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15화 노예(1)]

나는 꽤 비싼 노예였다. 아덴부르크의 노예시장에서 이제껏 그만한 가격에 거래된 노예는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위대한 샤 티르의 수줍은 고백 中-
“미친놈! 인질 좋아하고 자빠졌네. 손자고 뭐고 아무 사이 아니라며? 주워온 놈이라고 노예로 팔아치워지기 일보직전인데 그딴 게 귀에 들어올 성 싶어?”
애써 잊으려했던 문제를 아프게 떠올리며 티르는 혼자 분통을 터트렸다. 저 망하고도 망할 것은 제가 무슨 짓을 해놓았는지도 헷갈리는 모양이다.
“이 멍청한 놈아, 난 상처 받았어. 아무렇지 않은 척 하고 있지만 아프다고. 바라도 밉고 막시무스도 미워. 나칼 놈은 쳐 죽이고 싶을 지경이야. 이런 마당에 뭐가 인질이란 거야?”
티르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막상 탄탄이 바라의 목에 칼을 들이밀고 협박을 해온다면 꼼짝 못하고 항복하게 될 거라는 걸 잘 알면서도 소리 지르는 일을 멈출 수 없었다. 억울해서. 화가 나서. 그리고 슬퍼서.
“돌겠어.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바라, 누가 힘없이 인질 따위나 되라고 했어? 거짓말쟁이 주제에!”
티르메네스라는 이름으로 살아온 지난 16년(몇 살에 주워왔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기억하지 못하는 유년이니까.) 인생이 사실은 가짜라니. 이제까지 잘도 속여 온 그에게 심심한 경의를!
거짓말쟁이, 거짓말쟁이……. 원망스레 외쳐보지만 사실은 누구보다 사랑한다. 그에게 바라는 사랑하는 가족이다. 아버지, 어머니, 형제를 포함한 모든 것이었다. 그런 그를 영영 잃는다면 티르는 절반쯤 무너져 내릴지도 몰랐다.
“고집쟁이 바라. 나를 키운 건 바라지? 그럼 내가 어떻게 할지도 알고 있을 거야.”
샤나메에 대해 알려준다고 해서 정말로 그를 팔아치우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얻을 것을 얻고 나면 오히려 더 그를 처리하기 쉬워졌다고 생각할 것이다. 아니 샤나메가 그의 뱃속에 들어있다는 사실을 알면 당장 배를 째려고 덤벼들지도 모를 일이다.
“누굴 바보로 알아? 미친놈, 어디 두고 보라지?”
어떻게 하면 잘 빠져나갈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 티르는 문득 자신이 갇혀있는 장소에 대해 자각했다. 자신의 방이다.
“뭐야, 이제야 깨닫다니. 나 설마 멍청이가 되어가고 있는 건가? 젠장, 알게 뭐야. 흥! 내 방에 가두어둔 걸 후회하게 될 것이다, 탄탄.”
티르는 득의의 미소를 지으며 침대 쪽으로 걸어가 불쑥 베개 아래로 손을 집어넣었다. 역시! 언젠가 넣어두었던 단검이 찰떡처럼 착하니 손에 잡혔다. 무기에 한창 열을 올리고 있는 그였다. 서재뿐만 아니라 방에도 단검 하나쯤은 굴러다닐 만한 상황이었고 당연히 그랬다.
“아, 사과를 깎아먹으려고 넣어둔 건데 잘 쓰겠네.”
가죽으로 된 검 집에서 단검을 뽑아들고는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사과를 깎기엔 조금 컸지만 누군가를 찌르기엔 좀 작다. 양날이라 그나마 좀 낫긴 하나 손잡이가 짧아 힘을 주어 찔러 넣기엔 다소 버거울 듯도 했다.
“아무렴 어때. 잘만 쓰면 되는 거지.”
단검이긴 하지만 일단 무기를 손에 쥐니 조금 안심이 됐다. 티르는 단검을 품에 잘 숨겨 넣고 이런저런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나리만과 약속한 내일이 오면 모든 것이 결판나리라.
“가기 전에 바라를 한번 보게 해달라고 해볼까?”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데 역시 한번은 보고 가야 했다. 노예가 되어 나리만 놈에게 팔리든 혹은 탈출에 성공해 카도니아로 가게 되던 당분간은 만나지 못한다. 상태도 확인하고 또 남길 말도 있다. 그러니 꼭 한번은 보고 가야 했다.
