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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링카 1권 (10화)
3. 시바 (2)/

그녀가 하얀 담비 털로 만든 겉옷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그래서 나는 하녀의 도움을 받아 입고 있던 비단 옷을 벗어놓고 그 옷으로 갈아입었는데 그것이 더 마음에 들었는지 그녀가 드디어 고개를 끄덕였다. 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던지… 열 벌도 넘는 옷을 입고 벗느라고 나는 기운이 다 빠져버렸다. 대체 뭐 하러 그 많은 옷을 장만한 것인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어차피 입고 갈 수 있는 옷은 단 한 벌 뿐인데 말이다.
“내일은 상단에 한번 나가보지 않으련?”
“상단에요?”
“그래. 내가 주문한 황제폐하의 생신 선물이 드디어 도착했다길래 구경도 할 겸 내일쯤 찾아가 보려는 참이었거든.”
“웅, 그럼 전 그냥 집에 있을래요. 서고에서 오래된 역사책이나…”
“안돼! 꼭 가야 돼.”
별뜻 없이 중얼거린 말에 스칼라는 정색을 하고 빽 소리쳤다. 그 바람에 나를 비롯한 모두가 화들짝 놀라서 허연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꼭 데려오라고 했단 말이야. 안 그러면 그걸 내주지 않겠대. 어제 일 가지고 앙심을 품은게 분명해. 더구나 그 노인네는 원래 한다면 꼭 하는 지독한 성격이란 말이야. 아들아, 설마 이 ‘엄마’에게 슬픔을 줄 생각은 아니겠지?”
“아하하, 아니요오.”
“오호호호… 역시, 착한 내 아들. 근데 언제 엄마라고 불러 줄거니?”
“헉!”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지그시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을 피해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솔직히 내기에서 지는 바람에 불러주어야 하는 입장이 되긴 했지만 당장 불러주기엔 뭔가 상당히 민망한 구석이 있는 말이었다. 차라리 ‘어머니’만 됐어도 한결 쉬웠을 텐데 어쩌다가 ‘엄마’ 가돼서…
‘후우, 이 나이에 엄마라니. 난 패배자야. 가윈이나 흑사자단이 반칙을 쓰는 이유를 알겠어.’
역시 내기는 반칙을 써서라도 이겨야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깨닫게 되었다. 어떻게든 이기는 놈이 잘난 놈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아들아, 엄마는 너무 섭섭해. 애정이 부족한 거니?”
“아, 아, 아니에요. 절대 그런 거 아니에요. 이대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네, 진짜예요.”
“흐응, 그럼 엄마라고 불러줄 거지?”
“그, 그게…”
벌게진 얼굴로 도로 고개를 숙이자 그녀는 ‘호호’ 웃으면서 나를 폭 안고 등을 두드려 주며 말했다.
“긴장하지 마. 어때서 그러니? 재촉하지 않을 테니까 부르고 싶을 때 불러주면 돼. 기다리고 있으면… 언젠가는 꼭 불러줄 거잖니?”
끄덕끄덕.
“그래. 하지만 역시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면 안 되겠지? 호호호…”
그녀는 애써 웃음 짓고 있었다. 얼굴엔 울 것 같은 서운한 표정이 역력한데 목소리는 평소와 다를 바가 없어서 매우 이상했다. 아무래도 남몰래 ‘엄마’라고 부르는 연습이라도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상하게 웃는 스칼라를 보면서 죄책감에 사무쳐 나날이 말라갈지도 모르니까.
“휴우, 이 짓도 쉬운 게 아니구나.”
방으로 돌아와 침대 위에 대자로 누우며 나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가짜이지만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 있다는 사실이 왠지 조금 아릿하게 느껴졌다. 가족… 시끌벅적한 기사들과 엉뚱한 마법사들 그리고 팔불출 양아빠와 고집쟁이 이타라. 이제는 사라진 나의 가족들.
“모두들 어디로 사라진 거야?”
당장이라도 화이트 문으로 찾아가 확인하고 싶었다. 게리온의 그 오래된 저택으로 돌아가 눈으로 보고 만지고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될것만 같은데… 정말로 사라졌을까봐, 행여라도 정말일까봐 나는 계속 망설이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나는 또다시 절망하게 될 테니까.
“나는 어쩔 수 없는 바보인가 봐.”
문득 춥다고 생각했다. 날씨 따위 느끼지도 못하면서 그저 춥다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은 겨울이니까.
“도련님, 여기 계세요?”
오래전 일을 생각하면서 눈을 감고 있는데 제제가 들어와 나를 찾았다. 웬일인지 외투를 걸치고 있는 모습이었다.
