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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니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가만히 기다렸다. 어두운 밤바다를 배경으로, 푸른 스파크를 튀기는 전류들이 물결을 타고 뻗어 나가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적어도 범위가 몇십 미터까진 유효한 듯했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수면 위로 허연 배를 내놓은 물고기들이 둥둥 떠올랐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혹은 당연하게도 그중 인어는 없었다.

‘역시 한 번에 성공할 리는 없겠지?’

니나는 그리 크게 실망하지 않았다. 그녀는 늘 운이 나쁜 편에 속했기 때문이다. 바다 쪽으로 더 깊이 날아 들어간 그녀는 아까처럼 열심히 전류를 퍼트리기 시작했다.

니나가 가는 곳마다 온갖 물고기들이 배를 드러낸 채 둥둥 떠올랐다. 만약 이 일을 생업으로 삼는 어부들이 봤다면 노골적으로 긴장했을 만큼의 실력이었다. 다행히도 이번에는 효과가 있었다!

“으…… 크흣! 캿, 푸핫!”

니나에게서 그리 멀지 않은 수면 위로 인어 하나가 떠올랐다. 해초 밑에서 자다 말고 전류를 얻어맞은 인어는 경기를 일으키고 있었다. 간헐적으로 몸을 튕기며 눈을 허옇게 까뒤집고, 입에서 꾸역꾸역 물을 토하는 모습이 심상치 않았다.

그 추태를 본 니나는 걱정스러워졌다. 그녀는 인어가 바다에서 익사하는 기막힌 현장의 목격자가 되고 싶진 않았다. 인어가 제정신을 차리기 전, 재빨리 그녀의 머리채를 움켜쥔 니나는 열심히 날갯짓을 했다.

어차피 미끄러운 체액 때문에 인어를 들어 올리는 건 불가능했다. 그러니 물 위에 뜬 인어를 질질 끌고 근처의 바위까지 갈 생각이었다.

‘그리고 바위 위에서 순간 이동 스크롤을 쓰자.’

니나의 계획은 나쁘지 않았다. 대략 절반까지는 그랬다. 근방에서 가장 크고 평평한 바위까지 간 니나는 이제 그 위에 인어를 얹어 놓을 작정이었다.

하지만 인어의 몸통을 잡았다간 체액 때문에 미끄러질 것 같았다. 니나는 하는 수 없이 인어의 머리채를 잡고, 바닷속에서 그녀를 통째로 끌어 올렸다. 그러자 머리채가 우드득― 뜯기는 고통에 정신을 차린 인어가 거세게 몸부림을 쳤다.

“키익! 아파! 놔!!!!”

“앗, 잠깐만! 움직이면 안 돼!”

인어가 본격적으로 비명을 지르며 저항하자 니나는 당황했다. 애매한 크기를 한 니나의 날개는 잽싼 움직임이 가능한 대신, 균형감과 안정성은 많이 떨어졌다.

이 와중에 커다란 인어가 전력으로 몸부림을 치자, 니나는 허공에서 위태롭게 휘청거렸다. 만약 바닷속으로 인어를 떨어트렸다간 그대로 영영 놓쳐 버릴 것이 자명했다. 니나에겐 이제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니나는 입술을 깨물고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그리고 날개에 힘을 줘, 순간적으로 높이 날아올랐다. 인어를 얼른 바위 위로 올려놓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는 썩 좋지 않은 선택이었다.

“캬하악!!!! 아악!!!!”

안타깝게도 허공에 완전히 떠오른 인어의 머리채에는 더 많은 체중이 실리게 되었다. 가엾은 인어는 그야말로 미친 듯 몸부림쳤다. 그녀의 몸이 허공에서 거세게 흔들릴 때마다, 니나의 손끝에서 우드득― 하고 젖은 머리채가 뜯겨 나가는 끔찍한 촉감이 생생하게 전달되었다.

“어, 어어?”

이대로 가다간 인어의 머리채가 다 뜯겨 나가게 생겼다. 당황한 니나가 좀 더 안정적으로 인어를 붙잡기 위해, 그녀의 겨드랑이 밑에 한 손을 집어넣었다.

이 때문에 머리채를 쥐고 있던 한 손이 풀리자, 인어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거세게 꼬리를 튕겼다. 결국 허공에서 균형을 잃은 니나는 인어를 밑으로 떨어트리고야 말았다. 놀란 그녀의 두 눈이 커졌다.

“안 돼!!!!”