“자, 생각을 해보자. 탄탄 놈이 언제 다시 올까? 나칼에게 말해봤자 씨도 안 먹힐 거고…….”
샤나메의 영향으로 신비한 금청색으로 변한 눈동자가 반짝 빛을 뿌렸다. 그때였다.
-찌링!
“응?”
-찌리링!
“어라? 이게 무슨 소리지?”
귓가에서 이상한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티르는 저도 모르게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그러자 순간 눈앞으로 이상한 환영 같은 것이 홱 스쳐지나갔다. 너무 순식간에 지나가버려 무언지 정체를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어둠 속에서 빛나는 기다란 그림자 같은 것을 그는 분명히 보았다.
“모, 몸이 허해졌나?”
멀쩡히 두 눈을 뜬 상태로 헛것을 보았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 그런데 그건 대체 뭐였지? 혹시 또 보이게 될까봐 움직임을 멈추고 가만히 기다려보았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환영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아득하게 찌링찌링 울어대는 가녀린 소리만이 귓가에서 메아리치고 있을 뿐.
“제길!”
막시무스는 좁은 감옥 안을 초조하게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열심히 나돌아 다닐 때는 미처 깨닫지 못했는데 확실히 자신은 좁은 곳과는 어울리지 않는 듯 하다.
“답답해서 미치겠단 말이다!”
아니 사실은 너무 궁금한 것이 많아 속이 답답한 것뿐이다.
바라는 어찌 되었는지, 티르는 무사한지, 나칼 놈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기타 등등. 기타 등등.
궁금하고 걱정도 되고 또 동시에 화도 났다. 이렇게 복잡다단한 감정이 하필이면 손바닥만 한 공간에 갇혀있을 때 폭발할 건 또 뭔가.
“으아악! 이봐, 거기 아무도 없나?”
막시무스는 두 손으로 거칠게 창살을 거머쥐고 밖을 향해 버럭 소리쳤다. 감옥을 지키는 병사라도 붙잡고 혹시 들은 소문이 없는지 알아봐야 다급한 속이 좀 진정될 것 같았다.
“어이, 거기 조용히 좀 하지?”
바깥쪽에서 소리를 들은 누군가가 험악한 목소리로 경고를 해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막시무스는 재차 소리쳤다.
“이봐, 혹시 카비아니 가와 관련된 소문 들은 것 없나?”
“없다. 있어도 없어. 그러니 이제 그만 그 입 좀 닥치라고. 살인미수범 주제에.”
“뭐? 저 자식이…….”
혀를 깨무는 심정으로 뒤집어 쓴 죄지만 생각할수록 억울했다. 술에 취해 잠들었다 깨어나 보니 살인범이 되어 있더라…… 라는 상황 자체가 막시무스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보기 좋게 이용당했고 죄를 뒤집어썼으며 이젠 생으로 처벌까지 받게 생겼다.
“판결이 나기 전에 이 빌어먹을 곳에서 나가야 할 텐데…….”
다 죽어가는 바라가 이제라도 깨어나 그의 무죄를 증명해주거나 진범이 자백을 하지 않는 이상은 심문관들이 내리는 판결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무슨 판결이 내려질까? 교수형? 단두대? 아니면 장살?
뭐가 되었든, 여차하면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바라의 말처럼 그는 본의 아니게 목숨을 걸어버린 것이다.
그랬는데 목숨 값이 아깝게도 그 노예 계집이 티르의 비밀을 죄다 까발려 문제를 만들었다면? 나칼이 가문의 명예나 바라의 의지조차도 개밥 그릇처럼 내팽개치고 결국 티르를 내쫓는다면? 그거야 말로 미치고 돌 일이 분명할 터였다.
“나칼, 제발 잘 생각해라. 더 이상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란 말이다.”
눈앞에 나칼이 있기라도 한 듯 그는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뜻밖에도 그 말에 대꾸를 해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나칼이란 자가 이번 일의 주역인 모양이지요?”
“어? 누구냐?”
뚜벅뚜벅. 입구 쪽에서 호리호리한 그림자 하나가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밖에 분명히 경비병들이 서 있는데 어쩐 일인지 그들은 언질 한마디도 없다. 마치 사내를 보지 못한 것처럼. 그리고 여전히 보이지 않고 있는 것처럼.
