격을 건너뛰어 윤상호의 코앞으로 다가왔다.
“엇!”
당황한 윤상호는 뒷걸음질 쳤다.
내력을 실은 수호의 주먹이 뒤따라가 그의 얼굴에 처박혔다.
퍼억!
윤상호의 뺨이 주먹에 눌려 찌그러졌다.
충격이 안쪽으로 파고들자 뿌리까지 뽑힌 치아가 밖으로 튀어나왔다.
“이런 씨발!”
분노한 윤상호가 입에서 피를 질질 흘리며 덤벼들어 왔다.
조금 전에는 따라갈 수 없었던 그 움직임.
‘어림없지!’
흑위마공의 기운이 전신혈맥을 타고 사지백해로 퍼져 나갔다.
인간은 연약한 존재다.
날카로운 이빨도, 특출난 괴력도 없다.
하지만 도구를 사용할 수 있는 지능 덕분에 이 행성의 지배자가 됐다.
따지고 보면 무공도 도구다.
인류의 잃어버린 유산.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고자, 극의에 이르고자 불태웠던 무림인들의 집념과 열정.
그것도 천 년이 지나자 세월에 묻혀 스러져 버렸다.
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서, 수호의 손에 의해 재현되고 있었다.
“이, 이건 말도 안 돼!”
윤상호가 눈을 부릅떴다.
대등?
수호는 전혀 밀리지 않고 윤상호의 기세를 감당해 냈다.
‘아니, 그 이상!’
우드드득!
수호는 정면으로 날아오는 윤상호의 주먹을 손바닥으로 감싸고 그대로 손목을 꺾어 버렸다.
“크아아악!”
고통에 찬 괴성은 수호에겐 아름다운 선율처럼 들렸다.
하지만 이걸로 만족할 수는 없다.
수호는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우선 안면에 한 방 더!
그리고 복부에는 맞은 만큼!
“우욱!”
일권을 꽂고 한 대 더 날리려는 찰나, 둘 사이로 전대환이 끼어들었다.
“그만! 그만!”
그는 몸을 틀어 윤상호를 가리면서 손을 뻗어 수호가 다가오지 못하게 했다.
“예? 왜요?”
“됐어! 그만하면.”
“되긴 뭘 돼요. 이제 시작인데.”
“내가 보기엔 결판이 났다. 네가 이겼어, 진수호.”
“…….”
“왜? 불만 있어?”
수호가 인상을 썼다.
“무지하게 있구만. 근데 뭐 어쩔 거야. 내가 심판인데.”
전대환이 수호의 손을 들어줬다.
“자, 진수호 승리!”
그가 선언하자 양측의 반응이 극명하게 갈렸다.
2학년들은 이마를 짚은 채 암담해 했고, 수호에 호의적인 반 친구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좋아했다.
경태가 흥분된 표정으로 달려왔다.
“야, 뭐냐! 왜 이렇게 잘 싸워?”
“내가 뭐?”
“움직임 미쳤던데? 홀딩은 어떻게 풀어낸 거야? 스킬을 쓴 것처럼 보이진 않았는데. 그래도 쓴 건 맞지? 에너지 드레인이 완벽하지 않았나?”
내력을 운용해 순간적으로 힘을 폭발시켰다, 라고 해봐야 뭔 개소리냐는 반응만 돌아올 게 뻔했다.
“어…….”
수호는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뭐가 됐든 진짜 대단했어! 다 끝난 줄 알았는데 홀딩 풀고 명치에 빡! 속이 뻥 뚫리더라.”
“활명수도 아니고 뭔…….”
흥분 상태인 건 경태뿐만이 아니었다.
짜릿한 역전승은 수호를 무시하던 학생들의 시선도 바꿔 놓았다.
경태 덕분에 친구들을 꽤나 사귀었지만, C랭크 애들은 여전히 수호를 본척만척했다.
