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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노예(2)]

“뭔가?”
“잊으신 모양인데 이 아이에 대한 책임은 아직 카비아니 가에 있습니다.”
“흥! 매입자는 우리 나리 단 한분뿐이니 이미 나리만 가의 소유나 다름없네.”
“아아, 아직은 아니지요. 거래는 시작도 하지 않았으니까. 그쪽의 교육은 거래가 끝난 다음에나 할 일입니다.”
“흥! 무식한 사냥꾼 주제에!”
제 맘대로 되지 않음에 화가 났는지 나무리는 탄탄까지 싸잡아 모욕을 주었다. 티르에겐 그다지 거부감 없는 말이었지만 당사자인 탄탄은 어지간히도 열을 받을만한 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탄탄은 당장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티르를 죽일 듯이 노려본 것뿐이다. 그리곤 이를 갈며 천천히 말했다.
“먼저 출발하시지요. 저는 이 건방진 노예를 데리고 곧 뒤따라가겠습니다.”
“그러시든가. 그럼 먼저 가네.”
말에 포함된 의미를 알아챈 나무리가 히죽 웃어보이곤 먼저 휑하니 돌아섰다. 그리고 곧 티르는 흉악하게 일그러진 얼굴의 탄탄과 마주해야 했다. 짝!
“악!”
“건방진 놈, 네놈을 이 자리에서 죽여 버릴 수도 있어!”
“흥! 그러진 못할 걸? 네놈이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을 내가 가지고 있으니까.”
모질게도 얻어맞아 입술이 다시 찢어졌다. 흐르는 피를 손등으로 훔치고 티르는 탄탄을 노려보았다. 어차피 그는 자신을 죽이지 못한다. 나리만도 나리만이지만 그도 못지않게 욕심이 많은 인간이니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약간의 귀찮음 정도야 얼마든지 감수하겠지.
“죽일 놈. 말해라. 샤나메가 뭐지?”
“왕들의 책.”
“뭐?”
“못 들었어? 위대한 왕들의 일대기가 적혀있는 책이라고.”
“책이라고? 멍청한 놈. 속일 생각 같은 건 하지 않는 게 좋아. 그때 영감은 책 같은 건 가지고 있지도 않았어. 더구나 고작 책 따위가 무슨 대단한 물건이라는 거지? 잔머리 굴리지 말고 사실대로 털어놓는 게 좋을 거다. 그 늙은이가 내 손에 있다는 사실을 잊으면 곤란해.”
“흥! 멍청한 건 너다, 탄탄. 책이라니까 돌돌 말린 양피지만 생각했나보지? 무식하기는!”
가장 싫어하는 말이라는 사실을 짐작하고 있으면서도 티르는 거침없이 무식 운운하며 그를 비웃어줬다. 아니나 다를까, 놈의 얼굴이 또다시 무섭게 굳어졌다. 그리고 다시 주먹이 날아왔다. 퍽!
묵직한 주먹을 고스란히 맞고 티르는 멀리까지 날아가 자빠졌다. 숨이 컥 막힐 정도로 아팠다. 하지만 그것은 기회였다. 바닥에 자빠지자마자 티르는 그대로 정신을 잃은 척 몸에 힘을 빼고 축 늘어져 버렸다.
이제 노예 시장에 도착할 때까지 눈을 뜨지 않을 생각이었다. 놈이 안달을 하거나 말거나 그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급한 건 그가 아니니까.
“아, 왜 이렇게 안 와?”
“고, 곧 도착할 겁니다, 주인님. 분명히 금방 뒤따른다고 했는데…….”
“금방은 무슨 놈의 금방? 네놈이 돌아온 지 벌써 반시간이나 지나고 있질 않으냐!”
나리만의 짜증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점점 더 치솟고 있었다.
저택을 나설 때만 해도 싱글벙글이더니 카비아니 가에서 운영하는 시장 건물로 들어서면서부터는 내내 찌푸린 얼굴이었다.