어리둥절해 입구 쪽을 살피는 사이 사내는 어느새 복도 한복판에서 불쑥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길게 풀어헤쳐진 붉은 머리카락. 갸름한 선이 아름다운 얼굴과 붉은 입술. 낯이 익었다.
“당신은?”
“다시 뵙는군요, 막시무스님. 하라입니다.”
“당신이 어떻게 이곳까지……?”
“뭐, 별것 아닙니다. 그저 궁금한 것이 있어 잠시 들러본 것뿐이랍니다.”
나직하게 말하며 사내는 방긋 웃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화사하고 아름다운지 막시무스는 순간 그를 또 ‘아름다운 붉은 머리의 미녀‘라고 착각할 뻔 했다.
“크흠. 궁금한 것이라면 역시…….”
보나마나, 찍으나 마나 사내는 티르의 일을 궁금해 하고 있을 터였다. 막시무스는 그 점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속해있는 자라면 역시 다른 무엇보다 주인의 명령을 지키는 일이 가장 중요할 테니까.
슬그머니 말끝을 흐리자 하라는 망설임도 없이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코앞까지 다가와 불쑥 물었다.
“그분의 생신날, 제가 부탁드렸던 이야기를 티르메네스님께 전하셨습니까?”
“아! 아, 그게…….”
“전하지 않으셨군요.”
“크흠. 미안합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소. 그때, 나는 당신이 작은 도련님에게 해로운 영향을 줄지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판단했으니까. 물론 그 생각은 지금도 달라지지 않았소.”
“호오! 해롭다?”
눈을 좁히며 비아냥거리듯 중얼거리는 사내를 막시무스는 굳은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안 보이게 방글방글 웃던 아름다운 남자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지금 그 앞에 서있는 건, 소름이 끼치도록 차가운 눈동자를 가진 무사 아니 그 보다 더 위험한 ‘무엇‘이었다.
꿀꺽. 마른침이 의식하기도 전에 저절로 목구멍을 넘어갔다. 막시무스는 어느새 자신이 긴장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위험하다. 이 남자는 위험한 자다. 무사로서의 본능이 맹렬하게 경고를 보내오고 있었다.
“흐음, 역시 인간들이란 이토록이나 어리석다니까. 해로운 영향이라니……. 그분이 가져야 할 마땅한 권리를 찾아주는 일이 해롭다? 아무리 해롭다한들 천하디 천한 인간들의 손에 의해 노예로 팔리는 것보다 더 하겠습니까?”
“뭣? 그, 그게 무슨 소리지? 노예라니? 누가?”
“모르고 있었군요. 들어보십시오, 막시무스님. 대단하신 카비아니 가에서 오늘 한 가지 사실을 발표했답니다. 티르메네스는 카비아니 가의 핏줄이 아닌 습득물이므로 시의 규정에 따라 노예시장에 내놓는다!”
“헉!”
숨이 컥 막히는 듯 했다. 나칼은 생각보다 더 엄청난 일을 벌이고 있었다. 노예라니? 바라의 운명, 막시무스의 책임을 노예로 팔아버린다고? 누구 마음대로! 막시무스는 분노했다.
“나칼, 그 멍청한 놈이 기어이!”
“화를 내시는군요.”
“내가 지금 화를 안 내게 생겼소? 그놈이 어떻게 티르를…….”
“아아, 그렇지요. 어떻게 감히 그분께 그런 불경스러운 일을 저지를 수 있는 걸까요? 이 일을 제 주인께서 아신다면 아마…….”
말끝을 흐리며 그는 의미심장한 눈으로 막시무스를 응시해왔다. 뭘까? 무슨 뜻이지? 광폭이라는 말이 어울릴 만큼 잔인하게 빛나는 시선이었다.
눈으로 누군가를 죽일 수 있다면 그의 시선을 받은 자는 그 자리에서 누구보다 처참하게 찢겨질 것. 막시무스는 그만 상상하는 일을 포기해 버렸다.
“그런데 당신의 주인이라는 분은…….”
“아, 당신의 질문은 받지 않겠습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오늘은 제가 궁금한 것이 있어 왔으니까요. 당신은 그저 대답만 하시면 된답니다. 후후.”
“……!”
