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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링카 1권 (11화)
3. 시바 (3)/

“도련니임…”
“한 냥이래.”
“금 한냥입죠.”
“헉! 무슨 달걀 값이 그렇게 비싸요? 그 돈이면 열판을 사고도 남는데…”
“이건 특별나게 맛있는 달걀이거든요. 제가 먹고 확인한 사실이죠.”
“…!”
구멍 난 속빈 달걀을 가리키며 하는 말에 제제는 결국 돈을 내놓았고 나는 제제에게서 금 한 냥을 받아 그에게 건네주었다. 그러자 그는 달걀을 종이로 돌돌 말아서 나에게 내밀었고 나는 그것을 두 손으로 받아 다시 제제에게 내밀었다.
“정말 맛있는지 확인하게 오늘 밤 간식으로 줘.”
“…삶아 드릴까요, 후라이로 해드릴까요?”
“삶아줘. 반숙으로.”
허탈하게 묻는 제제에게 진지하게 대답해주고 나는 다시 기사를 바라보았다. 그는 이미 자리를 털고 일어서고 있는 중이었다. 장사를 다했으니 이제 볼 일이 없다는 듯 홀가분한 모습이었다. 일어선 그는 생각보다 키가 컸다. 보통 사람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크고 떡 벌어진 어깨에 단단한 가슴을 가진 사람으로 어깨를 덮는 검은 머리칼과 날카롭게 뻗어 올라간 눈, 미소를 머금고 있는 입술 등이 꽤 보기 좋을 정도로 단정하고 잘 생겼다. 마치 이마에 ‘사나이’라고 써있는 것처럼 잘 생긴 모습이어서 나는 한순간 그가 무지 부러워졌다. 특히 저 울퉁불퉁 드러나는 탐스러운 근육들이.
‘아아, 나도 저런 근육을 가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늘 앙상하기만 한 내 팔뚝을 만지작거리며 나는 그의 근육들을 탐욕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러다 검을 등에 매고 고개를 돌리던 그와 눈이 딱 마주쳤는데 내 시선의 의미를 알아차린 건지 어쩐 건지 그는 또 히죽 웃으면서 말했다.
“너, 이쁘구나?”
“…”
“나랑 밥 먹으러 갈래?”
“무, 무슨 그런… 하아, 도련님. 이런 사람은 상관하지 마시고 어서 가세요.”
제제가 이맛살을 팩 찌푸리면서 내 손을 잡아끌었다. 그래서 또다시 질질 끌려가는데 성큼 다가온 그가 다짜고짜 나를 불끈 안아 올려 어깨위에 척 걸치는 것이 아닌가?
“악! 이게 무슨 짓입니까? 우리 도련님을 당장 내려놓으십시오!”
“아아, 걱정하지 마. 잡아먹지는 않을 테니까. 밥만 먹고 올 테니까 자넨 볼 일이나 부지런히 보고 있게. 금방 돌아오지.”
“아앗, 도련니이임…!”
비명 같은 제제의 목소리를 뒤로 하고 기사는 기분 좋게 웃어젖히면서 무작정 달려갔다. 물론 나는 그의 어깨위에 얌전히 매달려 있었고. 근데 이상하기도 하지? 일이 이렇게 되기까지 왜 나는 반항을 하지 않은 걸까? 영락없는 짐짝처럼 그의 어깨위에 척 하니 얹혀가고 있는 중인데…
‘검은 갑옷 하나에 이렇게 물러지다니 내가 정말 어떻게 된 것인가?’
스스로도 어이가 없어서 나는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예기치 못한 사건에 조금 유쾌해진 것은 사실이었다. 스스로도 믿을 수 없을 만큼 나는 정말 유쾌해 하고 있었던 것이다. 매달려 가는 주제에 이렇게 소리칠 정도로.
“야호! 이봐, 좀 더 빨리 달릴 수는 없어?”
“아하하하!”
또다시 기분 좋게 웃으면서 그는 좀 더 속도를 빨리했다. 주변의 풍경들이 빠른 속도로 휙휙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그가 멈춰선 곳은…
“여기 맥주 두잔!”
“그 정도는 알아서 갖다 처먹어! 야, 저 자식 끌어내! 외상은 무슨 얼어 죽을 외상!”
“우, 왜 째째하게 굴고 그래?”
…지저분하고 시끌벅적한 것이 식당이라고 불러주기엔 무언가 상당히 모자라 보이는 웬 허름한 가게 앞이었다. 그는 역시나 다짜고짜 가게 문을 걷어차고 안으로 들어서서 나를 내려놓았는데 찬바람이 들이쳐서인지 아니면 그가 원래 유명해서인지 갑자기 주점 안이 조용해지더니 안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우리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마치 품평을 하듯 한마디씩 중얼거리는 말.
