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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한 주 동안 내내 무탈했다.
슬슬 진수호의 삶에도 녹아들어 가는 시점.
혈마제 서문환이 아닌, 진수호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데도 익숙해졌다.
얼마나 적응을 잘했나, 스스로 점수를 매겨 본다면?
수호의 머릿속에 채점지가 만들어졌다.
1. 집에서 - 정학 처분을 받은 것은 아쉽지만 뜻밖의 랭크업으로 부모님의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질 않는다. (40점)
2. 학교에서 - 경태 등과 친해지면서 원만해진 교우 관계. 수업도 뒤처지지 않고 따라가고는 있다. (40점)
도합 80점.
‘나름 괜찮게 하고 있는 거 아닌가?’
이 정도면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어도 무난히 타인의 삶에 뿌리내린 것 같았다.
‘위험요소도 사라진 것 같고.’
곰곰이 상념에 잠긴 수호.
나란히 걷고 있던 영석이 그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어? 별거 아니야.”
“별거 아니긴. 표정에서 다 티 난다. 뭐 고민이라도 있어?”
“고민은 아니고, 윤상호가 잠잠한 게 이상해서.”
윤상호 트리오는 개쪽이란 개쪽은 다 당한 이후로, 자취를 감추었다.
주말을 지나 오늘까지도 코빼기조차 안 비추는 걸 보면 동생의 복수는 포기했나 싶지만…….
“깨끗이 인정하고 물러날 캐릭터가 아니잖아. 뭔가 좀 꺼림칙한데.”
영석은 다른 의견이었다.
“글쎄, 나였으면 쪽팔려서라도 못 나타날걸? 그리고 네 뒤에 송화영이 있잖아.”
“있긴 뭐가 있어. 걔하고는 그냥 면식만 있는 사이라니까?”
영석이 흐 하고 웃었다.
“그러시겠지.”
“또 몰아가네.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하냐?”
“아니, 난 믿지. 믿는데 그 얘기, 다른 사람한테 한 적 없잖아. 다들 송화영이 널 대놓고 감싸는 걸로 알고 있어.”
“으음.”
“아무리 윤상호가 개념이 없어도 B반 에이스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함부로 못 건드리지. 장담하는데, 그 인간 어쩌다 마주쳐도 눈도 똑바로 못 쳐다볼걸?”
“그런가.”
일리 있는 말이었다.
‘그럼 혈마제 꼴이 말이 아니게 되는 거긴 한데.’
전 무림을 공포로 몰아넣은 마도의 절대자 서문환.
우는 아이뿐만 아니라 다 큰 어른도 이름 석 자를 들으면 벌벌 떨며 두려워하던 게 그였다.
그런 그가 여자애에게 보호받는 입장이 됐다라…….
중원인들이 이를 들었다면 충격으로 식음을 전폐했을 거다.
‘뭐, 그 사람들은 다 죽고 없지만.’
그래도 이건 자존심 문제다.
진수호 역시도 자존심이 센 놈이었고.
용납할 수 없는 일이지만 뭐 어쩔 수 없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주일 전이었으면 몰라도.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넌 이쪽이지?”
영석이 계단 위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어.”
수호는 C반, 영석은 D반.
여기에서 갈라져야 했다.
“이따가 보자.”
영석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이 웃음이 가식이 아니라는 게 안타까웠다.
“음, 그래.”
하지만 수호가 해줄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나마 수호가 D반에서 존재감을 보여줬던 터라, 영석이 덜 괴롭힘을 받을 거라는 게 위안이 되는 부분이었다.
‘좋은 녀석이고, 룸메이트로도 딱인데.’
하지만 영석의 호언장담은 채 몇 분도 지나지 않아 틀린 것으로 밝혀졌다.
수업 시작 십 분 전.
교실 뒤편에서 흥분한 음성이 들려왔다.
“진수호! 진수호 어딨어!”
수호는 자기 자리에서 경태와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계속해서 그를 찾는 목소리에, 경태가 의아해하며 그쪽을 쳐다봤다.
윤상호 패거리였다.
“쟤들 알아?”
“잘 알지.”
수호의 표정이 살짝 구겨졌다.
경태가 몸을 돌렸다.
그는 그쪽으로 가서 위협조로 물었다.
“너네들 뭐냐? 수호는 왜 찾아?”
“찾을 일이 있으니까 그런다. 그러는 넌 뭔데?”