“자아, 말씀해 주십시오. 내일 카비아니 가의 노예시장이 열린답니다. 그런데 우선매입 후보자가 한명이라는군요. 그 자가 매입 포기 선언을 해야 다른 사람이 나설 수 있다는 뜻이겠지요. 당신이라면 그 자가 누군지 아시겠지요?”
‘나리만!’
당장에 답이 나왔다. 그 밖에 없다. 평소에도 노골적으로 티르를 탐내던 사람이니 이런 좋은 기회를 어찌 놓치려 할까.
‘가만! 우선매입자? 어째서? 설마, 놈이 나칼과 손을 잡고 일을 벌인 것이란 말인가?’
순간 막시무스는 자신이 처한 상황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나리만이라면 심문관들 정도를 매수하는 것은 일도 아닐 터였다. 티르가 쫓겨나는 사정도 알만 했다. 나칼은 티르를 눈엣가시처럼 여기고 있고 나리만은 그런 그를 원하고 있었다. 즉, 그들은 서로 필요한 것을 나누어 가지기로 한 것이다.
“이것들이!”
으드득 이를 갈았다. 격렬한 분노가 혈관을 따라 맹렬하게 온몸으로 번져가고 있었다. 막시무스는 이제 탈옥하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뛰쳐나가 그들의 목을 움켜쥐고 달달 흔들기라도 해야 진정이 될 것만 같았다. 그런 그를 가만히 지켜보던 하라가 마치 모사꾼처럼 속삭였다.
“이제 대답을 들어 볼까요?”
“좋아. 대답해주지. 단, 조건이 있어.”
“조건?”
“당신, 허락 없이 들어온 거 맞지? 이곳을 지키고 있는 저 멍청이들이 두 눈 멀쩡히 뜨고 보면서도 아무 소리 하지 않는 이유가 있을 거야. 그렇지?”
“그렇다면?”
“별거 아니야. 나갈 때 같이 좀 나가자는 거지. 어때?”
낮게 속삭이는 그의 제안에 하라는 소리 없는 미소로 대답하고 있었다.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것 같았다.
“뭣? 어딜 갔다고!”
나칼은 경기를 일으키듯 버럭 소리쳤다.
노예 시장이 서는 날이었다. 티르를 나리만에게 넘기기로 한 바로 그 날. 물론 그로서도 이 아침이 기꺼운 것만은 아니었다. 지난 밤 내내 나칼은 갈등했다. 티르를 이대로 나리만에게 넘기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고뇌하느라 잠드는 것마저 잊었었다.
‘이미 친 혈육이 아니라는 사실이 모두에게 알려졌다. 하지만 녀석은 바라가 인정한 손자. 어쩌면 사람들은 녀석을 내치는 나를 향해 인정머리 없다고 손가락질 할지도 모른다.’
그들의 수군거림이 두려운 것은 아니었다. 남이야 뭐라고 떠들든 말든 그다지 관심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밤 내내 고뇌해야 했다. 왜? 뭐가 두려워서?
‘그래, 나는 그놈이 두려운 거다. 나를 바라보는 놈의 시선을 견딜 수 없는 거야.’
심문회에서 돌아온 그날도 그랬다.
경멸 섞인 녀석의 시선과 마주치는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었다. 애써 잊으려했던 죄책감이 밀려들고 손에는 어느새 땀이 찼다. 당장이라도 ‘내 할아버지를 찌른 원수‘라고 소리치며 놈이 달려들 것만 같았다.
그런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나칼은 기어이 ‘도피‘하는 쪽으로 결론을 내려버렸다. 쓸데없이 죄책감을 충동질하는 티르를 보이지 않는 곳으로 치워버리기로 한 것이다. 그랬는데, 제 방에 갇혀 있어야 할 놈이 보이지 않았다.
“방금 전, 어르신의 처소로 갔습니다.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번만 보고 싶다고 했다면서 탄탄님께서 직접 데리고 움직이셨습니다.”
“탄탄이?”
나칼은 조금 놀랐다. 탄탄이 자신의 허락도 없이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오늘 노예 시장을 여는 것만 해도 거의 그가 주도하다시피 했는데 이젠 자신에게 묻지도 않고 티르를 바라의 처소로 데려갔단다. 대체 누구 마음대로!
절대 보여주고 싶지 않은 바라의 모습을 가장 보여주기 싫은 녀석에게 공개해 버리다니. 아득하게 현기증이 일었다. 너무 화가 나 차마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나칼은 무시무시하게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당장 바라의 처소 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쾅!