“오, 이쁘장한 아가씨구만? 취향이 바뀌었나?”
“으리으리한데? 오옷, 저 보석 좀 봐. 진짤까?”
“능력도 좋지. 내가 십년만 젊었으면…”
“왔으면 얼른 문 닫고 들어오지 뭘 멀뚱하게 서 있어?”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덩치 큰 주인이 버럭 소리쳐서 주위를 환기시켰다. 아마도 그는 내 옆에 선 기사를 잘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미리 말해두지만 외상은 어림도 없어.”
자리를 잡고 앉는 우리에게 주인이 다가와 협박조로 말했다. 그는 말끔한 대머리에 노란 콧수염을 기르고 있는 사람이었는데 훤히 드러난 단단한 팔뚝 근육이 마치 내 허벅지처럼 굵어보였다. 솔직히 그 팔뚝을 얼마나 만져보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아가씨를 울리는 짓은 이제 그만 두라고.”
나를 흘깃 바라본 그가 혀를 쯧쯧 차면서 점잖게 충고했다. 아, 이런 오해받는 것도 정말 지겹다. 따라서 여리여리 하기만 한 내 외모가 나는 점점 마음에 안 들기 시작했다.
“크하하, 걱정마라. 아가씨가 아니라 도련님이라니까 울릴 일은 없을 거야.”
“도련님? …정말?”
“호오, 못 믿냐?”
“아니, 넌 이쁘면 다 좋아하잖아. 정말 안 울릴까 싶어서.”
어허라, 이것이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들인고? 오고 가는 대화의 심상치 않음을 깨달은 나는 가볍게 눈살을 찌푸리면서 바락 소리쳤다.
“흥, 울긴 누가 운다는 거야? 헛소리 하지 말고 술이나 가져와, 바보!”
“윽. 이거 진짜 귀여운데? 이보게, 친구. 나한테 넘기시게.”
“음, 그건 어려운 일인데… 외상값 지워주면 생각해 보지.”
“이것들이 보자보자 하니까 진짜…”
“앗, 화났다. 이봐, 농담이었어.”
기사가 이상하게 웃으면서 나를 말리고 나섰다. 그러자 주인도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곧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대체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것이지?
“근데, 너 이름이 뭐냐?”
한쪽 다리를 의자위에 올려놓고 앉아있던 그가 한손으로 턱을 괴며 물어왔다.
“이봐, 사람 이름을 물을 땐 자신의 이름 먼저 밝히는 거야.”
“아아, 그래. 내 이름은 시바. 넌?”
“…파비안.”
“파브?”
“닥쳐! 파비안이야, 파비안.”
이타라 녀석이 불러대던 이름으로 부르는 걸 보고 깜짝 놀라서 나는 대뜸 소리쳤다. 설마하니 그 이름을 생각해내는 사람이 또 하나 있을 줄은 몰랐던 나였다. 그리하여 쓸데없이 호기심만 더 커지고 말았다. 대체 뭐하는 사람이지?
“이봐, 한 가지 물어볼 게 있는데…”
“그래? 어서 물어봐. 뭐가 궁금해? 내 이상형?”
“닥쳐! 내가 왜 그딴 걸 궁금해 하겠어? …내가 궁금한 건, 그 시커먼 갑옷에 대해서란 말이야.”
“갑옷? 이 갑옷이 왜?”
시바는 자신이 걸치고 있는 꼬질꼬질한 갑옷을 살펴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어왔다. 그래서 나는 나름대로 진지하게 말했다.
“왜 하필 검은색인지 궁금해서.”
“아, 별다른 뜻 없어. 사실 원래 내 갑옷은 흰색이었지. 근데 내가 데리고 있는 늙어빠진 영감 하나가 어느 날 이렇게 말하는 거야. ‘검은색이면 때도 잘 안 타고 더 폼 나지 않을까요?’ 그 말도 일리가 있다 싶어서 바꿨지.”
“…그게 다야?”
“응. 그럼 무슨 대단한 사연이라도 있을 줄 알았냐? 거참, 너두 어지간히 특이한 놈이다.”
그는 대수롭지 않게 중얼거렸다. 하긴, 검은 갑옷을 입는 사람이 한둘도 아니고… 애초에 무언가를 기대한 내가 어리석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자 이상하리만치 기분이 허탈해져서 나는 대머리 쥔장이 내온 맥주를 단숨에 벌컥벌컥 마셔버렸다.
“크아! 맛있다.”
“오, 생각보다 멋진 도련님인걸? 자자, 한잔 더 해.”