니나가 저도 모르게 고함을 쳤다. 그러나 이미 손을 떠나 버린 인어는 약 3m 아래로 추락했다. 그것도 하필이면 울퉁불퉁한 바위 위에.

철퍽―

두개골이 깨지는 축축한 소리가 허공에 울려 퍼졌다. 바위 위에서 간헐적으로 몸을 몇 번 꿈틀대던 인어는 그대로 축 늘어져 버렸다.

다 잡은 줄 알았던 니나의 어깨도 덩달아 축 늘어졌다. 혹시나 싶어 암반 위로 내려앉아 인어의 상태를 확인했지만, 역시나 즉사였다. 인어의 사체 옆에 쪼그려 앉은 니나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잠시 괴로워했다.

‘어떡하지? 임무를 실패하면 벌을 받게 될 텐데.’

이대로 마젠티움에 빈손으로 돌아갔다간 어떻게 될지 안 봐도 뻔했다. 상냥한 미소를 띤 도로시가 니나를 맞아 주며 아마 이렇게 말하겠지.

‘어머, 가엾은 니나! 걱정하지 마. 앞으론 이런 문제가 없도록 더 ‘진화된’ 몸으로 만들어 줄 테니까.’

그럼 이번에야말로 무릎 아래를 통째로 썰린 뒤, 하피의 발톱 같은 게 부착될지도 몰랐다. 겁에 질린 니나가 창백한 얼굴로 비척비척 날아올랐다. 다행히 그녀에겐 아직 하루가 더 남아 있었다.



눈에서 항해용 망원경을 뗀 벨시안이 의기양양하게 제 부관을 돌아보았다.

“어떻게 생각해, 체커릿? 내 말이 맞지?”

“제 눈이 의심스럽네요, 전하. 제가 대체 방금 뭘 본 겁니까?”

똑같이 망원경을 내린 체커릿이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벨시안이 ‘내가 뭐랬어?’ 하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다.

겉으론 잘난 체하고 있었지만, 벨시안도 사실 속으로 놀라고 있었다. 소녀의 머리에 뿔이 달린 건 진즉에 봤었지만, 심지어 저기에서 전류도 뿜었다! 이런 건 듣도 보도 못했다.

사람들은 인어를 흔히 아리따운 모습으로만 기억하지만, 실제로 보면 생각보다 큰 체구에 놀랐다. 인어의 실제 신장은 꼬리까지 포함하여 약 1.8∼2미터 사이였다. 당연히 그 무게 또한 상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어를 한 방에 후려쳐 혼절시키는 파괴력, 2m의 인어를 한 팔로도 끌어 올리는 괴력, 날개가 달려 하늘을 나는 이점에다 뿔에서 방출하는 전류까지!

이건 대박이었다. 벨시안은 광산도 아닌 바다 한복판에서 금을 캔 기분이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흥분하여 제 부관의 옆구리를 툭툭 쳤다.

“봐, 체커릿. 저걸 전쟁에서 백병전에 풀어놓는다고 한번 상상해 보란 말야.”

“확실히…… 위력적이겠네요. 그리고 사람 말도 하는 것 같고요.”

체커릿도 고개를 주억거리며 벨시안의 의견에 동의했다. 만약 저 소녀를 금속 갑주의 보병들 사이에 떨궈 놓으면, 실로 일당백 발키리의 현신이 따로 없을 것이다. 비록 좀 마르고 어려 보이긴 했지만, 전쟁 전까지 잘 먹이고 입히면 훨씬 나아질 것이 틀림없었다.

‘저걸 반드시 포획해야겠어. 아주 유용할 거야.’

벨시안은 눈을 빛내며 다짐했다. 그의 조국인 킨케이드는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전쟁 중이었다. 비록 지금은 휴전 상태에 돌입했지만, 언제 또 전쟁이 재개될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만약 저 소녀를 전력으로 확보한다면 큰 도움이 될 터였다. 벨시안은 저 신비로운 생물체를 포획하기 위해, 지금부터 제 부관과 의논할 안건이 매우 많았다. 해안가의 절벽을 벗어나는 그의 발걸음이 경쾌해졌다.



* * *



니나는 먹이를 찾아 어슬렁거리는 한 마리 갈매기처럼 밑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이 쨍쨍한 햇살을 받으며 모래톱까지 나와 있는 정신 나간 인어는 단 한 마리도 없었다.