굉음과 함께 부서질 듯 문이 열렸다. 급하게 열린 문 사이로 선선한 아침 공기가 확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씩씩 거리는 누군가의 거친 숨소리가 등짝에 와 부딪쳤지만 티르는 돌아보지 않았다.
“무슨 짓이냐!”
“이런! 왜 이렇게 화가 나셨습니까, 당주님?”
“탄탄, 어째서 저놈을…….”
“아아, 진정하세요. 진정하십시오, 당주님. 대 카비아니 가의 당주님께서 이렇게 침착하지 못한 모습을 보이시다니…… 아랫것들이 비웃을 겁니다.”
“흥! 그러기만 하라고 해. 죄다 죽여 버릴 테니! 그딴 소리할 시간 있거든 당장 저놈부터 끌어내라. 누가 저놈을 이 방에 들이라고 했나? 엉?”
나칼은 바락바락 악을 써대고 있었다.
잔머리 굴려 간신히 얻어낸 시간인데 그마저도 용납할 수 없다고 목에 핏대까지 세워가며 닦달질이다. 그 모습이 참으로 눈꼴시고 아니꼬워 티르는 허탈한 웃음마저 날 지경이었다.
‘적반하장도 유분수라더니. 빌어먹을 놈 같으니라고.’
퉁퉁 부어터진 볼과 피딱지가 앉은 입술을 매만지다 티르는 욱신거리는 몸을 힘겹게 움직여 천천히 바라가 누워있는 침대 쪽으로 다가갔다.
지난밤, 그는 탄탄으로부터 상당한 고문을 받았더랬다. 낮에 조용히 물러가기에 그러려니 했는데 그 쪼잔한 놈은 밤에 다시 와 샤나메의 행방에 대해 추궁을 한 것이다. 노예로 팔리기 일보직전에, 어차피 보는 사람도 없겠다 싶었는지 다짜고짜 주먹질을 퍼붓고 협박을 해댔다.
‘이렇게 피떡을 만들어 놓으면 나리만이 퍽도 좋아하겠구나.’
괜히 맞을 이유가 없어 비아냥거리자 그제야 아쉬운 듯 손을 내리는 놈을 향해 티르는 과감히 거래를 제안했다. 마지막으로 바라를 보고 가게 해주면 샤나메의 행방에 대해 사실대로 털어놓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다 죽어가는 노인네 한번 본다고 해서 닳을 것도 아니고, 언제 드러누웠냐 싶게 벌떡 일어날 것도 아니니 그로선 별로 손해랄 것도 없었다. 말 그대로, 그저 얼굴 한번 보는 것이 다일 테니까.
“마지막이니 자비를 베푸는 겁니다. 이렇게 해야 사람들이 새 당주님의 성품에 대해 칭송을 아끼지 않을 테니까요.”
“그딴 것은 상관없어! 잔말 말고 얼른 저놈이나 내보내라니까.”
“아아, 너무 매정하게 굴지 마십시오, 당주님. 잠시면 됩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 어린놈은 당주님을 원망할 자격이 없답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이니까. 안 그렇습니까?”
사근사근한 어조로 나칼을 설득하는 탄탄의 목소리가 티르의 귀엔 흡사 악마의 속삭임처럼 들리고 있었다. 적어도 그에겐 악마나 다름없는 자였다.
티르는 그들로부터 등을 돌리고 선채 슬그머니 품에 감추어둔 단검 쪽으로 손을 가져갔다. 이대로 두 놈을 죽이고 도망쳐 버릴까? 잡히거나 말거나 이 자리에서 끝장을 보고 싶은 마음이 앞서 손이 덜덜 떨릴 지경이었다.
순간, 창백한 몰골로 드러누워 있는 바라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앞뒤 가릴 것 없이 그대로 일을 벌이고 말았으리라. 주먹을 꾸욱 말아 쥐고 심호흡을 한 다음 티르는 조용히 바라의 곁에 앉았다.
그의 움직임을 따라오는 집요한 두 시선을 모른 척 하고 죽은 듯이 누워있는 바라를 응시하기 시작했다. 하얀 머리, 꾹 감은 눈, 굳게 다물려 있는 입술. 벌거벗은 상체에 붕대를 칭칭 감고 누워있는 노인은 어쩐지 바라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저 바라를 조금 닮은 다른 사람인 듯 상당히 낯설기까지 했다. 그 묘한 어색함에 티르는 울컥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이제 떠나면 언제 다시 볼 수 있을까. 돌아와 그의 곁에 설 날이 과연 다시 와줄까.
