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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니나는 그 말을 무시하며 어떻게든 인어를 움켜쥐기 위해 애를 썼다. 니나의 갈퀴 같은 손끝에 찍힌 인어는 상체가 온통 푸른 피로 얼룩덜룩해져 한층 더 미끄러웠다. 시간에 쫓기는 이 상황도 초조한데 남자의 질문은 더 정신을 어지럽게 했다.

‘인어를 먹냐니, 그럴 리가 없잖아.’

니나도 스스로 더는 인간이라고 말할 수 없는 몰골임을 자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남에게 직접 듣는 건 생각보다 훨씬 더 싫은 일이었다. 또다시 인어를 놓친 니나는 한숨을 삼키며 속으로 고민했다.

‘그냥 내가 구덩이 밑으로 내려가서 순간 이동을 할까?’

하지만 너무 위험했다. 이런 스크롤은 찢는 순간 바닥에 마법진이 그려지면서, 그 표면 위의 대상들을 이동시키는 원리로 작동했다.

근데 구덩이 바닥은 너무 협소한 데다 표면마저 울퉁불퉁해서, 도저히 마법진이 제대로 그려질 것 같지 않았다. 불안정한 대지 위에서 순간 이동 마법을 잘못 발동시켰다간 신체의 일부만 따로 이동될 수도 있었다. 그건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이봐, 내 말이 안 들리나?”

한편, 니나에게 그 존재 자체를 무시당한 남자도 점차 오기가 생겼다. 고귀한 태생인 그는 애초에 누군가에게 무시당하는 것에 익숙지 않았다.

이쯤 되면 평화적인 대화 시도는 충분히 한 것 같았다. 허리춤에서 인어 포획용 네트 건(Net Gun)을 뽑아 든 남자가 니나를 겨눴다.

“대답하지 않으면 쏘겠어! 말하기 싫으면 고갯짓이라도 하지그래?”

그제야 니나의 시선이 남자를 향했다. 드디어 그녀의 무심한 눈빛을 낚아챈 남자의 눈이 긴장과 흥분으로 꼭 보석처럼 반짝였다. 니나를 바라보는 남자의 입가에 뜻밖의 웃음기가 떠올랐다. 이를 본 니나는 의아해졌다.

‘저 남자는 왜 나를 보고 웃는 거지?’

제 겉모습은 꼭 마물처럼 보일 텐데, 참으로 대담하고 이상한 남자였다. 어쨌든 그의 손에 들린 네트 건 따윈 그리 무섭지 않았다. 발사되는 그물이야 까짓것 악력으로 찢어 버리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먼발치에서 점점 가까워지는 남자의 일행들은 매우 거북스러웠다. 니나는 고심 끝에 결국 인어를 포기하고 일단은 도망치기로 했다. 임무 도중에 마주치는 민간인은 최대한 그 수가 적어야만 했다.

까짓것 또 잡지 뭐. 마음을 정한 니나가 단숨에 구덩이 안을 박차고 화살 같은 속도로 날아올랐다.

“어, 어? 이봐, 잠시만! 거기 멈춰!!”

설마 니나가 이렇게 가 버릴 줄 몰랐던 남자가 당황하며 뒤에서 소리쳤다. 그러나 니나는 순식간에 해안가에서 멀어져 높이높이 날아가 버렸다. 애초에 땅을 걷는 인간이 하늘로 도망치는 니나를 쫓을 수는 없었다.

남자의 네트 건에서 뒤늦게 발사된 그물이 허무하게 찰나를 비행하다 풀썩 떨어졌다.

“벨시안 전하, 몸은 괜찮으십니까? 방금 날아간 건 대체 뭐죠?”

뒤늦게 달려온 남자의 일행 중 체커릿이 입을 열었다. 그의 시선은 이미 절벽 너머로 사라져 가는 니나의 뒷모습에 꽂혀 있었다. 평범한 인간인 그의 눈에는 뭔가 큼지막한 갈매기(?)가 날아간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체커릿의 관심은 사실 갈매기 따위보단, 인어의 포획 쪽에 좀 더 기울어져 있었다. 칼라브 만에 사는 식인 인어들은 무역국 킨케이드의 해상로를 종종 방해하는 통에, 참으로 골치 아픈 몬스터였다.

미리 설치된 덫 아래를 내려다본 체커릿이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오! 인어를 생포하셨군요. 한 번에 성공하시다니, 역시 전하다우십니다.”

그러나 체커릿의 칭찬을 듣는 검은 머리의 남자는 정작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는 방금 전 눈앞에서 놓친 니나가 못내 아쉬웠다. 금발에 예쁘장한 얼굴을 한, 작은 악마 같던 소녀.