왜 먼저 와 기다리지 않는 거냐, 내실이 너무 검소하다, 카비아니 가로 당장 사람을 보내라, 티르메네스가 도망친 것은 아니냐. 기타 등등, 기타 등등. 마음에 들지 않는 것도 많고 이리저리 시킬 일도 많았다.
그 바람에 나무리를 비롯한 아랫사람들은 내내 허리 한번 펴지 못하고 숨 가쁘게 돌아다녀야만 했다. 상황이 이런데도 카비아니 가에서는 아직 사람이 오지 않고 있었다.
“당장 다시 사람을 보내봐라. 아니다. 네가 가서 아예 티르메네스를 끌고 와!”
“예예. 예, 주인님 가겠습니다. 가고말고요.”
발을 탕탕 굴러가며 난리를 쳐대는 모습에 혼비백산한 나무리가 냉큼 허리를 굽실거리며 움직이려는 순간이었다. 언제, 어디서 나타난 건지 건장한 청년 몇 명이 안으로 빼꼼 고개를 들이밀고 있었다.
“여기가 카비아니 가의 노예거래소인가? 그런데 그 녀석은 안 보이네. 아직 안 왔나보다, 이라즈.”
“알고 있습니다. 일단 들어가서 기다리십시오. 설마 안 오기야 하겠습니까?”
“그렇지? 어, 그럼 실례.”
“웨, 웬 놈들이냐?”
태연하게 안으로 들어서는 사내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퍼뜩 정신을 차린 나리만이 고함을 내질렀다. 시장이 열린 사실은 카비아니 가와 그만이 알고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 자들이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건가. 아니 어떻게 들어왔지?
나리만은 불길한 예감이 엄습하는 것을 느끼며 당장 나칼과 그 건방진 사냥꾼 놈을 의심해 보았다. 이것들이 혹시 자신도 모르게 다른 쪽과 거래를 한 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들이 어떻게 시장이 열린 일을 알고 찾아든단 말인가.
“당장 나가라!”
제가 주인이라도 되는 양 비단 쿠션이 놓인 상석에 털썩 주저앉는 검은 머리의 청년과 그의 뒤에 우뚝 서는 두 사내를 향해 나리만은 다시 고함을 쳤다. 그러자 청년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쩨쩨하게 굴지 마. 같이 좀 구경한다고 해서 닳는 것도 아니잖아? 안 그래?”
“뭐, 뭐라? 하! 이젠 별 거지같은 것들이 다 끼어들어 귀찮게 하는군. 대체 뭣 하는 놈들인지는 모르겠다만 잘못 찾아들었다. 거기, 아무도 없느냐? 당장 저놈들을 끌어내라.”
우르르 쏟아져 들어오는 무사들에게 발작적으로 소리치며 나리만은 매섭게 눈을 빛냈다. 이제와 다 된 밥에 재를 뿌릴 순 없는 일이었다. 물론 생판 모르는 것들과 기쁨을 나누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모름지긴, 이런 종류의 기쁨이란 제법 은밀한 구석이 있어서 혼자 만끽하기에도 늘 부족하지 않던가. 더구나 티르메네스를 얻기 위해 그간 들인 공인 얼마인데!
“인색한 자군. 그런데 어쩌나? 난 오늘 이곳에서 볼 일이 있는데 말이야.”
“볼일이라니? 무슨 볼일이라는 거냐?”
“아, 별거 아니다. 그저 노예를 하나 사려는 것뿐이니까. 그래, 이왕이면 은발이 좋겠군.”
“……!”
의미심장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으며 슈라는 기분 좋게 미소 지었다. 돼지처럼 투실투실 살이 찐 노예 상인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어지거나 말거나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다만 나리만의 명령으로 개떼처럼 몰려든 무사들을 조금 난감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귀찮은 건 딱 질색인데 말이야.”
“그런 분이 잘도 일을 만드십니다. 처음부터 이렇게 할 것까지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너도 동의한 일이잖아.”
