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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노예(3)]


“4탈란톤!”
“뭐, 뭣?”
“어라?”
입구 쪽에서 아름답게 울려 퍼지는 낯선 목소리.
모두의 시선이 다시 한 번 입구 쪽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길게 풀어헤쳐진 붉은 머리를 휘날리며 우아한 자세로 서있는 웬…… 사내?
‘우와, 예쁜 형님이네.’
남자에게 예쁘다는 말이 어디 가당키나 할까마는, 어쨌거나 사내는 아름다웠다. 뽀얀 피부와 갸름한 얼굴 그리고 빨간 머리칼 사이에서 빛나는 에메랄드빛 눈동자는 완벽한 미인의 그것과 다름없었다.
헐렁하게 걸친 튜닉 사이로 단단한 가슴팍이 보이지 않았다면 주저 없이 여자라고 여겼을 법한 미모. 그 굉장한 미모 덕분에 내실엔 묘한 침묵마저 감돌고 있었다. 근데 누구지? 누구냐, 너?
“크흠!”
“헛!”
“누, 누구냐?”
탄탄의 기척에 퍼뜩 정신을 차린 나리만이 발작을 하듯 크게 소리쳐 물었다. 취향인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잡아먹을 듯 열광적인 시선을 던지고 있었던 주제에 안 그런 척 단박에 표정을 바꾼 것이다. 아나 쑥떡, 그 당돌한 입가로 흘러내리는 침이나 닦으시지, 돼지.
티르는 게걸스런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있는 나리만을 비웃어주고 다시 빨강머리의 사내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무슨 이유인지 그가 아까부터 자신을 보며 방긋 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늦지 않은 것 같아 다행입니다.”
“에?”
“모시러 왔습니다, 티르메네스님.”
“에엥?”
당신은 또 누군데?
자신이 언제부터 이렇게 인기가 좋았나 생각하며 티르는 허탈하게 웃었다. 이번엔 또 뉘 집의 돼지가 거금을 뿌려가며 그에게 손을 내미는 건지 슬쩍 두려운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한두 푼도 아니고 무려 4탈란톤이다. 그 돈이면 성인 노예 열 이상을 사거나 배 한척을 사서 저 푸른 유니아 해를 횡단할 수도 있다. 뿐인가? 시민병 3천명의 월삯이기도 하다.
그런 돈을 고작 어린 노예 하나에게 투자할 수 있는 사람이란 건, 저 돼지 같은 나리만과 같은 등급이거나 적어도 그보다는 더한 사람이라는 뜻일 게다. 더 부자거나 더 돼지 같거나 둘 중 하나겠지. 물론 둘 모두일수도 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적어도 그가 이 아덴부르크 사람은 아닐 것이라는 점이다. 어린 노예에게 4탈란톤이나 들이부을 수 있는 부자에다 집요하게 티르를 노리는 바보돼지는 이 아덴부르크에서 나리만 밖에 없으니까.
“당신도 거래에 참가할 거요?”
불만이 가득한 나리만의 시선을 외면하고 나칼이 앞으로 나서며 사내에게 물었다. 위험한 경고가 가득한 탄탄의 시선이나 방해받은 슈라의 불쾌한 시선이 잇따랐지만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굴고 있었다.
그런 그가 우연인 듯 맹한 표정을 한 채 멍청하게 서있는 티르를 슬쩍 돌아보았다. 당장이라도 나리만에게 떠넘기고 간단하게 손을 털 줄 알았던 나칼이 다른 이들의 반대를 무릅쓰면서까지 기어이 슈라를 끌어들였을 때부터 티르는 이미 그의 속내를 짐작하고 있었다.
‘곁에 두기가 불안하다는 뜻이지? 하여튼 멍청해. 위험한 놈일수록 곁에 두고 감시해야 한다는 걸 왜 모르지?’
위험한 것을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두면 오히려 더 불안해지는 것이 사람의 심리임을 나칼은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는 듯 했다. 덕분에 티르는 나칼이 생각하기에 아덴부르크에서 가장 먼 곳으로 가게 될지도 몰랐다.
“물론 참가하겠습니다.”
여전히 방긋 웃는 얼굴로 사내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나칼이 뭐라 더 덧붙이기도 전에 다시 외쳤다.
“5탈란톤 드리겠습니다.”
“헛! 미, 미친…….”
“이런!”
파격적인 금액 앞에서 나리만과 슈라가 동시에 헛바람을 집어삼키며 주저앉았다. 5탈란톤이란다. 자그마치 5탈란톤. 고작 3탈란톤을 조금 넘긴 금액 앞에서 갈등하던 두 사람의 전의를 완전히 꺾어버리는 선언이 아닐 수 없었다.