뭐, 당연한 일이긴 했다. 인어 같은 해양성 몬스터들은 야행성으로, 대낮에는 절대 해안가에 나오지 않았다. 애초에 바다 생물에게 있어서 햇볕에 몸을 말린다는 것 자체가 미친 발상이기 때문이었다.

‘이제 어떡하지…….’

니나는 멍한 눈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멀쩡한 바다를 가르고 인어를 끄집어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차라리 절벽이라도 죄 무너트려 볼까? 어쩌면 떨어지는 절벽 파편 때문에 놀라 파드득대는 인어 한두 마리쯤은 건질 수 있을지도.

다행히 니나의 극단적인 발상이 실현되기 직전, 뒤에서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여기 있었군. 이봐, 날 기억하나?”

“……!!”

예상치 못한 남자의 목소리에 니나는 경기를 일으켰다. 그녀는 너무 놀란 나머지, 하마터면 절벽에서 떨어질 뻔했다. 재빨리 균형을 잡은 그녀가 당장이라도 자리를 뜰 것처럼 날개를 펼쳤다. 그러자 남자가 아주 간절한 목소리로 그녀를 붙잡았다.

“잠깐! 도망치지 마. 나랑 잠시 얘기 좀 하지. 정말로 잠깐이면 되니까.”

니나는 경계 어린 눈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엔 이전에 해안가에서 마주쳤었던 검은 머리의 남자가 서 있었다. 당시는 경황이 없어서 잘 몰랐으나, 지금 보니 키가 크고 어깨도 넓어서 꽤 남자다운 느낌이었다.

경계심이 되살아난 니나는 도망칠 준비를 했다. 그녀는 민간인과 접촉해선 안 되었고, 행여 어쩔 수 없이 접촉하게 되면 그 즉시 장소를 이탈해야 했다. 마법사들이 뼛속 깊이 새겨 놓은 신체적인 고통은 정신마저 굴종시켰다.

니나는 파르르 떨며 발작적으로 날개를 폈다. 만약 이때, 뒤에서 들려온 남자의 유혹적인 제안이 아니었다면 곧바로 도망쳤을 것이다.

“기다려 봐! 네가 뭘 하려는지 알아. 인어를 잡으려는 거지? 내가 도와줄 수 있어.”

남자의 고상하고 매력적인 저음이 귓가에 울려 퍼졌다. 니나는 감전된 것처럼 그대로 날개의 움직임을 멈췄다.

어차피 민간인과 마주쳐도 처벌, 임무에 실패한 채 빈손으로 돌아가도 처벌이었다. 연구소에서 겪는 고통들은 참으로 지긋지긋했다. 그렇다면 이번만 몰래 편법을 써 볼 수 있지 않을까?

어차피 몸속에 든 마법 칩은 성대의 움직임만 인식했다. 그러니 자신이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만 하지 않는다면, 칩에는 아무것도 녹음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을까? 들키면 어떡하지?

“쉿, 괜찮아. 내가 도와줄 테니 나만 믿으라고. 자자, 거긴 너무 가장자리라 위험하니 일단 이쪽으로 와.”

니나의 망설임을 눈치챈 남자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짐짓 매력적인 미소를 지은 남자가 조심스럽게 팔을 뻗어 그녀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그 손은 무척 단단하면서도 크고, 무엇보다도 따뜻했다.

니나는 실험체가 된 이후로 처음 겪어 보는 인간적인 접촉에 동요했다. 타인의 체온에 굶주린 그녀는 결국 힘없이 그 손길에 끌려갔다. 어차피 자신이 원하면 언제든 도망칠 수 있으니 괜찮을 것이다.

‘좋아, 일단 반쯤은 성공했어.’

벨시안은 흡족한 눈빛으로 제 앞에 서 있는 자그마한 소녀를 응시했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은 얼굴을 한 채 발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길들여지지 않은 날짐승 같은 외모와 달리, 그 동작은 꽤나 귀여워 보였다.

벨시안은 시선이 자연히 소녀의 하얀 발치로 향했다. 이 쌀쌀한 가을 아침, 험한 절벽 위에 선 소녀는 맨발이었다. 그녀의 작고 창백한 발가락 끝은 추운 듯 희미하게 분홍색을 띠고 있었다.

비록 이기적인 성향의 벨시안이었지만 그 작은 맨발은 어쩐지 마음이 쓰였다. 자연스레 평소보다 말이 더 부드럽게 나갔다.

“몇 살이지? 이름은 뭐고? 난 벨시안이라고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