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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말을 걸자, 소녀가 고개를 들고 벨시안을 바라보았다. 굳이 묻지 않아도 눈을 보면 그녀가 제 말을 알아들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소녀는 대답 대신, 양팔을 들어 엑스(X) 자를 그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을 본 벨시안은 속으로 의아해졌다.

‘왜 말을 안 하지?’

벨시안은 이미 소녀의 혼잣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따라서 그녀가 말을 할 줄 안다는 사실을 확신했다. 그러나 그는 모른 척 능구렁이처럼 그녀를 한 번 떠보았다.

“말을 잘 못 하나? 그게 아니면…… 나와 대화하는 게 금지된 건가? 어느 쪽이지?”

소녀는 의외로 벨시안의 교묘한 유도 심문에 넘어가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일관된 태도로 고개만 저으며 입을 꾹 다물었다. 아침 햇살처럼 연한 금발이 소녀의 마른 어깨 위에서 가느다랗게 흔들렸다. 그 모습이 더할 나위 없이 연약해 보였다.

이를 본 벨시안은 묘하게 마음이 불편해졌다. 겉모습에 속으면 안 되는데, 이상하게도 작은 새처럼 가녀린 느낌을 주는 소녀였다. 분명 그 커다란 인어를 무자비하게 후려 패고, 덜렁덜렁 들고 다니기까지 한 상위 포식자인데도 말이다.

벨시안은 그녀를 떠보는 짓을 그만두기로 했다. 그리고 미리 준비해 온 제안을 그녀의 코앞에서 먹음직스럽게 살살 흔들어 보였다.

“좋아, 이름 모를 아가씨. 네가 예전에 후려쳐서 기절시켰던 인어를 기억해? 붉은 머리 말야. 너와 같이 구덩이에 빠졌었던.”

니나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협조적인 그 태도에 미소를 지은 벨시안이 설명을 계속 이어 갔다.

“그 인어는 우리가 그간 계속 포획하려고 시도했던 특별한 개체야. 물론 네가 아니었어도 함정을 파 놨으니 잡았겠지만, 네 덕에 좀 더 수월하게 잡은 건 사실이지. 그래서 보답이랄 것까진 없지만 나도 널 좀 도와줄 생각이야.”

사실 ‘좀 더 수월하게’라는 부분은 벨시안이 교묘하게 니나의 공을 깎아내린 것이었다. 인어처럼 포악한 몬스터는 구덩이 안에 빠트렸어도 얼마든지 반격을 할 수 있었다.

따라서 벨시안은 원래 구덩이 속에 빠진 인어에게 마법 스크롤까지 쓸 작정이었다. 저 몬스터를 완전히 기절시켜야, 그의 부하들이 안전하게 인어를 포박할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니나는 스크롤도 없이 대뜸 맨주먹을 휘둘러 인어를 기절시켰다.

‘덕분에 비싼 스크롤을 아껴서 잘됐지.’

벨시안은 흐뭇했다. 참고로 그 마법 스크롤은 킨케이드의 궁정 마법사 테레사가 직접 제작한 것으로, 마물 제압 전용이라서 재료값이 무지무지하게 비쌌다. 킨케이드는 부유한 무역국이었지만, 벨시안은 기본적으로 짠돌이였다.

한편, 니나는 의아한 얼굴로 벨시안의 제안에 귀를 기울였다.

‘나를…… 도와준다고?’

눈앞의 남자는 매력적이었지만, 그리 강해 보이진 않았다. 마젠티움에 의해 개조된 신체를 가진 자신조차도 딱히 인어를 포획할 방법이 없어서 쩔쩔매는 중인데, 어떻게 자신을 도와준다는 걸까? 혹 미끼라도 되어 주겠다는 뜻인가?

눈치가 빠른 벨시안이 기민하게 고개를 끄덕여 답했다.

“맞아. 그때처럼 미끼가 되어 인어를 유인해 주지. 하지만 내가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도움을 주는 것이니만큼, 너도 그 대가로 나중에 내 제안을 하나 들어 줬으면 좋겠는데. 어때?”

벨시안의 제안을 들은 니나는 조심스레 고민했다. 하지만 사내가 제시한 조건이 워낙 파격적으로 좋았다. 경우에 따라 니나는 그의 제안을 ‘한번 들어 보기만’ 한 채 도움만 받고 내뺄 수도 있었다. 물론 이는 니나가 벨시안이라는 인간을 근본적으로 잘 몰랐기에 하는 순진한 착각이었다.