웬만해서는 놀라는 법이 없었던 티르조차도 입을 쩍 벌린 채 사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곧 빨강머리 청년의 정신 상태와 주머니 상태를 동시에 염려하기 시작했다.
거기, 얼굴 예쁜 형아. 주머니 상태는 안 예뻐도 되니까 정신 상태만은 좀 예뻐 주면 안 될까? 난 이미 팔리기로(?) 마음먹은 곳이 있어.
“지, 진심이십니까?”
“모자라다면 더 드릴 용의도 있습니다만.”
“쿨룩!”
경악이 흐르던 내실 한복판에 다시 숨죽인 고요가 내려앉고 있었다. 그 무서운 침묵을 깬 것은 의외로 팔려가는 티르였다.
“이, 이유는?”
“무슨 말씀이신지?”
“그렇게 큰돈을 처들이면서까지 나를 사려는 이유.”
“그거야…… 티르메네스님은 소중한 분이니까요.”
“……!”
“그러니까 제게 소중한 분이라는 뜻입니다.”
갑자기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아, 그러니까 내가 왜 댁한테까지 소중한 거냔 말이야.
날 때부터 ‘나는 소중하니까요.’라는 소리를 지껄이면서 살아온 티르지만 이 마당에 생판 남에게까지 소중하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는 않았다. 더구나 그 생판 남이라는 자가 노예나 사고 다니는 상인인 경우에는 더더욱.
‘왜 하필 나를 찍은 거야. 그냥 내버려두지. 안타깝지만 난 저 싸가지가 빈약한 카도니아의 황태자에게 팔려야 한단 말이다, 이 자식아.’
티르는 티도 못 내고 속으로만 줄줄 눈물을 뿌리고 말았다.
이대로 누군지도 모르는 자에게 팔리면 일이 어긋나도 크게 어긋나고 말 것이다. 슈라의 도움을 받아 하루라도 빨리 해치우려던 일들이 죄다 물거품이 되는 것은 물론이고 그 자신의 목숨마저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게 될지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자 문득 다 죽어가고 있는 바라와 막시무스의 얼굴이 더 안타깝게 눈앞을 스쳤다. 아아, 이를 두고 망연자실이라 하던가?
“더, 더 부르실 분 없습니까?”
“끄응. 이, 이건 말도 안 된다. 사기고 속임수야! 애초에 내게 팔기로 약속하지 않았나? 우선매입자는 나란 말이다!”
“하지만 카비아니 가의 당주 대리가 이미 높은 가격을 부르는 자에게 넘기겠다고 선언하지 않았나? 우리가 잘못 들은 건가?”
“그, 그건……. 나칼, 네놈이 이러고도 무사하길 바라는 거냐? 내가 가만히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사뭇 위험스러운, 나리만의 노골적인 협박에 나칼은 흠칫 몸을 굳혔다. 티르를 한시라도 빨리 치워버리고 싶은 욕심에 일을 진행하긴 했지만 뒤처리까지 자신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다른 것을 조금 더 내줌으로써 무마를 할 수 있겠거니 생각했던 것이다.
상황이 거의 마무리가 되어갈 조짐을 보이고 있는 지금에서야 분을 참지 못하는 나리만과 심상치 않은 탄탄의 기색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물러나기엔 일이 너무 진행된 데다 티르를 가까이에 두고 싶지 않은 마음이 아직은 더 컸다.
나칼은 악을 써대는 나리만과 탄탄을 무시하고 지그시 이를 깨물었다. 그리고 애써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티르메네스는 5탈란톤에 낙찰을 받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말도 안 된다. 누구 마음대로! 나칼, 이노옴. 네놈이, 네놈이…….”
발작적으로 소리치며 길길이 날뛰던 나리만이 당장이라도 무사들을 움직일 듯 살벌하게 그를 노려보자 위기감을 느낀 나칼이 먼저 카비아니 가의 무사들을 불러 그를 막았다. 그리곤 서둘러 낙찰 가격이 적힌 매매 서류를 하라에게 내밀었다.
“이런, 골치 아프게 됐는걸.”
방긋방긋 웃는 얼굴로 서류를 받아드는 빨강머리의 사내를 힐끗 보며 슈라가 가볍게 혀를 찼다. 적당히 가격을 올리다 우선매입자가 포기하면 선심 쓰듯 주워가려고 했는데 이놈의 일이란 게 처음부터 뜻대로 돌아 가주지 않았다.
