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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빛 맹약의 새

1화

0. Prolog




니나는 빈말로라도 그리 썩 운이 좋은 타입은 아니었다. 아니, 굳이 따지자면 대단히 나쁜 축에 속했다.

얼마나 나쁘냐고? 만약 누군가가 니나의 ‘진정한 불행’의 시작이 언제부터였냐고 묻는다면, 하나만 쉬이 꼽을 수 없을 정도였다. 적어도 세 개쯤은 꼽아 줘야 했다.

니나가 태어난 작은 왕국은 무려 1400여 년간 평화로웠다. 허나 니나가 열한 살이 되던 해, 오랜 평화는 깨졌고 니나는 전쟁고아가 되었다. 이것의 그녀의 첫 번째 불행이었다.

혼자가 된 니나는 뒷골목의 쓰레기통을 뒤지고, 사람들에게 구걸하며 1년간을 떠돌았다. 그러나 어린 고아 소녀가 가엾어서 거두어 주는 착한 귀족 따윈 현실에 존재하지 않았다. 니나는 홀로 몇 번이고 아사와 강간의 위험을 넘겼다.

그러던 어느 날, 니나는 결국 아동 전문 매매상에게 잡혀 상품으로 끌려갔다. 만약 운 좋게 좋은 주인을 만났다면 그게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을 터였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어린 소녀를 사는 손님들 중 애초에 좋은 사람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러나 니나를 산 사람은 뜻밖에도 소아 성애자나 창관 포주가 아니었다. 그녀는 흑마법 연구소 마젠티움의 실험체로 팔려 갔다. 당시에는 이게 어쩌면 행운이 아닐까 착각했었지만, 기실 이것이 니나의 두 번째 불행이었다.

그럼 대체 마지막 불행은 뭐냐고?

니나 같은 어린 실험체들은 본래대로라면 적당히 고통받고 빨리 죽어 버리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니나는 하필 트롤과의 ‘키메라 합성’ 실험 연구가 성공해 버렸다. 이것이 니나가 직접 꼽은, 그녀의 인생 최대의 불행이었다.

“샘플 채취는 다 끝났어?”

“아직, 치아를 좀 더 뽑아야 해.”

마법사들은 본 실험 전에 니나를 재료로 쓰기 ‘적합한’ 실험을 찾고자 했다. 이 때문에 형질을 분석하겠다며 그녀의 머리칼이며 손톱, 피, 살점의 일부, 심지어는 이빨―영구치였다―까지 서너 개 뽑아 간 전적이 있었다.

‘아파, 아파……!!’

당연히 니나는 그 모든 ‘샘플 채취’를 두 눈 뜨고 맨정신으로 당했으며, 그 끔찍한 과정에서 그녀는 문득 깨달았다. 비록 전쟁고아로 떠돌며 별별 수난을 겪긴 했었지만, 마법사들에게 있어 그녀는 정말로 물건이나 다름없단 사실을 말이다.

니나는 이 마젠티움에서 인격체는커녕 최소한의 개나 염소 같은 생물 취급조차 받을 수 없었다. 마법사들은 기실 니나가 아픔과 공포를 느낄 줄 안다는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는 듯했다.

특히 그녀에게 가장 정신적인 충격을 준 사람은 도로시라는 마법사였다. 그녀는 붉은 고수머리에 금빛 눈을 가진 상냥한 외모였는데, 니나를 노예 매매상에게서 직접 사 온 장본인이기도 했다. 그 당시 니나 앞에서 멈춰 선 도로시는 다정하게 웃으며 물었었다.

“언니랑 같이 좋은 곳 가지 않겠니? 너에게 새로운 삶을 살게 해 줄게.”

……새로운 삶이긴 했다. 그것도 완전히.

니나를 연구소로 데려온 도로시는 끼니마다 그녀를 배불리 먹였고, 낯선 환경에 긴장한 니나를 상냥하게 달래 주곤 했다. 그래서 전쟁고아로 외롭고 배고프게 구른 니나는 도로시를 퍽 좋아했었다.

아, 물론 도로시의 그런 상냥함이 니나의 생니를 뽑는 도중에도 한결같이 적용되는 무의미한 것임을 깨닫기 전까지는 말이다.