“말은 바로 하십시오. 중간에 납치하자는 의미였지 시장에서 사자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어쩔 수 없잖아. 그 애는 공짜로 얻기엔 지나치게 이쁘단 말이야. 더구나 이곳이 아니면 접근할 방법도 없었고.”
카비아니 가에서 사고가 있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돌아오기가 무섭게 그들은 티르메네스가 사실 카비아니 가의 손자가 아니며 곧 노예로 팔린다는 소문을 들었다.
아끼던 무사는 살인죄로 감옥에 갇혀있고 늙은 당주는 생사를 오락가락하는데 문제의 주인공은 노예로 팔린다?
대강 듣고도 누군가의 음모가 있었을 법 했다. 그것이 나칼이라고 하는 사촌형이든 또는 다른 누군가가 되었든 간에 슈라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어쨌거나 티르메네스를 중간에 가로채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으니까.
“어찌 할까요, 전하?”
자일로스가 속삭이듯 물었다.
“어쩌긴? 시끄러운 놈들을 치워야지.”
“존명!”
자일로스는 당장에 검을 뽑아들었다.
이미 검을 뽑아들고 다가들던 나리만 가의 무사들과 자연스럽게 대치하기 시작했다. 노예를 거래하는 상인들을 위해 검소하지만 고급스럽게 치장된 내실은 이제 무사들의 싸움판으로 돌변하려 하고 있었다.
“멈춰라!”
누군가의 성난 고함소리가 입구 쪽에서 터져 나왔다.
그러자 당장이라도 한데 얽혀 드잡이질을 하려던 무사들이 움직임을 멈추고 일제히 움찔 멈추어 섰다. 약속이나 한 듯 모두의 시선이 금방 소리가 터져 나온 곳으로 돌아갔다.
빛바랜 금발머리를 한 청년이 무사들인지 사냥꾼인지 모를 이들을 잔뜩 거느린 채 막 내실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나칼이었다.
“이곳은 카비아니 가의 노예거래소이다. 허락도 없이 웬 소란인가?”
“크흠! 마침 잘 왔네, 나칼.”
응원군이라도 만난 듯 나리만이 반가운 얼굴로 그를 향해 손을 흔들어 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나칼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그리고 슬쩍 맨 끝에서 따라오고 있는 티르를 돌아보았다.
탄탄에게 맞아 기절한 놈이 짐짝처럼 사냥꾼의 어깨위에 달랑 매달려 있었다. 어떻게든 도착하기 전에 정신을 차리게 할 요량으로 물도 끼얹어 보고 뺨도 쳐보고 한 끝에 간신히 눈만 뜨게 해 끌고 왔는데 나리만을 보자 어쩐지 슬쩍 불안한 생각이 든다.
‘과연 잘하는 짓일까?’
나칼은 티르를 나리만에게 넘기는 일이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와 약속을 하긴 했지만 그 사실이 마냥 기껍지만은 않은 것은 역시 티르를 가까운 곳에 두는 것이 싫은 탓일 것이다.
‘다시 보게 될 거라고? 다시! 다시?’
바라를 보고 나온 후의 놈의 시선을 잊을 수가 없었다. 핏발 선 눈으로 다시 보게 될 거라고 외치던 모습에 소름이 돋았었다. 놈을 가까이에 두면 내내 이 빌어먹을 두려움에 휘둘리게 될지도 모른다. 나칼은 그것이 싫었다.
“무슨 일입니까?”
불편한 심기를 황급히 감추고 애써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그러자 나리만은 그 통통한 손으로 낯선 청년 일행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저자들이 난입을 했단 말일세. 대체 어떻게 알고 온 건지 설명을 듣고 싶단 말이야. 설마 자네들이 초대를 한 것은 아니겠지?”
“어? 초대라니? 초대장을 들고 와야 하는 곳이었나? 언제부터?”