우선매입자가 생각보다 더 집착이 강한 인물이었는지 그 엄청난 가격에도 불구하고 쉽게 포기를 하지 않은 것이다. 게다가 아슬아슬한 순간에 생각지도 못했던 다른 매입자가 등장해 순식간에 어마어마한 금액으로 꼬맹이를 가로채가 버리지 않았나.
“이제 어쩐다지?”
“가뿐하게 포기하십시오.”
“미쳤나? 한쪽 날개만으로 나는 새 봤어?”
“전하께서는 새가 아니시잖습니까? 사람이 날면 그게 더 웃긴 겁니다. 괜히 날아보겠다고 날치지 마시고 그냥 황태자 노릇이나 잘 하십시오.”
“젠장, 못 알아듣는 척은……. 이라즈, 너도 저 꼬마가 보통 녀석은 아니라는 걸 알아봤으면서 왜 딴소리야?”
“상대가 만만치 않아서 그럽니다.”
“……?”
“모르시겠습니까? 저는 이제껏 저 자처럼 강한 자를 본 적이 없습니다.”
그제야 슈라는 이라즈가 긴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자신도 덩달아 긴장한 채 티르메네스를 향해 방긋 웃고 있는 빨강머리의 청년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호리호리한 몸에 우아한 태도와 나긋나긋한 표정.
겉모습만 봐서는 영락없이 곱게 자란 귀족가의 중간토막 아들내미 쯤으로 여겨도 큰 무리가 없어보였다. 그러나 안력을 돋우어 자세히 보니 곧 그의 몸에서 새어나오는 강한 기운이 느껴졌다. 어둡고 날카로우며 동시에 강렬한.
“굉장하군. 그리고 기분 나빠. 대체 정체가 뭐지?”
“글쎄요.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여자는 아니라는 거겠지요?”
“이 와중에도 그런 게 중요한 거냐?”
“중요합니다. 여자가 아닌 이상 저 자는 우리의 적이라는 뜻이니까요. 원하는 것을 얻으십시오, 주군.”
“어떻게?”
“어떻게든.”
씨익. 오고가는 미소 속에 싹트는 상큼한 음모.
서로 마주보며 화사한 미소를 교환한 두 사람은 곧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태평한 얼굴로 티르메네스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엉뚱한 사람에게 팔려 잔뜩 당황해버린 꼬마가 저만치 앞에 서있었다. 자, 이제 넌 어떻게 행동할 거지, 티르메네스?
“살살 좀 하지?”
마치 달아나는 놈을 잡아챈 것 마냥 큼직한 손으로 뒤에서 팔을 꽉 움켜쥐는 탄탄을 향해 티르는 나직하게 투덜거렸다.
“도망갈 생각 없으니까 놔. 방금 나 팔린 거 못 봤어? 난 이제 카비아니 가의 관리를 받을 이유가 없어, 이 새끼야.”
“흥, 과연 그럴까? 당주 늙은이가 누구 손에 들어있는 지 벌써 잊었나? 쉿, 목소리를 낮추는 게 좋을 거다, 티르메네스. 잠깐 나갈까?”
“별로 그러고 싶지 않은데? 할 말 있으면 여기서 해.”
“원한다면.”
슈라 일행에게 팔려 카도니아로 가겠다고 작심하기가 무섭게 일이 어그러져 버린 탓에 티르는 단단히 심통이 나 있었다.
“쪼잔한 놈의 인간, 돈 좀 넉넉히 가져올 일이지. 고작 3탈란톤에서 무너지냐? 좀 더 쓰면 떼어먹을까봐?”
당황을 넘어서 살짝 좌절까지 했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 그는 일부러 더 퉁퉁거렸다. 나리만에게 팔려 근처에 머물고 싶어 했던 것처럼 들리도록 놈의 쪼잔함에 대해 불평을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탄탄이 다시 속삭였다.
“자, 이제 아까 하던 얘기를 마저 해볼까?”
“무슨 얘기?”
“훗, 시치미를 떼겠다는 소리인가? 상관없다. 곧 기억나게 될 테니까. 자, 말해봐라. 샤나메는 어디 있지?”
“……!”
“갈 땐 가더라도 그런 건 말해주고 가야 착한 아이지. 안 그런가?”
갑자기 난입해 거금을 들여 자신을 사버린 생뚱맞은 사람에게 정신을 쏟는 바람에 시장으로 오는 내내 기절한 척 연기했던 이유를 깜빡 잊고 있었다.
‘젠장, 내내 궁금해 하다 죽어버리게 끝까지 안 가르쳐 주고 사라져 버리려고 했는데!’
혼자만의 작은 음모가 실패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이제 어쩐다? 사실대로 털어놓았다가는 새 주인 손에 넘겨지기도 전에 배가 갈라질 확률이 크고 그냥 입 꾹 다물고 있자니 바라와 막시무스가 심하게 눈에 밟힌다.