“니나, 착하지? 말 잘 듣기로 나랑 약속했었잖아. 자, 입 좀 더 벌려 보렴.”

니나는 당시 ‘샘플’로 생니를 두 개나 뽑힌 상태였다. 어린 그녀가 쇼크로 울고불고 눈을 까뒤집는 동안, 마법사들은 그 작은 팔다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제압했다.

그리고 니나가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피 때문에 질식할 것 같아서 입을 벌릴 때마다, 매우 신속하게 그녀의 입 속에 다시 기구를 들이민 후 기어이 이빨을 뽑아 갔다.

도로시를 포함한 그들에게는 이런 끔찍한 일을 겪은 니나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한 관심이나 배려가 일절 없는 것 같았다. 하긴, 그 누가 벽에서 못을 뺄 때 벽이 느낄 고통이라든지 트라우마 따위를 신경 쓰랴?

‘무서워, 괴로워.’

니나는 가엾은 고야 소녀를 주워서 공주님처럼 소중히 대해 주는, 그런 동화 같은 허황된 이야기를 꿈꾼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건 해도 너무하지 않는가? 니나는 ‘세상에 공짜는 없다.’라는 진리를 너무 어린 나이에, 너무 가혹하게 배웠다.

‘난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니나는 앞으로 자신에게 닥칠 미래에 대한 막연한 공포를 느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기어이 마법사들의 잔혹한 수술대 위에 오르게 되었다.

니나는 영문도 모른 채 시소처럼 대칭으로 놓여 있는 깨끗한 두 개의 유리관 중 하나에 갇혔다. 그리고 나머지 한쪽 유리관 안에는 그녀가 생전 처음 보는 큼지막한 녹색 생물체가 들어 있었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그것은 어린 트롤이었고, 이 실험은 인간의 ‘진화’ 가능성 여부를 연구하고자 했던 마법사들에 의한 키메라 합성 실험이었다.

그들이 니나에게서 강제로 채취해 간 그녀의 ‘샘플’은 불행히도 트롤과 상당히 높은 일치성을 보였다. 이에 희망을 얻은 마법사들은 그 어느 때보다 치밀하게 수술을 준비했고, 기어이 성공해 버리고 말았다.

“아아아악!! 흐아, 악, 흐으윽!!”

니나와 새끼 트롤의 유리관 사이를 잇는 마법 장치는 지독하게 고통스러운 전기 충격들을 가했다. 그녀는 새끼 트롤이 끈질기게 재생하고 또 재생하다가 결국 한 줌의 생체 에너지로 ‘추출’ 및 흡수되기까지, 태어나서 처음 겪어 보는 극한의 고통을 견뎌야만 했다.

계속되는 전기 고문을 견디다 못한 니나는 미친 듯이 유리관에 머리를 박았다. 그것은 고작 열두 살의 소녀가 두개골 함몰로 인한 자살을 꿈꾸게 할 만큼 고통스러웠고, 정말이지 지독하게 길었다.

다행히도 영원할 것만 같았던 실험은 끝났고, 불행히도 그것은 성공했다.

트롤이란 몬스터의 특징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급속한 재생력이었다. 덕분에 죽기를 각오하고 들이박아서 금이 갔던 니나의 두개골 및 뽑혔던 치아, 손톱 등은 다음 날에 완벽히 재생되어 버렸다.

도로시는 그녀의 입 안을 억지로 벌려 치아 상태를 확인한 후, 기쁨의 환성을 내질렀다.

“근사해, 니나! 난 네가 해낼 줄 알았어. 처음 봤을 때부터 넌 어쩐지 특별했거든. 자랑스럽기도 하지!”

뺨이 발갛게 상기되어 마치 꿈을 꾸는 듯한 어조로 니나의 뺨을 쓰다듬는 도로시의 눈은 소름 끼칠 만큼 순수해 보였다.

아직까지도 생니를 뽑힌 충격이 남아 있던 니나는 그 손길에 경기를 일으켰다. 물론 기쁨으로 고양된 도로시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이제 보잘것없었던 예전의 너는 잊으렴. 이제 넌 한층 더 우월한 생물체로서 ‘진화’한 거야. 알겠니?”

이런 게 진화라고? 아니, 그녀는 이전의 작고 행복한 소녀에서 끔찍한 괴물로 거듭났다. 앞으로 자신에게 닥치게 될 고통을 예감한 니나는 음울한 눈으로 고개를 떨궜다.