의심 가득한 나리만의 말에 슈라는 당장 비아냥 가득한 대꾸를 하며 나칼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곧 시선을 옮겨 티르를 찾았다. 덩치 큰 사냥꾼의 어깨위에 달랑 매달린 꼴을 보니 편치만은 않았을 그간의 상황이 짐작됐다.
‘다행히 빼앗기진 않았나보군.’
티르의 한쪽 팔뚝에 얌전히 채워져 있는 팔찌를 확인하고 슈라는 남몰래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꼬마를 가로채기만 하면 되는 일이다. 이 얼마나 간단한 일인가.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려가는 걸 보니 역시 하늘이 그를 돕고 있는 모양이다.
‘역시 난 운이 좋아.’
안 그래도 여유만만 했던 슈라의 태도가 한층 더 방자해지는 순간이었다.
“당신…… 누구지?”
의심 가득한 시선을 번뜩이며 나칼이 물었다.
“누구긴? 보시다시피 손님이지. 그대가 가진 은발의 노예를 사고 싶어 하는.”
“오늘 거래에 대해서는 어떻게 알았지?”
“소문이 제법 짠하더군. 모를 수가 없는 일이었지. 비밀을 만들고 싶었다면 입단속부터 하는 게 먼저였어.”
“……원하는 이유는?”
“이뻐서.”
이뻐서? 그 말을 듣는 순간 나칼은 저도 모르게 다시 나리만을 돌아보았다. 나리만이 티르를 원하는 이유를 모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둘은 같은 부류인가? 좀 의외긴 하지만 드문 일도 아니라 금방 수긍을 할 수 있었다.
“뭘 하는 거지? 당장 저자들을 내쫓으라니까!”
돌아가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나리만이 정색을 하고 따지고 들었다. 그러나 나칼은 들은 척도 않고 계속 물었다.
“어디에서 왔지?”
“비밀. 꽤 멀거든.”
“멀다?”
원하던 바였다. 멀수록 좋다. 가능한 멀리 보내버릴 수 있다면…….
“당주님, 약속을 잊지 마십시오.”
아무래도 안 되겠던지 잠자코 지켜보고 있던 탄탄이 나칼의 어깨를 잡으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탄탄은 불안했다. 그냥 얌전히 저택에 머물 것처럼 굴더니 갑자기 자기가 직접 거래를 하겠다며 나설 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이제 와서 귀찮게 굴 생각인가?
‘멍청한 놈, 여기서 일을 망칠 생각이냐? 누구 마음대로!’
고작 몇 대 처 맞고 기절해버린 꼬마 녀석 때문에 가뜩이나 심기가 불편해 있는데 이젠 나칼마저 그의 일을 방해할 것처럼 굴고 있었다. 더구나 갑자기 끼어든 저 청년 일행의 의도도 의심스럽다. 혹, 저들도 자신처럼 샤나메인지 뭔지를 노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탄탄은 퍼뜩 그런 생각을 해보았다.
잠깐이지만 그가 유심히 살펴본 청년은 고작 이쁘장하다는 이유만으로 어린 사내 녀석을 탐할만한 자가 아니었다. 당당하고 위압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것으로 보아 낮은 신분도 아니다.
‘그렇다면 역시…… 저들도 노리고 있는 거야!’
탄탄은 확신했다. 그저 외모에 빠져 티르메네스를 탐내고 있는 나리만과는 다른 부류. 힘을 원하는 자들.
‘양보할까보냐.’
왕으로 만들어 줄 수 있는 물건이라고 했다. 왕들의 책 운운했지만 그것 말고도 따로 숨겨진 힘이 있다고 했었다. 탄탄은 샤나메가 꼭 필요했다.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다. 그 또한 간절히 힘을 원하고 있었으므로.
“신용은 중요한 겁니다. 약속을 이행하십시오.”
지그시 이를 깨물며 윽박지르듯 속삭였다. 그러자 흠칫 놀란 나칼이 경악어린 시선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순간 위협을 당했다고 여긴 모양이다. 어쩌면 이제껏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이라는 사실을 상기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상관없는 일이었다. 이제 나칼도 슬슬 제 주제를 깨달을 때가 되었으니까.