“무슨 일이야, 제제?”
“아, 계셨네요. 시장에 갈 건데 뭐 필요한 거 없으세요? 오늘은 이것저것 살게 많아서 큰 시장으로 가볼까 해서요.”
“시장? 이 시간에?”
“에? 아직 초저녁 밖에 안됐어요.”
그가 창밖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그러고 보니 이제 겨우 해가 기울고 있는 무렵 밖에 되지 않은 때였다. 흐음, 그렇단 말이지.
“좋아. 그럼 나도 같이 가주지.”
“네? 아니, 그러실 필요까지는…”
“살 게 많다면서? 그러니까 따라가 준다니까.”
나는 거의 억지를 써서 제제를 따라나섰다. 물론 킬이나 스칼라가 눈치 못하게 은밀히 나선 길이었다. 그들이 안다면 틀림없이 무슨 이유를 대서라도 따라나서려고 들었을 테니까. 그것도 예의 눈부신 마차까지 동원해서.
‘흥, 그런 일을 또 겪을 수는 없어. 사나이의 로망은 뭐니뭐니해도 역경을 헤쳐 나가는 모험정신에 있는 거야.’
나는 진정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근데 크림색의 평범한 마차를 타고 저택을 나오면서 나는 왠지 반항하는 자식 혹은 탈선을 꿈꾸는 십대가 된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건, 표면상으로 보면 어느 정도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그런 걸까?
‘아냐. 난 그래도 얌전한 편에 속하는 걸 거야. 암, 그렇고 말고.’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나름대로 위안을 삼았다. 그런데 그런 마음에 도움이 되지는 못할망정 돌맹이를 던지듯 가차 없이 흘러나온 제제의 말.
“도련님, 이러시면 나중에 불량 중년으로 자라실지도 몰라요.”
“내, 내가 왜? 나만큼 얌전하고 착한 애가 어딨다고 그래?”
“흐응, 그런 말씀하실 입장이 아닐 텐데요? 미리 말씀드리는데요, 부디 지난번 같은 사고만은 치지 말아주세요. 또 도련님을 잃어버리면 제제는 아마 왕야께 맞아 죽고 말거라고요.”
제제는 걱정스럽기 이를 데 없다는 투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무언가 상당히 억울해지는 말이었다. 그건 원래 내 본의가 아니었거늘. 하지만 말해봤자 씨도 안 먹힐 것 같아 나는 알아서 입을 다물었다. 이런 종류의 일은 원래 말을 하면 할수록 손해를 보게 마련이니까 말이다.
마차는 빠른 속도로 대로를 지나 어딘가로 달려가고 있었다. 초저녁임에도 불구하고 거리엔 여전히 사람들이 넘쳐났다. 역시 축제는 축제인 모양이었다. 줄곧 창쪽에 달라붙어있다시피 하다가 지난번 칠왕야의 기사들을 만났던 거리를 발견하자 문득 그날 제제에게 말해놓았던 것이 생각났다. 그때 분명히 그들에 대해서 알아봐 달라고 했었는데…
“제제, 그건 어떻게 됐어?”
“그거라뇨?”
“내가 알아봐 달라고 한 것 말이야. 칠왕야의 기사들.”
“아, 우선 사람을 붙여놓고 살펴보고 있는 중이에요. 어떤 상인에게서 창고를 빌려 묵고 있다고 하더군요. 두목이라는 자는 최근에 합류했고 칠왕야는 아직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있답니다. 소문에 의하면 그 사람 무언가를 찾고 있는 모양이에요.”
“응? 찾는다니? 뭘?”
흑사자단의 후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보니까 왠지 그 말 한마디도 예사롭게 들리지 않았다. 그는 대체 무얼 찾고 있는 것일까? 황제폐하의 생신 선물 같은 것인가? 나는 가슴까지 두근거리면서 대답을 재촉했다. 그러나 그는 멀뚱히 고개를 저었을 뿐이었다. 쳇, 모르면 말을 꺼내지나 말 것이지.
“걱정하지 마세요. 금방 알아낼 수 있을 거예요. 찾는 것이 물건이든 혹은 사람이든 찾으려는 시도만 해도 상단의 눈엔 걸리게 될 테니까요.”
“아아, 그나마 조금 위로가 됐어.”
“오, 다행이네요. 근데, 왜 그분에게 관심을 두시는 건가요, 도련님?”