“이봐, 너무 먹이진 말라고.”
그렇게 해서 나는 주당들에게 둘러싸여 밤새도록 술을 퍼마셨던 것이다. 그리고…
“우웅, 여기가 어디지?”
아침에 눈을 떠보니 웬 허름한 방 침대위에 혼자 달랑 누워있는 것이 아닌가?
‘이 무슨 꿈같은 상황이라지?’
나는 상황 판단이 덜 된 상태로 부스스 일어나 삐걱거리는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아무도 없는 조용한 주점 안이 한눈에 들어왔는데 잠시 두리번거리는 사이 마침 밖에서 누군가가 들어왔다.
“어라? 깼냐?”
시바였다. 그는 한손에 기다란 빵과 과일 등이 들어있는 커다란 봉투를 들고 있었는데 그대로 헤죽 웃으면서 다가와 멍하니 서있는 내 어깨를 툭 치면서 말했다.
“밥 먹자!”
“밥?!”
“그래. 아침 일찍 나간 덕분에 싸게 샀지 뭐냐? 흐흐… 자, 이 빵 한번 먹어볼래?”
딱딱하고 기다란 빵을 내밀면서 그는 또 헤죽 웃었다. 그래서 엉겁결에 받아들고 그 앞에 마주 앉자 그는 봉투안의 물건들을 우르르 꺼내놓고 마지막으로 내게 동전 몇 개를 내밀었다.
“앙? 이게 뭐야?”
“응. 술값 내고 방값 내고 아침거리를 산 다음 남은 돈.”
“근데 왜 내게 이걸 주는 건데?”
“아, 네 보석 목걸이를 팔아서 생긴 돈이거든.”
“…!”
어쩐지 무언가가 심히 허전하더니만 결국은 그런 것이었단 말인가? 나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휑해진 목 부분을 쓰다듬으며 멀뚱히 그가 내놓은 누런 동전들을 바라보았다. 근데 어찌 이리 빈약할꼬?
“한개, 두 개, 세 개… 가만, 그 목걸이는 웬만한 집 한 채 값은 나오고도 남았을 텐데 왜 이게 전부야?”
“아, 그게 말야… 여기저기 밀린 내 외상값을 갚고 났더니 그것만 남더라고. 게다가 어제 밤에 마신 술값도 내가 다 냈거든. 크하하하, 간만에 크게 한턱 쓴 거지.”
“내 돈으로 외상값을 갚고 술을 사고 그랬단 말이야?”
“뭐, 그런 셈이지. …이봐이봐, 너도 사나이라면 그런 사소한 것에 신경 쓰지 마라. 그러다간 키 안 큰다.”
그는 손가락을 까딱거리면서 그런 근거도 없는 말을 잘도 늘어놓았다. 집 한 채 값의 빚을 지고 있었다는 사실도 경악스러운데 그걸 다 내 돈으로 갚았다니. 이 무슨 막심한 손해란 말인가? 가윈이 듣거나 보았다면 몇 날 며칠 밥도 안 먹고 통곡을 할 일이었다. 그리고 그 돈을 다시 마련할 때까지 무지막지한 내기판을 벌이거나 살을 깎는 부업을 해댔겠지.
‘이타라 이후 내게 이런 손해를 입힌 녀석은 없었는데…’
그런 생각을 하고 나자 나는 더더욱 억울해져서 막 빵을 입으로 가져가는 시바의 손을 탁 잡아챘다. 그리고 당당하게 말했다.
“갚아.”
“에?”
“빌려준 셈 칠 테니까 갚으란 말이야. 아니면 내 부탁을 하나 들어주던가.”
의외의 말이었는지 그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한동안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다 내가 눈 하나 깜짝않고 똑바로 마주보자 갑자기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크, 크하하하하…”
“왜 웃어?”
“너, 너 정말… 흐흐, 재미있는 녀석이구나? 도련님 주제에 거래를 할 줄도 알고.”
당연하지. 내가 어떤 환경 속에서 자랐는데…
아무리 돈이 많아도 소시민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은 그 무수한 내기판과 가윈의 철두철미한 절약정신 덕분이라는 것을 그가 어찌 알 것인가. 나는 그가 만일 가윈과 단 한번이라도 시장을 함께 보았다면 분명 나와 같은 사고방식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그는 아마도 오늘날 인생 자체가 달라져 있을지도…
“들어줄 거야, 말 거야?”
“크흠, 하는 수 없지. 좋다! 네 부탁을 들어주지. 근데 어떤 부탁이냐?”
“…응, 간단한 거야. 아주 간단해.”
나는 생긋 웃으면서 그렇게 대답했다. 그리고 그때 내가 한 부탁이란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