“크흠! 약속대로 티르메네스를 넘겨주게. 내 사례는 섭섭지 않게 하겠네. 30무나 쯤으로 아니 1탈란톤을 내…….”
“1탈란톤 30무나 내겠다!”
“뭐, 뭣?”
갑작스런 선언에 나리만은 혀를 깨물고 말았다.
어린 노예라면 1탈란톤도 대단히 비싼 편이었다. 그런데 거기에서 가격을 더 쳐주겠다고?
오만하기 짝이 없는 청년의 낯짝을 뚫어지게 노려보다 나리만은 슬쩍 웃었다. 이제껏 흥정에서 져본 적이 없는 그였다. 그가 누구인가? 아덴부르크 제일의 노예 상인이 아니던가. 금력에서 그를 이길 수 있는 자는 몇 되지 않았다.
그 사실을 되새기자 갑자기 기운이 솟았다. 뉘 집의 철없는 도련님인지는 모르겠지만 상대를 잘못 골랐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게 해주리라 작심했다.
“크흠. 난 확실한 것이 좋네, 나칼. 정말로 이 거래에 저자들을 초대하겠다는 건가?”
“그럴 리가! 절대로 아닙…….”
“초대하겠다!”
“헉! 다, 당주님?”
“……!”
숨죽인 충격의 신음성과 함께 곧 경악어린 시선들이 교차했다. 나리만은 배신감에 몸을 떨었다. 그리고 탄탄은 분노로 눈앞이 새카맣게 물드는 경험을 하고 있었다. 담담한 것은 오직 나칼과 슈라 일행뿐이었다.
“자, 그럼 흥정을 계속 해보실까? 난 1탈란톤과 30무나를 불렀는데 더 부를 사람 없나?”
“어림없는 소리! 이것은 말도 안 된다. 우선 매입자는 나 하나뿐이라고 약속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이제와 내 뒤통수를 치겠다는 건가? 대답을 해라, 나칼!”
“나는 카비아니 가의 당주 대리로서 아덴부르크 시를 대신해 정당한 거래를 주선할 뿐입니다. 아시다시피, 시의 대리인은 가장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사람에게 먼저 판매할 의무가 있습니다.”
“너, 너 이노옴! 기껏 도와주었더니 감히 나를 배신해?”
나리만은 당장이라도 발광을 할 것처럼 얼굴을 시뻘겋게 붉히며 발을 굴러댔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칼은 깨끗하게 무시하고 다시 물었다.
“흥정에 참여하시겠습니까?”
“……끄응. 참여하겠다. 으드득!”
나리만은 이를 악물었다.
저 천둥벌거숭이 같은 애송이 놈을 잡아채 당장이라도 박살을 내놓지 않으면 속이 터져버릴 것 같았지만 지금은 참아야 했다.
일단 티르메네스를 얻고 난 후에 행동해도 늦지 않는다. 어쨌거나 약점을 가진 건 놈이니까 말이다. 모든 결과를 뒤엎고 저를 빈털터리로 만들어 내쫓을 수도 있는 것이 바로 나리만, 자신임을 잠시 잊고 있는 모양이나 이제 곧 깨닫게 될 것이다.
‘그래, 곧 알게 해주마. 멍청한 놈, 내게 협력하지 않으면 네놈이 얻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야.’
분노어린 시선이 나칼을 지나 그의 등 뒤에 선 탄탄에게로 내리꽂혔다. 탄탄 또한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상황인지 싸늘하게 굳은 얼굴로 나칼의 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할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그 잘난 머리통을 부셔버리고 싶다고 말하는 듯한 시선으로.
짧은 순간, 나리만과 탄탄……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그리고 곧 소리 없는 모종의 의견이 눈빛을 타고 은밀하게 오가더니 희미한 끄덕임을 끝으로 예정되어 있던 각자의 방향으로 엇갈렸다.
