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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링카 1권 (9화)
3. 시바 (1)/

<집착이란 건, 사람을 강하게도 만들지만 또한 잔인하고 추악하며 외롭게도 만든대. 그런 사람들을 만났어. 그리고 어쩌면 나도 그들 중 하나였던 것 같아.>

그들은 내 앞에 무릎을 꿇고 나란히 앉아 있었다.
맨 앞의 셋은 말끔한 얼굴을 가진 30대 청년들이었고 뒤에 있는 아홉명의 장정들은 그들이 거느리고 있는 하인들로 보였다. 강제로 끌려온 탓인지 그들의 얼굴은 분노로 하나같이 잔뜩 일그러져 있는 모습이었다. 그래, 불만이 많겠지. 하지만 나도 만만치 않게 불만이 많다는 사실을 알아줬으면 해.
‘어쩌다 이리 쉽게 잡혀 와서 내 속을 뒤집어놓는 것이란 말이냐아아…!’
하루 아니 한 시간만 늦게 잡혀왔어도 되는 일이 아니었느냔 말이다, 내 말은. 그랬으면, 득의만만한 얼굴로 앉아있는 킬과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고 있는 스칼라에게 이렇듯 따가운 눈총을 받지 않아도 되었을 테고 하늘이 빙글 도는 듯한 충격 속에서 허탈감으로 쓰러지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을 것이었다. 게다가, 게다가, 게다가… 떨어지지 않는 입으로 그, 그, 그… 런 식으로 불러주어야 하는 일도 결코 생기지 않았을 테고 그로인해 창피를 당할 일도 없었을 것이 아닌가. 즉, 이게 다 모자라기 짝이 없는 저 바보들이 너무 일찍 잡혀온 탓이라는 말이다.
“자아, 사랑스러운 우리의 손님인 나기가 직접 확인을 해주었으니… 어서 궁금한 것을 물어보려무나, 아들아. 하하하…”
으윽. 대체 언제부터 나기를 ‘사랑스러운’ 어쩌고 하며 부르기 시작한 것이지?
반나절 전만해도 쓸모없는 덩어리 취급을 받던 나기는 이 순간 매우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내 곁에 떡하니 앉아 있었다. 녀석은 이미 눈앞에 있는 자들이 자신에게 몰매를 준 자들이 틀림없다고 확인을 해준 다음이었다. 즉, 나의 패배를 최종 선언한 것과 다를 바 없는 짓을 해놓은 참인 것이다. 은혜를 원수로 갚아도 유분수지… 아무튼 그 순간부터 킬은 표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연신 웃어대고 있었고 반대로 나는 혀를 깨물고 죽고 싶다는 표정으로 계속 한숨만 쉬어대고 있었다. 하아, 난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거라지?
“뭘 하고 있느냐? 어서 물어 보래두?”
“호호, 아빠가 재촉하시잖니, 아들아.”
“흐어어어…”
작정하고 말한 것이 분명한 ‘아빠’라는 말에 나는 경기를 일으키듯 몸을 바르르 떨었다. 한 순간 끝도 없는 닭살의 바다에 퐁당 빠졌다 나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 정말 어떻게 살지?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고민을 하다가 나는 고개를 홱 돌려 눈앞에 있는 자들을 신경질적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살기가 풀풀 풍기는 목소리로 가차 없이 물었다.
“왜 내 손님에게 몰매를 주었지?”
“흥, 그대가 아무리 왕야의 아드님이시라고 하나 우리도 엄연히 귀족가의…”
“시끄럽다! 왜 몰매를 주었느냐고 내 아들이 묻지 않았느냐?”
노란 머리의 청년이 바락 대들자 킬은 눈을 부라리며 그를 꾸욱 밟아주었다. 덕분에 그들은 다시 얌전해졌고 나는 별 어려움 없이 원하는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귀찮게 달라붙으며 헛소리를 하길래 그리하라 명령한 것입니다.”
“알지도 못하는 아이인데, 달려와 무작정 ‘큰 도령’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당연히 우린 그런 자를 모른다고 대답했고요. 그런데도 아이는 끝까지 따라붙으며 떨어지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모르는 아이를 그 지경이 되도록 팼다? 하! 우스운 변명이군.”