윤상호 옆에 선 놈이 눈을 부라리자 경태도 질세라 눈에 힘을 빡 줬다.
“나 수호 친구다. 이것들이 돌았나, 왜 남의 반에 와서 행패질이야?”
“와아, 상호야. 뭐냐, 이거? 요즘 1학년들 단체로 간덩이가 부은 거야?”
윤상호는 비릿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위아래 없는 새끼 하나가 애들을 버려놓은 거지. 그 새끼 저기 있네.”
수호를 찾은 윤상호가 눈을 빛냈다.
그가 몸을 앞으로 내밀자 경태가 진로를 가로막았다.
“어딜!”
“비켜, 이 새끼야!”
경태의 두 발이 땅에서 떨어졌다.
부웅!
그는 수호 앞으로 날아와 바닥에 처박혔다.
경태는 어이없어하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쟤네들 뭐야? D반 애들 아니었어?”
“아니, 2학년인데?”
“엥?”
“뭘 보고 D반이라고 생각한 거야?”
“모르는 얼굴이라서.”
이건 또 무슨 개념?
수호가 물었다.
“왜 얼굴 모르면 D반이지?”
“나보다 랭크 높은 애들은 기억해 둬야지. 당연한 거 아냐? 살아남으려면.”
“흐흠.”
“근데 2학년이면 송화영한테 참교육 당한 그 인간들 아냐?”
경태의 말을 들었는지 윤상호의 안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안 닥쳐?”
그가 성큼성큼 다가와 수호 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언제든지 찾아와도 된다고 했지? 그래서 왔다, 씹새야.”
“얼마든지라고 했지 언제든지라고 하진 않았는데?”
“그거나, 그거나. 따라 나와.”
윤상호가 문가를 향해 턱짓을 했다. 하지만 수호의 발끝은 미동도 없었다.
그가 말했다.
“가만 보니까 안 좋은 습관이 있네.”
“……?”
“일부러 그러나? 왜 사람 말을 띄엄띄엄 들어?”
“뭐?”
“떨거지는 떼고 오라고 했지. 옆에 아무도 없으면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냐? 고작 1학년 만나러 가면서도? 이건 뭐 삼신기도 아니고.”
“삼… 신기?”
윤상호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아닌가? 그럼 삼위일체? 삼지창? 삼발이?”
“개소리 집어치워! 너는 나 혼자 상대한다. 얘들은… 그냥 같이 온 거고.”
윤상호가 이런 결단을?
조금 놀랍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알았으니까 나중에 다시 와. 넌 시간관념도 없냐?”
면박을 주고 도로 자리에 앉자 윤상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말이 안 통하네. 야.”
윤상호의 고갯짓에, 삼신기 중 둘이 수호를 잡으러 왔다.
탁!
뻗어오는 손을 쳐내자 바로 몸부터 들이밀어 온다.
이 두 인간은 매번 당하기만 했으면서 이번에도 수적 우세를 믿고 자신 있게 덤벼들었다.
“으, 으앗!”
와당탕탕!
친구 1이 경태가 그랬던 것처럼 뒤로 나뒹굴었다.
수호가 밀쳐내는 힘을 견디지 못한 것.
“이런 씨앙!”
욕지기와 함께, 친구 1, 2가 양쪽에서 달려들었다.
두 사람은 좌우에서 수호를 붙잡고 강제로 일으켜 세우려고 했다.
“……?”
“뭐, 뭐야?”
그런데 젖 먹던 힘을 다해 봐도 수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들이 당혹스러워하는 낯빛을 띄우는 그때, 전대환이 반으로 들어왔다.
“뭣들 하는 거야?”
무슨 상황인지는 한눈에 들어왔다.
눈을 반짝이며 구경하는 학생들, 그들의 시선 끝에는 세 사람이 몸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진수호?”
가까이 온 전대환이 눈살을 찌푸렸다.
“너네들 2학년 아니냐?”
수호를 잡고 있던 녀석들은 놀라 굳어 있다가 그 말에 수호에게서 손을 떼고 주춤주춤 물러났다.
“아, 아닌데요.”
“아니긴 뭐가 아냐. 맞구만.”
전대환이 추궁하듯 물었다.
“2학년이 우리 반엔 무슨 일이지? 수호는 왜 괴롭히는 거고?”
“괴롭… 힌 적 없는데요?”
