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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도로시가 미소 띤 얼굴로 니나를 재촉했다. 니나는 그 명령에 따라 독액처럼 뻑뻑한 양팔의 마력을 확장시켰다. 그러자 가녀린 양팔이 별안간 날카롭게 솟구치며, 크기도 모양도 흡사 갈퀴 같은 모양새로 주욱― 팽창했다.

니나의 키만큼이나 거대해진 팔은 손끝이 땅에 질질 끌릴 만큼 길었다. 하지만 검으로도 흠집이 안 날 만큼 표면이 단단했다.

여기에 니나가 가진 트롤의 근력까지 더해지면, 흡사 양팔에 갈퀴를 단 채 휘두르는 듯한 파괴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녀의 작고 가녀린 외형만 보면 상상할 수 없는 압도적인 무력이었다.

“52번 실험체, 모든 전투 상태 양호. 에타(Eta)칩 이식 후 출고를 허락합니다.”

흡족한 눈으로 자신의 최고 걸작품을 바라본 도로시는 니나의 가슴에 칩을 주입했다. 손가락 한 마디가량의 이물질이 심장 부근에 미끄러지듯 안착했다.

이제부터 7일 내에 임무를 끝마치고 복귀해야 했다. 정해진 기일을 넘기면 이식된 칩과 함께 심장이 터지게 되어 있었다. 마법사들은 지나가는 개에게조차 쉬이 쓰지 못할 이런 비정한 장치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에게 사용했다.

“빨리 돌아오렴. 우리 귀여운 니나가 없으면 쓸쓸하니까. 알았지?”

귀환할 때 사용할 순간 이동 스크롤을 건네준 도로시가 빙긋이 웃었다. 소름 끼치게도 그녀는 니나의 손을 한 번 꼬옥 잡았다 놓아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 짧은 접촉에 니나의 등 깃털이 부르르 떨리며 곤두섰다. 도로시는 니나의 두개골 일부를 파내 버린 뒤, 그 자리에 키마이라의 뿔을 쑤셔 넣고 뇌신경을 하나하나 이을 때에도 저렇게 웃고 있었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심장이 터져 버렸으면…….’

니나는 수천 번도 넘게 반복한 생각을 저도 모르게 되풀이했다. 마음 같아서야 진작 자살했지만, 트롤의 재생력 때문에 심장이 터져도 즉사한다는 보장이 없었다.

재수 없으면 다시 살아날 것이고, 그럼 마법사들이 칩의 마력을 쫓아 니나를 회수할 것이다. 그들이 과연 ‘전과’가 있는 실험체를 앞으로 어떻게 다루려 할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아니, 사실 알 것 같기도.’

니나는 창백한 눈으로 연구소 출구에서 좀 떨어진 지하 병동의 입구를 흘끗 바라보았다. 그녀를 포함해서 대부분의 실험체들이 죽는 것보다 더 두려워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그건 다름 아닌 ‘지하 병동’행이었다.

니나는 애써 음산한 지하 병동에서 시선을 뗀 후, 도망치듯 그곳을 떠났다. 앞으로 7일 내에 마젠티움에서 준 임무를 완수하려면 시간이 빠듯했다.



니나가 이웃 왕국에 자리한 칼라브 만(Bay of Calab)에 도착한 것은 약 3일이 지나서였다. 그녀의 미성숙한 잿빛 날개는 다소 작아서 장거리 비행에는 썩 적합하지 않았다. 그나마 니나가 작고 마른 소녀라, 굳이 더 큰 날개로 교체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어차피 돌아갈 땐 순간 이동 스크롤을 사용할 터였다. 그러니 니나에겐 약 4일 정도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니나는 자신이 맡은 임무를 천천히 속으로 되새겼다.

“이번 임무는, 칼라브 만의 식인 인어 생포……. 한 마리일 것.”

니나는 본디 전쟁 병기용으로 개발되었지만, 지금은 휴전 기간이었다. 따라서 마젠티움에선 니나를 주로 희귀 몬스터들을 포획하는 용도로 썼다.

물론 그렇게 포획한 몬스터들은 또 다른 실험체가 되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목줄이 매여 있는 한, 니나는 마젠티움의 명에 따라야 했다. 그녀는 식인 인어 서식지인 칼라브 만의 벼랑에 살며시 내려앉았다.

― 푸른 물결 속의 반짝이는 햇빛, 상냥한 바닷바람 속의 흰 소금, 진줏빛 그대여 나에게 깊이 잠겨 와요…….