‘과연 그건 뭐였을까?’

짙은 눈썹 밑으로 초록색의 매력적인 눈동자를 한 남자는 인어만큼이나 아름다웠다. 그는 킨케이드의 왕족 태생으로, 현왕의 친동생이자 외교부의 수장을 맡은 대공이었다.

이렇듯 고귀한 피가 흐르는 벨시안이 굳이 미끼를 자청하게 된 까닭은 다름 아닌 무역 때문이었다. 이 빌어먹을 식인 인어들 때문에 해상 무역이 위태위태하니, 도무지 거래 물자가 늘어나질 않았다. 그래서 이참에 인어족의 여왕과 협상을 해 볼 요량이었다.

이를 위해 그들이 택한 협상 방식은 바로 ‘인질’이었다. 물론 그리 세련된 협상 아이템은 아니었지만, 사람 잡아먹는 몬스터에겐 이 정도 수준이 딱이었다.

“일단 우리가 찾던 인어가 맞는지부터 확인해 봐.”

니나가 날아간 방향에서 간신히 시선을 뗀 벨시안이 명했다. 그러자 구덩이 앞에 우르르 몰려든 남자들이 그 밑을 내려다보았다.

“맞는 것 같습니다!”

“저희가 찾던 붉은 머리의 인어입니다!!”

기절해 있는 인어의 발그스름한 머리칼을 확인한 남자들이 흐뭇하게 웃었다. 저 망할 인어 공주를 잡겠답시고 이 짠내 나는 해안가에 며칠을 잠복해 있었던지.

인어족의 여왕은 딸을 여섯이나 낳았지만, 그중 가장 아끼는 것은 붉은 머리의 막내딸이었다. 불행히도 그 막내딸은 강한 마성을 타고 난 만큼, 식욕도 대단히 강했다. 그래서 킨케이드를 오가는 무역선들을 자꾸만 꾀어내 난파시켰다.

최근 3년간 인어에 의한 난파 피해가 스무 건을 돌파하자, 벨시안은 결국 강수를 두기로 결심했다. 그는 인어족의 막내 공주를 인질로 포획하여, 인어 여왕과 직접 담판을 지을 작정이었다. 그 과정에서 우연히 니나와 마주친 것이다.

“인어가 깨어나기 전에 재갈부터 물려. 그리고 테레사에게 넘겨줘.”

벨시안이 구덩이 안을 흘끗 바라보며 체커릿에게 지시했다. 자신은 귀에 끼고 있는 아티팩트 덕에 인어의 노래로부터 무사할 수 있었지만, 만약 인어가 깨어나기라도 하면 대참사가 벌어질 게 뻔했다.

벨시안의 명을 받은 남자들이 우르르 몰려가 구덩이 안에서 인어를 꺼내 포박했다. 이 인어는 왕실 마법사 테레사가 잘 보관(?)할 터였다. 모든 일 처리를 직접 확인한 벨시안이 이윽고 체커릿에게 고갯짓을 했다.

“그리고 자넨 잠시 날 좀 따라오도록 하지.”

“네, 전하!”

계획대로 인어 여왕의 막내딸을 포획한 체커릿의 표정은 밝았다. 확실히 제 상관인 벨시안은 유능한 남자였고, 그 혈통 또한 고귀하여 믿음직스러웠다. 오늘도 보라, 그의 계획에 따랐더니 인어가 떡하니 잡히지 않았던가?

하지만 벨시안에 대한 그의 존경심은 잠시 후, 매우 흔들리게 되었다. 벨시안이 들려주는 믿지 못할 괴생물체 목격담 때문이었다. 그 허풍 같은 묘사들을 곱씹어 본 체커릿이 미간을 좁히며 되물었다.

“네? 하늘을 날고, 뿔도 있고, 거기다 팔까지 막 이렇―게 늘어나는 소녀라구요? 혹시 조인족을 잘못 보신 거 아닙니까?”

체커릿이 가장 가능성 있는 추측 한 가지를 내세웠다. 그러자 벨시안이 자신의 남자다운 턱선을 쓸어내리며 반문했다.

“조인족? 난 하피라고 생각했었는데. 혹시 조인족 중 뿔이 달린 사례도 있나?”

“글쎄요……. 복귀하면 테레사 님께 한번 여쭤보겠습니다.”

체커릿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전형적인 문관인지라, 몬스터에 대해선 문외한이었다.