하지만 조금 전 승리에는 감명을 받았는지 지나가면서 한 마디씩 던졌다.
“야, 진수호. 다시 봤다?”
“생각보다 괜찮게 하네?”
띄워주는 분위기에도 수호는 입가에 웃음기조차 띄우지 않았다.
벼락처럼 뒤집은 한판으로 보이지만, 실은 무공을 안 써서 밀렸던 것뿐.
마땅히 이겨야 할 싸움에서 이긴 거라 역전의 쾌감 같은 건 없었다.
더 쥐어 패서 찍소리도 못 내게 했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해서 온전히 일을 보지 못한 듯한 찝찝한 기분이었다.
“괜찮아? 의무동 가야 하는 거 아냐?”
전대환은 윤상호에게 가서 그의 상태를 살피고 있었다.
“아, 됐어요. 내가 알아서 해요. 야, 가자!”
윤상호가 꺾인 손목을 부여잡고 수호 곁을 지나쳐 갔다.
“이게 끝이라고 생각하지 마. 두고 보자!”
“몇 번째 두고 보자인지……. 응원할 테니까 잘 좀 해봐.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고 했으니까.”
주먹으로는 못 때리니 말로라도 때려 준다.
최대한 밉살스럽게 비꼬아 주자 윤상호가 씩씩거리며 받아쳤다.
“방금 한 말, 후회하게 될 거다!”
마지막까지 살기등등한 윤상호였다.
그의 친구들은 힘의 차이를 느꼈기 때문인지, 쪽팔려서 고개를 못 드는 건지 패잔병처럼 기가 죽어서 훈련장을 떠났다.
“대결 끝났다. 교실로 돌아가. 바로 수업 시작할 거니까.”
전대환이 손을 휘휘 젓자 다들 해산했다.
교실로 향하는 중, 경태가 수호의 곁에 붙어서 의아한 듯 물었다.
“이겼는데, 안 기뻐? 표정이 왜 그러냐?”
“아니, 기쁜데.”
“그게 기쁜 거면 우울할 땐 어떻다는… 걱정돼서 그래?”
“무슨 걱정?”
“마지막으로 남긴 말. 칼 제대로 갈아서 갚아주러 올 것 같던데? 그거 때문 아냐?”
“넌 축구 선수 했으면 성공했겠다.”
“……?”
“헛다리짚기 잘하네. 젓가락을 갈아 봐야 송곳이지. 그런 건 신경 안 써.”
“그럼 뭔데?”
수호는 말할까 말까 하다가 그냥 말했다.
“윤상호하고 손속을 겨룬 거, 이번이 처음이 아니거든.”
“손속이 무슨 말이냐? 혹시 손 속도… APM?”
“싸워 봤다고.”
경태가 고개를 이리저리 옮겼다.
“그런 표현도 있나?”
무림에서는 흔히 쓰이던 말이지만, 지금에 와선 무척 낡은 표현이었다.
수호가 입을 다물자 경태가 대화를 이어 붙였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싸워 봤는데 뭐?”
“이상할 정도로 강해졌어.”
“이 갈고 열심히 수련했나 보지.”
“그런 수준이 아니야. 아예 랭크가 달라진 듯한? 일주일 사이에 그렇게 될 수가 없잖아.”
아까부터 수호의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는 의문이었다.
경태를 가볍게 날려 버릴 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붙어 보니 그게 이상할 게 아니었다는 데에 더 놀랐다.
“뭐야, 난 또 심각한 거라고.”
경태는 별 고민 없이 툭 답을 내놓았다.
“그 D반 금수저네 친형 아냐? 그럼 뻔하네 뭐. 부모님이 마정석 해준 거겠지.”
“마정석을 해줘?”
아니, 애초에 마정석이란 게 뭐지?
진수호의 기억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마정석 - 죽은 마물에게서 드물게 드랍되곤 하는 물체.
각성자에겐 보약과도 같은 아이템이다.