티르는 흔들리는 눈으로 매매 서류를 작성하기 위해 사이좋게 돌아서는 빨강머리와 나칼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혹시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싶어 슈라 일행 쪽에도 진하게 시선을 주었다.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길길이 날뛰다 카비아니 가의 무사들에게 막혀 티르의 근처에도 갈 수 없게 된 나리만이 갑자기 몸을 홱 돌렸다. 그리곤 막 매매 계약서를 작성하기 시작한 나칼을 가리키며 자신의 무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저놈을 잡아!”
“무슨……?”
“이노옴, 감히 내 일을 방해하고도 살길 바란 건 아니겠지? 뭣들 하느냐? 당장 저놈을 잡아 대령하란 말이다!”
나리만은 반쯤 이성을 잃고 있었다.
두 눈 멀쩡히 뜨고 원하던 것을 빼앗기게 생겼는데 어떤 놈이 제정신일 수 있을까마는, 뜻하지 않게 나칼에게 뒤통수까지 맞은 터라 분노가 이성을 잠식해버리는 것은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내 네놈의 죄를 덮어주었더니 감히 나를 배신해? 탄탄, 이 형편없는 사냥꾼 놈아, 당장 약속을 지키지 못하겠느냐?”
“훗! 진정하시지요, 나리. 지나친 흥분은 몸에 해롭습니다.”
“진정?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나?”
“아아, 정말이지 꼴사납군. 3탈란톤이 아까워 벌벌 떨었던 주제답지 않잖아?”
불난데 부채질을 하듯 슈라가 슬쩍 끼워 넣은 한마디가 펄펄 날뛰는 나리만의 화를 더욱 돋우었다. 이판사판. 서늘한 생각 하나가 나리만의 뇌를 스치고 있었다.
“뭣들 하느냐? 놈들을…… 쳐라!”
“헉! 마, 막아!”
주춤하던 무사들이 다시 서로를 향해 왁 달려들기 시작했다.
넓은 내실이 무기를 들고 날뛰는 무사들 때문에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돌변하고 있었다.
“으악!”
“막아랏!”
“나리마아안!”
“흥! 어리석은 놈. 감히 나를 배신해? 놈을 죽여도 좋다! 티르메네스만 있으면 된다!”
“탄탄!”
궁지에 몰린 나칼이 탄탄을 소리쳐 불렀다. 그라면 나리만을 설득할 수 있을 거라고 여긴 까닭이다. 그러나 이미 티르를 붙잡고 구석으로 몸을 피한 탄탄은 그의 외침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자, 어서 말해라!”
근육이 꿈틀거리는 팔뚝으로 티르의 목을 누르며 탄탄이 등 뒤에서 속삭이고 있었다. 티르는 이를 악물었다. 전쟁이나 다름없는, 이 혼란스런 상황이 어쩌면 기회가 되어줄지도 몰랐다. 닥치는 대로 칼부림이 오가는 이런 상황에 자신이 사라지는지 마는지 누가 신경이나 쓰겠는가 말이다.
‘그러니까 이 무식하기 짝이 없는 사냥꾼 놈의 품에서 무사히 벗어나기만 한다면 방법이 있을 것도 같단 말이지.’
한쪽으로 물러나 여유 만만한 작태로 이쪽을 살피고 있는 슈라 일행을 흘깃거리며 티르는 나름대로 궁리라는 걸 하고 있었다. 은근슬쩍 칼을 만지며 입구 쪽을 가리키는 폼으로 보아 이 자리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도움을 주겠다는 뜻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무슨 수를 써서든 자신의 힘으로 벗어나는 수밖에 없다. 그런 생각과 함께 티르는 슬며시 품안에 감추어둔 단검 쪽으로 손을 가져갔다. 기절한 척 연기하는 그를 들춰 업고 나오기 급급해 몸수색은 생략한 상태라 다행히 단검은 그대로 있었다.
“아직도 기억이 나지 않는 건가? 그렇다면 생각나게 해주랴?”
허벅지에 묶어놓은 단검의 손잡이를 쥐는 순간, 탄탄이 팔뚝에 힘을 주며 한손으로 그의 머리칼을 꽉 움켜쥐고 뒤로 홱 잡아당겼다. 고개가 꺾어지듯 확 넘어간다.
“윽!”
“어서 말하란 말이다. 사냐메를 어디에 숨겼어!”
“그, 그건…….”