“아, 그럼 내가 잘못 봤구나? 요즘 기가 허해졌나? 헛것을 다 보고.”
“아니, 그런 말이…….”
조금 전까지 수호를 잡고 있던 녀석들이 어버버거리자 윤상호가 나섰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어? 너 상호 아니냐?”
“저 맞아요. 오랜만에 뵙네요.”
“가만, 네 동생이…….”
전대환이 수호와 윤상호를 번갈아 봤다.
“에이, 생각하시는 그런 거 아니에요.”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데?”
“다구리 놓으려고 온 거 아니구요. 일대일로 붙자고 하는데 자꾸 빼길래 마찰이 좀 있었던 거예요.”
“아, 그래?”
전대환이 굳은 인상을 풀었다.
동생 대신 복수하러 왔다고 하는데도 그는 대수롭지 않은 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진수호, 이 말 맞냐?”
수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 재밌게 돌아가네. 빼는 이유는 뭔데? 둘 다 C반이잖아. 랭크 비슷하지 않나?”
정상적인 교사라면 호통부터 치면서 당사자들을 갈라놔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데 전대환은 화를 내기는커녕 흥미만 보이고 있었다.
수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아마도요.”
“근데 왜? 2학년이라서 부담스러워?”
“전혀요. 수업 들어야 하는데 나오라고 하니까 그렇죠.”
“그런 거라면, 내가 손써줄 수 있는데.”
“네?”
생각해 보니 오늘 첫 수업을 맡은 사람이 전대환이었다.
전대환은 C반 학생들, 그리고 윤상호 트리오를 1학년 훈련장으로 데려갔다.
“오늘 수업은 실전 대련… 아, 그건 진수호만이지. 나머지는 관전 및 이미지 트레이닝. 어때, 좋지?”
다들 얼굴 표정으로 말하고 있었다.
‘당근 빳다죠!’
언제나 싸움 구경은 재밌다.
그것도 지루한 수업 대신이라면 더더욱.
학생들은 전부 이게 웬 떡이냐는 반응이었다.
전대환은 학생들을 뒤로 물려 공간을 만들고, 수호와 윤상호를 가운데 세웠다.
“해묵은 감정을 풀기에는 주먹보다 좋은 건 없지. 원 없이 싸워 보라고.”
윤상호가 물었다.
“스킬 써도 되는 거죠?”
“그거 하라고 여기로 온 거 아니냐. 스킬 안 쓰면 그게 싸우는 거야? 좀 투닥거리다 마는 거지.”
“분명히 말했어요.”
윤상호는 전대환의 눈을 쳐다보며 못을 박았다.
‘무슨 자신감이지, 대체?’
훈련장으로 오는 내내 수호는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해서 좌청룡, 우백호를 꼭 데리고 다니는 인간이 웬일로 정정당당한 게 수상하달까?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할 때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그러면… 시작해라!”
전대환이 뒤로 물러났다.
대결에 들어가자 얼마 안 가서 자신감의 근원을 알 수 있었다.
‘그때의 그 윤상호가 아니다?’
지금 이건 첫 대결이 아니라 리매치다.
처음 손속을 나눠본 것은 정학이 풀리고 C반으로 옮겨온 첫날.
제대로 각 잡고 붙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어떤 수준인지 파악할 정도는 됐다.
그런데 겨우 한 주 지난 지금.
윤상호가 변했다.
익히 알던 움직임이 아니었다.
몰아쳐 오는 속도 자체가 다르고, 주먹 끝에 실린 힘 또한 그때보다 한층 묵직해졌다.
‘뭐지?’
파파파팟!
윤상호가 정신없이 몰아쳐 왔다.
권격이 쏟아졌다.
수호는 좀처럼 수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저번과 비슷한 구도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그때는 탐색을 위해 일부러 방어만 한 거였고, 현재 막고만 있는 건 다른 수가 없어서였다.
쉬익!
윤상호가 단번에 거리를 좁혀 안쪽으로 들어왔다.
“많이 놀랐나 보네?”
비웃음 가득한 얼굴.
신나 죽겠다는 듯, 입가가 마구 씰룩거렸다.
“랭크 좀 오르니까 선배가 우습게 보이지? 하지만, 이게 너와 나의 결정적 차이다!”
윤상호의 주먹이 코앞으로 날아왔다.
전력을 다해서인지 사전 동작이 길었다.