‘바라, 죽지 마. 약한 할아버지 따위 두지 않았어. 살아만 있어. 그러면, 그러면…… 날 속인 것 정도는 용서해 줄게.’
얇은 이불 밖으로 나와 있는 손을 한번 꾹 잡아주고 티르는 벌떡 일어섰다. 이제, 그도 최선을 다해 살아남아야 했다.
“그럼 그만 가볼까?”
씨익 웃는 얼굴로 탄탄이 다가왔다. 그런 그를 잠시 외면하고 티르는 나칼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나칼…….”
“이놈! 천한 노예 주제에 누구 이름을 함부로 부르느냐. 나가라! 당장 나가!”
티르는 얼굴까지 붉히고 서서 악을 써대는 그에게 바짝 다가갔다. 그리곤 한쪽 어깨를 꾸욱 잡고 시선을 마주한 다음 죽어도 잊을 수 없도록 또박또박 말했다.
“바라를 잘 지켜. 바라가 잘못되면 네놈도 같은 꼴을 만들어 줄 테니 목숨 걸고 지키는 것이 좋을 거야. 어때, 카비아니 가의 재산을 지키는 것보다는 쉬운 일이지?”
“너, 너, 너어!”
“다시 보게 될 거다, 나칼. 기다리고 있어.”
계획대로만 된다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막시무스가 처형당하기 전에는 반드시 돌아올 테니까. 그때는…….
“네놈을 가장 먼저 죽여 버릴 거야.”
방을 나서기가 무섭게 등 뒤로 바짝 다가와 서는 탄탄을 향해 티르는 이를 갈았다.
“영광이군. 자아, 그럼 이제 그 대단하다는 물건에 대해 말을 좀 해보실까? 시간은 충분히 준 것으로 아는 데 말이야.”
“샤나메.”
“뭐?”
“그 대단하다는 물건의 이름이야.”
선심 쓰듯 톡 쏴주고 티르는 돌아섰다. 그대로 걸음을 옮기려다 문득 발소리가 들린다 싶어 고개를 길게 빼고 돌아보니 언젠가 보았던 나리만네 집사 놈이 헐레벌떡 뛰어오고 있었다. 그러니까…… 나무리인지 무수리인지 하는, 그런 이상한 이름을 가진 놈이었던 것 같다.
“무슨 일입니까?”
갑작스런 그의 등장에 탄탄은 조금 긴장하고 있었다.
“자네는…… 아아, 사냥꾼이었군. 나리께서 서두르라고 재촉을 하고 계시네. 이미 시장 내실에 도착해 계시지.”
“저런, 마음이 급하셨던 모양이군요.”
“말도 말게. 꼭두새벽부터 얼마나 닦달을 하셨는지 날도 밝기 전부터 뛰어다녔다네. 휴우, 원하는 것을 손에 넣으시면 좀 잠잠해지시겠지. 그래, 드디어 손에 넣게 되는군.”
바짝 마른 몰골로, 어울리지도 않게 그는 잔뜩 거드름을 피우고 있었다. 단 한 번도 비실거린 적이 없다는 듯 뒷짐까지 지고 오만한 눈으로 티르를 내려다본다. 당당하게 시선을 맞받았다. 약하게 굴 생각 따위는 애초부터 아예 없었으므로.
“건방진 놈. 아직도 제 처지를 깨닫지 못한 모양이군. 하지만 걱정 말아라. 곧 고분고분하게 굴게 될 테니.”
“흥!”
“아무래도 네놈의 교육은 내가 직접 맡아야겠구나. 그때도 지금처럼 오만하게 굴 수 있는지 어디 두고 보자.”
“두고 보자는 놈치고 제대로 된 놈이 없다지?”
“이, 이놈이!”
싸늘한 대꾸에 나무리는 모욕을 받았다고 느꼈는지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며 손을 뻗더니 그대로 티르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전이라면 상상도 하지 못했을 일을 이젠 마음 놓고 한다. 달라진 자신의 신분을 티르는 그렇게 처절하게 깨닫고 있었다.
“잠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