나는 냉정한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정말 낯선 아이였다면 그런 명령을 내리지는 않았을 거라고. 그때 나기는 평범한 옷이라도 귀족들이나 입는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귀족이라도 신분이나 정체를 알고 있지 않는 이상 함부로 대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즉, 그들은 나기가 누구인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입고 있는 옷에 상관없이 몰매를 가할 수 있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감히 누구 앞에서 거짓말을 하려고?’
내심 그런 결론에 이르자 나는 그들의 존재가 더더욱 짜증스러워졌다. 그래서…
“나도 당신들이 누군지 몰라. 근데 지금 내 기분은 상당히 안 좋거든? 그러니 이번엔 내가 당신들에게 몰매를 줘도 되는 거지?”
“나는 자피스 남작 가의…”
“아, 그딴 것엔 관심 없어. 알고 싶지 않아. 모르고 있어야 당신들을 팰 수 있는 거잖아? 그래도 되는 거라며?”
분노가 뚝뚝 떨어지는 말에 그들은 입을 꾹 다물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무언가 억울하고, 화나고, 또 수치심이 가득한 눈빛들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을 똑바로 받아주며 나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이 아이가 큰 도령이라고 부른 자에 대해서 가르쳐 준다면 그냥 보내줄 수도 있어. 듣자니 노백작의 큰도 령이라고 하던데…”
“…”
내 말에 그들은 서로 시선을 교환하며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했다. 그래서 나는 나기에게 큰 도령이라는 자의 생김새를 물었고 녀석은 또 그 어눌한 말로 띄엄띄엄 설명을 해나갔다.
“큰 도령은… 크다. 힘세고, 칼도 가지고 있다.”
“그의 머리카락은 무슨 색깔이지? 그리고 눈동자는?”
“응… 금발. 눈동자는 생각 안 나.”
“노백작은 큰 도령에게 뭐라고 불렀어?”
“…루이?”
“루이베르 트리키.”
나기의 입에서 루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청년중의 하나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분노에 가득차 입술을 질끈 깨문 채였다.
“트리키 백작가의 장남입니다. 아무리 왕야시라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가문의 사람이지요. 물론 저희는 돌아가는 대로 이 일을 그 댁에 알릴 것입니다. 또한 저희 가문에서도 그냥 있지만은 않을 것이고요.”
“호오, 협박을 하는 것이냐?”
“협박이 아니라 이 일에 대한 책임을 지시라는 말입니다.”
오기인지 아니면 정말 대단한 가문인 건지 그들은 꽤 자신만만하게 나왔다. 마치 ‘내가 이를 테니까 니들은 이제 큰일 났어.’라고 말하는 듯한 태도였다. 그런 그들을 킬은 여전히 히죽 웃는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웃음이 나오다니 아까의 흥분이 골수에까지 미친 건가?
“재미있군. 정말 재미있어.”
“…”
“이 얼마만의 도전이냐. 그래, 너희가 덤벼보겠다고? 허허, 좋지, 좋아. 안 그래도 내 아들내미가 돌아왔는데 보여줄 것이 없어 적적하던 참이었다. 그래, 덤비겠단 말이지?”
“아니, 그게 아니라…”
“덤벼주어서 고맙구나.”
아아, 킬은 정말로 정신이 어찌된 모양이다. 뭘 어쩌려는 것인지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뜻이 역력한 얼굴로 그들에게 고맙다고 말하더니 또 미친 듯이 크게 웃어젖히고… 한마디로 그는 혼자 신이 나서 죽으려고 드는 중이었다. 그리고 나는 영문을 몰라 그의 머리를 짚어보고 싶어 하는 중이었고.
“내 기사들을 시켜 정중하게 바래다주마.”
한참을 웃던 그가 간신히 웃음을 그치고 입을 열었다. 속삭이는 듯한 나긋나긋한 말투. 그러나 웃는 얼굴로 하는 말치곤 상당히 날카롭기 그지없는 말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리고 오늘의 이 사태를 알린 다음, 책임을 물을 것이다. 내 손님을 상하게 했으니 각오는 하고 있어야 할 게다. 아비들에게 가서 전하거라. 곧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라고.”
“그, 그러나… 저놈은 트리키 가의 하인이었는데…”
“하지만 지금은 내 손님이지. 더구나 내 아들이 상당히 아끼고 있는. 가거라!”
역시 그들은 나기가 누구인지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함부로 대할 수도 있었던 것이고. 킬군의 짧은 명령에 기사들은 일사분란하게 움직여 그들을 도로 끌어내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방안이 정리되자 나는 나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걱정마, 나기야. 이제 곧 네 목걸이를 돌려받을 수 있을테니.”