수호는 몸을 숙여 간발의 차이로 피해내고는 어깨로 윤상호를 들이받았다.
“크앗!”
허술한 틈을 제대로 노린 것이라 윤상호는 중심을 잃고 뒤로 나자빠졌다.
드디어 기세를 가져왔나 싶어 공격을 이어가려는데 쓰러진 윤상호의 표정이 여유로웠다.
“좋냐?”
윤상호가 손을 뻗었다.
‘스킬인가?’
아차 하며 물러나려는 순간, 바닥에서 시커먼 손 같은 게 올라오더니 수호의 양 발목을 붙잡았다.
“어때, 내 스킬.”
있는 힘을 다해 걷어차 보는데도 검은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뭐야, 이거?”
“죽은 자의 손길이라는 건데 꽤 쓸 만해. 이렇게 적을 잡아둘 수도 있고.”
윤상호가 재차 스킬을 사용하자 검은 손이 또 올라와 수호의 양팔을 옥죄었다.
“이것만 있으면 평범한 홀딩 스킬이겠지. 근데 효과가 또 있거든. 에너지 드레인이라고 알아?”
들은 바 없는 용어지만 부연해주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에너지가 줄어든다. 흡성대법 같은 건가?’
사지 결박에 에너지까지 빨리고 있는 상황.
누가 봐도 대위기였다.
둘의 대결에 집중하던 C반 학생들의 눈에 실망감이 스쳤다.
“에이, 이거 싱겁게 끝나겠네.”
“역시 같은 C반이어도 2학년은 2학년이라는 건가?”
“처음부터 클래스 차이가 너무 나더라.”
모두가 윤상호의 압승을 점치고 있었다.
여기서 혼자만 생각이 다른 사람.
바로 수호였다.
‘다행히 에너지만 빨아가는군.’
그렇다면 문제될 건 전혀 없다.
‘어디 한번 해볼까.’
전생에선 숨 쉬듯 익숙한 행위였음에도 왠지 모르게 낯설다고 느껴졌다.
어찌 됐건 현생에선 첫 실전이니.
하지만 걱정할 것은 없다.
처음이되, 처음이 아니다.
수호는 심호흡을 하고 내력을 끌어올렸다.
한 주 동안 내내 무탈했다.
슬슬 진수호의 삶에도 녹아들어 가는 시점.
혈마제 서문환이 아닌, 진수호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데도 익숙해졌다.
얼마나 적응을 잘했나, 스스로 점수를 매겨 본다면?
수호의 머릿속에 채점지가 만들어졌다.
1. 집에서 - 정학 처분을 받은 것은 아쉽지만 뜻밖의 랭크업으로 부모님의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질 않는다. (40점)
2. 학교에서 - 경태 등과 친해지면서 원만해진 교우 관계. 수업도 뒤처지지 않고 따라가고는 있다. (40점)
도합 80점.
‘나름 괜찮게 하고 있는 거 아닌가?’
이 정도면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어도 무난히 타인의 삶에 뿌리내린 것 같았다.
‘위험요소도 사라진 것 같고.’
곰곰이 상념에 잠긴 수호.
나란히 걷고 있던 영석이 그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어? 별거 아니야.”
“별거 아니긴. 표정에서 다 티 난다. 뭐 고민이라도 있어?”
“고민은 아니고, 윤상호가 잠잠한 게 이상해서.”
윤상호 트리오는 개쪽이란 개쪽은 다 당한 이후로, 자취를 감추었다.
주말을 지나 오늘까지도 코빼기조차 안 비추는 걸 보면 동생의 복수는 포기했나 싶지만…….
“깨끗이 인정하고 물러날 캐릭터가 아니잖아. 뭔가 좀 꺼림칙한데.”
영석은 다른 의견이었다.
“글쎄, 나였으면 쪽팔려서라도 못 나타날걸? 그리고 네 뒤에 송화영이 있잖아.”
“있긴 뭐가 있어. 걔하고는 그냥 면식만 있는 사이라니까?”
영석이 흐 하고 웃었다.
“그러시겠지.”
“또 몰아가네.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하냐?”
“아니, 난 믿지. 믿는데 그 얘기, 다른 사람한테 한 적 없잖아. 다들 송화영이 널 대놓고 감싸는 걸로 알고 있어.”
“으음.”