해안가 어디선가 매력적인 인어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니나가 남자였다면 벌써 눈이 혼몽하게 풀려서 인어를 향해 다가갔겠지만, 다행히 그녀는 여자였다. 인어의 노래는 오직 남자에게만 그 마력을 발휘했다.

니나는 그 감미로운 노랫소리를 따라 천천히 이동했다. 칼라브 만의 해안가는 온통 울퉁불퉁한 암초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인어에게 홀린 배들은 대개 이 안에서 좌초되었다.

그래서인지 칼라브 만의 분위기는 꽤 음산했다. 원래대로라면 이곳은 에메랄드처럼 예쁜 청록색 바다와 검은 암벽들이 조화를 이루며 자연의 아름다움을 뽐냈을 터였다. 허나 그 위를 굴러다니는 인간의 뼈와 오래된 난파선들이 으스스한 분위기를 덧입혔다.

그러나 니나는 주위 풍경엔 별 관심이 없었다. 인어의 노랫소리를 따라가다 보니, 드디어 그녀의 눈앞에 한 인어의 뒷모습이 나타났다. 촉촉한 머릿결을 길게 늘어트린 인어는 홀로 모래톱까지 나와 있었다.

‘저걸로 잡아가면 되겠지?’

절벽 위에 내려앉은 니나는 신중하게 인어를 관찰했다. 인어는 원래 무리 생활을 하는데, 저 인어는 어쩐 일로 혼자였다. 그녀는 반쯤 부서진 선체를 바라보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저를 잡아가 달라고 하소연하는 것 같았다.

니나는 잠시 기다렸지만, 인어 주위에 다른 동료가 있는 것 같진 않았다. 자신감이 생긴 니나가 날개를 펼치며 절벽 밑으로 하강했다. 그 모습은 꼭 물고기를 낚아채는 독수리처럼 날쌔 보였다.

니나가 팔에 마력을 두르자, 그녀의 가녀리던 팔이 순식간에 거대한 갈퀴처럼 변했다.

퍽―!!!!!

니나는 하강하던 가속도까지 붙여서 인어를 세게 후려쳤다. 그러자 인어의 예쁘고 축축한 머리통에서 흡사 그릇 깨지는 듯한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뜻밖으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인어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기절했다.

‘아, 저런. 너무 세게 때렸나?’

니나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기절한 인어의 호흡을 체크했다. 나름대론 힘 조절을 한 건데, 설마 죽진 않았겠지? 이번 임무는 어디까지나 인어의 ‘생포’라서 죽으면 곤란했다.

다행히 인어의 귀 언저리에 달린 아가미는 뻐끔뻐끔 개폐 운동을 하고 있었다. 고로 죽은 것 같진 않았다. 생각보다 빠르게 임무를 완수한 니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정말.”

뭐, 인어의 입장에선 차라리 지금 죽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니나가 자신이 이렇게 되기 전, 진즉에 죽었어야 했다고 후회하는 것처럼 말이다. 실험체가 될 인어의 미래를 상상해 본 니나는 씁쓸해졌다.

그러나 자기 연민은 본디 각박한 현실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법이었다. 이 사실을 너무 일찍 깨우쳐 버린 니나는 서둘러 연구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괜히 이 주위에서 어정거리다 민간인의 눈에 띄기라도 하면 곤란했다.

‘보나마나 벌을 받겠지.’

니나는 그 ‘벌’이라는 것의 끔찍한 고통을 떠올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마젠티움 연구소에선 실험체가 민간인과 접촉하는 걸 절대 금하고 있었다. 그러니 최대한 조심해야 했다.

니나는 제가 생포한 인어와 같이 되돌아가기 위해, 허리춤에서 순간 이동 스크롤을 찾았다. 그 순간, 어디선가 알 수 없는 시선이 느껴졌다. 전투 감각이 탁월한 니나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려 그쪽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불청객을 발견한 그녀의 눈이 커졌다.

‘사람이…… 있었어?’

인어가 바라보던 방향에는 큼지막한 선체의 파편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 틈새로 웬 남자 한 명이 몸을 반쯤 숨긴 채 서 있었다. 니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가 잘생긴 얼굴에 미소를 띠며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갸웃했다.

“이런, 들켰네.”

잘 그을린 피부에 짙은 흑발, 매력적인 이목구비를 가진 남자의 눈은 짙은 초록색이었다. 만약 두 다리가 붙어 있지 않았다면 남자 인어라고 착각했을 만큼 근사한 외모였다. 니나를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던 그가 앞으로 한 발짝 나서며 입을 열었다.