“좋다. 흥정을 계속하지. 1탈란톤 40무나!”
“2탈란톤!”
“으음. 2 탈란톤 10무나!”
어린 노예의 가격으로는 이제껏 거론된 적조차 없었던 금액이 숨 가쁘게 오가기 시작했다. 그 순간, 반쯤 기절한 상태로 사냥꾼의 어깨위에 매달려 있다 간신히 바닥으로 내팽개쳐진 티르는 또다시 이상한 경험을 하고 있었다.
-찌리링!
그저 살짝 기절한 척 연기하려던 것이 잘못됐는지 그는 정말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비몽사몽간인 듯 눈앞은 몽롱하고 기운이 쭉 빠져 팔다리가 흐물거리는데 귓가에서는 또 이상한 소리가 울리고 있다.
-짤랑!
맑은 쇳소리가 울리고 곧 눈앞으로 황금빛을 뿌리는 까만 그림자가 홱 스쳐지나간다. 상당히 긴 그림자다. 무언가가 주렁주렁 매달린 것이, 언뜻 보면 작은 나무처럼 보이기도 한다. 대체 정체가 뭐지?
-찌리링!
분명히 낯이 익은 모양이긴 했다. 그 동안 숱하게 모아온 무기들 중 어떤 종류와 닮았다. 길고 날카롭고 또 아름다운…….
-짤랑!
그건 아마…….
“……창(槍)?”
희미한 목소리일망정 소리 내어 그것의 이름을 기억해내자 그제야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동시에 몽롱하던 시야가 개인 듯 맑아졌다. 물속에서 건져내진 것처럼 갑자기 정신이 확 돌아온 것이다.
‘대체 뭐지? 왜 이런 이상한 일이 생기는 거야. 설마 샤나메를 삼켜서 생기는 부작용인가?’
아무래도 쬐금 불안하기는 해 티르는 슬쩍 배를 문질러보았다.
이물감 하나 없이 매끈한 배를 살살 문지르다 손바닥으로 통통 두드렸다. 평소와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었다. 복근 하나 안 생기는 물렁한 살도 여전하고 때가 되면 정확히 ‘꼬르륵‘ 소리가 나는 것도 똑같다.
첫날처럼 죽을 만치 아프다거나 열이 나는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해서 남달리 건강해진 것 같지도 않다. 변한 건 없었다. 이렇게 가끔 이상한 소리를 듣는다거나 눈앞을 스쳐가는 어떤 환영을 본다는 것만 빼면 지극히 정상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근데 왜 창이지? 돌겠네. 설마 살짝 돌기 일보직전인 건가? 안 되는데! 젠장, 이래서 아무거나 주워 먹지 말라고 하는 건가보다.’
삼키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긴 했지만 그래도 시간을 두고 조금 더 생각을 해볼 걸 그랬나 보다. 다른 건 몰라도 지난 이틀간 화장실 한번 못 간걸 생각하니 역시 후회스럽다고나 할까.
‘끄응, 설마 막혀버린 건 아니겠지?’
호두알만한 걸 삼켰으니 나중에 빼내기가 힘들지도 모른다. 설마 이대로 변비가 되려는 건 아닐 거야.
“에잇! 3탈란톤!”
“헉!”
변비와 관련된 진지한 사색에 잠기려는 순간, 그를 일깨우는 벼락같은 소리가 있었다. 벌건 얼굴로 손가락 세 개를 치켜들고 있는 나리만. 그러고 보니 잠깐 현실을 잊고 있었다.
‘나, 노예로 팔리고 있는 중이었지 참.’
그 중요한 사실마저 잊고 딴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이놈의 태평함은 이제 시와 때를 가리지 않는다. 바라를 닮아서 그런가? 티르는 스스로의 두툼한 신경에 삼가 경의를 보냈다.
“어디 더 불러보시지! 흐흐흐.”