“아무리 윤상호가 개념이 없어도 B반 에이스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함부로 못 건드리지. 장담하는데, 그 인간 어쩌다 마주쳐도 눈도 똑바로 못 쳐다볼걸?”
“그런가.”
일리 있는 말이었다.
‘그럼 혈마제 꼴이 말이 아니게 되는 거긴 한데.’
전 무림을 공포로 몰아넣은 마도의 절대자 서문환.
우는 아이뿐만 아니라 다 큰 어른도 이름 석 자를 들으면 벌벌 떨며 두려워하던 게 그였다.
그런 그가 여자애에게 보호받는 입장이 됐다라…….
중원인들이 이를 들었다면 충격으로 식음을 전폐했을 거다.
‘뭐, 그 사람들은 다 죽고 없지만.’
그래도 이건 자존심 문제다.
진수호 역시도 자존심이 센 놈이었고.
용납할 수 없는 일이지만 뭐 어쩔 수 없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주일 전이었으면 몰라도.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넌 이쪽이지?”
영석이 계단 위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어.”
수호는 C반, 영석은 D반.
여기에서 갈라져야 했다.
“이따가 보자.”
영석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이 웃음이 가식이 아니라는 게 안타까웠다.
“음, 그래.”
하지만 수호가 해줄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나마 수호가 D반에서 존재감을 보여줬던 터라, 영석이 덜 괴롭힘을 받을 거라는 게 위안이 되는 부분이었다.
‘좋은 녀석이고, 룸메이트로도 딱인데.’
하지만 영석의 호언장담은 채 몇 분도 지나지 않아 틀린 것으로 밝혀졌다.
수업 시작 십 분 전.
교실 뒤편에서 흥분한 음성이 들려왔다.
“진수호! 진수호 어딨어!”
수호는 자기 자리에서 경태와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계속해서 그를 찾는 목소리에, 경태가 의아해하며 그쪽을 쳐다봤다.
윤상호 패거리였다.
“쟤들 알아?”
“잘 알지.”
수호의 표정이 살짝 구겨졌다.
경태가 몸을 돌렸다.
그는 그쪽으로 가서 위협조로 물었다.
“너네들 뭐냐? 수호는 왜 찾아?”
“찾을 일이 있으니까 그런다. 그러는 넌 뭔데?”
윤상호 옆에 선 놈이 눈을 부라리자 경태도 질세라 눈에 힘을 빡 줬다.
“나 수호 친구다. 이것들이 돌았나, 왜 남의 반에 와서 행패질이야?”
“와아, 상호야. 뭐냐, 이거? 요즘 1학년들 단체로 간덩이가 부은 거야?”
윤상호는 비릿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위아래 없는 새끼 하나가 애들을 버려놓은 거지. 그 새끼 저기 있네.”
수호를 찾은 윤상호가 눈을 빛냈다.
그가 몸을 앞으로 내밀자 경태가 진로를 가로막았다.
“어딜!”
“비켜, 이 새끼야!”
경태의 두 발이 땅에서 떨어졌다.
부웅!
그는 수호 앞으로 날아와 바닥에 처박혔다.
경태는 어이없어하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쟤네들 뭐야? D반 애들 아니었어?”
“아니, 2학년인데?”
“엥?”
“뭘 보고 D반이라고 생각한 거야?”
“모르는 얼굴이라서.”
이건 또 무슨 개념?
수호가 물었다.
“왜 얼굴 모르면 D반이지?”
“나보다 랭크 높은 애들은 기억해 둬야지. 당연한 거 아냐? 살아남으려면.”
“흐흠.”
“근데 2학년이면 송화영한테 참교육 당한 그 인간들 아냐?”
경태의 말을 들었는지 윤상호의 안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안 닥쳐?”
그가 성큼성큼 다가와 수호 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언제든지 찾아와도 된다고 했지? 그래서 왔다, 씹새야.”
“얼마든지라고 했지 언제든지라고 하진 않았는데?”
“그거나, 그거나. 따라 나와.”
윤상호가 문가를 향해 턱짓을 했다. 하지만 수호의 발끝은 미동도 없었다.
그가 말했다.
“가만 보니까 안 좋은 습관이 있네.”
“……?”
“일부러 그러나? 왜 사람 말을 띄엄띄엄 들어?”
“뭐?”
“떨거지는 떼고 오라고 했지. 옆에 아무도 없으면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냐? 고작 1학년 만나러 가면서도? 이건 뭐 삼신기도 아니고.”