“넌 누구지? 사람인지 괴물인지 정체를 밝히시지.”

니나는 대답 대신 입을 꾹 다물었다. 실험체인 그녀는 민간인과 접촉하거나, 그 눈에 띄어선 안 됐다. 고개를 숙인 그녀의 얼굴에 짙은 낭패감이 떠올랐다.

어쩐지 인어가 홀로 모래톱까지 나와 있는 게 이상하다 싶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녀는 이 남자를 유혹하는 중이었던 것이다. 꼬리 달린 인어가 큼지막한 선체 파편들 사이를 기어 올라갈 순 없으니, 남자를 유혹하여 제 발로 내려오게끔 할 의도였을 것이다. 그리고 남자가 내려오면 그 내장을 맛있게 파먹었겠지.

“왜 말이 없지?”

남자는 니나의 속도 모르고 겁 없이 재촉했다. 그렇다고 민간인과 대화를 할 수는 없었다.

니나의 쇄골 부근에 심어진 칩은 성대 울림을 감지하여, 그녀가 한 모든 발언들을 고스란히 기억했다. 그러다 연구소로 되돌아가면 마법사에게 이를 전달하는 것이다.

‘빨리 이 자리를 뜨자.’

마젠티움의 ‘벌’을 받고 싶지 않았던 니나는 이대로 검은 머리의 남자를 무시하기로 했다. 그녀는 제가 사로잡은 인어의 머리채를 단단히 고쳐 잡고, 다른 손으로 재빨리 순간 이동 스크롤을 찢으려 들었다.

쿠구궁― 콰쾅!!!!

그때, 발밑에서 별안간 폭음이 울리며 땅이 밑으로 푹 꺼졌다. 놀란 니나가 반사적으로 날개를 퍼덕여 몸의 균형을 잡으며 남자 쪽을 돌아보았다. 그가 서 있는 선체 쪽은 멀쩡한 반면, 니나와 인어는 구덩이 밑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아아, 어쩐지. 웬 정신 나간 인간이 식인 인어 서식지에 혼자 있나 했더니, 함정을 판 모양이었다. 보아하니 인어를 산 채로 사로잡고자 하는 건 니나 혼자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졸지에 인어를 잡기 위한 덫에 스스로 뛰어든 셈이 된 니나는 암담했다. 그녀는 구덩이 밑에서 입술을 깨물며 위를 올려다보았다. 상황이 영 좋지 않았다.

“어이! 놓치기 전에 빨리 가자구!”

“잠깐, 발밑 조심해! 이곳은 지형이 너무 험해.”

폭발 소리와 동시에 어디선가 웅성거리는 남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저 흑발 남자와 같은 일행인 모양이었다.

마음이 급해진 니나는 일단 날개를 이용해 구덩이 밑에서 날아올랐다. 다행히 저 멀리 보이는 남자의 일행들은 아직 한참 떨어져 있었다. 그러니 자신이 도망칠 시간은 아직 충분했다. 별 생각 없이 자리를 뜨려던 니나가 멈칫했다.

‘아참, 인어! 인어를 데려가야 하는데.’

니나는 침착해지려고 애쓰며 구덩이 밑으로 떨어진 인어 옆에 내려앉았다. 그리고 손끝에 경질화를 집중시켜 인어를 잡았다. 좁은 구덩이 안에서 순간 이동을 할 순 없으니, 인어를 밖으로 꺼낼 작정이었다.

하지만 일은 생각처럼 쉽게 풀리지 않았다. 인어는 자꾸만 니나의 손끝에서 미끄러져 구덩이 속으로 도로 떨어졌다. 인어의 피부를 덮고 있는 미끄러운 체액 때문이었다.

이 체액은 진줏빛 광택이 돌아 인어의 미모를 한층 더 부각시키고, 물 밖에서도 피부가 메마르지 않게 보호해 주는 역할을 했다. 그 때문에 도무지 인어의 상반신을 움켜쥐고 구덩이 밖으로 들어 올릴 수가 없었다.

‘어떡하지?’

초조해진 니나가 입술을 깨물며 다시 구덩이 안으로 내려앉았다. 저 멀리에서 다가오는 남자들의 왁자지껄한 목소리가 퍽 가까워졌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초조한데, 설상가상으로 구덩이 바깥에 선 남자는 그녀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대답해. 너는 누구지? 무엇 때문에 인어를 공격했고? 혹시…… 먹이로 삼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