트롤은 눈알이 뽑혀도 3일이면 완벽히 재생했고, 팔이나 다리를 잘라도 2주면 원래대로 자라났다. 하필이면 이런 트롤과의 합성에 성공해 버린 니나는, 그 재생력을 기꺼워한 마법사들―특히 도로시―에 의해 그 후 본격적인 상시 개조를 당했다.

‘차라리 그때 어떻게든 죽어 버렸어야 했는데.’

니나는 그 후 수차례 반복된 고통스러운 실험들 속에서, 수천 번도 넘게 똑같은 후회를 반복했다. 쉽게 죽을 수 있는 몸일 때 일찌감치 죽었다면, 그랬다면 좀 더 행복했을 것이다. 그러나 니나는 이제 마음대로 죽을 수 있는 몸이 아니었다.

이것은 그렇게 시작된 귀족 영애도, 특별한 차원 이동자나 회귀자도 아닌, 그냥 행복해지고 싶은 니나라는 한 소녀의 이야기이다.


1. 칼라브 만의 괴생물체



마젠티움에서 보낸 6년은 산지옥 같았다. 마법사의 연구소에 잡혀간 실험체의 외모가 예쁘고 멀쩡한 건, 오직 동화 속에서만 가능한 얘기였다.

수백 번의 실험을 통해 개조된 니나의 외모는 음…… 굳이 비유하자면 그 동화의 마왕쯤 될 터였다. 이제 그녀에겐 무려 뿔과 날개가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니나는 슬픈 눈으로 손을 뻗어 제 머리 위에 있는 뿔을 만지작거렸다.

‘길 가다가 화살이나 안 맞으면 다행이겠어.’

그녀의 금발 머리칼 사이에 자리 잡은 한 쌍의 뿔은 꼭 가젤처럼 검고 길쭉했다. 이뿐 아니라 등에는 칙칙한 잿빛 날개도 달렸다. 도로시는 이런 니나의 날개 색을 볼 때마다 매번 아쉬워했다.

“날개가 하얀색이었더라면 더 예뻤을 텐데. 그렇지, 니나야?”

니나에 대한 도로시의 감각은 안구와 손발을 마음대로 갈아 끼우는 구체 관절 인형과도 비슷했다. 불행히도 인형으로 태어나지 못한 니나는 몸을 움츠렸다.

날개 이식 수술의 끔찍한 고통은 아직도 니나의 척추에 섬뜩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그건 지금껏 그녀가 당한 무수한 실험 중에서도 단연 압도적이었다.

본래는 성년식을 마친 조인족의 흰 날개를 쓸 작정이었지만, 작고 마른 체형의 니나에겐 너무 컸다. 그래서 마법사들은 어쩔 수 없이 성인식도 못 치른 어린 조인족을 재료로 썼다. 그들은 성인이 되어야 털갈이를 하기 때문에, 니나에게 주어진 날개는 칙칙한 잿빛이었다.

‘정말로 아팠었지.’

과거의 고통을 떠올린 니나가 씁쓸한 눈을 했다. 그러나 한가로운 감상에 빠지는 것조차 그녀에겐 사치였다. 니나의 전담 연구원인 도로시가 눈앞을 오락가락하며 ‘흠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집중하라는 뜻이었다.

“죄송해요.”

니나가 짧게 사과했다. 지금은 마젠티움에서 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나가야 할 시간이었다. 그녀를 내보내기 전, 도로시가 꼼꼼하게 니나의 ‘출고 전 상태’를 점검했다.

“52번 실험체, 날개 및 비행 상태 양호합니다. 좌우 경질화 확인 들어갑니다.”

이제 니나가 제일 싫어하는 검사만이 남았다. 도로시가 부드럽게 니나의 양팔을 어루만지며 눈짓했다. 그러자 니나가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의 팔을 내려다보았다.

10대 소녀다운 가련한 외모와 달리, 니나의 양팔은 겨드랑이 아래서부터 손끝까지 기묘한 자색을 띠고 있었다. 멀리서 보면 흡사 팔꿈치 위까지 올라오는 긴 자주색 장갑을 끼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 팔의 진정한 기능은 따로 있었다.

“니나야? 경질화 상태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