“삼… 신기?”
윤상호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아닌가? 그럼 삼위일체? 삼지창? 삼발이?”
“개소리 집어치워! 너는 나 혼자 상대한다. 얘들은… 그냥 같이 온 거고.”
윤상호가 이런 결단을?
조금 놀랍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알았으니까 나중에 다시 와. 넌 시간관념도 없냐?”
면박을 주고 도로 자리에 앉자 윤상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말이 안 통하네. 야.”
윤상호의 고갯짓에, 삼신기 중 둘이 수호를 잡으러 왔다.
탁!
뻗어오는 손을 쳐내자 바로 몸부터 들이밀어 온다.
이 두 인간은 매번 당하기만 했으면서 이번에도 수적 우세를 믿고 자신 있게 덤벼들었다.
“으, 으앗!”
와당탕탕!
친구 1이 경태가 그랬던 것처럼 뒤로 나뒹굴었다.
수호가 밀쳐내는 힘을 견디지 못한 것.
“이런 씨앙!”
욕지기와 함께, 친구 1, 2가 양쪽에서 달려들었다.
두 사람은 좌우에서 수호를 붙잡고 강제로 일으켜 세우려고 했다.
“……?”
“뭐, 뭐야?”
그런데 젖 먹던 힘을 다해 봐도 수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들이 당혹스러워하는 낯빛을 띄우는 그때, 전대환이 반으로 들어왔다.
“뭣들 하는 거야?”
무슨 상황인지는 한눈에 들어왔다.
눈을 반짝이며 구경하는 학생들, 그들의 시선 끝에는 세 사람이 몸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진수호?”
가까이 온 전대환이 눈살을 찌푸렸다.
“너네들 2학년 아니냐?”
수호를 잡고 있던 녀석들은 놀라 굳어 있다가 그 말에 수호에게서 손을 떼고 주춤주춤 물러났다.
“아, 아닌데요.”
“아니긴 뭐가 아냐. 맞구만.”
전대환이 추궁하듯 물었다.
“2학년이 우리 반엔 무슨 일이지? 수호는 왜 괴롭히는 거고?”
“괴롭… 힌 적 없는데요?”
“아, 그럼 내가 잘못 봤구나? 요즘 기가 허해졌나? 헛것을 다 보고.”
“아니, 그런 말이…….”
조금 전까지 수호를 잡고 있던 녀석들이 어버버거리자 윤상호가 나섰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어? 너 상호 아니냐?”
“저 맞아요. 오랜만에 뵙네요.”
“가만, 네 동생이…….”
전대환이 수호와 윤상호를 번갈아 봤다.
“에이, 생각하시는 그런 거 아니에요.”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데?”
“다구리 놓으려고 온 거 아니구요. 일대일로 붙자고 하는데 자꾸 빼길래 마찰이 좀 있었던 거예요.”
“아, 그래?”
전대환이 굳은 인상을 풀었다.
동생 대신 복수하러 왔다고 하는데도 그는 대수롭지 않은 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진수호, 이 말 맞냐?”
수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 재밌게 돌아가네. 빼는 이유는 뭔데? 둘 다 C반이잖아. 랭크 비슷하지 않나?”
정상적인 교사라면 호통부터 치면서 당사자들을 갈라놔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데 전대환은 화를 내기는커녕 흥미만 보이고 있었다.
수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아마도요.”
“근데 왜? 2학년이라서 부담스러워?”
“전혀요. 수업 들어야 하는데 나오라고 하니까 그렇죠.”
“그런 거라면, 내가 손써줄 수 있는데.”
“네?”
생각해 보니 오늘 첫 수업을 맡은 사람이 전대환이었다.
전대환은 C반 학생들, 그리고 윤상호 트리오를 1학년 훈련장으로 데려갔다.
“오늘 수업은 실전 대련… 아, 그건 진수호만이지. 나머지는 관전 및 이미지 트레이닝. 어때, 좋지?”
다들 얼굴 표정으로 말하고 있었다.
‘당근 빳다죠!’
언제나 싸움 구경은 재밌다.
그것도 지루한 수업 대신이라면 더더욱.
학생들은 전부 이게 웬 떡이냐는 반응이었다.
전대환은 학생들을 뒤로 물려 공간을 만들고, 수호와 윤상호를 가운데 세웠다.