이 새끼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발에 때처럼 여기던 놈에게 핍박을 당하고 있자니 새삼 화가 치솟았다. 인질이나 다름없는 바라 때문에 옴짝달싹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한껏 이용하는 놈이 나리만보다 더 증오스러웠다.
따지고 보면, 나칼보다 놈의 죄가 더 크다. 보나마나 놈이 뒤에서 나칼을 부추겼을 것이 틀림없는데다 나리만과도 모종의 거래를 한 것처럼 보이고 있으니까 말이다.
‘오냐, 너 죽고 나 살자. 네놈을 그냥 두면 바라가 더 위험해 질 테니 어디 한번 해보자고.’
단검을 쥔 손에 불끈 힘을 주었다. 그리고 약간의 틈을 벌기 위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샤나메는…….”
“꿀꺽. 그래, 어디에 숨겼지?”
목을 조이고 있던 팔이 조금 느슨해졌다. 동시에 몸이 빙글 돌아가면서 탄탄을 올려다보는 자세가 되었다.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티르는 조금 몸을 숙여 탄탄에게 바짝 달라붙었다.
“샤나메는…….”
“샤나메는?”
“내 뱃속에 들어있다, 이 새끼야!”
낮은 목소리로 씹어뱉듯 또박또박 소리치며 티르는 잽싸게 단검을 뽑아 휘둘렀다. 코앞으로 다가와 있던 탄탄의 이마부터 아래로 힘차게 내리그었다.
“억!”
“죽어라!”
“이놈이!”
퍽!
이마부터 콧등을 지나 반대쪽 뺨을 가로지른 칼끝이 마침내 턱 아래로 향하려는 순간 탄탄이 거칠게 그의 몸을 걷어찼다. 티르는 피를 뒤집어쓴 채 뒤로 한참이나 날아가 처박혔다. 그 와중에도 끝까지 단검을 손에서 놓지 않은 것은 그야말로 처절한 인내의 승리였다.
“죽여 버리겠다!”
얼굴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탄탄이 사납게 소리쳤다. 눈을 적시는 피 때문에 앞이 잘 보이지 않아 볼 성 사납게 비틀거리면서도 검을 뽑아들고 미친 듯이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 눈 먼 검에 엉뚱한 무사가 희생되는 사이 티르는 재빨리 몸을 굴려 입구 쪽으로 움직였다.
그런 그의 움직임을 눈치 챈 슈라 일행도 슬그머니 밖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 자리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곧 그를 낚아채 안전한 곳으로 피해주리라. 이젠 아예 내어놓고 밖을 향해 눈짓을 하는 슈라를 보며 티르는 내심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덥석!
“어?”
“여기 계셨군요, 티르메네스님.”
몇 발짝 떼지도 못했는데 기다렸다는 듯 덥석 어깨를 잡아채는 손이 있었다. 삐걱삐걱. 돌아가지 않는 목을 간신히 움직여 돌아보니 아직도 방글방글 웃고 있는 미끈한 얼굴이 보였다.
“아, 그러니까…….”
“매매 계약서가 완성되었습니다. 이제 약속한 돈을 치르면 다 끝난 답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아니 그러니까 난 그다지 댁한테 팔리고 싶은 생각이…….”
“기다리셔야 합니다.”
웃는 얼굴과 어울리지 않는 단호한 한마디. 그건 틀림없는 명령이었다. 명령? 벌써 주인 노릇을 하겠다는 건가?
속에서 욱하는 반발심이 일었지만 어쩐 일인지 티르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주고 있는 것도 아니고 독한 말로 협박을 한 것도 아닌데 약이라도 먹은 듯 몸에서 저절로 힘이 빠지고 있었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착하십니다. 걱정 마십시오. 잠시면 된답니다.”
마치 어린 아이를 달래듯 다정한 목소리로 말하며 그는 가만히 티르를 잡아끌었다. 그러더니 칼부림이 오가는 내실 한복판을 유유히 가로질러 구석에 몰린 나칼에게 다가갔다.
카비아니 가의 무사들 틈에 섞여 힘겹게 칼질을 하고 있던 나칼이 다가오는 그들을 발견하고 흠칫 몸을 굳혔다. 나리만도 그들을 발견했는지 자신을 보호하는 무사들을 이끌고 잽싸게 다가와 뒤를 막아선다.
“네놈들 뜻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으냐?”
“후훗, 매매 계약서는 이미 완성이 되었답니다. 자, 이것은 약속한 대금입니다. 충분하겠는지요?”
잔뜩 긴장한 얼굴로 나리만을 경계하는 나칼에게 그가 불쑥 손을 내밀었다. 얼떨결에 손을 뻗자 큼직한 보석 몇 개가 그의 손바닥위로 쏟아졌다.
“이, 이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