결국 니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고, 그녀를 낚은 벨시안은 아주 흐뭇하게 웃었다. 그녀의 반짝이는 금발 사이로 길쭉하게 솟아 있는 검은 뿔들을 애써 못 본 척하면서 말이다.



칼라브 만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과 비죽이 솟아 있는 암반들로 인해 보호받는 천연의 요새였다. 이곳에 자리 잡은 식인 인어들은 낮에는 암초 밑에서 인간의 해골로 수구를 즐겼고, 밤에는 남자들을 유혹해 배를 채웠다. 실로 평화로운 나날들이었다.

그 날도 인어들에겐 별다를 바 없는 온화한 하루였다. 적어도 웬 인간 남자의 씩씩한 노랫소리가 울려 퍼지기 전까진 그랬다. 아무리 낮이라지만 식인 인어 서식처에서 노래를 부르다니, 미친 인간임이 틀림없었다.

“푸른 파도와 장엄한 기상이 넘실거리는 곳, 햇살 아래 부드러운 금빛 모래가 빛나는 곳. 아아 이곳에서 나 영원토록 살리라!”

벨시안의 매력적인 목소리가 고요한 해안가를 가득 채웠다. 생각보다 성량이 풍부하고 목소리가 근사해서 듣기 좋은 노래였다.

그러나 노래 실력과는 별개로, 벨시안은 사실 킨케이드의 애국가를 대충 편곡해서 부르는 중이었다. 왕족의 피가 흐르는 그가 언제 시장의 소리꾼들처럼 노래를 쩌렁쩌렁 불러 보았겠는가? 그나마 익숙한 애국가가 최선이었다.

벨시안의 이 눈물겨운 노력에도 불구하고, 노래를 시작한 지 20여 분이 지나도록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거라곤 모래톱으로 밀려오는 흰 포말뿐이었다. 이쯤 되자 벨시안은 슬슬 민망해지기 시작했다.

‘이거 효과가 있긴 한 건가?’

인기 없는 광대 노릇 중인 벨시안으로선 지당한 의심이었다. 그러나 이 엉터리 공연은 확실히 잘 먹히고 있었다.

니나는 절벽의 높은 돌출부에 웅크린 채 밑을 내려다보았다. 끝없이 밀려오는 파도뿐이던 해안가의 수면 위로 기묘한 머리통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그들은 거센 파도에도 불구하고 일정한 위치를 지키며, 수면 너머로 눈만 내놓은 채 벨시안을 지켜보았다.

니나가 현재까지 파악한 머리통은 대략 예닐곱 개 정도였다. 수면 밑의 모습까지 확인할 순 없었으나, 군침을 삼키고 있는 게 확실했다.

그러나 인어들은 뜻밖에도 아주 신중했다. 그들은 섣불리 벨시안에게 달려들지 않고, 서로 눈치만 보았다.

― 인간 남자……. 맛있어 보여.

― 하지만 공주님이 없는데. 이러면 누가 먼저 내장을 파먹지?

니나와 벨시안이 모르는 식인 인어들의 내부 사정은 이러했다. 무리 지어 생활하는 마수들이 다 그렇듯, 그녀들에게도 나름대로의 룰이 있었다.

사냥감이 나타나면 보통 그 무리에서 가장 서열이 높은 인어가 최우선으로 먹이를 차지했다. 그녀가 가장 좋은 내장 부위를 다 파먹은 후에야, 다른 인어들이 남은 부위를 순차적으로 뜯어 먹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첫 식인의 영광은 대개 인어 여왕의 소중한 막내 공주가 차지해 왔다. 하지만 그녀는 며칠 전, 해안에서 울린 폭음과 함께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이 때문에 인어 여왕은 매우 분노했고, 인어들 사이에는 경계 주의보가 떨어졌다. 그녀들은 한동안 무역선을 난파시키거나 항구에서 인간을 유혹하는 일이 금지되었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먹어도 되지 않을까?’

먹이가 제 발로 직접 인어 서식처까지 들어와 노래하고 있었다. 그 도발적인 유혹을 참기란 매우 어려웠다.

인어들은 여왕의 명령과 본능 사이에서 치열하게 고민했다. 그녀들은 겉보기엔 인간과 흡사했지만, 불행히도 그 실체는 물고기와 같은 어류였다. 고로 지능이 그다지 높진 않았다.

때마침 그 순간, 벨시안이 별안간 노래를 부르다 말고 셔츠를 훌러덩 벗어 던졌다. 이를 바라보는 인어들의 눈이 커졌다.