“해묵은 감정을 풀기에는 주먹보다 좋은 건 없지. 원 없이 싸워 보라고.”
윤상호가 물었다.
“스킬 써도 되는 거죠?”
“그거 하라고 여기로 온 거 아니냐. 스킬 안 쓰면 그게 싸우는 거야? 좀 투닥거리다 마는 거지.”
“분명히 말했어요.”
윤상호는 전대환의 눈을 쳐다보며 못을 박았다.
‘무슨 자신감이지, 대체?’
훈련장으로 오는 내내 수호는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해서 좌청룡, 우백호를 꼭 데리고 다니는 인간이 웬일로 정정당당한 게 수상하달까?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할 때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그러면… 시작해라!”
전대환이 뒤로 물러났다.
대결에 들어가자 얼마 안 가서 자신감의 근원을 알 수 있었다.
‘그때의 그 윤상호가 아니다?’
지금 이건 첫 대결이 아니라 리매치다.
처음 손속을 나눠본 것은 정학이 풀리고 C반으로 옮겨온 첫날.
제대로 각 잡고 붙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어떤 수준인지 파악할 정도는 됐다.
그런데 겨우 한 주 지난 지금.
윤상호가 변했다.
익히 알던 움직임이 아니었다.
몰아쳐 오는 속도 자체가 다르고, 주먹 끝에 실린 힘 또한 그때보다 한층 묵직해졌다.
‘뭐지?’
파파파팟!
윤상호가 정신없이 몰아쳐 왔다.
권격이 쏟아졌다.
수호는 좀처럼 수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저번과 비슷한 구도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그때는 탐색을 위해 일부러 방어만 한 거였고, 현재 막고만 있는 건 다른 수가 없어서였다.
쉬익!
윤상호가 단번에 거리를 좁혀 안쪽으로 들어왔다.
“많이 놀랐나 보네?”
비웃음 가득한 얼굴.
신나 죽겠다는 듯, 입가가 마구 씰룩거렸다.
“랭크 좀 오르니까 선배가 우습게 보이지? 하지만, 이게 너와 나의 결정적 차이다!”
윤상호의 주먹이 코앞으로 날아왔다.
전력을 다해서인지 사전 동작이 길었다.
수호는 몸을 숙여 간발의 차이로 피해내고는 어깨로 윤상호를 들이받았다.
“크앗!”
허술한 틈을 제대로 노린 것이라 윤상호는 중심을 잃고 뒤로 나자빠졌다.
드디어 기세를 가져왔나 싶어 공격을 이어가려는데 쓰러진 윤상호의 표정이 여유로웠다.
“좋냐?”
윤상호가 손을 뻗었다.
‘스킬인가?’
아차 하며 물러나려는 순간, 바닥에서 시커먼 손 같은 게 올라오더니 수호의 양 발목을 붙잡았다.
“어때, 내 스킬.”
있는 힘을 다해 걷어차 보는데도 검은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뭐야, 이거?”
“죽은 자의 손길이라는 건데 꽤 쓸 만해. 이렇게 적을 잡아둘 수도 있고.”
윤상호가 재차 스킬을 사용하자 검은 손이 또 올라와 수호의 양팔을 옥죄었다.
“이것만 있으면 평범한 홀딩 스킬이겠지. 근데 효과가 또 있거든. 에너지 드레인이라고 알아?”
들은 바 없는 용어지만 부연해주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에너지가 줄어든다. 흡성대법 같은 건가?’
사지 결박에 에너지까지 빨리고 있는 상황.
누가 봐도 대위기였다.
둘의 대결에 집중하던 C반 학생들의 눈에 실망감이 스쳤다.
“에이, 이거 싱겁게 끝나겠네.”
“역시 같은 C반이어도 2학년은 2학년이라는 건가?”
“처음부터 클래스 차이가 너무 나더라.”
모두가 윤상호의 압승을 점치고 있었다.
여기서 혼자만 생각이 다른 사람.
바로 수호였다.
‘다행히 에너지만 빨아가는군.’
그렇다면 문제될 건 전혀 없다.
‘어디 한번 해볼까.’
전생에선 숨 쉬듯 익숙한 행위였음에도 왠지 모르게 낯설다고 느껴졌다.
어찌 됐건 현생에선 첫 실전이니.
하지만 걱정할 것은 없다.
처음이되, 처음이 아니다.
수호는 심호흡을 하고 내력을 끌어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