“못할 것도 없지. 3탈란톤 10무나 12드라크마 24오보로스!”
“제, 제길!”
실실 웃는 얼굴로 놀리듯 주절주절 잘도 금액을 올려놓은 슈라가 티르를 향해 찡긋 윙크를 보내왔다. 오락가락하는 어마어마한 금액에 놀라다가 마침내 그를 발견한 티르의 눈이 순간 화등잔 만하게 커졌다가 돌아왔다.
‘신기하네. 어떻게 알고 찾아왔지?’
티르는 그를 단박에 알아보았다. 안 그래도 무사히 탈출만 한다면 찾아갈 생각이었는데 제 발로 나타나 주었으니 새삼 못 알아볼 이유가 없었다. 돌아가는 상황으로 보아 그 어마어마한 돈을 치르고 자신을 사려는 모양이다. 기대도 안했는데 싸가지 답지 않게 제법 예의가 있잖아?
파지처럼 구겨진 몰골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사실이 조금 창피하긴 했지만 그래도 일이 생각보다 쉽게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큼은 마음에 들었다.
‘카도니아의 황태자라고 했지? 목적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아쉬운 건 나니까 잠깐 신세 좀 질게.’
만일 그가 사준다면 티르는 두말 않고 따라나설 생각이었다.
탄탄과 나리만의 손에서 카비아니 가를 구하려면 힘이 필요했다. 다 죽어가는 바라와 감옥에 갇혀있는 막시무스도 구해야 하고 또 철딱서니 없는 나칼 놈도 혼내주고 싶었다. 거기까지 생각하다 티르는 퍼뜩 또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내가 왜? 손자도 뭣도 아니라는데! 젠장!’
잊고 싶어도 좀처럼 잊혀 지지 않는 사실 때문에 순간순간 기분이 가라앉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잠시. 누가 뭐래도 그는 바라의 아이였다. 그 사실은 그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꼭 돌아올게, 바라. 절대로 죽지 말고 기다려. 무슨 짓을 해서든 반드시 살아 돌아올 테니까…….’
티르는 이를 악물었다. 그렇다. 지금 중요한 것은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살아남는 것이었다. 나머지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될 일이다.
“거기에 10무나 더!”
결심을 굳히는 순간 나리만의 성난 목소리가 다시 귀청을 떨어 울렸다. 돼지 같은 놈이 돈은 많아서 씩씩거리면서도 지지 않고 한푼 두푼 잘만 가격을 올리고 있다.
슬그머니 양쪽의 표정을 살펴보니 심기가 불편한 것은 피차 마찬가지. 여유만만 하던 슈라도 어느새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고 나리만은 이미 불타는 돼지로 변해가고 있었다. 착실하게 불려가고 있기는 하지만 3탈란톤을 훌쩍 넘어버린 돈은 어느새 서로에게 부담스러운 금액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도 일단 시작한 건데 좀 더 쓰지 그래?’
유례없이 비싼 값에 팔린다는 사실에 뿌듯했던 것도 잠시. 티르는 살짝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가진 돈이 부족해 슈라 일행이 경매를 포기하게 될까봐.
생각 같아서는 허리춤에 매달린 예의 럭셔리한 검이라도 팔아서 사달라고 조르고 싶었지만 어쩌면 이미 그것을 염두에 두고 가격을 올린 것일지 몰라 티르는 냉큼 입을 다물었다.
“흐흐, 어디 더 불러보시지?”
“흐음, 이것 참.”
“3탈란톤이면 다른 노예를 몇쯤 사고도 남을 거네. 원한다면 내가 데리고 있는 아이 중 가장 예쁜 아이를 선물로 줄 수도 있고. 자, 어떤가? 이쯤에서 물러서지 않겠나?”
안 그래도 부담스러운 가격을 더 올리지 말라는 듯 나리만이 은근히 수작을 걸기 시작했다. 슈라의 미간에 생긴 주름이 더 짙어지고 있었다. 그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