“나 이제 조국의 발아래 결심하노니, 굳게 쥔 맨주먹과 이 뜨거운! 맨가슴으로!! 앞장서리라!!!!”

벨시안은 짜증이 잔뜩 나 있었다. 아무리 가을이라고 해도, 한낮의 땡볕을 20분 내내 고스란히 내리쬐니 벌겋게 익어 버릴 지경이었다. 여기에 평소 부르지도 않던 노래까지 부르려니 아주 죽을 맛이었다.

어차피 벨시안의 역할은 천하제일 음유 시인이 아니라, 식인 인어들을 유혹하는 미끼였다. 그렇다면 굳이 효율 떨어지는 방식을 계속 고집할 필요는 없었다. 벨시안은 더위를 식힐 겸 상의를 벗어 던지고, 당장이라도 바다에 입수할 사람처럼 호쾌하게 걸어 나갔다.

‘설마 이러고도 안 넘어오진 않겠지. 고작 몬스터 주제에.’

벨시안은 자신 있게 승부수를 던졌다. 그의 매끈한 갈색 피부 위로 뜨거운 햇볕이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가 걸을 때마다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상체의 유려한 근육들, 땀방울이 미끄러져 스며드는 단단한 복부, 그 아래 건강하게 꿈틀거리고 있을 신선한 장기들…….

인어들은 끝내 먹이의 과감한 도발 앞에 굴복했다. 그는 너무나 건강하고, 싱싱하고, 맛있어 보였다. 장장 20여 분간 이어졌던 벨시안의 노래에 드디어 답가가 되돌아온 것도 그때였다.

― 푸른 물결 속의 반짝이는 햇빛, 상냥한 바닷바람 속의 흰 소금, 진줏빛 그대여 나에게 깊이 잠겨 와요…….

벨시안은 발걸음을 멈추고, 수면 저 너머에서 서서히 가까워지는 인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인어는 몸을 부드럽게 흔들면서 남자의 정신을 쏙 빼놓을 유혹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하지만 호신용 아티팩트를 지니고 있는 벨시안에겐 그 노래가 전혀 먹히지 않았다. 제자리에 서서 다가오는 인어를 바라보던 벨시안은 그 노래에 점수를 매겼다.

‘음정, 박자, 리듬감 측면에서 다 합쳐 8점쯤?’

그리고 자신의 노래는 솔직히 3점도 아까웠다. 돼지같이 혼자 20분간 꽥꽥거렸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린 벨시안이 눈썹을 찡그렸다. 이곳에 아무도 없었기에 망정이지, 만약 킨케이드 사교계에 소문이라도 났다간 최소 10년간은 이불을 뻥뻥 찰 각이었다.

이 와중에 어느덧 모래사장 근처까지 다가온 인어가 그 매혹적인 자태를 드러났다. 진줏빛 광채가 도는 흰 살결에, 젖은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트린 여인의 상반신은 매우 아름다웠다.

‘어이쿠.’

하지만 그녀의 푸른 눈과 마주친 벨시안은 찔끔했다. 그녀의 매혹적인 푸른 눈은 노골적으로 벨시안의 몸에 꽂혀 있었다. 그 촉촉한 눈에 기이한 갈망의 광채가 번들거렸다. 당장에라도 자신의 배를 가르고, 그 내장을 파먹는 상상 중인 게 틀림없었다.

벨시안은 제게 다가오는 인어를 바라보며, 속으로 자신의 생존 가능성을 점쳐 보았다. 비록 아티팩트를 써서 노래를 차단했지만, 불행히도 이건 물리적인 공격은 막아 주지 않았다.

인어의 꼬리지느러미 근력은 우습게 볼 게 아니었다. 거센 파도와 물살을 헤집으며 단련된 저 꼬리는 단단한 근육 덩어리였다. 정통으로 얻어맞으면 갈비뼈 정도는 우습게 나갈 터였다. 초조해진 벨시안은 시선을 들어, 니나가 있는 절벽 쪽을 바라보았다.

‘설마 여기서 날 버리고 가진 않겠지?’

벨시안은 자신의 영민한 외교적 머리와 우월한 혈통, 근사한 외양이 자랑스러웠다. 하지만 전투에는 딱히 별 소질이 없었다. 만약 이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그 소녀가 자신을 배신하면 어떻게 되는 걸까?

‘뭐, 나름대로 대비책은 세워 놨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