“이링카도 있어야 해. 그래야 작은 도령이 살아난 댔어.”
“그래… 그것도 곧 찾을 거야.”
내 말에 나기는 헤죽 웃어보였다. 그러더니 주섬주섬 주머니를 뒤져 내 손에 무언가를 쥐어주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사탕이었다. 시장에 갔을 때 내 말대로 제제가 사준 모양이었다.
“이거 맛있어. 신 아니 도련님도 먹어.”
“그래. 고맙구나.”
호박색의 사탕을 받아들고 입에 넣자 녀석은 또 헤죽 웃었다. 사탕은 별로 달지 않았다.
제제를 시켜 녀석을 방으로 돌려보낸 다음 나는 축 늘어져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뭔가를 기대하고 있던 킬과 스칼라가 얼굴을 바짝 들이대고 물었다.
“기운이 없어 보이는 구나, 아들아?”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았니?”
“하아, 배고파.”
내기 때문에 거른 저녁식사를 생각하며 그렇게 중얼거리자 킬은 당장 다시 저녁식사를 준비하라고 명령했고 더불어 그 잘난 기사단에게도 떡 벌어지게 차려서 먹이라고 말했다.
“배가 고파 죽겠어.”
그날은 이상하게 허기가 져서 나는 얼마나 많이 먹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먹어도 허기가 채워지지 않아 밤이 늦도록 식당을 차지하고 있었다.

“좋은 아침이구나, 아들아.”
늦은 아침, 부스스한 얼굴로 눈을 뜨자 웬일인지 눈앞에 킬군의 얼굴이 떡하니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내 곁에 모로 누워 나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뭐, 뭐하는 짓이야?”
놀란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빽 소리쳤다. 그러자 ‘흐흐’ 웃는 얼굴로 두 팔을 벌리면서 그가 하는 말.
“자아, 아빠한테 아침 인사해야지?”
“에에?”
“왜 다들 그러잖아. ‘아빠, 안녕히 주무셨어요.’라고 말하면서 품에 폭 안기는…”
“누, 누가 그런 쪽팔린 짓을 해?”
어디서 듣고 온 것인지 킬은 가당치도 않은 것을 요구했다. 한두 살도 아니고 어떻게 그런 끔찍한 짓을 나에게 요구하는 것이지? 가차 없이 손을 내젓자 킬은 순간 울상이 되어서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뭐야, 해줄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것인가?
“아, 아무리 그래봐야 소용없어. 절대 안돼!”
“제제는 몇 해 전까지 계속 그렇게 했어.”
“제제니까 그렇지. 엥?”
제제가 그렇게 했다는 말을 나는 매우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는 이제 스물이 된, 나름대로 잘 생긴 미청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짓이 꽤 잘 어울리는 특이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뭐랄까, 남들 하고는 다른 좀 엉뚱한 구석이 있다고나 할까?
‘술 취한 이안의 행동 때문인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에이, 그러지 말고 한번만 해주라. 응?”
“싫어. 오늘로 인연 끊기 전에 포기해.”
달라붙는 그를 발로 꾹 밟아주고 나는 그대로 침실을 나섰다. 그러자 마침 때맞춰 제제가 방으로 들어섰는데 그를 보자 나는 갑자기 이안의 품에 안기며 ‘아빠, 안녕히 주무셨어요.’라고 말하는 그의 모습이 떠올라 속에서부터 웃음이 터져 나오고 말았다.
“하하하하… 제제, 정말이야?”
“네? 뭐가요?”
“아하하하…”
“도련님?”
나는 말도 못하고 그렇게 한참을 웃어댔다. 지금 내가 무슨 상상을 하고 있는지 알면 제제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심히 궁금해지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자꾸 웃지만 마시고 어서 서두르세요. 티란 스승님께서 기다리고 계신다구요.”
웃느라 꼼짝을 않는 나를 제제는 제 맘대로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씻기고 입히고 먹여서 티란 스승 앞에 가져다 놓았다. 그래서 나는 또다시 지루한 타마르의 역사책을 읽었고 오후엔 발이 꼬이고 어지럽기 짝이 없는 춤도 배웠으며 초저녁이 되었을 땐 스칼라 앞에서 다 만들어진 옷을 입었다 벗었다 해야 했다.
“이번엔 이쪽 것으로 입어보렴, 아들아.”