하지만 벨시안은 이쯤에서 대화를 그만둘 생각이 없었다. 그의 머릿속은 온통 신비한 소녀에 대한 궁금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제가 본 소녀의 어마어마한 전투력을 회상하며, 체커릿에게 재차 물었다.

“그리고 조인족은 애초에 마법으로 잘 알려진 종족 아닌가? 혹시 육탄전도 하던가?”

“남성체 중 간혹 마법과 병행해서 활을 쏘거나, 투창을 던지는 경우는 발견된 사례가 있습니다.”

그런 거 말고 주먹질을 하던데. 아주 인어의 대가리를 깨 버렸지.

벨시안은 애매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조인족은 큰 날개로 자유로운 비행을 하는 우아한 마법 종족이었다. 애초에 마법을 쓸 줄 아는데, 굳이 무식하게 주먹질을 할 리가 없었다. 덕분에 벨시안이 목격한 소녀의 정체는 점점 더 오리무중으로 빠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정체를 확인할 필요가 있어.’

벨시안은 자신의 왕국에 그토록 강한 몬스터(?)가 있다는 것이 찝찝했다. 앳된 얼굴을 보아하니 아직 어린 것 같던데, 성체가 되면 얼마나 더 강해질까? 아무래도 그녀의 정체를 파악해 놔야 차후 대비를 하든지 말든지 할 터였다.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는 그의 부하들은 태평하기 짝이 없었다. 그들은 난생처음 가까이에서 보는 인어의 생김새를 관찰하는 중이었다.

“세상에, 이게 다 피야? 인어의 피는 파란색이네. 근데 왜 이렇게 몸에 상처가 많지? 온통 피투성이잖아.”

“폭발 때 떨어지면서 긁힌 거겠지. 그거 알아? 인어 고기를 먹으면 장수한다던데.”

“너는 저 시퍼런 피를 보고도 식욕이 생기냐? 근데 상처가 좀…… 이상하네. 긁혔다기보단 꼭 커다란 포크에 몇 번 찍힌 것 같지 않아?”

수군대는 부하들의 목소리를 흘려듣던 벨시안이 문득 눈을 빛냈다. 생각해 보니 그 소녀는 다급한 와중에도 필사적으로 인어를 잡아가려 했다. 그 모양새로 보아하니, 조만간 인어를 잡으러 칼라브 만에 다시 나타날 것 같았다.

정체를 모르면 직접 확인해 보면 되는 것 아닌가? 벨시안은 어쩐지 예감이 좋았다. 그가 발견한 그 신비한 소녀가 어쩐지 굉장한 행운을 가져다줄 것 같았다.



* * *



니나가 보름달이 뜨는 인어의 서식지, 칼리브 만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건 이틀 후였다. 마음 같아선 좀 더 조심하고 싶었지만 시간이 많지 않았다. 그녀는 혹 주위에 사람이 있나 싶어 조심스럽게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좋아, 아무도 없는 것 같아.’

피어오르는 물안개 속에 몸을 숨긴 니나는 조금 안심했다. 그래, 제정신이 박힌 인간이라면 달밤에 식인 인어 서식지를 어슬렁거리진 않으리라.

암흑같이 캄캄한 인어의 바다는 고요하기만 했다. 달빛에 반사된 잔물결들이 은빛으로 자잘하게 반짝였다. 하지만 저 고요한 수면 밑에 있는 인어들을 어찌 끄집어낸담?

니나는 고심했으나,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는 할 수 없이 가장 무식한 방법부터 써 보기로 결심했다. 해안가에서 조금 떨어진 암초 위에 내려앉은 그녀는 양 뿔에 다짜고짜 전류를 모으기 시작했다.

‘닥치는 대로 전류를 쏘다 보면 한 명쯤은 걸리겠지.’

니나에게 접합된 검은색 뿔은 강력한 전기 속성이었다. 본디 키마이라라고 부르는 사자형 마수의 것으로. 어마어마한 힘을 보유하고 있었다.

덕분에 이식 수술 또한 어마어마하게 아팠다. 멀쩡한 두피를 갈라서 두개골의 일부를 긁어내고, 그 자리에 남의 뿔을 접합시켰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니나는 아직까지도 그 후유증으로 신경성 두통에 종종 시달리곤 했다.

파직― 파지직―

니나는 자신의 고양이 같은 회색 눈이 하얗게 변할 때까지 양 뿔에 전류를 가득 모았다. 그리고 그것을 대뜸 암석 인근의 바닷물에 내리꽂았다. 잔뜩 농축된 고압 전류가 순식간에 고요한 밤바다로 퍼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