전혀 궁금하지 않은 척 하면서 그가 물어왔다. 하지만 나는 그 이유를 말해줄 수가 없었다. 말해줘 봤자 이해하지 못할 테니까. 내가 찾고 있는 그들이 누구인지도 그는 모를 테니까. 그래, 정말로…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거야.”
나는 단지 그렇게만 말하고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지금은 어렴풋한 생각일 뿐이지만 그들이 정말로 흑사자단의 후예들이고 모두스 가의 마법사들이 어딘가에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면… 그때, 나는 다시 화이트 문을 찾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때야말로 그리운 그곳을 다시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군요.”
별 뜻도 없는 내 말에 제제는 뭔가를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뭘 알았다는 거지? 꽤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그가 나는 적잖이 신경 쓰였다. 혹시 혼자서 이런저런 상상을 덧붙이고 있지나 않을까 해서. 설마, 아니겠지? 아니라고 말해줘, 제제.
“오, 다 왔어요, 도련님. 바로 저기예요.”
대답 대신 제제가 가리킨 곳은 오렌지 색 등불이 길게 이어져있는 거대한 시장의 입구였다. 마치 뱀처럼 지평선 끝까지 구불구불 이어진 넓은 시장. 홀린 듯 마차 밖으로 내려서서 보니 대낮처럼 환하고 복잡한 구조를 가진 시장이 눈앞에 길게 이어져 있었다.
“우와, 크다.”
나는 우선 그 압도적인 크기에 놀랐고 오가는 사람 수에 놀랐으며 시끌벅적함 경악해서 입을 쩍 벌렸다. 크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클 줄은 몰랐던 나였다.
“후와, 여기서 시장을 본단 말이야?”
“네. 주로 거래하는 점포가 있어서 필요한 것을 말해두기만 하면 돼요. 그러면 그들이 새벽에 알아서 물건을 가져다주죠.”
“아하, 그렇구나.”
가볍게 감탄성을 터뜨리며 나는 근처에 매달려있는 정체불명의 물건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제제는 눈을 둥그렇게 뜬 채 꼼짝도 않고 있는 나를 질질 끌고 목적지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물론 나의 시선은 시장에 내걸린 신기한 물건들에게로 줄곧 향해 있었고. 그러다보니 시장 한켠에 주저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그를 발견한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가 입고 있는 것이 굳이 시커먼 갑옷이 아니었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내 발걸음을 멈춰 세운 것은 순전히 그 갑옷 때문이었다. 꼬질꼬질 때가 낀 그 시커먼 갑옷.
갑옷을 보고 걸음을 멈춰선 나는 좀 더 가까이 다가가 그 사람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는 검고 긴 머리칼을 아무렇게나 늘어뜨린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는데 크고 긴 칼을 어깨에 걸친 데다 고개를 깊이 숙이고 있어서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풍기는 분위기만큼은 왠지 심상치 않았다. 게다가 갑옷위에 아무런 무늬가 없다는 것도 좀 걸리고. 근데 앞에 오도카니 놓여있는 달걀은 뭘까?
흰색을 가진 두개의 달걀은 그의 앞 종이위에 나란히 놓여 있었다. 그런데 그중의 하나는 꼭대기에 조그마한 구멍이 뚫린 채 텅 비어 있었고 나머지 하나만이 멀쩡한 채로 덩그러니 놓여있는 것이었다. 설마 달걀을 팔기위해 앉아있는 것은 아니겠지? ‘그럴 리가…’라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일부러 그의 앞에 쪼그려 앉으며 큰 소리로 물었다.
“얼마예요?”
“앗, 도련님! 뭐 하시는 거예요?”
“뭘 하긴? 달걀 값을 물었잖아?”
놀란 제제가 냉큼 달려와 나를 일으키려고 들었다. 기사는 둘째 치고 입고 있는 옷을 더럽힐까봐 걱정하는 듯한 눈치였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그의 손에 이끌려 엉거주춤 일어서는데 바로 그때 잠든 듯 꼼짝도 안 하던 기사가 고개를 들고 나를 슥 올려다보는 것이었다. 그리곤 눈빛을 번쩍이며 심각한 투로 하는 말.
“한 냥.”
“…!”
달걀을 팔러 나온 것 맞나보다. 당당하게 금액을 말하는 것을 보니.
조금 어이없고 또 조금은 당황해서 나는 한동안 그를 빤히 바라봐 주었다. 그러자 그는 나를 향해 씨익 웃어 보이더니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포장해 드릴까요, 손님?”
“…네.”
얼결에 대답해 놓고 나는 입을 쩍 벌린 채 굳어있는 제제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내가 샀으니 너는 돈을 내야 하지 않겠느냐는 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