보유 에너지를 늘려주고 레벨, 랭크업에도 관여.
당연히 더럽게 비싼 가격으로 거래된다.]
“금수저니까, 엄마 휴대폰 바꿔줘, 그래픽 카드 사줘… 가 아니라 랭크업하게 마정석 구해줘~ 인 거지. 집에서는 그걸 또 해주는 거고.”
“흐음.”
“그래서 있는 집 애들하고는 안 엮이는 게 좋다니까? 당장은 별거 없어 보여도 부모님이 큰맘 먹고 지갑 한 번 열어주면? 바로 전세 역전되는 거지.”
경태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이 반응을 보면 그는 있는 집 자식은 아닌 모양이다.
그런 반면, 수호는 입꼬리가 점점 올라가고 있었다.
“너 일부러 그러냐? 이거엔 또 왜 그렇게 좋아하는데?”
“아니, 옛날 생각이 나서.”
돈으로 랭크를 살 수 있다라.
대체 어떻게 된 시대일까 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천 년 전 무림에도 금수저라는 건 있었다.
운 좋아서 좋은 핏줄, 좋은 배경을 타고난 이들.
성장기부터 영약을 무슨 비타민제 먹듯 복용하고, 때가 되면 가문의 비전절기를 전수받아 손쉽게 고수의 반열에 오른다.
하지만 서문환은 그들을 부러워하지 않았다.
‘진짜 초고수는 온실 속에서 탄생하는 게 아니지.’
그의 신념이었고,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해 혈마제로 군림이라는 결과로 당당히 증명해 냈다.
‘뭐, 각성자가 무림인은 아니니까. 더 강해지긴 해야겠군.’
문제는 달리 뾰족한 수가 없다는 거다.
하던 대로 하는 수밖에.
일단은 현질로 강해져서 돌아온 윤상현을 가볍게 꺾었다는 걸로 만족해야 했다.
* * *
“월요일에 실습 나가는 거 다 알지?”
반에 들어온 전대환이 학생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실습이란 말이 나오자 평소와는 달리 다들 그에게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네에~.”
여기저기서 대답이 흘러나왔다.
전대환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갔다.
“컨디션 조절은 잘하고 있을 거라 생각한다. 주말 동안 외출 자제하고, 딴짓 하지 말고 일찍들 자. 체력, 에너지 모두 최상인 상태로 들어가야 하니까.”
그의 잔소리는 거기까지였다.
“뭐, 실습 한두 번 나가는 것도 아니고 알아서들 잘하겠지? 믿는다.”
하지만 그 한두 번에도 포함이 안 되는 학생이 한 명 있었다.
전대환은 교실을 나서면서 수호를 밖으로 불러냈다.
두 사람은 복도에 섰다.
전대환이 물었다.
“우리 클래스에서는 첫 실습인데, 어떨 것 같아?”
“뭐, 똑같지 않을까요?”
“그래도 갑자기 던전 난이도가 확 올라가 버린 거니까, 네 입장에선 이게 좀 나중에 잡히는 게 좋았을 텐데. 스케줄이 너무 빨리 나왔어.”
그가 제안을 했다.
“이번은 적응하는 셈 치고 교사들 옆에 붙어 있을래?”
“신경 써 주시는 건 감사하지만, 그렇게까지 안 해도…….”
“왜? 괜찮을 거 같아?”
“어차피 한 번은 제대로 겪어봐야 하는 거잖아요. 지금 하나 나중에 하나 차이가 있을까요?”
“그건 그렇긴 하지.”
“제 랭크가 걱정하실 정도로 낮은 편은 또 아니니까요. 큰 문제는 없을 거 같은데요.”
“그럼, 일단 똑같이 참여하는 걸로 할게. 대신, 하나만 약속해 줘. 무리다 싶으면 현장에서 곧바로 알려줘야 한다?”
“네, 그럴게요.”
대답을 하고 수호는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던전이라……. 재밌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